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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
청분계는 안동지역의 유림들이 조선 초의 문신이자 청백리인 응계 옥고(凝溪 玉沽, 1382~1436)선생과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1517)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갑신(2004)년 봄에 입안(立案)한 유계이다. 높은 인품과 학문으로 후세의 사표가 된 두 분 선생은 안동의 묵계서원(黙溪書院)에 제향되어 있으며, 계의 명칭인 청분(淸芬)은 맑은 향기를 이르는 말로 선생의 ‘맑고 향기로운 덕행’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인 묵계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지역 사림의 공의(公議)로 창건되었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설하지 못하다가 1998년 봄에 보백당의 창손(鬯孫)인 김주현(金冑顯)씨가 완전하게 복원하여 두 분을 다시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계의 설립은 복설 6년 후 김주현씨가 길안 서원현황을 설명하고자 복설봉안고유시에 협조한 제유(諸儒)를 서원으로 초청하였는데, 이때 회중(會中) 상석(上席)에서 선생의 학덕을 흠앙하는 청분유계가 발론(發論)되었다. 이어서 공의로「유안절목(儒案節目)」을 만들고 약간의 성납전(誠納錢)을 거두어 후일을 기약하였으며, 2005년 5월 5일 묵계서원에서 정기총회를 가졌다.
계의 추모대상 가운데 한 분인 응계 옥고선생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자(字)는 대수(待售)이다. 사미(斯美)의 둘째 아들로 김해 부(府) 남산리(南山里)에서 태어나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8세인 1399년(정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과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등을 거쳐 1408년(태종 8) 대구군수(大邱郡守), 1420년(세종 2) 집현전의 설치와 함께 재행이 있다하여 교리에 선보(選補)되었으며, 사간원정언․예조정랑․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할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았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또 한 분인 보백당 김계행선생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취사(取斯)이다.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공(太師公, 宣平)의 후손으로 비안현감을 지낸 삼근(三近)의 차자(次子)로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現 안동시 풍산읍 하리)에서 출생하였다. 10세 때 학문에 입문하여 17세 때 진사가 되고 1461년(세조 7) 동당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후 여러 고을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교수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는 김종직과 교유하면서 주역과 근사록 등을 강론하였다.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고령현감․홍문관부수찬․교리․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대사간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여러 번 사퇴와 출임(出任)이 반복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시정의 잘못을 소(疏)하였으나 회답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집 곁에 작은 서재를 지어 편액을 보백당(寶白堂)이라 하였다.
무오사화(1498년) 때는 김종직과 교분이 두터웠던 까닭으로 국청(鞠廳)에 불려가 모진 심문과 함께 태형(笞刑)을 받기도 하였다. 옥(獄)에서 풀려난 뒤 곧이어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00년(동 6) 앞서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고 다섯 달 만에 풀려나 풍산으로 낙향한 후 그 이듬해에는 한적하고 풍광(風光)이 수려한 묵계촌으로 이거하여 만휴정(晩休亭)에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706년(숙종 32) 묵계서원에 제향되었고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홍문관 예문관 양관대제학(弘文館藝文館兩館大提學)으로 증직되었다. 또 충효청백리(忠孝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정헌(定獻)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문집으로 『보백당실기(寶白堂實紀)』4권 2책이 있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현재『청분계첩(淸芬稧帖)』에는 풍산인(豊山人) 류단하(柳端夏)를 비롯한 지역 유림 88인의 성명과 자(字)․생년․본관․사는 곳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계원들의 성씨를 보면 모두 24개 성씨가 수계에 참여하였는데, 이 가운데 보백당의 일가․후손인 안동 김씨가 30인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 뒤를 이어 광산 김씨 7인, 의성 김씨 6인, 전주 류씨가 5인이다. 그리고 순흥 안씨․재령 이씨․진성 이씨가 각각 4인이고, 고성 이씨․안동 권씨․의령 옥씨․풍산 류씨가 각각 3인이며, 그 외 2인 이하로 구성되어있다.
계원의 가입은 2004년 계를 입안할 때 참석한 35인이 계첩에 올랐으며, 그 해 동짓달에 보백당을 기리는 불천위제사 때 11인이 추입되었다. 2005년에는 모두 25인이 입계하였는데, 정기총회 때 8인․당회 때 2인․향사 때 9인․불천위제사 때 6인이다. 2006년에는 향사 때 16인이 가입하였고, 2007년에는 정기총회 때 1인이 입계하였다. 계원의 자격은 유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가의 후예로서 본 서원의 임원(任員)을 맡은 분으로 하고 있으나 수계(修契)의 취지가 두분 선생을 추모하는 것에 있으므로 소임(所任)을 맡지 않은 분의 가입도 가능하다고 한다.
2) 운영
계의 운영은 마련된 계칙이 없어 제반문제는 정기총회 때 계원들이 협의하여 결정하고, 사소한 문제는 임원진에서 논의하여 진행한다.
임원구성은 계장(契長)격에 해당되는 도유사 1인과 계무를 수행할 유사 2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유사와 유사는 2006년에 선임하였으며 임기는 1년으로 정했으나 형편상 2년마다 교체하는 것으로 하였다. 초대 도유사는 하회 충효당의 종손인 류영하(柳寧夏)씨가 선출되었고, 초대 유사로는 이종남(李鍾南)․김재동(金宰東)씨가 선임되었다.
계의 재정 상태를 살펴보면 2007년 4월말 기준으로 수입이 3,508,973원이었으나 이 가운데 1,711,910원이 지출되어 1,797,063원의 계금이 남아있다. 수입금은 신입계원이 낸 가입비가 1,820,000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다음은 협찬금이다. 협찬금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1,000,000원, 의령 옥씨 문중에서 500,000원, 본손 회의시 협찬한 180,000원을 합해 모두 1,680,000원이다. 지출은 정기총회 때 중식대와 장보기․다과상마련 명목 등으로 1,058,130원이 사용되었고, 우송료와 계첩제작 따른 기타 경비로도 적지 않은 돈이 지출되었다.
정기총회일은 양력 5월 5일을 정일(定日)로 하였으나 사정에 따라 개최 시기를 하루 이틀 늦출 수도 있다. 모임의 장소는 도유사가 원칙적으로 본 서원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정하였으나 사정에 따라서는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다. 첫 정기총회는 2006년 5월 5일 본 서원에서 열렸는데 계원들은 이날 오전 11시에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 사당인 청덕사(淸德祠)에서 알묘례(謁廟禮)를 올린 후 회의를 열어 안건을 논의하였으며, 회의 후에는 점심을 먹고 파회하였다고 한다.
3. 기타
1) 淸芬稧帖序
修稧所以同志之誼合也門徒而爲師後學而尊賢同庚而厚誼風猷而共樂其旨各殊然究其義則同其志而厚
其誼者也恭惟我凝溪玉先生以李輯世宗朝廉直儒賢通判本府而崇文尙學之遺澤有文翁之化置塾於默溪
定獻公寶白堂金先生以成宗朝淸德名賢立朝數十年間歷敭三司要職非惟安金氏中顯之祖實是其鄕先覺
眞儒其淸直剛毅之性不合放亂政昏迷之世以難進易退之想翻然歸曾占之默溪之庄建書堂而養後進爲樂
於乎兩先生所蘊展布之旨同軌而相符其於敎化之功大矣而至于今安東稱鄒魯之鄕者有賴兩先生遺化之
效審矣往在肅廟年間士林追慕兩先生而建廟合祀尋昇書院而列享俎豆之非但後生崇奉之所絃誦不絶爲
養士之道場者數百年之間運値陽九高宗戊辰因甲見撤而芬苾肅淸之地變爲燕麥蓬蒿之場者且經百餘年
矣不禁雲仍士林之茹恨行路之嗟歎天運循環光復後雖見復享之擧然尙不無施設修治未備之恨矣寶白堂
鬯孫胄顯甫慨然有完修之忱血誠幹旋南修仙莊臺而建亭西成松柏林而造景環境一新韻致之勝倍加於前
日矧者思不匱之肖孫也事旣訖廣速關儒生而設祝宴于立敎堂宴酣之際厓老胄孫柳康叔慶爲本院修稧之
論無異論而事成焉時維甲申晩春參席者百餘員矣稧名爲淸芬者蓋追慕兩望淸德遺芬之意也事訖衆議以
余齒先之由要帖頭之文目顧無似所難當之寄然端夏之追仰兩先生之忱不後於人且忝外裔之地不可以昏
筆不文不得終辭敍之顚末如右望須僉彦銘心始發之意克遂有終之美不負先賢遺風有補於化風成俗則修
稧之義有以也而本院幸甚斯文幸甚
民國八六年甲申春 稧末 豐山 柳端夏 謹序
청분계첩서
수계란 뜻을 같이하는 정의를 합하는 것이다. 문도들이 스승을 위하여, 후학들이 형인을 높이 받들고자, 동년배들끼리 정의를 두텁게 하기 위하여, 풍류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 요지는 각각 다르나 그 의리를 구하는 것은 같은 것이니 그 뜻을 같이하고 그 정의를 두텁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응계 옥선생은 이조 세종조의 청렴하고 곧은 유현으로 안동 본부의 통판을 지냈다. 문을 받들고 학문을 숭상한 은택을 남겼고, 문옹의 교화에 힘입은 바 있어 묵계에 사숙을 설립하였다.
정헌공 보백당 김선생은 성종조의 청아한 덕으로 이름 높은 명현으로 조정에 출사한 수년간 삼사이 요직을 두루 선양하였으니 비단 안동김씨문중의 현달한 조상일 뿐만은 아니다. 진실로 이는 향토의 선각자적인 참선비였으며 그 맑고 곧으며 강직하고 의로운 성품은 난리가 남무하고 정국이 혼미했던 시대와는 부합되지 않아 나아가기는 어려워도 물러나는 것은 쉽다는 생각에 홀연히 햐이로 돌아 왔다. 일찍이 묵계에 터를 점지하여 서당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두 선생의 쌓고 전개하여 베풀었던 가르침은 궤를 같이 하였으며 그 교화의 공적이 서로 부절을 맞춘 듯이 부합된 점이 매우 크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안동을 추로지향이라 일컫는데는 두 선생이 남긴 교화의 효험에 힘입은 사실은 분명한 일이다.
지난 숙종년간에 사림에서 두 선생을 추모하고자 사당을 세워 함께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이곳은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곳일 뿐만 아니라 후생들이 높이 받들어 모시며 학문을 탐구하는 바가 끊이지 않아 선비를 양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수백 년간에 그 운명이 쇠퇴하여 고종 무진년에는 강제로 훼철되는 지경이 되었으니 향기롭고 깨끗한 땅이 보리밭이며 쑥대밭으로 변해버린지 또 백여 년이 지났다. 그 후손된 자로서 사림은 커다란 한을 품고 길가던 사람들도 탄식을 금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운이 다시 돌아 광복 후에 비록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 시설하고 수리하는데 미비한 한이 없지 않다.
보백당의 주손 주현이 크게 개탄하여 정성으로 완전하게 수리하고 혈과 성을 다하여 주관하여 남쪽 선장대에 정자를 세웠으며 서쪽으로는 송백림을 조성하여 조경하니 그 환경이 일신하여 그 운치의 뛰어남이 전날보다 배가되었다. 하물며 효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 후손들이겠는가.
일을 마치고 나서 넓고 신속하게 관련 유생들에게 알리고 입교당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즐기게 된 차제에 서애의 주손 류강숙이 본원의 수계를 설립하자는 의견을 내 놓음에 아무도도 이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 일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갑신년 늦은 봄에 백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계명을 청분으로 하였으니 이는 양현의 청덕이 향기를 추모하자는 뜻이다. 일을 마치고 모두의 뜻으로 나에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첩의 머릿글을 청함에 스스로 돌아보니 내 자질이 부족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나의 두 선생을 추앙하는 정성만은 남 에게 뒤지지 않고 또 외후손의 처지에 있어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어서 오른쪽과 같이 그 전말을 적으니 모름지기 여러분들은 마음에 새길지어다.
처음 뜻을 발현한 것으로부터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으니 선현의 유풍을 저버리니 말고 그 교화의 바람에 도움을 받아 좋은 풍속을 이루자는 것이 수계의 뜻이 있음이니, 이는 본원의 커다란 행운이요 유림의 커다란 행운이다.
민국 86년 갑신년 봄
계말 풍산 류단하 근서
2) 淸芬儒稧序文
安東은 嶺南의 雄府로 地靈이 明美하고 人傑은 淵藪를 이루었다. 名公巨卿과 鴻儒碩德이 잇달아 輩出되어 禮樂文物이 나라 안의 으뜸이라 사람들은 鄒魯之鄕이라 일컬었다. 이곳 仙巷名區는 淸淨한 山水와 名儒의 叢林으로 손꼽혀 東南의 冠冕이요 洞壑의 窈窕明爽함은 高士들의 潛心黙會하기에 넉넉하다. 여기 由緖깊은 黙溪書院은 凝溪 玉先生과 寶白堂 金先生을 禮享하는 곳이다.
삼가 살피건대 國初名宦 凝溪先生은 吉冶隱先生의 門下에서 經學과 理學을 傳授받았다. 일찍이 安東判官으로 廉潔自守하여 遺澤餘韻이 江山에 스며있고, 昭代名臣 寶白堂先生은 佔畢齋 金先生과 同庚師友로 學問을 講論하였으며 言官으로서 正義를 위해 論駁하니 大小臣僚들은 敎化의 風威를 우러렀다. 晩年에는 黙村에 退休하여 吾家無宝物이요 宝物唯淸白의 遺訓을 남겨 後人의 師表가 되었으며 高風卓節의 남은 薰芬이 綿綿한 곳이다. 이에 兩先生의 遺芬餘馥을 仰慕하던 士林의 通議로 物色景觀이 아름다운 壼潭위에 立敎 克己 挹淸 -進德의 樓堂을 짓고 淸德祠를 세워 幷享하게 되었다. 비로소 春秋禮享과 絃誦으로 尊賢養士의 講場이 되었으나 天運이 無常함이라 設享後 百六十餘年이 지난 高宗 辛未에 國禁으로 撤祠하게 되니 後學은 愴感한 心懐를 禁하지 못하고 裔孫은 寓慕의 곳을 잃었다.
居然한 歲月 百二十有七年이 지난 戌寅年 봄에 金先生의 鬯孫 原任 敎育道伯 金胃顯氏가 賢士들의 뜻을 모아 物心의 精誠을 다하여 復院하고 鄕道士林의 告由가 있었다. 堂室과 宮墻이 華美하지 않고 古規를 지켰으니 어찌 守分하고 儉約한 선비의 精神이 아니겠는가. 六年이 經過한 甲申年 暮春節에 本院堂會가 열렸으며 뜻 높은 長少望士가 束帶列坐하였으니 道遠 世衰한 오늘날의 盛事라 아니할 수 없다. 崇賢尙古의 俊整한 公論이 敦定되고 金氏一家의 仙莊世稿 刊行의 頌祝도 함께 이루어지니 진실로 百世風敎의 韻致를 남겼다. 會中上席에서 先生의 淸標한 學德을 欽仰하는 淸芬儒稧가 癸論되고 朝坐의 公議 또한 欣然하여 儒案節目을 別成하고 若干의 誠納錢으로 後日을 期約하였다.
嗟呼옵다 先生의 體香이 서린 듯한 堂中에서 先生의 道를 講明하고 好學向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은 僉君子의 바람일 것이다. 散會에 즈음하여 弁言의 役을 昌會에게 下囑함이라 稧末의 所任이 아닌 줄 알면서도 士林과 賢裔의 追遠之誠에 慕化되어 삼가 옷깃을 여미고 위와 같이 敍述한다. 다만 盡美한 일이라 後學들의 많은 參與를 바란다.
二OO五年 乙酉 元月 上弦 光復後 再乙酉 元月 上弦
後學 安東 金昌會 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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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분계의 유림들은 음력1월6일 정알행사와 음력8월5일 서원향사를 주관하고, 서원관리및 서원정기총회는 양문중에서 음력1월6일 정알행사후 실시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