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회
시와 경계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 발표
제16회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그간 본 잡지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아짐으로써 신인우수작품 응모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하성호, 정기석, 최해숙 세 분을 당선자로 선정합니다.
앞으로 시 정신에 있어서 채찍을 늦추지 않고 뜨겁게 익혀가기를 바라며, 세 분의 신인에게 축하를 전합니다.
■ 당선자
하성호 「달팽이를 삼키다」, 「등 푸른 인간」, 「벤치에 앉는다는 것」, 「비닐봉지」
1970년 부산 출생. 부산교대 졸업
제32회 부산교대 한새문학상 시 당선
현 보림초등 교사
E-Mail issaboo@hanmail.net
정기석 「모친의 팔순」, 「쉰에 하게 된 일」, 「입맞춤은 골목이 적당하다」, 「돈은 무적이다」
1963년 경남 진주 출생. 고려대학교 지질학과(이학석사)
전북대학교 사회학과(농촌사회학 박사 수료).
저서 『오래된 미래마을』,『사람 사는 대안마을』,『행복사회유럽』,『마을주의자』, 『귀농의 대전환』외 다수.
前 국회정책연구위원
마을연구소(Commune Lab) 대표
E-Mail tourmali@hanmail.net
최해숙 「원정노동」, 「어부의 웃음」, 「산」, 「빵」
1964년 경남 남해 출생. 고성책사랑독서회원
E-Mail jiu64@hanmail.net
당선작
달팽이를 삼키다 외 3편
하성호
아무 생각 없이 포도를 먹다가
그 뒤편에 붙어있던 달팽이까지 삼켰다
제길, 신선하다 해야 할까
몇 번이나 양치질을 해도
비릿한 끈적임이 위 속에서 느껴지는데
자리에 누워 천천히 잠이 들면서부터
등이 조금씩 딱딱해지더니
한없이 느린 꿈을 꾸는 것이었다
닿고자 하는 그곳은 자꾸 멀어져만 가고
기어도 기어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한밤중에 눈을 뜨고 화장실에서
오줌으로 그것들을 시원하게 내보내고 나서야
편안히 누워서 잠들 수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달팽이처럼 온몸을 말고 있었다
달팽이처럼 왔다가
오줌발처럼 사라진 하루
아침에 꽉 막히는 도로가 끈적인다
에이, 이것들이 다들 달팽이를 먹고 왔나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누가 오줌이나 한번 시원하게 갈겼으면
등 푸른 인간
길은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눈이 동그란 죄로 주먹을 들 줄 모르고
위아래로 치이다 새겨진
등짝에 저 푸른 손바닥 자국
하늘은 알려 주었다
상처가 푸른색이면
이미 붉은 시간을 건너온 것을
충혈 된 눈으로 무단 횡단하는 하루
너희들은 모두 샐러리맨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밤새 팔딱거리는
이름만 들어도 높은 교육을 받은 어류가 되어
한없이 부패하는 중
주둥이에서는 침묵만 흘러나온다
오늘도 상갓집에 들렀나 보군
오래 살 거야
소금을 그렇게 뿌려대니
깊숙한 곳까지 물들어서야
상에 오르는
너희들은
자반고등어
벤치에 앉는다는 것
비어 있는 옆자리가 더 커 보이는 저녁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를 본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저 손
물기 없는 다리가
가족의 무게를 지게막대처럼
받치고 견디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야 할 시간
산다는 건, 어쩌면
벤치의 이쪽에서 저쪽 자리로 옮겨 앉는 일
서로 각을 세우며 만나
서로 발끝만 붙이고 살던 그림자도
등을 기대어 오는 것이다
벤치에 앉는다는 건
비닐봉지
언제부터 이렇게 무거웠지?
바닥에 붙어 헐떡인다, 개미들이 들끓는다
개미굴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비탈길이 많은 이곳은 불개미의 본거지
살짝만 건드려도 쏟아져 나오는
분별없는 목구멍들
남아프리카 희망봉에서 국을 태우면
좁은 골목을 건너는 낙타의 등에서 연기가 나지
바람과 그늘이 목을 조른 굴뚝 옆
소주도 새우깡도 모두 이것에 포획되지
보이지 않는 불투명이 미끼를 흔들어
길고양이들의 뒷다리를 잡으면
아, 그런 밤이 오고
놀라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부피
올라갈수록 가벼워지는가
높이 올라갈수록 그늘은 꾸덕꾸덕 말라가고
뒤편이 없는 달은 자전이 부끄러웠다
멀리서
빌딩 불빛의
배경이 되어가는
무거운 부피들
당선 소감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 당황스러운 경우 말입니다. 다만 근육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조금 더 오래 걸을 수 있게 되는 것.
얼마 전부터 그것으로 혼자 위안하며 걸어가고 있을 즈음 <시와 경계>에서 보내주신 이정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그 방향으로 더욱 힘찬 걸음을 걷겠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시를 쓰고 싶어집니다. 세상의 익숙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보아내는 힘이 시가 되고 그 힘의 시작은 언제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지독히 사랑해야 ‘시’가 됩니다. 좀 더 독하게 사랑하겠습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의 마음에도 그런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함께 하였음을 느낍니다. 이제 또 다른 새로움을 찾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옆에서 가르침을 주시며 시를 향한 끊임없는 두근거림을 갖게 해 주신 권애숙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서로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우리 <시창작 아카데미> 문우님들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끝으로 언제나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는 사랑하는 아내 구름과 예쁜 우리 유진, 유은이와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사랑합니다.
====================================================================================================
당선작
모친의 팔순 외 3편
정기석
드디어, 외롭다고 했다
팔십 년 만에, 팔순이 된 모친은
이제 외로움을 알만한 나이라고
외로움이 힘에 겨운 나이라고
본인의 입으로 먼저 자백했다
중년의 자식들은 밥상에 다 모이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로 바쁜 가난한 자식은
돈도 염치도 효심도 없어 올 수 없었다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누구도
그런 자식을 기다리지 않았다
특정 개인의 가족사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라는 듯
매우 깊은 양해심을 보였다
모친이, 짧지만 깊게 외로움을 탄식할 때
겨우 모인 자식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가급적 외로워 말라고 신신당부나 했다
용돈도 좀 더 생각해 넣었다
국가와 정부가 양산하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자식들은
모친의 외로움이 중증이라는 사실을
눈치 챌 제정신이 없었다
모친의 팔자가 팔십 년 묵힌
거대한 외로움으로 변신한 날,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어 보이는
오륙십이 다 된 자식들은
드디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쉰에 하게 된 일
쉰이 되자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진종일 일상을 탕진하기로 했다
차라리 불한당들과 어울리는 도시의 자영업자가 되거나
짓궂게도 사보타지를 즐기는 철의 노동자가 되거나
심지어 잡초를 농사짓는 초보 농부가 되기로 했다
처자식과 채권자들은 당황했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돌연, 새로운 숙명이 나타나
날개 빠진 어깻죽지를 서둘러 수선하기 시작했다
입맞춤은 골목이 적당하다
전주나 진주의 오래된 골목길은
입맞춤을 하기에 적당하다
습도는 촉촉하고
채광은 달빛 같다
일찍이 입맞춤을 염원해온 소년들은
골목길을 서성대는 게 주로 하는 노동이다
이런 소문을 들었다
어여쁜 소녀들은 대개 골목에서 성장한다더라
소녀들의 몸이 커지면서 골목은 좁아진다
소녀들의 커진 몸 때문에 골목이 좁아질수록
골목의 긴장감과
애비들의 불안감과 불행은
크기와 높이, 그리고 넓이가 증폭된다
몸이 큰 소녀들의 입술은 대체로 붉은 편이다
노을 지는 저녁에나 겨우 귀가하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모두 붉은 입술을 선호한다
입술이 붉을수록 입맞춤하기 좋다는 것인데
전주나 진주의 과학자들,
소년과 소녀들은 다 아는 얘기다
돈은 무적이다
살면서 꽤 들었다
머리는 참 좋은데 돈은 못 벌겠다는 말
일은 잘하는데 돈은 못 벌겠다는 말
사람은 정말 착한데 돈은 못 벌겠다는 말
그런 빈말을 천만번쯤 들었을 때
돈을 벌기엔 돈이 너무 어려워졌을 때
칭찬이 아니라 조롱이란 걸 눈치 챘다
돈은 천하무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국기와 처자식 앞에 굳게 다짐한다
앞으로 돈에 먼저 시비 걸지 않기로
항상 내가 먼저 사과하기로
앞으로는 서로 형, 동생하며 지내기로
부디 돈이 이 점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사실 나는 널 좋아한다, 애원한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칼맑스가 문제다
나는 너한테 무조건 진다, 턱도 안 된다
이제 내 눈을 피하지 말기를
그만 날 용서해주기를
이 메시지 보는 대로 연락 주기를
당선 소감
시인의 직업화 연구용역 보고서
젊어서 어리석었던 어느 날, 인사동 대폿집에서 시인에게 물었다.
“혹시 시인도 직업이 될 수 있나요?”
돌아온 대답은 모호하고 공허해서 서로 미안하고 쓸쓸해졌다.
“직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좋은 직업은 될 수 없을지도…”
이후 시에 소홀하고 시를 게을리 했다. 써서 모아둔 시가 있으면 한번 가져와 보라는 시인의 애정과 배려도 무시했다. ‘누구 보여주려고 쓴 시가 아니’라며 버르장머리 없이 굴었다. 대신 시인이 아닌 일반시민으로서 ‘먹고 살기에’ 좋은 직업을 탐구하는 데 헌신하고 매진했다. 시로는 먹고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는 늘 지참했다. 심지어 ‘신도 졌고, 시도 졌다’며 동네방네 건들거리며 까불고 다녔다.
시를 직업 삼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잔머리나 굴려 생각하고 연구하고 숙제하는 천형 같은 밥벌이로 내내 먹고살았다. 결국 자발적 유배를 결행, ‘시인의 직업화 연구’로 민생고의 활로를 찾아 나섰다. 시가 환금성이나 상품성도 좀 갖춰서 시인이 일종의 직업으로 분류되었으면 하는 숙원의 발로다. 연구는 일단,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세상의 불행을 치유하는 공익행위이므로, 마치 공무원이나 공익요원처럼 국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는 게 마땅하다는 기본전제에서 출발한다.
가령, 직업인으로서 시인의 표준 업무공정 또는 일상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인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한편씩 시를 생산해 국가 또는 대한민국 정부에 납품한다. 편당 10만 원쯤 국고에서 원고료를 즉시 지급받는다. 이렇게 주당 5일, 한 달에 20일쯤 성실히 시인으로 복무하면 2백만 원짜리 월급쟁이 신세는 되는 셈이다. 됐다, 그 정도면. 그 정도면 욕심 부릴 이기심도, 남과 싸워 이길 근력도 없는 시인의 입장에서 설사 죽을병은 걸릴지언정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는다.
이상, ‘시인의 직업화 연구용역 보고서’로 당혹스러운 당선 소감을 허둥지둥 갈음한다. 30여 년 전, 시가 무엇인지 깨우쳐준 정진규 시인, 일개 시민을 ‘시인’으로 대접해준 ‘시와 경계’가 참 고맙다. 이제, 나도 먹고살고 우리도 먹여 살리는 ‘이기는 詩’를 쓰고 싶다. 여생은 직업시인으로 잘 살다 잘 죽고 싶다는 소원이다.
==============================================================================================
원정노동 외 3편
최해숙
큰 배 만들어 바다로 나가려 했던 김씨
조선업이 불황을 맞자 돛을 접었다
20년 노동으로 얻은 직업병에
저린 팔 펴지기도 전 아침이 오면
울긋불긋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 틈에 끼어
우줄우줄 봉고에 오른다
중국은 중국끼리
베트*는 베트끼리
일당 7만원에 하루 품 팔러 간다
사람들이 짐짝처럼 부려진 마늘밭에서
두덕을 타고 말처럼 경주 한다
뒤처지는 사람 찬 대신 욕을 먹고
데려간 사람 욕의 반을 먹는다
일손 서툰 아낙 화장실을 묻다가
욕으로 채워진 아랫배 붙들고 밭가로 뛴다
눈 질끈 감고 푼 허리끈에 둥실 떠오르는 달덩이
남자 일꾼들 일제히 좌향좌 해줄 때
하나의 예의만 존재하는 일당 7만원의 현장
아침마다 인력사무실 앞에
원정노동 대기표를 쥐고 선 사람들은 오늘도
이 도시에서 저 촌으로, 저 나라에서 이 나라를 넘나들며
언니 삼촌 이모 할매 영락없는 일일 가족일터를 만들지만
오늘은 창녕 양파밭 끝나면,
합천 마늘밭 끝나면, 사과 배 감밭 끝나도
서울 젊은이는 몇 박 며칠 벌어
월세 내기도 바빠 삶이 전쟁 같다는 헬조선
일에 일을 해도 가난하기만 한 삶들이,
헬조선이 트럭에 봉고에 오르는 아침이다
*베트남을 이르는 작업반장의 말
어부의 웃음
촘촘한 그물에 든 은멸치
어부의 얼굴에 은니를
잠깐 빛나게 하고
검정봉지에 들어
비린 바닷물을 튕기며
배를 타고 뭍으로
차를 차고 읍내로
키가 큰 늙은 어부를 따라
흔들리며 느릿느릿 도시로 와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고
새 집이 되었다
새 집 흉한 기운 막아야 한다며
노인들 먼저 드시고
자식에 해될까 오체투지
온몸으로 액 막음 하신 뒤
아침처럼 개운하게 웃으셨다
그물에 든 잔멸치 떼의 비늘같이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을 보며
노인의 은빛 웃음이 바다로 가는 것이다
산
아픈 아이를 기르는 건
산을 지고 가는 거라 했다
내려 갈수도 오를 수도 없어
하루에도 몇 번 무릎을 꿇는 산
기침을 할 때마다 흙이 무너지고
모든 움직임들이 푹푹 빠지고
어미는 절뚝이며 길을 간다
산꼭대기 집게 발자국
화석처럼 박혀 태어나던 날
의사는 실수가 아니라 했다
햇살 아래 쏟아지는 소나기 같이
생길 수 있는 일이라 했다
그날이후 엄마는 신에게도
산에게도 무릎을 꿇었다
병원과 싸우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기려면 힘이
져주려면 용기가 필요하듯
산의 고통과 우리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선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나
산은 허공을 바라보고
엄마는 산을 본다
빵
이국적인 빵집에 가면
갓 구운 향기 구미를 당기지
통유리 창가에 따끈한 행복
풍성하게 누워 오감을 당기지
농부의 웃음같이 구수한 팥빵
밀밭사이 지나는 산들바람
결결이 품은 파이와 페스츄리
흰구름 둥실 보송보송 크림빵
햇살이 튕겨간 반지르르 한 베이글
별을 닮은 쿠키는
우리를 가끔 별나라로 보내지만
눈송이처럼 부풀어 오르거나
보송보송한 솜털의 모습으로 발효되는
저 간지러운 슬픔
당선 소감
하늘 한 켠에 무지개가 걸린 오후
뜨거웠던 여름이 떠나며 아쉬웠던지 아침부터 제법 굵은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갤 무렵 하늘 한 켠에 무지개가 걸린 오후.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에는 마음을 모으는 힘이 있나 싶어, 문득 세상이 좋아졌습니다. 오래 꿈꿔온 일이라 그런지 꿈만 같았습니다.
이명처럼, 귓속을 맴돌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아직도 무지개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배고픔은 한 조각의 빵으로 채울 수 있다지만 정신의 허기는 늘 채우기가 버거웠습니다. 그런데도 시를 대하면 마음에 명주바람이 일고, 강물이 흐르고 꽃이 피었습니다.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 아픔을 보듬는 시업詩業을 이루려 노력하겠습니다. 느리고 서툰 걸음에 손잡아 주신 선생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16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상 심사평/
끝을 알 수 없는 경주
우리는 응모된 작품 가운데 시적 진술과 상상력이 새롭고 주제의 선이 분명하여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시들에 관심을 두기로 했습니다. 결국 하성호, 정기석, 최해숙 님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습니다.
하성호 님 시의 특징은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를 먹다가 포도에 붙어있던 달팽이까지 삼키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확장하여 처리합니다. 달팽이의 딱딱한 껍질과 느린 생태적 특징을 잠을 자면서 등이 딱딱해진다는 것과 출근길의 정체현상에까지 비유를 이동시킵니다. ‘고등’에서 오는 동음을 살려 자반고등어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의인화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의 마른 다리에서 늙도록 가계를 받치고 있었을 가장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개미들이 들끓는 바닥에 달라붙은 비닐봉지를 비유하는 멋도 새롭습니다.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이 믿음직합니다.
정기석 님의 시는 문장의 진술이 활달하고 사회비판과 현실풍자가 매섭습니다. 어휘들이 지리적 공간과 비유적 사물을 폭넓게 이동하면서 상상의 폭을 크게 합니다. 의도도 잘 읽혀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무래도 그의 시의 압권은 모친의 팔순에 일어난 사건들인데, 외로움이 힘겹다고 자백하는 모친과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팔순 생일에 다 모이지 못하는 “돈도 염치도 효심도 없어 올 수 없었”다는 말이 파급력을 갖습니다. 특히 “국가와 정부가 양산하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자식들”이라는 풍자가 멋집니다.
최해숙 님의 시는 투고 작품 간 다소 격차가 있었지만 원정노동의 핍진한 진술력에 반하여 뽑기로 했습니다. 삶이 전쟁 같은 헬조선의 풍경을 우스꽝스럽게 비꼬고 있습니다. 이런 비꼼도 시의 주요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서정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은빛 멸치에서 어부의 은니로 비유를 이동시키고, 바다에서 부서지는 햇살과 노인의 웃음을 대응시키는 방식도 좋습니다. 아픈 자식을 키우는 엄마가 “신에게도/ 산에도 무릎을 꿇”는다는 서정의 백미가 발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한꺼번에 세 명의 당선자를 낸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우리는 세분의 가능성을 보고 흔쾌히 합의하였습니다. 등단은 시 쓰기 경주의 출발선입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경주를 시작한 세 분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심사위원: 공광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