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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14권
6. 오법품 ④
[5해탈처](2)
또 구수여, 모든 필추와 필추니 등이 비록 큰 스승이나 혹은 어느 한 높으신 지혜가 있고 범행을 같이하는 이가 그를 위하여 법요를 설하는 것도 없고, 또한 큰 음성으로써 일찍이 들었던 대로의 구경의 법요를 독송하지도 않으며,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일찍이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를 널리 설하고 열어 보이지도 않고, 또한 혼자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일찍이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의 모든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리며 관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한 선정[定]의 모양을 잘 취하여 그 선정의 모양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또 환히 알고 또 잘 통달한다고 하자.
여여하게 어느 한 선정의 모양을 잘 취하여 그 선정의 모양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또 잘 환히 알며 잘 통달할 적에는 이러이러하게 그 법요에 대하여 법과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이니, 법과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앎으로 말미암아 곧 기꺼워하게 되고, 기껍게 여기기 때문에 기쁨을 내며,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가뿐해지고, 몸이 가뿐해지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고 보며, 사실대로 알고 보기 때문에 싫증을 내고, 싫증을 내기 때문에 여의게 되며, 여의기 때문에 해탈하게 되나니, 이것을 제5의 해탈하는 곳이라 한다.
이 모든 필추와 필추니 등은 이곳에 편안히 머물러서 기억이 아직 머무르지 못한 이면 바른 기억에 머무르게 되고,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이면 바른 선정에 머무르게 되며,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이면 모든 번뇌를 다하게 되고, 아직 가장 안온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 이면 그것을 증득하게 된다.
이 가운데서 ‘큰 스승이나 혹은 어느 한 높으신 지혜가 있고 범행을 같이 하는 이가 그를 위하여 법요를 설한다’라고 하였다.
[문] 큰 스승[大師]이란 어떤 이인가?
[답] 곧 모든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을 말하여 ‘큰 스승’이라 한다.
[문] ‘높으신 지혜가 있고[有慧]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란 어떤 이인가?
[답] 해교진나(解憍陳那:阿若憍陳如)와 마승(馬勝:阿說示)과 현승(賢勝:跂提)과 무기(霧氣:波濕波)와 대명(大名:摩訶男)과 야사(耶舍)와 원만(圓滿:富樓那彌陀羅尼子)과 무구(無垢:毘摩羅)와 묘비(妙臂:莎波手)와 우주(牛主:憍範鉢提)와 사리자(舍利子)와 대채숙씨(大採菽氏)와 대가섭파(大迦葉波)와 대겁비나(大劫庀那)와 대영구씨(大營搆氏)와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와 대집장(大執藏)과 대선현(大善見)과 대로(大路)와 수순(隨順)과 무멸(無滅)과 욕락(欲樂)과 금비라(金毘羅) 등이니, 모두가 높으신 이로서 ‘지혜가 있고 범행을 같이하는 이’라 한다.
[문] ‘법(法)’이란 어떤 것인가?
[답] 명신(名身)과 구신(句身)과 문신(文身)이니, 이것을 바로 법이라 한다.
곧 앞의 큰 스승과 높으신 지혜가 있고 범행을 같이하는 이가 모든 명신과 구신과 문신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하고 시설(施設)하며 건립(建立)하고 열어 나타내며, 분별하고 명료하게 하며, 열어 보이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들을 위하여 법요를 설한다’라고 한다.
‘여여하게 큰 스승이거나 혹은 어느 한 높으신 지혜가 있고 범행을 같이하는 이가 그들을 위하여 법요를 설할 적에는 이러이러하게 그 법요에 대하여 법과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안다’라고 하는데,
[문] ‘법과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안다’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명신과 구신과 문신을 법이라 하며 그는 이 법에 대하여 평등하게 알고 가까이하며 똑똑하게 알고 품류(品類)의 차별을 통달하며,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는 지혜[無二無退轉智]를 얻었기 때문에 법을 바르게 분명히 안다고 한다.
[문] ‘뜻[義]을 바르게 분명히 안다’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명신ㆍ구신ㆍ문신이 나타내는 것과 알 것과 설할 것과 두루 설할 것과 보일 것과 평등하게 보일 것과 열 것을 뜻이라 하며, 그는 이 뜻에 대하여 평등하게 알고 가까이 알며, 똑똑하게 알고 품류의 차별을 통달하며,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는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것을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안다’라고 한다.
‘법과 뜻을 분명히 알므로 곧 기꺼워하게 된다’라고 함은,
맨 처음에 일어나는 기쁨을 기꺼워한다[欣]고 하며, 그는 이 기꺼움이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움직이고 나타나 움직이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기를 ‘곧 기꺼워하게 된다’라고 한다.
‘기껍게 여기기 때문에 기쁨을 낸다’라고 함은,
상품(上品)의 기꺼움이 움직이는 것을 바로 기쁨[喜]이라 하며, 그는 이 기쁨이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움직이고 나타나 움직이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기를 ‘기껍게 여기기 때문에 기쁨이 생긴다’라고 한다.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가뿐해진다’라고 함은,
그는 기껍게 여김으로부터 마음에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몸의 묵직한 성품[重性]이 끊어지고 마음의 묵직한 성품도 끊어지며, 몸이 감당해 냄이 있고 마음도 감당해 냄이 있으며, 몸이 매끄럽고 마음도 매끄러우면서 몸이 가뿐해지고 마음도 가뿐해지는지라 몸은 덮개[蓋]를 여의고 마음도 덮개를 여의며, 몸에는 게으름이 없고 마음에도 게으름이 없으며, 몸에 고달픔이 없고 마음에도 고달픔이 없게 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가뿐해진다’라고 한다.
‘몸이 가뿐해지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함은,
몸이 감당해 냄이 있고 마음도 감당해 냄이 있으며, 나아가 몸에 고달픔이 없고 마음에도 고달픔이 없기 때문에 몸에는 곧 즐거움이 있게 되고 마음에는 묘한 기쁨을 느끼게 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몸이 가뿐해지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한다.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된다’라고 함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피로와 권태를 멀리 여의게 되고, 피로와 권태가 없는 법이 평등하게 행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게 되며, 한 군데로 나아가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된다’라고 한다.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고 본다’라고 함은,
그는 만일 어느 때에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면서 둘이 없고 움직임도 없게 되면 그때에는 괴로움[苦]에 대하여 사실대로 괴로움을 알고 보며, 괴로움의 원인[集]ㆍ괴로움의 소멸[滅]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고 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고 본다’라고 한다.
‘사실대로 알고 보기 때문에 싫증을 낸다’라고 함은,
그는 만일 어느 때에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을 사실대로 알고 보며, 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사실대로 알고 보면 그때에는 5취온(取蘊)에 대하여 곧 싫증과 헐뜯음과 거역을 하며 머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사실대로 알고 보므로 싫증을 낸다’라고 한다.
‘싫증을 내기 때문에 여의게 된다’라고 함은,
만일 어느 때에 5취온에 대하여 싫어하고 헐뜯고 거역을 하며 머무르게 되면 그때에는 곧 탐냄[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의 세 가지 선근(善根)이 아닌 것을 능히 손상하고 엷게 하고 점차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노란 옷[黃衣]을 물에 담갔다가 햇빛에 놓아두면 염색(染色)이 빨리 날아가는 것처럼,
만일 어느 때에 5취온에 대하여 싫어하고 헐뜯고 거역을 하며 머무르게 되면 그때에는 곧 세 가지 선근이 아닌 것을 능히 손상하고 엷게 하고 점차로 줄어질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싫증을 내기 때문에 여의게 된다’라고 한다.
‘여의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라고 함은,
그는 만일 때에 세 가지 선근이 아닌 것을 손상시키고 엷게 하고 점차로 줄어지게 할 수 있으면 그때에는 곧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대하여 마음에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여의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라고 한다.
‘이것을 제1이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漸次)와 순차(順次)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數)로 첫 번째가 된다.
[문] ‘해탈하는 곳[解脫處]’이라 하는데, 이 가운데서는 어떤 것을 해탈하는 곳이라 하는가?
[답] 이 가운데서는 일곱 가지 법을 해탈하는 곳이라 한다.
첫째는 법을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이요,
둘째는 뜻을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이며,
셋째는 기꺼워하는 것이요,
넷째는 기뻐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가뿐해지는 것이요,
여섯째는 즐거운 것이며,
일곱째는 안정되는 것이다.
‘모든 필추와 필추니 등’이라 함은, 배울 것이 있는 이[學]로서 무간도(無間道)를 이끌 수 있는 이들을 곧 여기서는 ‘필추와 필추니 등’이라고 말한다.
‘이곳에 편안히 머물러서[安住]’라 함은, 이곳에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이곳에 편안히 머물러서’라고 한다.
‘기억이 아직 머무르지 못하는 이면 바른 기억[正定]에 머무르게 된다’라고 함은, 4정려(靜慮)에 머무르는 것이다.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이면 모든 번뇌[諸漏]를 다하게 된다’라고 한다.
[문] 모든 번뇌란 어떤 것인가?
[답] 세 가지 번뇌[三漏]가 있나니,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그는 이 세 가지 번뇌를 능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고 두루 다하며, 현재에 다하고 장차에도 다할 것이며 속히 다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이면 모든 번뇌를 다하게 된다’라고 한다.
‘아직 최상의 안온한 열반[無上安穩涅槃]을 얻지 못한 이면 빨리 증득하게 된다’라고 함은,
모든 애욕이 다하여[愛盡] 여의고[離] 사라진[滅] 열반을 말하여 최상으로 안온한 열반이라 하는데, 그는 이것을 빨리 얻고 따라 얻으며 접촉하고 증득하게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아직 가장 높은 안온한 열반을 얻지 못한 이면 빨리 증득하게 된다’라고 한다.
‘큰 음성으로써 일찍이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究竟法要]를 독송한다’라고 함은, 광대한 음성으로써 먼저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를 독송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위하여 일찍이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를 널리 연설하면서 열어 보인다’라고 함은,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를 널리 연설하고 시설하며 건립하고 열어 밝히며, 분별하고 똑똑히 알게 하며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혼자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일찍이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에 있는 모든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리며 관찰한다’라고 함은, 혼자 고요한 데에 있으면서 먼저 들었던 대로 구경의 법요에 있는 모든 이치를 생각하고 두루 생각하며, 간택하고 두루 간택하며, 관찰하고 두루 관찰하는 것이다.
‘어느 한 선정의 모양[定相]을 잘 취하고 그 선정의 모양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또 잘 환히 알며, 다시 잘 통달한다’라고 함은, 선정과 선정의 모양을 잘 취하며, 그 선정의 모양에 대하여 들어가고[入] 머무르고[住] 나오는[出] 모양을 잘 생각하고, 또 잘 환히 알며 다시 잘 통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5근]
5근(根)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신근(信根)이요, 둘째는 정진근(精進根)이며,
셋째는 염근(念根)이요, 넷째는 정근(定根)이며,
다섯째는 혜근(慧根)이다.
이 5근의 모양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5력]
5력(力)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신력(信力)이요, 둘째는 정진력(靜進力)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요, 넷째는 정력(定力)이며,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다.
[문] 신력(信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여래께 대하여 청정한 믿음을 닦고 심어 뿌리가 나서 편안히 머무르며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혹은 하늘ㆍ악마ㆍ범(梵)이나 혹은 그 밖의 세간에서 법답게 이끌리거나 빼앗기지 않는 것이니, 이 믿음의 힘을 신력이라 한다.
[문] 정진력(精進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이미 생긴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에 대하여 영원히 끊기 위하여 욕(欲)을 내어 다잡아 격려하며 나아가 더 자세히 설명하면 4정단(正斷)이니, 이 정진하는 힘을 정진력이라 한다.
[문] 염력(念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안 몸[內信]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며 나아가 더 자세히 설명하면 4념주(念住)이니, 이 기억하는 힘을 염력이라 한다.
[문] 정력(定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여의며 나아가 더 자세히 설명하면 4정려(靜慮)이니, 이 선정의 힘을 정력이라 한다.
[문] 혜력(慧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이것이 곧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이것이 곧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이것이 곧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이것이 곧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行聖諦]이다’라고 사실대로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 지혜의 힘을 혜력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힘[力]이라 하는가?
[답] 이와 같은 힘을 인(因)으로 하여 이와 같은 힘에 의거하고 이와 같은 힘에 머물러서 온갖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을 모두 끊고 자르고 꺾고 누르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5불환]
5불환(不還)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중반열반(中般涅槃) 보특가라(補特伽羅)요, 둘째는 생반열반(生般涅槃) 보특가라며,
셋째는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 보특가라요, 넷째는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 보특가라며,
다섯째는 상류(上流) 보특가라이다.
[문] 어떤 이가 중반열반(中般涅槃) 보특가라(補特伽羅)인가?
[답] 어떤 모든 보특가라는 곧 현재의 법에 있어서 이미 5순하분결(順下分結)은 끊었으나 5순상분결은 끊지 못했으며,
짓는 것[造作]이 더욱 자라면서 이숙(異熟)의 업(業)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그는 색계천(色界天)의 중유(中有)를 일으킨 뒤에 곧 이와 같은 무루도(無漏道)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結]를 끊고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이니, 이런 이를 중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중반열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이 보특가라는 근기[根]가 극히 날래면서 날카롭고 번뇌[結]는 극히 미미하고 엷은지라 이미 욕계를 초월했으면서도 아직 색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그 중간[中]에 곧 이와 같은 무루도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기 때문에 중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문] 어떤 이가 생반열반(生般涅槃) 보특가라인가?
[답] 어떤 모든 보특가라는 곧 현재의 법에 있어서 5순하분결은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면서도 5순상분결은 아직 끊지도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였으며,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는 저 색계천에 태어나게 되는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난 뒤에는 아직 오래지 않아서 곧 이와 같은 무루도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이니, 이런 이를 생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생반열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이 보특가라는 겨우 나자마자[生] 오래지 않아서 곧 이와 같은 무루도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기 때문에 생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겨우 태어나자마자 오래지 않아서 곧 이와 같은 무루도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게 되며,
이로부터 이후에는 수명이 다하도록 머무르다가 비로소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경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생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이가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 보특가라인가?
[답] 모든 보특가라는 곧 현재의 법에 있어서 5순하분결은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면서도 5순상분결은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하게 알지도 못하며,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그는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그곳에 태어나서는 뒷날에 행이 있는 도[有行道]에 의거하여 힘씀이 있는[有勤] 행(行)과 힘씀이 있는 작의(作意)로써 가행도(加行道)를 닦아서 쉬지 않으며,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이니, 이런 이를 유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유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이 보특가라는 행이 있는 도에 의거하여 힘씀이 있는 행과 힘씀이 있는 작의로써 가행도를 닦아서 쉬지 않으며,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기 때문에 유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보특가라는 유위(有爲)의 연(緣)의 선정[定]에 의거하며,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기 때문에 유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이가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 보특가라인가?
[답] 모든 보특가라는 곧 현재의 법에 있어서 5순하분결은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면서도 5순상분결은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도 못하며,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그는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뒷날에 행이 없는 도[無行道]에 의거하여 힘씀이 없는[無勤] 행과 힘씀이 없는 작의(作意)로써 가행도를 닦아서 쉬지 않으며,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경계에 들어가나니, 이런 이를 무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무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이 보특가라는 행이 없는 도에 의거하여 힘씀이 없는 행과 힘씀이 없는 작의로써 가행도를 닦아서 쉬지 않으며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기 때문에 무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보특가라는 무위(無爲)의 연(緣)의 선정[定]에 의거하여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고 무여의열반의 경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행반열반 보특가라라 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이가 상류(上流) 보특가라인가?
[답] 모든 보특가라는 곧 현재의 법에 있어서 5순하분결은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면서도 5순상분결은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며,
나아가 뒤섞여 닦는 세속의 제4 정려(靜慮)에 실제로 들어 있다가,
장차 목숨을 마치려 할 적에는 세 가지 정려에서 물러나 초정려(初靜慮)에 머무르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저 색계천의 중유(中有)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범중천(梵衆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의 그 뒷날에는 세속의 제2 정려에 실제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 그 뒷날에는 세속의 제3 정려에 실제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다.
이곳에서 난 뒤 그 뒷날에는 세속의 제4 정려에 실제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광과천(廣果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 그 뒷날에는 하품(下品)으로 뒤섞여 닦는 제4 정려에 실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무번천(無煩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 그 뒷날에는 중품(中品)으로 뒤섞여 닦는 세속의 제4 정려에 실제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무열천(無熱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 그 뒷날에는 상품(上品)으로 뒤섞여 닦는 세속의 제4 정려에 실제로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선현천(善現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에는 으뜸가고도 뛰어난 품[上勝品]으로 뒤섞여 닦는 세속의 제4 정려에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선견천(善見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에는 상상품(上上品)으로 가장 지극하고 원만하게 뒤섞여 닦는 세속의 제4 정려에 들어가며,
죽음에 임할 때는 짓는 것이 더욱 자라서 이숙의 업을 일으키고 이숙의 업을 내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저 색계천의 중유를 일으킨 뒤에 색계의 색구경천(色究竟天)에 태어난다.
이곳에 난 뒤에는 비로소 이와 같은 무루도(無漏道)의 힘을 얻고 나아가 남은 번뇌를 끊어서 무여의열반의 경계에 들어가나 이런 이를 상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상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두 가지 흐름[二流]이 있나니, 나고 죽는 업[生死業]과 그 번뇌(煩惱)이다.
그는 이 두 가지 것을 다 같이 아직 끊지도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도 못한다.
그는 이 인(因)과 연(緣)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행(行)하고 따라 행하며, 위에서 흐르고[流] 따라 흐르기 때문에 상류 보특가라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불환(不還)의 보특가라는 점차로 더욱 뛰어나게 나아가서 뒤와 그 뒤의 선정에 대하여 잘 따라 받아들이며 능히 받고 따라 받으면서 영원히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상류라 한다’라고 한다.
또 상류(上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색계에 가는 것이요, 둘째는 무색계에 가는 것이다.
색계에 가는 이는 색구경천(色究竟天)을 맨 마지막 처소로 삼으며, 무색계에 가는 이는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을 맨 마지막 처소로 삼는다.
[5정거천]
[문] 5정거천(淨居天)이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무번천(無煩天)이요, 둘째는 무열천(無熱天)이며,
셋째는 선현천(善現天)이요, 넷째는 선견천(善見天)이며,
다섯째는 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문] 어떤 것이 무번천(無煩天)인가?
[답] 여기저기에 있는 모든 무번천은 동일한 무리[類]로서 짝[伴侶]이 되고 중동분(衆同分)을 함께하며 의득(依得)과 사득(事得)과 처득(處得)을 모두 같이 하는 것과 또 무번천에 태어난 이들의 모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을 무번천이라 한다.
또 무번천은 괴로움[苦]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며, 괴로움의 소멸[滅]을 괴로움의 소멸로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보기 때문에 무번천이라 한다.
또 무번천은 몸에 번거로움이 없고 마음에 번거로움이 없으며, 그는 몸과 마음에 번거로움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고[寂靜] 두루 청정하며[遍淨], 샘이 없고[無漏] 미묘한 모든 느낌[受]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번천이라 한다.
또 이것은 곧 그것의 이름[名]이요 달리 부르는 말[異語]이요 덧붙인 말[增語]이며, 모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等想]과 시설(施設)과 언설(言說)로 무번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무번천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열천(無熱天)인가?
[답] 여기저기에 있는 모든 무열천의 동일한 무리로서 짝이 되고 중동분을 함께해서 의득과 사득과 처득을 모두 같이하는 것과 또 무열천에 태어난 이들의 모든 무부무기의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무열천이라 한다.
또 무열천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의 원인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며, 괴로움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로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보기 때문에 무열천이라 한다.
또 무열천은 몸에 뜨거운 고뇌[熱惱]가 없고 마음에 뜨거운 고뇌가 없으며, 그는 몸과 마음에 뜨거운 고뇌가 없기 때문에 고요하고 두루 청정하며, 샘이 없고 미묘한 모든 느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열천이라 한다.
또 이것은 곧 그것의 이름이요 달리 부르는 말이요 덧붙인 말이며,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무열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무열천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선현천(善現天)인가?
[답] 여기저기에 있는 모든 선현천의 동일한 무리로서 짝이 되고 중동분을 함께해서 의득과 사득과 처득을 모두 같이하는 것과 또 저 선현천에 태어난 이들의 모든 무부무기의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선현천이라 한다.
또 선현천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의 원인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며, 괴로움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로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보기 때문에 선현천이라 한다.
또 선현천은 형색이 미묘하여 대중이 모두 보기를 좋아하며 청정하고 단정 엄숙하여 무번천과 무열천의 하늘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선현천이라 한다.
또 이것은 곧 그것의 이름이요 달리 부르는 말이요 덧붙인 말이며,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선현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선현천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선견천(善見天)인가?
[답] 여기저기에 있는 모든 선견천의 동일한 무리로서 짝이 되고 중동분을 함께하면서 의득과 사득과 처득을 모두 같이하는 것과 또 저 선견천에 태어난 이들의 모든 무부무기의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선견천이라 한다.
또 선견천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의 원인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며, 괴로움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로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보기 때문에 선견천이라 한다.
또 선견천은 형색이 한층 더 미묘하므로 대중들이 모두 더욱더 보기를 좋아하며 더욱더 청정하고 단정 엄숙하여 무번천과 무열천과 선현천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선견천이라 한다.
또 이것은 곧 그것의 이름이요 달리 부르는 말이요 덧붙인 말이며,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선견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선견천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색구경천(色究竟天)인가?
[답] 여기저기에 있는 모든 색구경천의 동일한 무리로서 짝이 되고 중동분을 함께해서 의득과 사득과 처득을 모두 같이하는 것과 또 저 색구경천에 태어난 이들의 모든 무부무기의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색구경천이라 한다.
또 색구경천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의 원인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며, 괴로움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로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보기 때문에 색구경천이라 한다.
또 색구경천이 얻게 되는 제 몸은 형색 있는 색계[色趣]에 태어나는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첫째가기 때문에 색구경천이라 한다.
또 이 하늘은 애구경천(礙究竟天)이라고도 한다. 애(礙)라 함은 무엇에 걸림이 있는 몸[礙身]이라는 말이니, 이것은 걸림이 있는 몸의 맨 마지막 처소이기 때문에 애구경천이라 한다.
또 이것은 곧 그것의 이름이요 달리 부르는 말이요 덧붙인 말이며,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색구경천이라 하고, 혹은 애구경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색구경천이라 하고 혹은 애구경천이라 한다.
[5출리계]
5출리계(出離界)란 어떤 것인가?
구수(具壽)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多聞] 성스러운 제자들[聖弟子衆]은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見]을 갖추고,
만일 모든 욕(欲)을 염(念)하면 곧 모든 욕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못하고 믿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편히 머무르지 않고 뛰어난 견해가 없으며, 움츠러들면서 펴지 못하고 버리고 머무르며,
싫어하고 헐뜯고 억누르고 거역하는 것이 마치 힘줄과 날개를 불에 태우면 움츠러들면서 펴지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아서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을 갖추고 만일 모든 욕(欲)을 염하면 곧 그 모든 욕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못하고 나아가 거역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출리(出離)를 염하면 곧 벗어나는[出離] 일에 대하여 깊이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고 믿고 좋아하며 편히 머무르고 뛰어난 견해가 있으며,
움츠러들지 않고 한결같이 너그러워서 마음에 싫거나 헐뜯지 않으며,
저절로 현행(現行)하고 그 마음이 안락해져서 쉽게 잘 닦아 익히며,
모든 욕(欲)을 반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번뇌[漏]와 손해(損害)와 뜨거운 고뇌[熱惱]로부터 모두 해탈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뒤에는 계박(繫縛)을 여의고 해탈하며, 그것을 인(因)으로 하고 그것을 연(緣)으로 하는 모든 느낌[受]을 느끼지 않나니, 이와 같이 욕에서 벗어남을 욕출리(欲出離)라고 한다.
에와 무에[恚無恚], 해와 무해[害無害], 색과 무색[色無色]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구수(具壽)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을 갖추고,
만일 유신(有身)을 염하면 곧 그 몸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않고 믿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편히 머무르지 않고 뛰어난 견해가 없으며,
움츠러들어 펴지지 않고 버리며 머무르고, 싫어하고 헐뜯고 억누르고 거역하는 것이,
마치 힘줄과 날개를 불에 태우면 움츠러들고 펴지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아서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도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을 갖추고,
만일 유신을 염하면 곧 그 몸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않는다.
자세한 설명은 위에서와 같다.
그리고 만일 유신멸열반(有身滅涅槃)을 염하면 곧 그 몸이 있다[有身]는 것이 사라지는[滅] 열반에 대하여 깊이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고 믿고 좋아하며 편히 머무르고 뛰어난 견해가 있으며,
움츠러들지 않고 한결같이 너그러워서 마음에 싫어하거나 헐뜯지 않으며,
마음대로 현행에 돌아가고 그 마음이 안락하고 쉽게 잘 닦아 익히며,
몸이 있다는 것을 반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손해와 뜨거운 고뇌에 대하여 모두 해탈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뒤에는 계박을 여의고 해탈하며, 그것을 인연으로 하는 모든 느낌을 느끼지 않나니, 이와 같이 몸이 있다는 데서 벗어나는 것을 유신출리(有身出離)라고 한다.
이 가운데서 ‘모든[諸有]’이라 함은, 이와 같은 이름과 이와 같은 성과 이와 같은 종류와 이와 같은 음식과 이와 같은 고락(苦樂)을 느끼는 것과 이와 같은 오랜 삶[長壽]과 이와 같은 수명(壽命)의 맨 끝[邊際]이기 때문에 ‘모든’이라고 한 것이다.
‘견문이 많다[多聞]’고 함은, 바른 법을 많이 들은 것이다.
많은 바른 법이란,
계경(契經)ㆍ응송(應誦)ㆍ기별(記別)ㆍ풍송(諷誦)ㆍ자설(自說)ㆍ인연(因緣)ㆍ비유(譬喩)ㆍ본사(本事)ㆍ본생(本生)ㆍ방광(方廣)ㆍ희법(希法)ㆍ논의(論義)이니, 이 모든 법을 들었기 때문에 ‘견문이 많다’라고 한다.
‘성스러운 제자[聖弟子]’라 함에서 성인이란, 모든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제자를 성스러운 제자라고 한다.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는 모든 이들은 모두 다 성스러운 제자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때문에 ‘성스러운 제자’라고 한다.
[문]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을 갖춘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날래고 날카로운 것[猛利]인가?
[답] 상품(上品)이 원만하기 때문에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소견[見]’인가?
[답] 만일 벗어남[出離]과 멀리 여읨[遠離]에서 생기는 착한 법에 의하여 그 법을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더 나아가 비발사나(毘鉢舍那)가 있기 때문에 소견이라고 한다.
[문] ‘만일 모든 욕을 염한다’라고 함에서 어떤 것을 ‘모든 욕(欲)’이라 하는가?
[답] 욕심[欲]을 또한 모든 욕이라 하고, 욕계(欲界)를 또한 모든 욕이라 하며, 5묘욕(妙欲)의 경계를 또한 모든 욕이라 하는데, 지금 이 뜻에서는 5묘욕의 경계를 말하여 ‘모든 욕’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만일 모든 욕을 염하면’이라고 한다.
‘곧 그 모든 욕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않고 믿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편히 머무르지 않고 뛰어난 견해도 없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묘한 욕심[妙欲]의 경계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하는 뜻 지음[作意]으로 자세히 사유(思惟)할 적에 따르는[隨順] 마음[心]과 따르는 믿음[信]과 따르는 의욕[欲]과 따르는 마음의 뛰어난 견해[勝解]와 이미 낸 뛰어난 견해와 장차 낼 뛰어난 견해를 일으키지 않나니, 이 때문에 ‘곧 그 모든 욕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않고 믿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편히 머무르지 않고 뛰어난 견해도 없다’라고 한다.
‘움츠러들면서[卷縮] 펴지 않는다[不伸]’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모든 묘한 욕심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하는 뜻 지음으로 자세히 사유할 적에 마음이 즐거이 머무르지 않고 따르지 않으며 향해 나아가지도 않고 임(臨)하여 들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움츠러들어 펴지지 않는다’라고 한다.
‘버리면서 머무르고 싫어하고 헐뜯고 억누르고 거역한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모든 묘한 욕심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하는 뜻 지음으로 자세히 사유할 적에 모든 욕심에 대하여 버리면서 머무르고 싫어하고 헐뜯고 억누르고 거역하기 때문에 ‘버리면서 머무르고 싫어하고 헐뜯고 억누르고 거역한다’라고 한다.
[문] ‘만일 출리를 염하면’에서 어떤 것이 출리(出離)인가?
[답] 벗어나는 것[出離]도 출리라 하고, 벗어나는 경계[出離界]도 출리라 하며, 색계(色界)의 선근(善根)도 또한 출리라 하고, 초정려(初靜慮) 또한 출리라 하는데, 지금 이 뜻에서는 초정려를 말하여 ‘출리’라 한다. 이 때문에 ‘만일 출리를 염하면’이라고 한다.
‘곧 그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고 믿고 좋아하며 편히 머무르고 뛰어난 견해가 있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이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 뛰어난 견해와 함께하는 뜻 지음으로 자세히 사유할 적에 따르는 마음과 따르는 의욕과 따르는 마음의 뛰어난 견해와 이미 낸 뛰어난 견해와 장차 낼 뛰어난 견해를 일으키나니, 이 때문에 ‘곧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고 믿고 좋아하며, 편안히 머무르고 뛰어난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
‘움츠러들지 않고 한결같이 너그럽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이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하는 뜻 지음으로 자세히 사유할 적에 마음이 안락하게 머무르고 따라 나아가며 임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고 한결같이 너그럽다’라고 한다.
‘마음이 싫어하거나 헐뜯지도 않고 저절로 현행한다[任運現行]’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이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하는 뜻 지음으로 자세히 사유할 적에 욕심에 대하여 마음이 즐겨 머무르지 않거나 싫어하거나 헐뜯거나 억누르거나 거역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마음이 싫어하거나 헐뜯지도 않고 저절로 현행한다’라고 한다.
‘그의 마음이 안락해져서’라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마땅히 그러할 때에 그의 마음은 안락해져서 피로도 없고 손상도 없고 게으름이 없는 법[無倦法]을 이루게 되나니,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이 안락해져서’라고 한다.
‘쉽게 닦아 익힌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그러할 때에 자주자주 닦아 익히고 자주자주 뜻을 짓고 닦아 익히는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쉽게 닦아 익힌다’라고 한다.
‘잘 닦아 익힌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는 그러할 때에 인(因)이기 때문에, 문(門)이기 때문에, 이치[理]이기 때문에, 행(行)이기 때문에 닦아 익히는 것을 은근히 하고 정중히 여기며 닦아 익히는 것에 굳게 머무르고 닦아 익히는 것을 공경히 하며 닦아 익히는 것에 뜻을 짓기 때문에 ‘잘 닦아 익힌다’라고 한다.
‘모든 욕을 반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손해와 뜨거운 고뇌에 대하여 모두가 해탈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뒤에는 계박을 떠나 해탈한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욕심 가운데서 마음이 해탈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뒤에는 계박을 여의고 해탈한다고 한다.
‘그것을 인(因)으로 하고 그것을 연(緣)으로 하는 모든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함은,
모든 욕심에 대하여 만일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면 곧 괴로운 느낌[苦受]을 느끼지만 만일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안다면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않나니, 이 때문에 ‘그것을 인으로 하고 그것을 연으로 하는 모든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욕의 출리[欲出離]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지금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을 출리(出離)라 하는가?
[답] 모든 욕심을 영원히 끊은 것도 출리라 하고, 모든 욕심을 초월하는 것도 출리라 하며, 티끌세상을 버리고 여읜 것도 출리라 하고, 색계(色界)의 선근도 또한 출리라 하며, 초정려(初靜慮)도 또한 출리라 하는데, 지금 이 뜻에서는 초정려를 말하여 ‘출리’라고 한다.
【문】‘에(恚)와 무에(無恚)에 대해서’라고 하였는데, 에(恚)란 어떤 것인가?
[답] 성내는 것[恚]도 또한 에라 하고, 성을 내는 경계[恚界]도 또한 에라 하는데, 지금 이 뜻에서는 성을 내는 경계를 말하여 ‘에’라 한다.
[문] 무에(無恚)란 어떤 것인가?
[답] 성을 냄이 없는 것[無恚]도 무에라 하고, 성을 냄이 없는 경계[無恚界]도 무에라 하며, 자심정(慈心定)도 또한 무에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자심정을 말하여 ‘무에’라고 한다.
‘해(害)와 무해(無害)에 대해서’라 하였다.
[문] 해(害)란 어떤 것인가?
[답] 해치는 것[害]도 해라 하고, 해치는 경계[害界]도 또한 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해치는 경계를 말하여 ‘해’라고 한다.
[문] 무해(無害)란 어떤 것인가?
[답] 해침이 없는 것[無害]도 무해라 하고, 해침이 없는 경계[無害界]도 무해라 하며, 비심정(悲心定) 또한 무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비심정을 말하여 ‘무해’라 한다.
‘색(色)과 무색(無色)에 대해서’라 하였다.
[문] 색(色)이란 어떤 것인가?
[답] 형상 있는 것[色]도 색이라 하고, 색계(色界)도 색이라 하며, 4정려(精慮)도 또한 색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4정려를 말하여 ‘색’이라 한다.
[문] 무색(無色)이란 어떤 것인가?
[답] 형상이 없는 것[無色]도 무색이라 하고, 무색계(無色界)도 무색이라 하며, 4무색(無色)도 또한 무색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4무색을 말하여 ‘무색’이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날래고 날카로운 소견을 갖춘다’라고 함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유신(有身)을 염하면’이라 함은, 몸이 있다[有身]는 것도 유신이라 하고, 5취온(取蘊) 또한 유신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5취온을 말하여 ‘유신’이라 한다.
‘곧 몸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등’은, 앞의 욕(欲)에서 해설한 것과 같다.
‘만일 유신멸(有身滅)을 염하면’이라 함은, 몸이 있다[有身]는 것이 사라짐[滅]도 멸(滅)이라 하고, 택멸(擇滅)도 또한 멸이라 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택멸을 말하여 ‘멸’이라 하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설일체유부집이문족론(說一切有部集異門足論) 제14권
이 권(卷)은 송본(宋本) 제 8폭(幅) 제 8ㆍ9행(行) ‘피색계천중유기(彼色界天中有起)’ 아래에 ‘괴명종피색계천(壞命終彼色界天)’이라 하였고, 제 9폭 원(原) 5행 ‘보특가라부(補特伽羅復)’ 아래에 ‘이왕생색계(已往生色界)’라고 하였고, 제 11폭 제 7행 ‘생이숙업신(生異熟業身)’ 아래에 ‘차유작시언설(次有作是言說)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3절(節)은 문장이 단절되고 의미가 끊어져 서로 연속되지 않는다. 지금 두 가지 판본을 조사해 보니 송본(宋本)은 착오로 ‘생이숙업신(生異熟業身)’ 아래의 ‘괴명종피색계천(壞命終彼色界天)’ 내지 ‘보특가라부(補特伽羅復)’ 등 모두 34행의 문장을 앞으로 보내 ‘피색계천중유기(彼色界天中有起)’ 아래에 썼고 도리어 ‘중육기(中有起)’ 아래의 ‘이왕생색계(已往生色界)’ 내지 ‘생이숙업신(生異熟業身)’ 등 34행의 문장은 뒤로 빼서 ‘보특가라부(補特伽羅復)’ 아래에 써서 앞과 같은 글이 되게 하였다. 지금 두 가지 판본에 의거해 앞으로 보내고 뒤로 빼서 바로잡았다.
제 12폭 원 6행 ‘선현천중소유무(善現天中所有無)’ 아래에 국본(國本)과 송본(宋本)은 ‘부무기(覆無記)’ 내지 ‘변어제욕심(便於諸欲心)’ 등 모두 35행의 문장이 빠져있다. 지금 거란본[丹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