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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광반야바라밀경_20. 다린니품(陀隣尼品)
또한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무엇을 마하연[衍]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4의지(意止)가 이것이다.
무엇을 4의지라고 하는가?
보살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관하고 타인의 몸도 관하고, 안팎의 몸을 관하고 난 뒤에는 몸에 대한 생각[身想]도 없으며, 의지함도 없다.
행동하든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고뇌가 있음을 생각한다.
안의 통(痛)ㆍ의(意)ㆍ행ㆍ법을 관하고, 밖의 통ㆍ의ㆍ행ㆍ법을 관하고, 안팎의 통ㆍ의ㆍ행ㆍ법을 관한다.
행하든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어리석음과 고뇌를 생각한다.
수보리여, 어떻게 보살은 내신행(內身行)을 관하는가?
보살은 스스로 행할 만하면 행할 줄 알고, 머물 만하면 머물 줄 알고, 앉을 만하면 앉을 줄 알고, 누울 만하면 누울 줄 알고, 몸이 행하는 바를 모두 스스로 안다.
이것을 보살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동하든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고뇌를 생각한다.
또 수보리여, 보살은 출입하고 나아가고 멈출 때 침착하고 주의 깊게 하며 망령되지 않게 쳐다보고,
좌우로 앉고 누울 때도 침착하고 주의 깊게 하고 3법의(法衣)를 입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보살은 스스로 안팎의 몸을 관하고, 행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되 의지함이 없다.
보살은 항상 호흡의 출입을 관하며, 호흡이 긴 줄 알며, 호흡이 짧은 줄 안다.
비유하면 도륜(陶輪)과 같아서 그 느리고 급함을 조절한다.
보살은 뜻과 식이 함께여서 함께 나오고 함께 들어감을 스스로 안다.
이것을 보살이 안으로 몸의 행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동하는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어리석음ㆍ괴로움ㆍ환난을 생각한다.
또한 수보리여, 이처럼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항상 몸은 지ㆍ수ㆍ화ㆍ풍의 네 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는 것을 관해야 한다.
비유하면 소를 잡는데 네 부분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살은 몸이 네 가지로 분별됨을 관해야 하며,
근본으로부터 지말[末]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안팎의 몸을 관하는 것이라고 하며, 또한 의지함도 없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몸이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단지 부정(不淨)한 것만 있음을 관해야 한다.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치아와 근육ㆍ뼈ㆍ5장(藏)ㆍ36물(物)에 어떤 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비유하면 농가에 농기구와 오곡이 가득하지만 눈 밝은 선비가 열어 농기구를 분별하여 아는 것과 같다.
보살은 몸을 관하되, 몸 가운데 있는 것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보살이 스스로 안의 몸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동하든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어리석음ㆍ애착ㆍ고통을 생각하며 또한 그것을 의지함도 없어야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사람을 관해야 한다.
처음 죽은 날로부터 닷새가 지나 살이 문드러지고 악취가 나고 신체는 점점 무너져 더러운 물이 줄줄 흘러나오니 깨끗한 곳이 없다.
혹은 날아다니는 새가 쪼아 먹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짐승이 먹기도 한다.
혹은 반을 먹다가 내버리니 보기 흉하게 드러나서 깨끗하지 못하다.
혹은 어떤 죽은 자는 근육과 뼈가 흩어지며 해골에서 피고름이 흐르기도 하다.
어떤 죽은 자는 피와 살점이 이미 다 없어지고 근육과 뼈로 서로 연결되었고 그 가운데 해골이 으스러진 것은 마디마디가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
혹은 죽은지 오래되어 해골이 청백색인 것도 있으며, 혹은 부패하여 파괴된 것도 있으며, 혹은 썩어서 땅과 같은 색이 된 것도 있다.
보살은 모두 이와 같이 관해야 하며, 이와 같이 관한 후에는 도리어 내 몸은 이 법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며 아직 떠나지도 못했으며, 마땅히 그러하리라고 헤아려야 한다.
이것이 보살이 안으로 몸의 법을 관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는 것이며,
의지하여 탐할 것도 없는 것이다.
행동하든 고요하든 항상 세간의 어리석음ㆍ괴로움ㆍ재난과 환난을 생각한다. 스스로 각의법(覺意法)을 관하며,
또한 타인의 각의법도 관해야 한다.
분별하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미혹의 뜻을 끊어야 한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점점 4의단(意斷)1)을 수지하여 나아가야 한다.
무엇이 넷이 되는가?
악의법(惡意法)이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즐겁게 익히고 정진하고 뜻을 섭수하여 생기지 않게 한다.
악의법이 이미 일어났으면 또 즐겁게 정진하고 뜻을 섭수하고 익혀서 끊게 한다.
아직 생기지 않은 선한 일과 법을 가지려면 기쁜 뜻으로 정진하고 익혀서 생기게 한다.
이미 생긴 선한 법의 생각들은 널리 구족하게 나타내어 잊지 않게 한다.
또한 다시 기쁘게 정진하고 익히고 뜻을 섭수하여 나아가면 이루어진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미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4신족(神足)이 이것이다.
무엇이 넷이 되는가?
이미 즐거움의 선정[樂定]을 얻어서 모든 지은 행동을 없애고 신족을 총섭(總攝)한다.
정진의 선정[精進定]으로 모든 지은 행동을 없애고 신족을 총섭한다.
뜻을 지닌 선정[持意定]으로 모든 지은 행동을 없애고 신족을 총섭한다.
지혜의 선정[智之定]으로 모든 지은 행동을 없애고 신족을 총섭한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5근(根)이 이것이다.
무엇을 5근이라고 하는가?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지근(志根)ㆍ정근(定根)ㆍ지혜근(智慧根)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5력(力)이 이것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신력(信力)ㆍ정진력(精進力)ㆍ지력(志力)ㆍ정력(定力)ㆍ지혜력(智慧力)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7각의(覺意)가 이것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지각의(志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법각의(法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정진각의(精進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열희각의(悅喜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신각의(信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정각의(定覺意)를 가지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러한 각의(覺意)를 가졌다는 집착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현성팔품도(賢聖八品道)가 이것이다.
무엇이 여덟 가지가 되는가?
정견(正見)ㆍ정념(正念)ㆍ정언(正言)ㆍ정행(正行)ㆍ정업(正業)ㆍ정습(正習)ㆍ정지(正志)ㆍ정정(正定)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하며, 또한 의지할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3삼매(三昧)가 이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가 되는가?
공삼매(空三昧)ㆍ무상삼매(無相三昧)ㆍ무원삼매(無願三昧)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또 마하연이 있는데 온갖 지혜[慧]를 갖고 있는 일이다.
고혜(苦慧)ㆍ습혜(習慧)ㆍ진혜(盡慧)ㆍ도혜(道慧)ㆍ소혜(消慧)ㆍ무소기혜(無所起慧)ㆍ법혜(法慧)ㆍ명혜(明慧)ㆍ각각지타인소념혜(各各知他人所念慧)ㆍ진혜(眞慧)이다.
무엇을 고혜라고 하는가?
고통을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고혜라고 한다.
무엇을 습혜라고 하는가?
나쁜 습관은 없애고 끊어버리면 이것을 습혜라고 한다.
무엇을 진혜라고 하는가? 모든 고통스런 일들을 모두 소멸하는 것을 진혜라고 한다.
무엇을 도혜라고 하는가?
현성팔품도를 도혜라고 한다.
무엇을 소혜라고 하는가?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모두 다하는 것을 소혜라고 한다.
무엇을 불기혜(不起慧)라고 하는가?
생사를 받지 않는 곳을 불기혜라고 한다.
무엇을 법혜라고 하는가?
5음을 끊을 줄 아는 것을 법혜라고 한다.
무엇을 명혜라고 하는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가 무상하며,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법도 또한 무상한 것을 명혜라고 한다.
무엇을 각각지타인소념혜라고 하는가?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갖가지 생각이 일어나는 바를 모두 다 아는 것을 각각지타인소념혜라고 한다.
무엇을 진혜라고 하는가?
여래의 살운야지(薩云若智)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진혜라고 하며, 또한 의지할 것도 없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또 마하연이 있는데 3근(根)이 이것이다.
무엇을 3근이라고 하는가?
학사(學士)들이 백의(白衣)에서 수다원에 이르기까지의 5근(根)으로 이것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다함에서 아나함에 이르기까지 또한 5근이 있는데 알아야 할 것을 마땅히 아는 것이다.
아라한ㆍ벽지불ㆍ보살에서 부처에 이르기까지에도 또한 5근이 있는데, 이는 이미 알고 있어 다시 배울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3삼매가 이것이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유각유관(有覺有觀)이고, 둘째는 무각유관(無覺有觀)이며, 셋째는 무각무관(無覺無觀)이다.
무엇을 유각유관이라고 하는가?
제1선(禪)을 말하며 이것을 유각유관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각유관이라고 하는가?
제1선에서 2선에 이르지 않는 그 중간에 있으며 이것을 무각유관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각무관이라고 하는가?
제2선에서 무사상무사상혜선(無思想無思想慧禪)에 이르는 것이며 이것을 무각무관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10념(念)이 이것이다.
불념(佛念)ㆍ법념(法念)ㆍ승념(僧念)ㆍ계념(戒念)ㆍ시념(施念)ㆍ천념(天念)ㆍ멸념(滅念)ㆍ안반념(安般念)ㆍ신고념(身苦念)ㆍ사망념(死亡念)이며, 의지할 것은 아니다.
이것을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4선(禪)ㆍ4등(等)ㆍ4무형선(無形禪)ㆍ8유무선(惟無禪)ㆍ9차제선(次第禪)ㆍ부처님의 10종력[佛十種力]ㆍ4무소외(無所畏)이다.
10종력이란 것은 부처님의 몸과 상호에 나타난 신족변화를 말한다.
많은 삿된 무리를 감동시켜서 올바른 곳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첫 번째의 힘이다.
입에서 말하는 것은 온갖 지혜의 위에 있어서 의심 맺힌 것을 열어서 해탈케 하는 것이 두 번째의 힘이다.
뜻이 공의 선정[空定]에 들어가며 청명(淸明)하여 6달(達)하게 되며, 삿된 신[邪神]이 도의 뜻을 요란하게 하여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세 번째의 힘이다.
묵연하여 생각을 끊으며 신족(神足)도 하는 것이 없으며 삼천대천과 일월을 감동시키되 사람에게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지 않는 것이 네 번째의 힘이다.
도의 뜻이 총명하고 슬기롭고 법을 연설하여 포교하니, 시방이 두루 유익하게 되고 각각 그 편안함을 얻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의 힘이다.
온갖 뜻을 거슬러 알고 사람들이 행하는 취향을 깨달아서 묶여 있거나 벗어나거나 빠짐없이 해산시킬 수 있는 것이 여섯 번째의 힘이다.
삼세에 지은 재앙과 복의 근본과 받는 과보를 큰 지혜로써 모두 알며 걸림이 없는 것이 일곱 번째의 힘이다.
일체 인민들의 온갖 행위의 근원과, 각양각색으로 몸을 받는 것이 다른 그 본제(本際)의 인연이 일어난 곳을 모두 깨닫는 것이 여덟 번째의 힘이다.
혜안이 청정하여 통찰하는 바가 무한하여 모든 생사에 왕래하고 떨어짐을 보는 것이 아홉 번째의 힘이다.
큰 지혜는 이미 구족했고, 방편도 이미 갖추었고 생사는 이미 끊어졌고 집착하는 행은 이미 다했고 지은 바를 이미 마쳐서 받지 않는다. 자연히 스승 없는 일체지라고 말하는 것이 열 번째의 힘이다.
4무소외(無所畏)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었을 때 혹은 사문(沙門)이나 바라문, 혹은 마군, 혹은 천(天), 혹은 범(梵), 다른 대중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에게 와서 힐난하는 자가 없으며, 부처님께서는 또한 이러한 뜻을 일으키는 자도 보지 못하신다. 이와 같이 증득했으므로 부처님의 행은 안온하여 두려움이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첫 번째의 무소외이다.
정진을 행해서 최고의 장소를 얻을 줄 알며,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師子吼)를 얻어서 능히 범륜(梵輪)을 굴린다. 모든 사문ㆍ바라문과 모든 천[諸天]ㆍ범(梵)ㆍ마(魔)는 일체의 다른 법을 굴리지 못하고,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굴릴 수 있는 것이 두 번째의 무소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번뇌[漏]를 다했다. 만약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혹은 천ㆍ마ㆍ범이 감히 부처님의 번뇌가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자가 없는 것이 세 번째의 무소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처럼 진실하여 어긋남이 없고 선악의 과보가 행해짐을 잃지 않으며, 일체의 나머지 대중들과 모든 천ㆍ마ㆍ범은 감히 부처님의 말씀이 위배됨을 보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현성팔도(賢聖八道)를 행하면, 득도하고 온갖 괴로움을 제도할 수 있다. 일체의 나머지 무리들과 모든 천ㆍ마ㆍ범은 또한 이 가르침을 위배할 자도 없으며,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러한 곳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 네 번째의 무소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하며 의지함도 없어야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4무애혜(無礙慧)가 이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법의 일을 아니 그 지혜가 걸림이 없고,
모든 경구의 뜻을 아니 그 지혜가 걸림이 없고,
변재로 분별하니 그 지혜가 걸림이 없고,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게 확실하니 그 지혜가 걸림이 없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부처님의 18법(法)을 말한다.
무엇을 18법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는 성불하신 이래로 처음부터 그릇됨이 있을 때가 없었다.
두 번째는 성불하신 이래로 말에 추함이 없었으며 누실(漏失)됨도 없었다.
세 번째는 뜻을 잊어 버린 적이 없었다.
네 번째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없었다.
다섯 번째는 뜻에 선정 아닌 때[不定時)가 없었다.
여섯 번째는 처음부터 다른 것을 관한 적이 없었다.
일곱 번째는 자재함이 줄어듦이 없었다.
여덟 번째는 정진함이 줄어듦이 없었다.
아홉 번째는 지념(志念)이 줄어든 적이 없었다.
열 번째는 지혜가 줄어든 적이 없었다.
열한 번째는 해탈이 줄어든 적이 없었다.
열두 번째는 견해탈혜가 줄어든 적이 없었다.
열세 번째는 일체의 몸으로 행하는 바가 지혜로워서 가장 앞에 있었다.
열네 번째는 입으로 말한 것이 지혜로워서 언제나 앞에 있었다.
열다섯 번째는 뜻으로 행하는 것이 지혜로워서 가장 앞에 있었다.
열여섯 번째는 과거의 일을 보아서 그 지혜가 걸림이 없다.
열일곱 번째는 미래의 일을 보아서 그 지혜가 걸림이 없다.
열여덟 번째는 현재의 일을 보아서 지혜가 걸림이 없다.
이것을 마하연이라고 하며 또한 의지함이 없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 있는데 다린니목거(陀隣尼目佉)가 이것이다.
무엇을 다린니목거라고 하는가?
글자의 무리와 말의 무리가 들어가는 문이다.
무엇을 자문(字門)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아아(阿阿)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와서 들어가지만 일어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두 번째는 라라(羅羅)라는 것인데, 번뇌[垢]의 모양이 모든 법 속에는 어떤 티끌도 없다.
세 번째는 파파(波波)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서 니원이 가장 제일임을 가르친다.
네 번째는 차차(遮遮)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서 생사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다섯 번짼는 나나(那那)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서 모든 글자를 다 마쳤으니, 글자의 본성은 또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
여섯 번째는 라라(羅羅)라는 것인데, 세상을 건너 애정의 가지와 각 인연을 이미 멸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타타(陀陀)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여여해서 단절한 때가 없었다.
여덟 번째는 파파(波波)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이미 지옥을 여의었다.
아홉 번째는 다다(茶茶)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서 번뇌가 이미 다했다.
열 번째는 사사(沙沙)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 걸림이 없다.
열한 번째는 화화(和和)라는 것인데, 모든 법의 언행이 이미 끊어졌다.
열두 번째는 다다(多多)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열세 번째는 야야(夜夜)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진리[諦]여서 생겨남이 없다.
열네 번째는 타타(吒吒)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강한 번뇌를 볼 수 없다.
열다섯 번째는 가가(加加)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조작되는 것을 또한 볼 수 없다.
열여섯 번째는 사사(娑娑)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얻을 때가 없으며, 굴릴 것도 없다.
열입곱 번째는 마마(摩摩)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서는 나를 볼 수 없다.
열여덟 번째는 가가(伽伽)라는 것인데, 모든 법을 수지함을 볼 수 없다.
열아홉 번째는 타타(他他)라는 것인데, 모든 법처를 얻을 수 없다.
스무 번째는 사사(闍闍)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생하는 것도 얻을 수 없다.
스물한 번째는 습파습파(濕波濕波)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선한다는 것은 얻을 수 없다.
스물두 번째는 대대(大大)라는 것인데, 모든 법성(法性)은 얻을 수 없다.
스물세 번째는 사사(赦赦)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적정함을 얻을 수 없다.
스물네 번째는 거거(佉佉)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허공과 같아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스물다섯 번째는 차차(叉叉)라는 것인데, 모든 법이 소멸됨을 얻을 수 없다.
스물여섯 번째는 치치(侈侈)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각각 처한 곳에 있어 동요하지 않는다.
스물일곱 번째는 약약(若若)이라는 것인데, 모든 법의 지혜는 얻을 수 없다.
스물여덟 번째는 이타이타(伊陀伊陀)라는 것인데, 모든 법의 뜻은 얻을 수 없다.
스물여덟 번째는 번번(繁繁)이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한가할 때가 없다.
서른 번째는 거거(車車)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는 가히 버릴 것이 없다.
서른한 번째는 마마(魔魔)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구릉이나 분묘가 없다.
서른두 번째는 파파(叵叵)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분별할 수 없다.
서른세 번째는 차차(蹉蹉)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 사망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서른네 번째는 아아(峨峨)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는 붕당(朋黨)이 없다.
서른다섯 번째는 타타(咃咃)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는 각각 다름이 있어 장소가 있지 않음이 없다.
서른여섯 번째는 나나(那那)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머물지도 않고 또한 앉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며 구별하지도 않는다.
서른일곱 번째는 파파(破破)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삼계에서 불안한 것이다.
서른여덟 번째는 가가(歌歌)라는 것인데, 모든 법성을 얻을 수 없다.
서른아홉 번째는 차차(嵯嵯)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항상함을 얻을 수 없다.
마흔 번째는 차차(嗟嗟)라는 것인데, 모든 법은 분리되어 나가 버리니 얻을 수 없다.
마흔한 번째는 타타(吒吒)라는 것인데, 모든 법에는 제도함이 없다.
마흔두 번째는 노노(嗏嗏)라는 것인데, 모든 법의 변제(邊際)가 다한 곳에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많은 글자가 있지만 노(嗏)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자는 수(數)가 없으며, 또 이 글자를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도 잃지 않으며, 또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설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서사[書]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나타나지도 않는다.
수보리여, 일체 법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문자를 배워 들어가는 것은 모두 다린니에 들어가는 문이다.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 문자의 일을 깨달아 알았다면 언수(言數)에 머물지 않고 곧 말의 지혜를 알 수 있다.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42자(字)가 들어가는 구절을 듣고 인(印)자를 소지하여 풍송(諷誦)하고,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뜻을 해설하여 망령되지 않게 소지하고 독송하면 마땅히 스무 가지 공덕을 얻는다.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첫 번째는 강하게 생각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괴수치의 힘[慚愧羞恥力]을 얻는 것이고,
세 번째는 견고하게 행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네 번째는 깨달아 아는 힘을 얻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변재(辯才)가 있어서 교묘하게 말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다린니(陀隣尼)가 어렵지 않은 힘을 얻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말하는 바가 급하지 않은 일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끝내 경에 대해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아홉 번째는 선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고, 악을 듣고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열 번째는 또 스스로 높이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낮추지도 않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나아가고 멈출 때 침착하고 주의 깊게 하여 위의를 잃지 않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5음(陰)과 6쇠(衰)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열세 번째는 4제(諦)와 12연기를 잘 아는 것이다.
열네 번째는 인연의 일을 잘 아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법혜를 잘 알아 능히 모든 감관[根]을 만족하게 갖추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타인의 생각하는 바 길흉의 인과응보를 아는 것이다.
열일곱 번째는 천이(天耳)로 명확하게 들으며, 스스로 숙명을 아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는 중생이 생하는 바를 잘 아는 것이다.
열아홉 번째는 능히 모든 번뇌[漏]를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스무 번째는 왕래하는 곳곳마다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다린니문이고 자문(字門)이고,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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