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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치열했던 교사 김종만의 삶
김종만은 1957년 음력 8월 17일 전라남도 여천군에서 아버지 김진찬과 어머니 공순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과 누나가 한 분씩 있었고 몇 해 뒤 여동생이 태어났다. 1960년에 온 가족이 경기도 의정부로 옮겨 오면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의정부에서 다녔다. 의정부는 오랫동안 미군부대가 주둔한 도시였다. 훗날 김종만은 의정부에서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사격장 아이들》(보리, 2010)에 쓰기도 했다.
1978년 3월 김종만은 인천교육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시절에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기독학생회에서 총무를 맡아 활동하면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수업 시간이 아닐 때면 늘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가끔 음악실에서 가곡을 부르곤 했다.
유신시대 말기였던 그 시절 학교 분위기는 조용했다. 초등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 교과과정에는 철학도, 교육철학도 없었다. 오로지 국정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인’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과 말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김종만이 속한 윤리교육과는 그나마 철학개론과 윤리학 같은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으나, 수업은 교수가 교재를 읽으면서 밑줄을 그으라고 하면 학생들은 지시대로 밑줄을 긋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뿐 토론은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없었다. 그나마 그 교수는 성실한 편이었다. 교수들 중에는 강의 시간 내내 잡담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김종만은 책읽기에 열중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학교도서관에서 지내면서 신앙 서적부터 교육, 역사, 철학 따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을 통해 신학자 하비 콕스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1980년 3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운담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김종만은 그해 5월 광주에서 있었던 학살사건을 광주가 고향인 같은 학교 동기한테 듣고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뿌리 깊은 보수 신앙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일요일에는 한국대학생선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한편, 한국 교회 현실을 비판하는 김형석 교수의 신앙 강좌에도 귀를 기울였다.
이 무렵 김종만은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과 의식화》, 에버레트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의 사회》, 《의식의 축제》, 이오덕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일하는 아이들》을 읽으며 의식을 일깨웠다. 서머힐을 설립한 알렉산더 닐과 그의 스승 호머 레인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를 읽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저절로 행복하게 자란다.”는 닐의 교육사상은 김종만의 교육관과 교육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3년 9월, 교사 소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으면서 현실의 학교가 너무나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고 고민하고 있던 김종만은그동안 책을 읽고 존경하던 이오덕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가입을 권유하는 답장을 받고 주저 없이 가입하였다. 그리고 함께 공부하던 교사 모임 회원들을 모아서 1984년 봄에 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라는 지역 모임을 만들었다.
이 해에 시흥으로 학교를 옮긴 김종만은 대학 때 벗이었던 진양숙과 혼인을 하고 안양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김종만은 신혼집에서 경기글쓰기 회원 몇 사람과 함께 달마다 밤을 새워 타자를 쳐 만든 <경기글쓰기교육> 회보를 전국에 있는 글쓰기 회원들에게 보냈다. 반 아이들과 함께 학급문집도 만들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종만은 이런저런 모임에 참여하면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술을 별로 마시지 못했으나 해가 갈수록 늘어 나중에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 언제부턴가는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창을 부르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어 분위기를 돋우곤 했다.
1985년 6월 첫 딸 누리가 태어났다. 김종만은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글쓰기회 회원인 임길택 선생이 펴낸 학급문집 <물또래>에 대한 감상문을 <실천문학>에 투고했는데, 이 글이 《민중교육》 창간호에 실리게 되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교육운동의 싹을 짓밟기 위해 이 잡지에 글을 낸 교사들을 좌경용공 세력으로 몰아 모두 구속하거나 해직시키고 말았다. 초등 교사로 유일하게 연루된 김종만은 해임 다음으로 중징계인 3개월 감봉 처분을 받고 그나마 교직에 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전혀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고 1985년 부천YMCA 교사모임을 조직하고, 1986년에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총무를 맡아 더 열심히 활동했으며 《민중교육》지 관련 해직 교사들이 만든 민주교육실천협의회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교사들은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를 창립했다. 초등 교사들은 그에 앞서 전국초등교육자협의회를 먼저 결성하였다가 전국교사협의회에 합류했다. 김종만은 글쓰기회 총무 일로 바쁜 가운데 경기교사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아 열심히 뛰어다녔다. 처음 결성 당시에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경기교협 회원들은 1988년 하반기에는 1,000명이 넘었고 시군 교사협의회도 속속 결성되었다. 이 무렵 전국교사협의회는 임의단체로서 한계를 뛰어넘어 단일조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1,527명의 전교조 교사들을 파면 또는 해임했고 검찰은 전교조와 지부 집행부를 구속해 전교조를 와해하려 했다. 김종만은 의정부지회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직위해제를 당하고 7월에 파면되었다.
해직 이후 김종만은 교육운동에서 출판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선집을 펴내려고 직접 안동 빌뱅이 언덕 흙집으로 권 선생님을 찾아가기도 했으나 투자를 약속했던 사람이 약속을 어긴 탓에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출판운동의 뜻을 접지는 않았다. 쟁기출판사를 만들어 운영하였고 그동안 써왔던 교육 평론을 모아 《아이들을 매질하는 어른들의 나라》(온누리, 1991)를 펴냈다.
1991년 2월, 둘째 딸 소리가 태어났다. 이 해에 5.16 군사 쿠데타로 폐지되었던 지방자치가 다시 시행되면서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의정부 지역의 진보 사회단체에서는 김종만을 경기도 광역의원 후보로 추천하였다. 처음에는 고사했으나 거듭된 출마 권유에 선거에 출마한 김종만은 하루 한 시간도 자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선거운동을 펼쳤으나 무소속 후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방의회 선거 이후 김종만은 다시 출판계로 돌아와 진보 문화예술 잡지 《예감》의 편집장이 되었다. 《예감》은 마야코프스키, 브레히트, 파블로 네르다를 비롯하여 김수영, 윤이상, 김순남 같은 시인, 예술가를 소개하여 진보 문화예술 애호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창간 6개월 만에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김종만은 글쓰기에 몰두하여 잡지에 동화를 연재하였고 1992년 6월에는 월간 《말》지 논픽션 공모에 <몸부림치는 교단>이 당선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글쓰기 교육뿐 아니라 아이들 놀이의 수집과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 교사 시절에 틈틈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했던 놀이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 1992년에는 중국 연변 지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북녘 아이들 놀이 자료를 정리하여 《아이들 민속놀이 백 가지》와 《북녘 아이들 놀이 백 가지》(우리교육, 1993)를 펴냈다.
김종만이 해직된 기간에 함께 모시고 살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간병하던 어머니는 고질병을 얻어 먼저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네 해 남짓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김종만은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한탄하곤 했다. 하지만 다시 기운을 차려 이 일 저 일 벌이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1994년 3월, 해직된 지 4년 8개월 만에 포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복직한 뒤로는 뜻이 맞는 전교조 지회 조합원들과 농사를 짓기도 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벌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 생태에 관심이 많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가 신명이 많아서 평소에도 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꿈꾸곤 했다. 포천지회 조합원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포천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날 행사도 열고 대안학교를 세우기 위한 계획도 추진하던 그때가 김종만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2003년 8월,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는 회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모임이 분열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종만은 사무총장직을 맡아서 갈등을 수습하려고 애를 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황장애라는 병을 얻어 몇 해 동안 고생하였다.
2005년에는 의정부 지역에서 여러 운동 단체가 함께 쓸 요량으로 수락산 자락 살림집 옆에 회관을 짓기로 했다. 김종만은 1988년에 살림집을 지을 때에도 지하실 공간 전체를 큰 방으로 꾸며 몇 차례 교사 단체 연수 모임을 열기도 했으나 물이 들고 습기가 차서 쓸 수 없게 되었다. 새로 짓는 모임집은 전교조 지회뿐 아니라 지역 여러 단체 사람들의 힘을 모아 짓기로 했으나 시작할 때의 열기가 차츰 식으면서 온전히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은 이층 건물은 ‘수락산채’라 이름 지었다. 수락산채는 평일에는 ‘꿈틀학교’라는 대안학교에서 쓰고 주말에는 의정부 지역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이용했다. 수락산채는 교사 모임뿐 아니라 의정부 지역의 진보운동 회원들도 모여서 지역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김종만은 전교조 지회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농사 공동체, 한문 공부 모임, 대금 연주 모임, 목각 공예 모임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집 지하실 공간에는 ‘성골예목공방’을 차려 지역에서 목각 공예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업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글을 쓰고, 예전에 쓴 책을 다시 고쳐 써서 어린이가 읽는 농사 이야기 《열두 달 우리 농사》(온누리. 2006), 《아이들 민속놀이 100가지》와 《북녘 아이들 놀이 100가지》 고침판, 《잘 놀아야 철이 들지》(바보새, 2007)를 잇달아 펴냈다.
2008년에는 새로운 학교 운동과 혁신학교 운동 연수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교육의 길을 모색하는 한편,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 지역운동에도 관심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 무렵 김종만의 몸은 그동안 지나치게 혹사한 탓에 한계에 도달한 듯하다. 특히 수락산채를 손수 짓는 과정에서 몸뿐 아니라 마음도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2009년 3월 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대장을 15센티미터나 절제하는 큰 수술이었다. 의사는 항암 치료를 꼭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마다하고 자연 치료를 선택했다. 설사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몸에 못할 짓을 하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죽음에 관한 선택도 스스로 하고 싶다고 했다.
김종만은 항암치료 대신 화내지 않기, 고기 안 먹기, 침과 뜸, 운동, 온열 요법을 하면서 한 해 동안 건강하게 지냈기에 스스로 암이 완치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방심했던 것인지, 2010년 12월 암이 재발하여 폐로 전이되고 말았다. 2011년에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강원도로, 제주도로 다니면서 요양 생활을 했으나 암은 폐에서 다시 뇌에까지 전이가 되었다. 김종만은 수술받은 것을 후회하고 병원 치료를 거부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 결국 병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감마나이프 시술로 뇌종양을 치료하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2012년에는 휴직 연장이 되지 않아서 다시 학교에 나가면서 항암 치료 기간에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생활을 반복했다.
십여 년 전 김종만은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 대안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포천 금주리에 터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으려고 나무까지 사놓았으나 문제가 생겨서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투병 기간에 김종만은 페이스북에 자신의 대안고등학교 구상을 글로 써서 올렸다. 학교 이름은 ‘메뚜기 학교’라고 짓고 싶어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 특성을 두고 지은 이름이었다. 교육목표에는 공동체 가치, 소통, 개성, 자유, 자율, 감성, 소양 같은 개념을 담으려고 했다. 정치이념이나 성향, 종교, 철학 신념 같은 것들은 배제하자고 했다. 백 명쯤 되는 학생들을 모아서 인문 소양, 직업 기능, 예술 소양과 기능의 세 분야로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지역에서 일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학교를 구상하였다. 비록 몸은 암세포와 싸우느라, 항암 치료에 시달리느라 고통스럽고 힘겨웠지만, 대안학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김종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몸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휴직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그만두기로 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해 전에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낸 것 때문에 공무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이 계속 미루어진 탓이었다. 하는 수 없이 2013년 2월 말에 일반 퇴직을 하였다. 해직 기간을 포함하여 만 33년의 교직 생활이었다.
김종만의 퇴직을 안타까워한 전교조 의정부지회와 포천지회 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2013년 3월 23일 의정부 성골마을에서 퇴직 행사를 마련했다. 수락산채에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김종만의 퇴직을 아쉬워하고 빠른 회복을 기원했다.
퇴직 이후에는 건강을 추스르면서 그동안 구상했던 대안학교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일반 퇴직조차 안 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병휴직을 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해도 안 된다고 해서 일반 퇴직을 했는데, 이미 그만둔 사람한테 이제 와서 일반 퇴직조차 안 된다니,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2013년 9월 7일 오전 8시 53분, 김종만은 향년 57세로 눈을 감았다. 이루지 못한 꿈은 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긴 채.
흙내 김종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놀이 운동가로, 시인으로, 동화 작가로, 교육 운동가로, 지역 운동가로 기억할지 모르나, 그는 ‘사람 농사’를 농사 중에 가장 귀한 농사로 여긴 천생 교사였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자란 지역을 사랑했다. 사람 모이는 것을 좋아해서 늘 모일 자리를 마련하고 행사를 꾸리고 사람들을 위한 잔치 마당을 여느라 동분서주했고, 무대에서는 스스로 광대가 되어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술자리에서는 남의 술값까지 내주고, 돈이 필요하다는 사람한테는 돈이 없으면 빚보증이라도 서 주었으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도 미워할 줄 몰랐다. 어떤 사람은 그런 그를 두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본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한량이라고도 했다. 물론 그는 놀이 운동가답게 놀기도 좋아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았다. 비록 남보다 짧은 삶을 살았으되 백 년을 산 사람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수많은 일을 벌이고 감당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게으른 선생’이라고 여긴 사람.
“어린이 시대는 놀이 시대입니다. 사람은 놀면서 철이 듭니다. 아이들은 놀아야 그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자라면서 철이 들지요. 우리 어른들,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들, 아이들을 살리는 참된 교육을 하고 싶은 교사들이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아이들에게 놀 시간과 놀 마당을 내주고, 그들의 생존 방식인 놀이를 권하고 북돋는 일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월간 《개똥이네 집》 2013년 3월호)
그가 남긴 《보리 어린이 놀이도감》(보리, 2017)은 그가 사랑했던 이 땅의 아이들에게 놀이를 권하고 북돋우려는 이들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2018. 1. 27. 이성인 씀)
김종만 약력
1957년 음력 8월 17일 전남 여천에서 아버지 김진찬과 어머니 공순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960년부터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아래 성골에서 살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1971년 2월 의정부초등학교 졸업
1974년 1월 복지중학교 졸업
1977년 2월 의정부고등학교 졸업
1980년 2월 인천교육대학 졸업
1980년 3월 경기도 포천시 운담초등학교 첫 발령
1982년 3월 경기도 포천시 포천초등학교 근무
1983년 9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가입
1984년 3월 경기도 시흥시 도창초등학교 근무
1984년 3월 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 창립
1984년 4월 29일 진양숙과 결혼
1985년 6월 18일 큰딸 누리 태어남.
1985년 부천 YMCA 교사 모임 결성
1985년 6월 민중교육지 사건
1985년 9월 경기도 시흥시 연성초등학교 근무
1986년 1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총무이사
1987년 경기교사협의회 창립 사무국장
1988년 3월 경기도 의정부시 배영초등학교 근무
1989년 5월 28일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관련하여 6월 14일 경기지부 의정부지회 지회장을 맡게 되어 6월 16일 직위해제 7월 7일 해직
1990년 2월~1992년 12월 쟁기출판기획 대표
1991년 2월 14일 둘째 딸 소리 출생
1992년 12월~1993년 12월 도서출판 마루 기획조사부장
1994년 3월 1일 신규 임용형식으로 복직.
1994년 3월 경기도 포천시 내촌초등학교 근무
1995년 3월 경기도 포천시 송우초등학교 근무
1996년 11월 경기도 포천시 선단초등학교 근무
2000년 3월 경기도 의정부시 신동초등학교 근무
2002년 포천 금주리 자유학교 추진
2002년 3월 경기도 의정부시 솔뫼초등학교 근무
2003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사무총장
2005년 3월 경기도 의정부시 발곡초등학교 근무
2006년 2월 수락산채 완공
2008년 3월 경기도 포천시 지현초등학교 근무
2013년 2월 정부의 명예퇴직 반려로 일반 퇴직함 (만 55세)
2013년 9월 7일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지현초등학교가 내려다보이는 사찰 도성사 봉안당에 안치.
(이주영 정리)
첫댓글 저는 이 글에서 김종만 선생님도 김종만 선생님이지만,
친한 동무가 살아온 길을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
이성인 선생님도 같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