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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공의의 하나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시편 9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쓰기는 ‘여호와’라고 썼지만 읽기는 ‘주’로 읽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주’로 읽는 것이 더 익숙해질 것 같다. 시편 9편의 내용은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원수를 망하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신약의 빛
구약은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의 상황이다. 선악이 홍수처럼 뒤덮고 있는데 생명은 그 위에 방주처럼 떠 있는 것과 같고, 선악이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는데 생명은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다. 시편 백 오십 편중에 어떤 곳은 읽으면 은혜가 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스러운 곳도 있다. 8편과 16편, 22편은 그냥 봐도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3~7편이나 9~15편은 원수 앞에서 억울해 하고 보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율법적인 관념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이런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렵다.
예수님도 구약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눈으로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혼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율법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 때문에 주신 것이나 원래는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며 율법을 재해석하셨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것은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워낙 완악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라도 써주라고 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라도 없다면 너희는 이혼증서는커녕 때려서 내쫓을 것이니 여자가 살 길이라도 열어주라는 자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이혼증서를 주라는 것이 아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것을 가지고 중동땅에서는 아직도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데 본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지만 이 말씀이 없었다면 그 시대에는 이에는 이가 아니라 아예 아작을 내는 시대였던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히위 족속 일족을 멸해버렸다. 그런 보복의 시대에 그렇게까지 하지는 말고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런 율법을 주셨지만 본래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은 구원의 역사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셔서 자기 앞으로 되돌리는 역사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니까 성경을 구원의 역사로 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람이 무엇을 했느냐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가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고 이삭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고 이삭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는 역사 이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글자 하나 하나에 매여서 ‘이에는 이’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보는 것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은 다르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시편 55편 8-9절에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편 9편의 보복이나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다른 것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시편 9편 3-5절에는 원수를 넘어져 망하게 하고 이방 나라들과 악인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다고 하였다. 이를 인하여 감사하고 주의 기이한 일을 전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하였다(시9:1-2).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원수를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가?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원수가 딱 정해져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내 원수와 네 원수가 다르니 어느 편을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되겠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대라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끼리 서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며 싸울 때가 많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는가?
만약 시편 9편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 없는 백성이라며 넘어져 망하게 하고 그 이름을 지우려 한다면 이 세상은 폭력만 악순환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은 회교도들을 이교도라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이백 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지나간 역사니까 이백 년이라고 하지만 끔찍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교도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어린아이까지 동원하는 무서운 일을 벌였던 것이다. 지금은 회교도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어린아이까지 자살폭탄에 동원하면서 성전이라고 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면서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거창하게 전쟁이라고 하니까 ‘그건 안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손 봐 주고 싶은 사람들과의 전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어떤 명분으로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성경에 그런 계시가 열린 때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선포하라 하셨으나 요나는 그 일을 싫어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래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래 뱃속에서 구원받아 니느웨로 간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며 회개를 선포했지만 그들이 망하기를 눈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요나는 그들이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고 망하기를 바랐지만 니느웨 백성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뉘우쳤던 것이다. 이를 싫어하여 분노한 요나는 그 성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성 동편 박 넝쿨 그늘에 앉아있었다. 이튿날 벌레가 박 넝쿨을 먹어 뜨거운 햇볕이 머리를 내리쬐니까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며 하나님께 반항했다. 그때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셨다(욘4;10-11).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만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들을 망하게 한 민족 앗수르까지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라는 계시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포로를 석방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 했을 때 이사야서를 보면 그를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종이라고 하였다(사45:1). 구약에도 그만큼 넓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편 9편은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주께 감사하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가? 잠시는 그랬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은 원수 이방나라가 승리하고 이스라엘은 망한 것으로 끝이 났다. 완전히 망해서 거의 육백 년을 나라를 잃고 사백 년은 계시도 없고 선지자도 없이 캄캄했으니까 무슨 소망이 있었겠는가!
만약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되지 않았을 텐데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새로운 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역사적이고 물질적이고 표면적인 약속이 이면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예수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눅4:18)라고 선포하신 것은 눈을 열어서 사람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시려는 것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제자들은 끝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사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간의 인격을 회복하고 사람의 가치와 존귀를 회복하는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복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복은 원수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이다. 다른 복 안으로 우리를 옮기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표면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인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런 문제를 이용해서 우리를 다른 자리로 옮기시는 것이다. 짧게는 시편 9편에서 원수가 망하게 하고 열방을 심판하신 것을 찬양하고 있지만, 길게 보면 이 약속은 예수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가 망하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참 승리를 예수의 죽음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격 안에서 참 자유자가 되고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다(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혜택을 받으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거래하는 습성이 있어서 하나님께 무엇을 받고 우리는 무엇을 갖다 드리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다. 거기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내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 제물을 드리고 자기가 필요한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종교적인 생활이 그렇다. 거래하는 생활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요구하고 찾으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나’와 ‘너’가 만나자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것을 놓고 주고받으려 한다. 그런 관계가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드는 관계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푯대가 되고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려고 오셨다. 이것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에게서 구원을 받은 것이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돌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고귀한 목적을 두신 것이다. 우리에게 존귀한 목적을 두신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에게 고귀한 목적을 두셨기 때문에 당연히 돌보시는 것이지 돌보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보존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두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형제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사람이면 당연히 할 일이다. 굳이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그 사람의 인생에 고귀한 목적을 주는 것이다. 복음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인생에게 두신 영원하신 목적과 존귀한 뜻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앉은뱅이를 만났을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며 능력을 행해서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다고 하였다(행3:1-10).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가진 것, 내 인생을 가장 복되게 한 것을 주는 것, 그것이 복음이고 사랑이다.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주셔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다. 마치 좋은 나무를 심으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밑거름이 되듯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고 푯대가 되고 목표가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심지어 우리가 원망하던 일까지 찬송이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인생에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게 된다. 인생에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일들로 파란만장해진 삶을 신세한탄을 해서 늘어놓지 않고 거기 골골이 하나님이 수놓으신 인생이 있음을 우리는 증거한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관여하셔서 다듬으시고 수놓으신 것이 풍성하게 있으니까 골골이 쌓여있는 우리의 이야기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고귀한 목적을 주신 것이다. 이 목적 안에서 인생은 버릴 것이 없이 완전하게 해석된다.
하나님의 공의
8절에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 하였다. 공의는 공평과 정의를 줄인 말로 억울함이 없는 세상, 반칙이 없는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억울함과 반칙이 없는 세상은 없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널려져 있다. 아벨 이래로 이 세상에 의인의 죽음은 대부분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죽임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신원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였다(계6:10). 시편 9편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원수들을 다 멸하셨습니다. 내 원수를 무너뜨려 도망가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기억됨이 없게 하셨습니다.”라는 노래를 부를 날을 기다리면서 제단 아래서 신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원은 예수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불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습니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으로 보면 불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불의한 사건을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은 죽음에 관여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에 관여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 답을 달라고 요청하는데 하나님의 공의는 부활 안에 있다.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말하게 되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공의로우시다고 고백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는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 골로새서 3장 11절에는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라고 하였다. 전혀 차별이 없는 공의로운 한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죽고 다시 난 부활의 세계 안에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는 공평해질 수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을 해도, 달리기를 해도 다 달라서 공평할 수 없다.
그런데 어디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우리가 예수를 만난 자리에서다. 내 환경이 이래서 나는 예수를 못 만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 더 억울한 환경이 주께로 더 빨리 가게 하는 축복이 될 수 있다. 억울하게 생각했던 그 일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지는 복된 기회가 되면 모든 것이 원인무효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만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열시에 온 사람이나 열두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세시에 온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는 것은 경제 원리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그리스도로 보면 맞다. 교회 안에서 보면 그렇다. 지금 막 온 사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주어졌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공의는 부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으로 공의를 나타내셨다. 죽음 뒤에 우리가 몰랐던 부활의 세계를 여셔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 눈물이 그치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는 세계를 여셨다.
최종적 심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이 세상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경작하신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것, 말세에 세상이 뒤집어지고 재난을 당하는 끔찍한 일들에 주목한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표현들이 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별들의 떨어져서 하늘이 종이축이 말리듯이 떠나가며 산들과 섬들이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한 표현들을 보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우리가 앉아서 핵전쟁만 생각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계시록의 표현은 핵전쟁을 능가하는 두려운 종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악인을 벌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매를 거두는 문제다. 그러므로 열매로 준비된 사람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게 되고 열매가 없으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조금만 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해서 춘향이를 다시 만났을 때 변사또를 벌하는 대목이 있지만 변사또를 벌하는 것보다 춘향이를 만난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상을 부수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추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최후의 심판은 세상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종적 열매를 거두는 일이다. 우리를 침해하고 찌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우리가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찔림 받은 그 일로 우리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세상에 대한 가장 완전한 심판이 아니겠는가!
원수에 대한 심판은 우리 인생이 더 온전하고 정결해지는 것이다. 가라지가 함께 자라서 밀이 자라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가만 두라고 하셨다. 밀을 거두면 나머지는 저절로 심판된다. 우리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망하는지 보자며 지켜볼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를 침해하여 억울하게 했고 원수되게 했을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우리 인생에 더욱 복된 자리로 옮겨진다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바벨탑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새 예루살렘,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어린양의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벽옥과 수정같이 맑고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신부가 준비되면 문들이 다 열리고 이 세상의 왕들이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이 성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것이 상생(相生)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상을 주고 원수는 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존귀하게 하심으로 세상은 이 영광을 보고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얻으려 성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저 영광을 향해서 가야겠다.’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러하니 얼마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공의로우신 분인가!
우리에게 가해지는 억울함이 우리를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이 완전한 보상이다. 억울한 그 일을 원망한다 해서 내가 침해받았던 그 일들이 되돌려지겠는가? 인생은 원망으로 되돌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원수를 갚는다 해서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원수를 갚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그것이 나를 복구시키거나 나에게 보상을 해놓지는 못한다.
잘하는 운동선수는 수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메시는 여러 명의 수비가 둘러싸고 태클을 걸어도 먹히지 않는다. 보통은 태클에 걸려서 넘어지고 프리킥을 얻어서 공격하려고 하는데 그는 수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종횡무진이다. 매 경기마다 골을 넣는다는 것을 알아도 수비가 막지 못한다. 그는 수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의 컨디션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탄이 어떻게 한다 해서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그러하다. 누가 어떻다 해서 방해가 될 수 없고 “누구 때문에 교회생활을 못하겠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몇 번 말씀드렸지만 캐나다에 가서 처음 여러 사람 앞에서 욕을 먹고 창피를 당했을 때 ‘이럴 수가 있나!’라고 여겨지지 않고 이상하게도 그때 나에게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정도로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먹히는 사람이 된다면, 그와 통하는 사람이 된다면 여기서 다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정도로는 이 사람에게 통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더 고운 가루로 만드시고 더 깊이 다루시어 다른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더욱 감사가 밀려왔고 그 사람이 미워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보니까 욕을 먹은 것이 앙금으로 남았다면 내 표정에서 느껴졌을 텐데 나는 정말로 그것이 감사가 되고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내 인생에 관여하십니까!’라는 마음이 드니까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내 얼굴이 해같이 빛났을 것이다. 그 분이 이후에 돌아가서 “저 사람과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라고 하게 되고 그래서 토론토 교회의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일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는 것을 알면 상처를 받거나 할 일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길 때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 사람이 행동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는 잠언의 말씀대로 그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무슨 허물이든 덮어주게 된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문제라서 태클이 걸리는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왜 나를 싫어하나?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러나?’ 하던 것들이 궁극적으로 사람 문제라고 알면 다른 자리로, 가만히 있어도 복이 되는 자리로 옮겨진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무엇을 많이 해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한 것은 이삭을 낳은 것밖에 없는데 이삭을 낳기까지의 삶의 과정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를 다루심이 아브라함의 생애 안에 비춰져서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복의 근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이방을 벌하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에 영광스럽게 된 예수를 요한이 보고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이 보이지 않았다.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이후에 찌른 자들에게까지 그 영광이 보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는지 찌른 자들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된다면 그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준비되면 최후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0장 6절에는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라고 하였다. 어느 때 심판이 오는가, 어느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이 세상에 많은 일들로 인해서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되고 향기가 될 때 사람들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우리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신부가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 이렇게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사탄이 떠나가고 천사가 수종을 들며 세상 만국이 이 영광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축복의 기회가 되고 우리의 생명을 표현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 복이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당한 모든 환난을 축복으로 바꾸시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해서 세상을 심판하고 만민을 살게 하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시는지! 이렇게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
[ 기 도 ]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공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예수 안으로 부르셔서 이 세상의 모든 찔림과 억울함과 우리가 당한 환난을 인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 영광 안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길래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셔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시고 우리를 이토록 존귀하게 하시는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우리를 통해서 온전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더욱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고 만민을 살게 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축복 안으로 이끄신 것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