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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聞이 不如一見’이고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여기저기 조금씩 답사지에 대한 지식이 늘어
나면서 ‘그곳에 가고 싶다!!’ 직접 발로 찾고, 눈으로 보고자하는 역마살이 스멀거린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미리 준비해 간 자료와 대조해 보면서, 사진도 찍고, 나름 생각하는 척
폼도 함 잡아보고... 그러다가 다음 코스로 이동하고, 또 다음 코스로...
정말로 하루해가 무지 짧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이동한다는 것, 이거 무지 정신없이 신나는 일이다. 겨울에 사냥총 들고 이산 저산
뛰다니면 산 두어개 넘어다니는 것 일도 아니란다. 운동은 덤이요, 건강은 보너스다.
덤덤한 눈으로 보면 그냥 낡고 고리타분한 옛날 것들이요,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흔하디 흔한
무덤일 뿐이나 그래도 우리네 민초들 보다는 석 자 이름 남기신 나름 유명 선조님들의 음택이다.
그 속에 깃들어진 조상님네의 사연, 사연들을 새기면서 오늘의 나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나와
내 가족, 내 친척, 내 벗, 지인들과 관련된 삶의 지침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역사공부의 바로미터(Barometer) 즉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溫故而知新’의 첫걸음은 대자리 왕릉골을 밟으면서 내 딛는다.
->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통일로를 달리다 보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통일로 IC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벽제 서울시립장제장이 나온다. 이곳 3거리에서 문산쪽으로 직진하면 한국전쟁
필리핀 참전비가 나오고, 참전비공원에서 우측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형성된 골짜기를 대자리
왕릉골이라 부른다. 보통 이곳은 ‘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의 고려말 최영장군의
적분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더 더욱 이 골짜기는 답사매니아들의 첫 코스로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거리도 가깝고, 교통 좋고 또 많은 왕족들의 분묘들과 함께 벽제관지, 고양향교, 연산군
금표비 등 다른 유명 유적지도 인근 가까이에 여기저기 섞여서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 대자리 왕릉골 전체 개요
처음 이곳에 왕족의 무덤이 들어선 것은 태종의 4남, 즉 세종대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성녕대군이다. 1418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었다. 애통한 마음에 모후 원경왕후는 아들을 이곳에 장사
지내고 인근에 대자암(大慈庵)을 짓고 아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후 세조 때 태종의 서4남인 근녕군이 들어왔고,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 예종의 부인
공빈 최씨, 성종과 숙용 심씨의 서8남 이성군, 효종의 숙휘공주와 부마 정제현, 그리고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그 자손들이 이 골짜기로 들어오면서 왕족들의 무덤들로 가득 들어찬
왕가의 계곡이 형성되었다.
왕릉골의 마지막 손님은 근녕군의 친형 온녕군과 그 후손들인데 1962년 도심개발로 인하여 미아리
에서 이곳 왕릉골로 묘역 전체가 이장해 왔다.
왕릉골에 이렇듯 많은 왕족의 분묘가 산재해 있지만 이외에도 려말에 최영장군이 이곳으로 유배
왔다가 개경에 돌아가서 사사되었지만 이곳 대자리에 부친과 함께 묻혀있고, 1448년에는 성녕대군의
장인 중추원사 성억대감이 대자암 건너편에서 사위와 따님을 보고 계신다.
특히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숙종의 장인으로 제2 계비 인원왕후의 부친 김주신 및 5대손 김홍집 등
문중의 선영이 왕릉골 이곳저곳 3개소에 분포되어 있다.
:: 왕릉골 답사 코스 순번 안내도
첫 코스는 벽제관지에서 시작한다. 비록 문은 닫았고, 폐허되었지만 옛날 국립호텔이다.
①벽제관지(碧蹄館址): 사적 144호, 덕양구 고양동 55-1.
: 역관터로 규모는 약 1300평.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 및 임금의 제릉(개풍 신의왕후 능) 친제 時
숙소로 사용되었던 국가 직영 호텔이다. 본래의 터는 이곳에서 서북방 5리에 위치하여 남별관이라
불렀는데, 인조 3년(1625) 현 위치에 새로 지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부 헐렸고,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었다. 1960년 남아있던 객관 정문마저 무너져
지금과 같이 주춧돌만 남은 터가 되었다.
:: 벽제관지.
♠Tips: 벽제관 전투 ->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으로 승승장구하던 명나라 이여송군대가 처음 패전을 기록한 벽제관 전투장은 서남향에 있는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시작되는 고개, 일명 숫돌고개에서
공릉천에 이르는 오금동과 신원동 일원의 벌판에서 벌어졌었다. 1593년 1월, 당시 왜장 고바야가와군은 3대열로 나누어 명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명나라군은 포병 없이 기병만으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참패하였다. 늦게나마 도착한 화군의 활약으로 왜군은 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여기서
패퇴한 이여송은 북쪽의 혜음령을 넘어 파주로 퇴각하였다가 개성으로 물러나면서 왜군 섬멸의
기회를 놓쳐버림으로써 전쟁은 정유재란까지 길게 길게 늘어져 7년전쟁이 되어 버렸다.
:: 벽제관 전투장.
②고양향교(高陽鄕校): 문화재자료 69호, 덕양구 고양동 306
:조선 초기 태조 7년(1398)에 ‘고양 文廟’라 하여 옛 벽제면 대자리 고읍(古邑)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3년 후에 다시 지었는데 그 후 원래의 위치인 고읍에 국장(國葬)을 지내게 됨으로써 향교를 이전하라는 命이 내려져 숙종 때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을 1984년 새로 신축하였다 한다.
:: 고양향교 전경.
♠Tips: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은?
: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고,
우리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사학교육기관이 서원(書院)이다.
향교는 대체로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은 배움터, 뒤는 사당)의 배치를 보인다.
:: 향교의 건물 배치도(문선왕 = 공자)
-향교의 용어 해설-
외삼문: 향교 정문. (외삼문 앞에 대부분 하마비, 홍살문이 있다.)
좌우로 동재와 서재: 동재는 양반자제, 서재는 庶流(서자) 숙소로 갈라진다.
명륜당: 배움터 겸 스승의 숙소.
내삼문: 사당으로 들어가는 정문.
동무(東廡), 서무: 공자제자들, 중국 제현, 동국 18현 등의 위패 봉안소.
대성전: 孔子를 중심으로 안자, 증자, 사사자, 맹자 등 중국4성, 공자 10대 제자, 송나라 6현.
따라서 서원에서는 공자 등 중국성현은 배향하지 않았고 우리 선현들만 배향한다.
서울에는 국립대학교 격의 성균관과 부속학교인 4학(四學: 중학, 동학, 서학, 남학)이 있었으며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에서 강학의 기능은 완전히 없어졌다.
향교는 현재 전국에 234곳이 남아 있으며, 서울에서는 양천향교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③경안군 및 임창군 묘소 外: 향토유적 5호, 덕양구 대자동 산65. (旧대자암 터).
: 경안군(1644~ 1665, 22세) ->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빈의 셋째 아들이다.
못난 것도 모자라 못되기까지 한 할배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 사돈댁 강빈의 친정까지
깡그리 처형 혹은 장살시킨 후 이제 겨우 12살, 8살, 4살의 세 친손자들까지 후환(?)을 두려운지
모두 없애려 하였다. (빙신짓거리하는 인간들 지가 알아요!)
1647년(인조 25) 5월, 4살짜리 석견(초명)은 두 형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떠났다.
두 형은 모두 그곳에서 7년 후에 풍토병으로 차례로 죽었고 막내 경안군 이회는 살아남아 삼촌인
효종 때 겨우 석방되어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 이후 복작되어 승헌대부를 지내며 문성군부인
허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2명(임창군, 임성군)을 두었다.
:임창군(1663~ 1725, 63세)-> 경안군의 장남으로 숙종이 즉위한 후 종친으로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자손으로 5남 5녀를 두었는데, 장손 밀풍군 탄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임금으로 추대되었다가
죽음을 당했다. 特히 임창군 묘소 앞 장명등은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크고 화려함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伝한다. (혹 방문의 기회가 생길 때 장명등을 살펴보세요~ )
임창군 묘소 좌측 뒤편으로 경안군의 둘째 아들 임성군 이황의 묘소도 같이 보인다.
( 경안군의 묘소는 높은 곳에, 아들 임창군은 밑에 있다.)
( 왕릉골 소현세자 후손 묘역 위치도)
: 밀풍군 탄 묘소 -> 덕양 대자동 556-1 정원가든 뒷산.
소현세자의 증손, 임창군과 응천군부인 박씨의 장남이다. 경종, 영조 때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왕으로 추대되어 난이 평정되자 자결을 命받았다.
고종 때 복권되었다.
: 굴氏 묘 -> 미지정문화재, 대자동 산 65- 2 밀풍군 이탄 묘소 맞은편에 위치. (간촌마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데리고 온 궁녀로 본래 명나라 궁녀였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의 환국령을 무시하고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경안군을 모셨다.
조선에 살면서 궁인들에게 자수와 상투메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굴씨는 나이 70에 죽으면서 효종의 북벌군을 반드시 지켜보겠노라고 서쪽 교외 중국으로 가는
길가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였다. 최영장군 무덤과 함께 왕릉골에 있는 풀이 나지 않는
적분(赤墳: 풀이 나지 않는 묘)이다. 2001년 소현세자 종중에서 정비하여 관리하고 있다.
(: 굴씨 묘소 -> 점차 적분의 모습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듯... )
④최영 장군(崔營將軍, 1316~ 1388, 73세): 기념물 23호, 덕양구 대자동 산70-2.
: 본관 동주, 윗 편에 장군의 부친 사헌부 간관 최원직의 묘소가 있고, 장군은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이다. 이 묘자리는 자신의 서녀가 우왕의 寧妃로 있을 때 골라 놓은 명당자리로, 우왕 14년
(1388)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하여 고양-> 충주-> 개경으로 유배, 이배 되었다가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장군의 묘는 赤墳으로 ‘내가 죄가 없으면 내 묘에 풀 한포기 나지 않을 것이다.’마지막 말씀대로
조선 500년간 붉은 묘였는데, 70년대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정성으로 가꾸기 시작하면서 차츰
잔디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보인다.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赤墳의 원한이 600년을 간 것이다.
“ 汝 見 金 如 石 ” 장군이 부친에게서 받은 평생의 유훈이었다.
( 최영장군 묘, 뒤에는 부친 최원직: 경안군 묘에서 걸어들어가는 길이 너무 좋아요)
** 최영장군 묘터는 명당터??
-> 유명 지관에 의하면 장군 묘 형국을 ‘회룡은산형(용이 산속으로 숨는 형태)’ 또는 ‘청룡출운형
(청룡이 구름속에서 나오는 형태)’라며 명당이지만 발복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용이
활동할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후손 중 입신양명한 자손은 없으나 묘를 쓴지 500년이 지났기에 앞으로 발복할 것이라는데...
풍수쟁이님의 말씀이시니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600년도 이미 지났으니 이건 솔직히 길어도 너무 길~다.
⑤성녕대군 종(1405~ 1418, 14세): 향토유적 2호, 덕양구 대자동 산69-1
: 태종의 4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고, 창령 성씨 좌찬성 성억의 딸과 혼인하였다.
일찍이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4년(1414) 대군으로 진봉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태도가
단정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나 14세 때 홍역을 앓고 죽었다.
효령대군 6남 원천군으로 후사를 이었다.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 태종과 원경왕후는 이를 몹시 비통해하여 대자골에 대자암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 성녕대군 묘소: 사당 대자사와 성녕대군파 묘역)
이제까지 왕릉골의 우측골을 살펴보았다. 이제 건너편에서 어린나이에 죽은 사위를 바라보시는
성녕대군의 장인 성억을 비롯한 좌측 능선에 자리한 음택을 살펴보자.
( 왕릉골 좌측골짜기 묘역 분포도)
⑥이성군 묘(利城君 墓): 향토유적 4호, 덕양구 대자동 산31, 사당 장평사.
: 이성군 관(1498~ 1552, 55세)은 성종대왕의 아홉째 아들로 성종 20년(1489)에 숙용 심씨를 모친으로 하여 태어났다. 연산조에 이성군에 봉해지고, 종부시, 사옹원 등이 도제조를 지냈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의 처리가 능숙해 종친으로 파격적으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직책에 임용
되었으나 거만하다고 조정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거나, 정직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명종 즉위 때 대윤 윤임을 탄핵하면서 위사공신 일등공신이 되었다.
초배는 남평 문씨 곤산군부인으로 아들 셋을 두었고, 재배는 안동 권씨 풍산군부인으로 소생은
없었다. 첩실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묘의 좌우에 곤산군부인 남평 문씨와 풍산군부인 안동 권씨의 봉분 3기가 있고, 앞에 묘비가 섰다.
인근에 아들 경양군 수환의 묘소 및 장손 녕평군, 장증손까지 같은 권역에 있다.
중종과 숙원김씨의 서5녀 숙정옹주와 구한(중종 사위)의 묘소도 있다하니 한번 찾아보자.
(이성군 묘역 : 앞은 아들부부, 뒤 나란한 3기가 이성군 부부들 묘역)
⑦경혜공주와 정종: 미지정문화재, 덕양구 무민로 27번길 10- 38. 사당 충민사. 신도비.
: 경혜공주(1436~ 1473, 38세)-> 문종과 현덕왕후의 1남 2녀 중 장녀로 1450(세종 32년) 참판
정충경의 아들 정종(鄭悰)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정종(鄭悰)에게 영양위(寧陽尉)가 봉해졌으며, 단종 3년(1455)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1461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공주는 광주(光州)에서 유복자로 딸을 낳았다. 이후 야사에는 공주가 순천부의 관비(官婢)로 전락하여 부사가 사역을 시키려 하자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으나 왕의 딸이다”라고 호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노비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박대하지 말고 집과 노비와 곡식을 내리고,
지속적으로 은전을 내린 기록이 보인다. 예종과 성종조에도 공주 가족은 잠저의 성종을 시중하였으며, 아들 정미수는 돈녕부직장,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며 연산조에 왕에게 상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해
주었고, 중종 때 정국공신이 되어 우찬성에 이르렀다.
정종(鄭悰)은 시신 수습이 되지 않아 제단만 있고, 묘소는 경혜공주만 있다.
정미수는 1512년 졸하여 외숙모인 단종비 정순왕후 송비의 사릉이 건립되기 전에 먼저 해주 정씨
선영에 장사 지내졌다. 이후 1521년 82세로 송비가 졸하자 마땅히 장사지낼 곳이 없었다.
결국 시누이 친정인 해주 정씨 선영에 장사 지내게 된 것이다. 사당 충민사.
경혜공주와 정종 묘 위치 -> 신도비 지나 산길 350m 지점에 묘소와 제단.
( 경혜공주묘와 정종 檀 후경)
⑧귀인(공빈)최씨 묘: 비지정, 대자동 산28, (주차) 대자동 965- 4 식당.
: 생몰미상, 본관 전주, 예종의 제 2부인으로 군기시 판관 최도일 따님이다.
1462년 세자(해양대군)의 소훈으로 간택되어 입궁, 6년 후 예종이 즉위하자 숙의로 품계상승.
13개월 만에 예종이 승하하였지만 정희왕후를 수행하면서 더 품계가 높아졌다고 한다.
후사가 없어 친정 전주최씨 묘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전주최씨 묘역 위에서 3번째.
조부 최승녕, 부친 최도일, 공빈최씨, 최도일 손자 최방귀(정랑), 최도일 자 최세현, 최도일
증손 최권(중종 별시 병과급제)의 순이다.
최도일의 다른 따님은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 부인으로 남천군, 청안군, 회원군을 두어
이씨 왕가에서 가장 번창한 가문을 이룬다.
( 공빈최씨 묘소: 위에서 3번 째에 위치)
⑧-1. 성 억(1386~ 1448, 63세): 향토유적 49호, 덕양구 대자동 산 27.
: 본관 창녕, 조부는 정당문학 성여완이며 부친은 三谷의 막내 우의정 성석인의 차남이다.
음보로 주부, 공조정랑, 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4년 딸이 성녕대군과 혼인하여 군자시부정이
되었고, 성녕대군이 요절하자 태종이 그의 일족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였다. 1421년(세종 3)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전라관찰사, 공조참판, 공조판서를 거쳐 1431년 중군도총제가 되었다.
1439년 우찬성, 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 우측 능선 쪽에 증손 개성부유수 성세정(상주기생 사랑)의 묘소도 있다.
( 성억 묘소: 3위 합봉(즉 초배, 계배와 함께 모신 묘)
처음이니까, 이 장은 일단 여기서 한 번 쉬었다 가자!! ~~ 왕릉골을 더 깊이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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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휴 ~~~천천히 생각하며 다읽었습니다 한꺼번에 다읽어니 정리가잘안되네요 다시 한절씩 읽어보고 선선하지면 답사를 가서눈으로 보면 더재미나게 역사공부할거같어요 다읽기도 복잡한데 이렇게 올려주시느라 얼마나수고하셨는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에구~~ 지송요. 사진자료가 미처 정리가 않되었는데, 정리하다 날라갈까봐 임시로 올려놓았는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여러각도에서 보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이끌어내어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함으로써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배우는 기쁨과
나누는 보람 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겠지요.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민족적 정체성을
함양하는데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
외국인에게도
우리나라 국민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아주
바람직한 행보입니다.
시간이 많잖아서
꼼꼼하게 모두 읽진않았지만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저도 일단 여기서 읽고 감상하는것,
잠시 쉬고 내일쯤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양시에는 왕릉과 같은 문화유산이 참 많네요.
상세한 글, 사진 감사 드립니다.
헥헥저 나리따라 저 중에 몇 곳은 다녀왔어요..게유..오늘은 바빠 이만 총총
다시 들어와 읽고 다시 댓글
수고 많으셨습미당...헤헤
기다렸던 역사에 대한 목마름을 하나또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해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당...
단숨에 읽느라 숨은 목에 찼지만, 잘 읽었습니다...
인사 꾸벅^^
이 글을 대하면서
풍수지리는 그냥 단순한 학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더욱 느끼게 되는군요.
최고 권력자나 로열 패밀리들이 제일 가는 명당을 차지하였음에도 후손들은 피비린내 속에서 허우적~~~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 정답인 듯!
기양 편히 사시징 무신 욕심들을 내셔서 이렇게 복잡시럽게들 사셨는지 잘 태어난것만두 감사하고 사셔야 할 분들이 쭉 읽기는혔는데 머리만 복잡 ㅎㅎ 늘 수고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머리좀 식히구서 다시 복습 ㅎㅎ
늘 좋은자료와 엄청난 연구에 경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