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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 남자(이희선)
내 나이 마흔 하나. 요즘 들어 부쩍 외롭다. 너무나도 바빠서 집에서는 하숙생 같은 남편,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아빠보다도 얼굴 보기 더 힘든 큰아들, 그리고 사춘기에 들어가고 있는 작은아들. 이렇게 세 남자와 살고 있는 유일한 여자. 문득 우리집에서 ‘나에게 갑자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가 아이들 밥은 제대로 챙겨 줄 수 있을까? 큰애는 어느 정도 컸는데, 작은놈은 어떻게 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뱅뱅 돌고 이러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뭔가 우리집에도 개선이 필요했다.
교육이 있다고 일주일 동안 늦게 들어갈까? 아니야 아이들 시험기간인데 그러면 안 돼.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를 해 볼까? 주일 예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머리는 복잡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한바탕 놀이가 끝났는지 작은아들이 울고 있었다. 형은 분명히 장난을 한 것이라 하는데 당한 동생은 너무 억울했는지 좀처럼 울지 않던 놈이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울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사태를 수습하니 무뚝뚝한 큰아들 미안은 했던지, "엄마, 이제부터 내가 잘할게. 미안해. 어깨 주물러 줄까?" 안 부리던 애교까지 부리는 모습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마트를 운영하느라 그제서야 퇴근해온 남편. 손에는 나의 주문대로 삼겹살이 들려 있었다.
“나는 오늘은 저녁 안 먹고 싶어. 당신이 아이들 데리고 같이 삼겹살 구워먹으면 좋겠다.” 라고 말을 했더니, 화를 벌컥 내면서 “먹지도 않을 거면서 뭐 하러 가져오라 했느냐?”면서 자기가 화를 더 낸다.
“그냥 자기가 아이들하고 차려 먹으면 안 되나요?”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나는 이렇게 쏟아 부었다.
“나도 안 먹을 거야.”
남편이 더 화를 내기에 어이없기도 하고 속도 상했지만 아이들 밥은 먹여야 하기에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치는 있었는지 아이들이 수저도 놓고 반찬도 꺼내고 제법 상을 차려 먹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는 남편, 이렇게 될 것을 괜히 건드렸나? 담배를 피러 나갔나?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 데도 안 들어 오는 남편이 슬슬 걱정될 즈음, “삐삐삐.”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마음을 놓고 아무 표정 없이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남편은 주머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더니 삼겹살을 안주 삼아 맛있게 먹는다.
‘아이고 웬수가 따로 없다. 저 인간을 어떻게 해줘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
참 맛있게도 먹는 남편의 입이 그렇게 미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마음만 더 상한 나의 하루가 지났다. 좀체 속마음 드러내지 않는 나지만 너무 속상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흉을 봤다. 돌아오는 말은 “바쁘고 힘든 사람 붙잡고 너는 별걸 다 해 달라 하다”는 핀잔이다. 본전도 못 건졌다. 작은 시누이와 통화할 일이 있어 말 끝에 오빠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면서 “우리 오빠 일 못한다고 시키지 말라”고 한다. 누가 가재는 게 편 아니랄까 봐, 지 오빠편만 들고. 정말 나쁜 시누이다. 마음이 더 우울해졌다.
많은 생각을 해봤다. 왜 이리 내 마음이 심란했을까? 그렇다고 항상 바쁜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 주었던 것도 아니었고, 남편은 그 모습 그대로 있는데 나의 이 복잡한 마음이 남편과 아이들을 힘들게 했나? 이런 또 쓸데없는 천사표 마음과 '아니야 이참에 확실하게 무언가를 남편과 아이들에게 남겨야해!' 이런 복잡한 마음이 싸우고 있는데, 벌써 저녁이 되었다. 퇴근해 들어오는 아빠를 보더니 “엄마, 아빠 아직도 화 났나 봐”라고 한다. “왜” 그랬더니 “다른 때는 들어오시면서 ‘아빠 왔다’ 하며 웃으시는데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표정도 무섭고….” 나름 신경이 쓰였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무거운 분위기로 말없이 밥을 먹고 나니 작은아들 “엄마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해 줄게. 엄마는 편안하게 쉬어” 하더니 열심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방에 들어가 있던 남편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아빠랑 같이 하자” 하며 둘이 설거지를 했다. 센스 있는 우리 작은아들 내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엄마가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다. 엄마 정말 힘들었지? 이제부터는 내가 많이 도와줄게.” 정말 귀여운 녀석이다. 어쩜 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알고 있는지, 옆에 서 있던 남편이 무안해 하면서 작은아이 입을 막는다. 아부성 발언 그만하라고….
다음 날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작은아들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미안했다고, 많이 부끄러웠다고, 앞으로는 열심히 돕겠다고….
이제 우리집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퇴근해 온 남편은 들어오면서 “오늘은 무엇을 도와줄까?” 묻는다. 청소기도 알아서 잘 돌려주고, 화장실 청소도 이제부터는 맡아서 해주기로 했다. 그런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는 반찬 하나라도 더 맛있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나의 반란 같지 않은 작은 반란은 작은아들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7. 네 살 인생(강은미)
33개월.
“엄마 이따 올게. 산이 여기서 놀고 있어.”
“엄마도 같이 있어. 엄마도 같이 있어야지.”
울먹이는 나를 뒤로 하고 엄마가 사라졌다. 동네 이모 집에 가면 엄마도 함께 있었는데 여기는 이모 집이 아닌가 보다. 왜, 엄마는 같이 있지 않은 거지?
“엄마는요?”
“선생님이랑 블록놀이하고 있으면 오실 거야.”
블록놀이를 한다.
“밥 먹자 얘들아.”
“동생들도 혼자 밥 먹네. 강산이도 밥 먹어야지.”
엄마는 밥 안 주고 어디 간 걸까? 숟가락을 들고 먹지 않으니 선생님이 떠먹여 준다. 한 숟가락 먹고 돌아다닌다.
“강산아, 앉아서 먹는 거야.”
엄마가 오셨다.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엄마는 나를 홀로 두고 가셨다. 일주일을 다니고 열이 났다. 똥꼬에 똥이 주르르 나온다. 아프다. 목도 아프고 똥꼬도 아프다.
“수요일까지 나아야 할 텐데….”
엄마가 중얼거린다. 며칠이 지나도 나는 낫질 않는다. 엄마가 급하게 서두르신다. 어린이입니다.
“선생님, 산이가 아직 아픈데. 죄송해요. 제가 갈 때가 있어서요. 늦어도 2시까지 올게요.”
“산아, 미안. 엄마 금방 올게.”
힘도 없다. 조금 울다 그만 둔다. 엄마도 같이 있어야지. 엄마가 오셨다.
“어머님, 산이가 설사를 2번이나 했네요.”
“죄송해요. 선생님.”
병원에 간 나는 링겔을 맞았다.
“내가 미쳤지.”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 밥도 먹고 우유도 먹고 나는 이제 괜찮다.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추석이라 할머니집도 가고 광주 외할머니집도 갔다가 왔다. 이제 나는 아프지 않다.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그런데….
“산아, 어린이집 가야지. 산이 좋아 하는 마이쥬 사줄게.”
“엄마도 같이 있어. 가지 말고.”
“산아, 어린이집에는 엄마는 있으면 안 돼. 친구들도 엄마 없잔아.”
34개월.
“산아, 내일 어린이집 안 울고 가면 기차 사줄게. 고든, 에밀리 뭐 사줄까?”
“몰리랑 머독.”
“하나만.”
“몰리.”
“몰리, 그래 몰리 사줄게.”
몰리는 토마스에 나오는 기차다. 예전에 더운 날, 영주이모가 몰리랑 머독을 줬다. 그런데, 엄마는 그건 준 게 아니라 빌려준 거라서 이모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몰리는 내 손에서 영주이모 손으로 갔다. 나는 그 몰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강산아, 내일도 오늘처럼 울지 말고 오자.”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엄마는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엄마 손을 잡아 당긴다.
“엄마, 몰리는?”
“어? 5번 울지 않고 가야 사준다고 했잖아. 오늘은 1번이야.”
“몰리…. 몰리 사줘.”
엄마는 그 날 달력을 내 눈높이에 달았다.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다.
“산아, 이만큼 동그라미 치면 몰리 사는 거야. 5번, 산이 1번, 2번, 5번 알지?”
“5번.”
“그래 5번.”
엉덩이를 토닥토닥한다.
“엄마, 몰리 왜 안 사줘?”
몰리 사러 가는 날.
5번의 동그라미를 완성한 나는 몰리를 사러가는 길이다. 입에서 노랫소리가 난다. 토마스코너다. 나는 정신이 없다. 토마스에 나오는 롤러 조지와 미니파워 레인저를 샀다.
“산아, 몰리 없으니까 조지 산 거야. 파워 레인저랑.”
“응.”
“엄마랑 밥을 먹고 집으로 간다. 모르는 아저씨에게 오른손에 든 조지를 올리며 웃는다. 아빠에게도 잘 안 보내는 미소를 아저씨께 보내고 있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손가락 네 개를 펼쳐보기도 한다. 엄마 뒤에 숨던 내가 말이다. 입에서 노랫소리가 난다.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엄마.”
“왜?”
“몰리는 왜 안 사줘.”
8.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인자)
“몸 건강하고 잘 지내라.”
아버지의 당부 말씀을 듣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울컥했다. 어머니는 말씀도 못 하신 채 울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를 순간 안아 드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대로 안아 드리지도 못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도 못해 드렸던 것이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꼭 안아 드렸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열심히 살게요. 건강하세요.”
나는 복받쳐 오는 울음을 삼켰다. 태어나서 고향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너무나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 왔다. 출가한 언니들, 오빠도 먼 곳으로 가지 않고 우리 가족은 늘 한 곳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 왔다. 그런데 목회를 하는 우리 가정은 사역지를 경기도 구리시로 갑자기 옮기게 된 것이다. 늘 함께 할 줄 알았던 막내딸이 갑자기 멀리 경기도로 간다니 부모님은 저 먼 나라로 보내는 것만큼 서운하고 가슴 아팠으리라 생각된다. 남편과 나도 타향살이가 처음이라 망설여지고 두렵기도 했지만 언젠가 가야 할 길임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이 곳 구리에 온 지도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왔던 처음과 달리 나는 향수병에 많이 힘들어 했다. 특히 가족이 너무 그리웠고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이 더욱 깊어만 갔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이었지만, 그 시절이 너무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손재주가 좋으셨던 우리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잘 만드시는 분이셨다. 연필깎이가 귀했던 시절, 손수 연필을 예쁘게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넣어 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때 일 때문에 멀리 서울로 올라가신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내려 오실 때 내게 예쁜 빨간 구두를 사 오셨다. 지금도 사진첩에서 빨간 구두를 신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사진을 볼 때면 그때 생각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다. 이처럼 나를 예뻐하시고 따뜻하셨던 아버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오랫동안 몸이 아파서 가정을 돌보지 못하실 때 혼자 모든 것을 맡아 하시며 힘 드셨을 아버지, 그때는 몰랐지만 자식들 몰래 울기도 많이 하셨다 한다.
칠십이 훌쩍 넘는 연세에도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열심히 부지런히 사시는 분,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표현을 잘 하시지 않지만 어머니와 서로를 걱정해 주시며 챙겨 주시고, 의지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젊은 시절 노래도 잘 부르시고 준수한 외모에 말씀도 재미있게 잘 하셨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아버지도 낭만적이고 즐길 줄 아는 분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삶에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시고 어머니와 즐겁고 편안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딸자식으로 해드리는 것 없이 힘들게 사는 모습만 보여 드리지만, 지금처럼 늘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 지켜 봐 주시기 바라는 마음뿐이다.
9. 엄마로서의 다짐(문혜진)
내 딸은 엄친딸이다.
나는 베타맘이다.
많이 무서운 엄마이다.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딸과 나는 무던히도 노력한다. 다행히도 잘 따라와 주는 딸 아이에게도 감사하다. 학원 한 번 보내지 않고, 한문, 영어, 수학, 국어 모든 면에서 뒤지지 않고 잘 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그런데도 가끔 아니 요즘은 우리아이에게 미안해진다. 그러려면 내가 왜 이렇게 엄한 엄마가 되었는지 가족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 나에겐 친정으로는 4남매가 있고, 시댁으로는 나이 어린 형님이 있다.
시댁은 남자 중심의 가정이다. 먼저 결혼한 나는 8살과 4살의 딸들이 있고, 형님네는 7살 아들 쌍둥이가 있다. 따로 있으면 너무도 예뻐해 주시지만, 같이 있을 땐 쌍둥이에 밀려 어느덧 찬밥이 되어버린 딸들에게 미안해 진다. 누나이기에, 딸이기에 “아들 것 뺏지 말고, 울리지 말고, 그냥 줘 버려라.” 시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이다. 하나 있으면 몰래 아들들만 챙겨주시고, 그걸 또 자랑하는 조카들…. 울며 떼쓰는 딸들, 그것이 나의 시댁에서의 하루다.
친정은 좀 특이하다. 아빠의 소원이자 내 결혼의 첫째 조건이 언제든 아빠와 같이 사는 것이었다. 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10년째, 나는 밖에서 4년, 함께 4년을 살았다. 물론 층수는 다르지만 1층, 3층, 4층이다. 그러면서 아이도, 나도, 우리 가족 모두가 변한 것 같다.
나에겐 틱장애를 앓고 있는 조카가 있다. 따로 살 땐 가끔 만나면 지나치게 딸아이를 감싸고 도는 언니가 이상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 딸은 모든 걸 양보하고, 3살인 딸아이가 8살 조카를 이해하고, 양보하고, 모든 걸 속으로 삭히는 것 같았다. 틱장애라는 것이 나는 해도 되고, 남은 하면 안 되고, 화를 냈다가 웃었다가, 짜증을 냈다가 좀처럼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는 것 같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머니나 할아버지 앞에선 자랑도 못하고, 축하해 주고 싶어도 축하해 줄 수가 없었다. 조카 녀석의 짜증과 약간의 폭력성까지…. 하지만 아프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약물치료로 좋아지고는 있지만 따라쟁이인 아이가 조그만 행동이나 말투를 따라 써도, 혹시나 우리 아이도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에게 좀 더 철저하게, 좀 더 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아이와의 타협 끝에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공부는 아침에 한다. 책은 소리내서 동생에게 읽어준다.
둘째, 뭐든 좋아하는,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조건 시켜준다. 단, 끝까지 할 수 잇는 것을 고른다.
셋째, 운동은 무조건 한다. 이것은 딸아이와 관계없이 무조건….
그러나 이 약속도 나에겐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아무튼 자칭 타칭 남들 보기엔 엄친딸이 된 지금 뒤돌아 보면 우리 딸, 사랑하는 내 딸이 의심 많은 엄마 탓에 너무 힘들진 않았나, 하고 싶은 것을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가르치는 아이는 엄마 수준밖엔 안 된다는 말이 있듯, 엄마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겠다.
10. 의자의 뒷모습(황은영)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오늘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정지한 듯 편안해 진다.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미동도 않고 조용히 창 밖만 바라보시던 아버님이 그리워진다. 어린 아들은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걱정스런 눈을 하고 의자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었다. 이제 우리에겐 할아버지를 기억하게 하는 의자의 뒷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항상 밝게 웃으시며 자상하셨던 아버님께서 무표정하고 거친 말과 행동을 보이시며 낯선 분이 되어 가셨다. 그러나 당신께선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으셨는지 홀연히 떠나셨다.
“너희들이 착하다는 것 아는데 불평하고 싸우게 되는 것을 멈출 수가 없구나.”
슬픈 얼굴로 혼잣말처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함께 하는 가족을 지치게 하는 노인성 치매란 병은 가장 무섭고도 슬픈 병인 것 같다. 이런 아버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물론 우리 가족은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서운한 마음 때문에 감정의 골이 생겨 걱정된 마음을 비틀어 버리시는 행동에 남편과 난 감정이 흔들려 당신과도 부딪치는 일이 늘어갔다. 이런 내게 친정 엄마는 ‘요양보호사’를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떠냐며 권하셨고, 이것은 내게 돌파구가 되었다. 사회복지, 간호학, 치매 등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 사례들을 통해 아버님의 노인성 치매 사실이 명확해졌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갈등도 조금씩 풀어져 갔다. 한 정신과 담당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30대 젊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있어 노인성 치매 부모를 모시는 상황은 세대 차이로 인해 그 갈등이 더 심각합니다.”
이 말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답답하게 내리 누르던 마음에서 벗어나, 예전의 아버님으로 대하지 못하는 송구함을 털어 버리고 웃으며 아버님을 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요양원에서 실습할 때의 일이다.
“여보쇼, 여보쇼.”, “배 고파, 배 고파.”, “아파, 아파.”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 하시던 어르신들이 계셨다. ‘이것이 우리 모도의 모습일 텐데.’ 실습하던 우리들은 눈물 지으며 가슴 먹먹해 했었다. 심지어 ‘무엇을 위해 힘겹게 목숨을 이어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이야기할 정도로 가슴 시린 광경이었다. 깡마른 모습의 한 할머니는 음식도 거부하시며 아프다고만 소리 지르고 계셨다. 그런데 그 분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아프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괴로움을 덜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꼭 안고 기도해 드리자 눈물을 흘리시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한 분은 고관절 수술로 인해 누워만 계셔야 하는데 일으켜 달라고 애타게 부르시면서 몸부림치셨다. 결국 안전 때문에 손발이 묶이셨고 욕창 예방을 위해 몸의 위치를 바꾸어 드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요양원이 떠나가도록 신발을 간호사들이 훔쳐갔다며 욕을 하시던 할머님이 계셨다. 사탕 하나에 기뻐하시며 내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시길 좋아 하셨던 그 분은 다음 날이 되면 “새로 왔나 보네.” 하셨다. 아기처럼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90세의 백발의 할머님은 4시간 간격으로 “배 고파”를 외치셨다. 이 분들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혹은 하루였지만, 어쩌면 이 점이 끝이 보이지 않고 가족도 찾지 않는 요양원 생활에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당신께서도 증세가 심해지시면 요양원에 가겠노라 하시며 우리를 걱정하셨고, 그래서인지 곧 떠나버리셨다. 치매로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외롭게 살고 계신 분들을 보면서 아버님을 이해하게 된 내게 빈 자리는 너무 크다. 가혹하리만큼 최악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 아버님과의 좋은 기억들이 많이 남아 있어 감사하다. 지금은 그전에 없던 평화로움과 여유로운 시간들로 넘쳐나지만 아버님께서 의자에 앉아 계시던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