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7권
20. 삼도멸도품(三道滅度品)
[위없고 지극히 참된 도를 구하는 까닭은?]
그때에 최승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장궤(長跪)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지진의 도덕은 끝이 없고 도문(道門)에 의지하여 벗어나는 해탈을 구하지도 않으며 청정한 배움을 부지런히 닦고 사모하여 금강삼매에 미치며 헤아릴 수 없나이다.
이제 여래께서 말씀하신 멸도는 청정하고 세 가지 도(道)가 하나로 돌아가며 다시는 둘이라는 이름도 없고 또한 둘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함을 들었사온데,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왜 위없고 지극히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도를 갈망하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히 식의 미혹[識惑]을 잊게 하여 주소서.”
이때에 세존께서 금빛 몸을 돌이켜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을 돌아보시니 고요하여 이름도 없고 저마다 여러 생각들이 없자 은근히 최승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좋은 질문이다. 진실로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구나. 여래는 너희를 위하여 낱낱이 널리 펴 연설하여 장차 오는 세상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영원히 망설임이 없게 하겠느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미정 삼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청정한 도의 뿌리에서는 더러운 가지가 생기지 않고 체성(體性)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도 청정하며,
다시 법성도 또한 모두가 청정하므로 점점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을 분별하느니라.
작용이 없는 청정함이란 것은 삼세의 청정함을 얻음이며, 그로써 삼세가 공(空)한 줄 분명히 알고 삼계를 관하나니, 이것을 바로 미정(微淨)삼매라 이름하느니라.
[몸ㆍ기억ㆍ생각ㆍ식]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세 가지 도(道)의 멸도는 그 품류가 동일하지 않고 의지와 취향도 저마다 달라서,
몸은 때의 근본[垢本]이 되고,
기억은 때의 못[垢池]이 되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遊塵]이 되고,
식(識)은 번뇌의 우두머리[結首]가 되나니,
하나가 멸하여도 셋이 존재하여 청정해지지 못하고,
둘이 멸하여도 둘이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며,
셋이 멸하여도 하나가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넷이 다 멸해야 공(空)하게 되어 비로소 청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니,
일체지에 이르러서 청정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처음 도적(道跡)으로부터 위의 무착(無着)에 이르고,
다시 1주(住)로부터 나아가 10주에 이르기까지 4환(還)과 4귀(歸)와 4애(碍)를 다 소멸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네 가지란,
몸은 때의 근본이 되어 범부(凡夫)로서 만족하게 여기고,
기억은 때의 못이 되어 네 가지 흐름[流]에서 멋대로 굴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이 되어 8만의 애욕을 일으키고,
식은 번뇌의 우두머리가 되어 3유(有)에 매이느니라.
이 때문에 큰 성인[大聖]에게는 현재 3도(道)가 있는데,
형상은 마치 우수하고 열등한 것과 같으나 진실로 멸도는 약간의 차별도 없으며,
도(道)는 열반에 있으나 텅 비고 고요함[虛寂]을 여의지 않느니라.
보살의 열반은 사람을 제도함으로써 이름이 붙여지고,
벽지불의 열반은 신족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며,
성문의 열반은 좁고 하열함[狹劣]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느니라.
[자ㆍ비ㆍ희ㆍ호]
또 최승아, 보살의 열반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써 중생을 양육하느니라.
가령 한 사람을 인도하여 도검(道檢)에 들어간 이가 있으면 모든 감관[根]이 즐겁고 기쁨이 한량없으며,
그 때의 의식(意識)은 맑고 고요하여 함이 없고 도인이나 세속[道俗]에 관한 생각이 없이 모든 감정이 다 청정하느니라.
청정함은 마치 열반과 같고 그것에서 영원히 다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바로 생각 없는[無念] 것이니,
의당 생각하는 바가 없고 또한 생각을 보지도 않고 그 생각도 역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배우는 이는 배우되 역시 배울 것이 없느니라.
빛깔[色] 또한 빛깔이 없고 또한 빛깔을 보지도 않으며,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의 생각 또한 의식의 생각이 없고,
5음(陰)의 몸으로부터 형상이 없음에 이르기까지 법체(法體)는 청정하여 생각이 있음을 보지도 않나니, 생각하는 바가 없느니라.
[열반의 청정한 도]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열반[泥洹]이란 말은 열반이 그러하거늘 어찌 멀다 하겠느냐?
이렇게 보지 말 것이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생각이 없는 법체라 형상이 없는 것으로 그 체성을 관하면 그것이 곧 바로 열반이기 때문이니,
열반의 체성은 곧 이것이 법관(法觀)이며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열반은 이름이 없으므로 볼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이라는 이름을 세울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 대사가 이 열반의 청정한 도(道)를 배우는 것이니, 도에 상응하도록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라.
[청정한 행]
최승아, 다시 분별해야 하느니라.
보살 대사가 수행하되 이 청정한 도인 열반의 체성을 분명히 통달하고자 하면, 마땅히 청정한 행[淨行]을 닦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어떻게 그 청정한 행을 수행하는가?
항상 몸ㆍ입ㆍ뜻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하자가 없게 하는 것이니,
무엇을 몸이 청정하고 하자가 없다고 하는가?
이에 보살은 자기의 몸이 이미 청정하면 모든 바깥의 몸[外身]도 역시 청정함을 이해하고,
자기의 몸이 텅 비고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공(空)함을 알며,
몸이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고요함을 알고,
자기 몸이 해탈하면 모든 몸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법을 관하다]
보살은 다시 법관(法觀)을 사유하여 게으름과 또한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자기의 몸에 게으름이 없거늘 도(道)에 어찌 게으름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보살은 몸에 게으름이 없음을 알고 보살이 생각에 세간의 오로관(惡露觀)을 일으키되 몸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고 청정한 생각[淨想]을 보지 못하나니,
청정함을 통달하여 생각이 없어야 비로소 열반에 상응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청정한 열반이며 도는 차별이 없는 것이라 말하느니라.”
[욕심이 없는 것]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은 체(體)가 청정하고 욕심이 없으며, 하고자 하나 욕심이 없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대사는 5취(趣)에 돌아다니며 생사에 유전(流轉)하되 방편과 권현(權現)으로 알맞게 교화할 적에,
어떤 이가 몸의 청정함을 말하면 곧 남이 없음[無生]을 논하여 그 생사를 보아도 곧 생사가 없고 남이 없음을 알게 하나니,
생사는 하나여서 다르지 않고 또한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느니라.
[몸의 행]
보살은 다시 몸의 행[身行]을 환히 분별하여 남이 없음을 통달하며,
이들의 나고 죽음이 곧 몸의 행인 줄 알면 안팎의 법을 통달하느니라.
무엇을 말하여 몸의 행이라 하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에 일어나고 쇠(衰)한 것이니,
과거는 자취가 없고 현재는 기록이 없으며 미래는 이름이 없느니라.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
또 최승아, 과거의 것은 영원히 다하였고 미래의 것은 끝이 없으며 현재의 것은 변천하고 옮아가나니,
역시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盡不盡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을 사유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의 청정한 생각을 분별하고 환히 통달하는 것이니,
그 다함이 없다고 함은 담연(淡然)하여 함이 없고 상념(想念)이 없음이니, 상념이 있게 되면 현성의 계율에 큰 결함이 있게 되느니라.”
[몸의 청정함]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옛날 성불하여 도수(道樹) 아래 앉아 7일 밤낮 동안 나무를 관하되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마음으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달으셨고 먼저 어떤 법을 통달하셨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때에 나는 최승아, 다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서는 먼저 몸의 법[身法]을 통달하시고 최정각(最正覺)을 체득하셨다.
인(因)과 연(緣)이 모여서 식(識)이 있고 생각(想)이 있었으니,
그 연을 알면 곧 공하고 생각도 없어서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다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라고 생각하였느니라.
만일 최승아, 이와 같이 관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몸의 청정함이니,
대개 몸이 청정하다고 함은 모두 다 지혜의 바다[智海]로 돌아가는 것이니라.
[바다로 돌아간다는 열 가지 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바다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그 일에는 열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의 바다[佛海]에 돌아가서 법에 형상의 관[形觀]이 없고,
중생의 바다[衆生海]에 돌아가서 유의 재난[有難]을 초월하며,
법의 바다에 돌아가서 온갖 지혜를 쌓기 때문이며,
복전의 바다[福田海]에 돌아가서 본래부터 근(根)이 없는 것을 세우며,
5음의 바다[五陰海]에 돌아가서 더러운 법을 나타내 보이고,
지혜의 바다에 돌아가서 여러 가지 교계(敎誡)의 나아갈 바를 분별하며,
근의 뜻의 바다[根義海]에 돌아가서 선근을 더욱 늘리기 때문이며,
마음을 머무는 바다[住心海]에 돌아가서 중생들의 여러 가지 마음과 뜻으로 생각한 바 한량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걸림이 없음을 알며,
행의 바다[行海]에 돌아가서 원(願)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며,
서원의 바다[弘誓海]에 돌아가서 생사의 근원을 궁구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이 바다에 돌아가는 열 가지 문(門)의 뜻이니, 마땅히 생각하고 수행하여 모두 다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無漏法身]에 돌아가야 하느니라.
또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을 관한다는 것은 본래 없음[本無]에 머물지 않고 삼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본래 없으면서 하나의 법신임을 통달하여 알고 몸은 샘이 없어서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관하며,
머무르되 머무름을 보지 않고 또한 머무르는 바가 없으며,
샘이 없는 몸으로써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고 색신(色身)을 나타내 보이되,
마치 색신이 없는 것과 같으며, 끝이 없고 가장자리가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보거나 나타낼 수 없고,
색신이 멸한 뒤에도 역시 멸한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생함을 보지 못하며,
몸의 본래 없음은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으며,
여래의 몸은 청정하면서 또한 흠이나 더러움이 없으며,
중생의 무더기에 들어가 앞의 형질을 따르고 형상을 따르면서 나타내느니라.
중생들의 몸이 청정함을 분명히 통달하면 자기의 몸이 청정하고 중생의 몸도 청정하여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고, 또한 약간도 있지 않고 평등하여 본래부터 없느니라.
본래부터 없는지라 도(道)가 없고 도가 있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또한 세속의 법과 유루ㆍ무루가 없고 또한 다시 삼승의 교계(敎誡)로 이것은 바로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과 부처님의 도라고도 보지 않으며,
또한 다시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이라고 보지도 않고 모든 현성의 도와 법에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행(行)과 상응하고 청정함과 상응하되 상응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입의 말[口言]이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입의 말이며 의당 청정해야 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계의 청정한 삼매[淸淨三昧]에 들어가서 널리 삼천세계에 있는 그 안의 중생으로서 형상이 있는 무리의 온갖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맑고 깨끗하거나 곱거나 누추하거나 간에 모두 다 공(空)으로 돌아가고 다 청정하다고 관하느니라.
보살은 다시 평등한 관[等觀]을 사유하되 제일의(第一義)에서도 역시 평등하다고 보지 않고 또한 평등하지 않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평등한 모양[等相]으로써 관하기 때문이니,
또한 평등하고 평등하지 않다는 것과 모양과 모양이 없다는 것도 보지 않으며,
다시 평등한 모양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되 도법(道法)은 한없고 끝없는 것도 보지 않고 세속법도 한이 있고 끝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현성이 3유(有)를 초월하는 것도 보지 않고 범부의 힘이 우열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청정한 음성을 분별하되 중생이 생각하거나 뜻에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니,
음향을 잘 살피면 음향이 없다고 관하여 알며,
조심하거나 기뻐하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이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뒤바뀐[顚倒] 것을 좋아하여 뒤바뀐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중생의 온갖 것은 모두가 청정함을 통달하여 아느니라.
욕심도 없고 물듦도 없으며,
또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도 없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毒)의 근본도 없으며,
다시 12인연과 18본지(本持)와 치(癡)로부터 사(死)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청정하고 치는 또한 내가 짓는 바의 행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행(行)도 또한 치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법과 법은 저절로 생기고 법과 법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을 관찰해야 하나니,
법이 법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치(癡)와 행(行)이 있겠느냐?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법은 서로 알지 못하여 법이 생기면 곧 생기고, 법이 소멸하면 곧 소멸하는 것이며,
법은 스스로 생기고 생기지 않는 것과 소멸하고 소멸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생기고 소멸하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온갖 것이 청정하다]
그때에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삼세의 치와 행은 몸을 따라 회전(廻轉)하는 것이오니,
몸이 있으면 행이 따르고 몸이 없으면 행이 소멸하며,
나아가 노사(老死)도 역시 그와 같사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의심되는 것을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장차 오는 세상의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이나 막힘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치(癡)는 몸을 물들이지 않고 몸은 치를 물들이지 않으며,
치는 또한 나에게는 몸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몸도,
또한 나에게는 치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저마다 청정하여 또한 나[吾我]가 없나니,
나라고 말하는 것은 다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함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온갖 것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 말[言]이고 어느 것이 말이 아닌가?
말은 안에 있지도 않고 또한 밖에 있지도 않으며,
말에 나오는 것이 있고 들어가는 것이 있는 것도 보지 않나니,
곧 열 가지 견고한 뜻을 완전히 갖추어서 중생의 음종(陰種)이 나아갈 바를 분별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에 보살은 먼저 벗어남[出要]을 구하여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수없이 교화하고 정진을 나타내지만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힘으로써 온갖 법이 공(空)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뜻을 쉬는 힘[息意力]을 나타내어 온갖 법에서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며,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을 회전(廻轉)하고 회전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의미를 분별하기 때문이며,
자성(自性)의 법력으로 지혜를 나타내어 드러내기 때문이며,
자재한 힘을 나타내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기 때문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을 나타내어 바른 법에 편안히 처하기 때문이며,
변재를 나타내고 한량없는 지혜를 나타내되 낱낱이 펴 나타내기 때문이며,
둘이 없는 힘[無二力]을 나타내되 짝할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중생의 종성이 나아갈 바를 분별하되,
또한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또한 양쪽 중간에도 있지 않느니라.
말[言]로써 하려는 것이 바로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 아니라면 다시 모든 때[垢]와 속박[縛]과 집착[着]이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역시 말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말하지 않는 데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모든 법은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도 없고,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마음도 역시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연설하게 되는 음향은 바람이 움직여 소리가 나오는 것이요,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소리와 메아리가 있는 것이며,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곱거나 누추함에도 소리는 조금도 없고 또한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로서 본무동(本無動)삼매에 머무른 이는 움직이는 생각과 그 행하는 바가 모두 허공과 같이 평등하여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 것도 없고, 또한 온갖 생각[衆想]도 없다고 사유하나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중생의 음성과 온갖 음향은 모두 다 공하고 진실이 아니며, 권도로 속이는[權詐] 법이어서 믿거나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니라.”
[여래ㆍ등정각의 도법]
그때에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거룩한 진리[聖諦]는 현성의 도과를 이루거니와 권도로 속임은 진실이 아니거늘, 어떻게 최정각(最正覺)을 이루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등정각의 도법(道法)은 자세한 진리[審諦]요 진실한 것이라 진실한 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니, 모든 법은 진실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닌 줄 알 것이니라.
또 다시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5도를 돌아다니며 중생을 가르쳐 주되 그의 알맞는 바에 따라서 그를 제도하고 해탈시키며,
중생의 이름과 음성을 관찰하여 위없는 법륜을 굴리며 법구(法句)의 뜻에 따라 보응에 도달하게 하느니라.
고(苦)를 좋아하는 중생에게는 고의 근원을 연설하며, 모든 법의 말에는 모두 말이 없는 것인 줄 분명히 아느니라.
어느 것이 말이고 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말은 나오는 것이 없는 줄 분명히 아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습(習)을 좋아하는 중생을 위하여,
습의 근본은 이것이 바로 습이요 이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因)이요 이것이 바로 연(緣)이라고 연설하여 주나니,
인연을 분별하면 본래 습의 실마리가 없고 습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이름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습을 좋아하는 중생의 온갖 음성은 모두가 공하고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앞의 그 중생에 따라 도(道)의 가르침으로써 갚고 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법을 수순하여 행하게 하되,
또한 행의 나아갈 바와 보응의 과보를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지만 행하는 바가 없고, 증득하지만 증득한 것을 보지 않으며, 그대로의 한 모양이요 평등하게 온갖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다시 다하는 것[盡]을 좋아하는 중생을 사유하되,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여 나오고 생기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며,
말과 음성은 머물러 그치는 바가 없고 앉거나 다니거나 간에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으며,
비록 시끄럽고 난잡한 데서 놀아도 언제나 한가하고 고요하며 설령 대중에 있다 하여도 현성으로서 말이 없으며,
뜻으로 말을 나타내고자 하나 말이 곧 스스로 그치고 말한 바를 뒤쫓아 찾지만 집착하거나 집착이 없는 것에서도 다한 것과 다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에서도 또한 다한 것을 보지 않고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집착하거나 끊는다거나 하는 소리는 말에서 나오기는 하되 영원히 그 종적이 없느니라.
또 보살은 도(道)를 좋아하는 중생이면 여덟 가지 행(行)을 사유하되, 중생이 닦고 익혀 열반에 나아가게 하며,
정언(正言)과 정업(正業), 나아가 정정(正定)의 법다운 것과 법답지 않은 것은 평등하여 하나의 허공관[一虛空觀]으로 둘이 없고 어기거나 잘못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입의 말[口言]이 청정하여 흠이나 더러움이 없는 것이니라.
[의식의 청정함]
또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의식(意識)의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의식이 청정한가?
이에 보살은 마음이 청정하되 또한 하자도 없고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 없으므로 그 근본이 있다고 보지도 않나니,
그 마음의 근본이란 더러움에 물들 수도 없고 마음에 장애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분명히 알지만 청정함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
세간에서는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많아서 이것에 대하여 물들고 집착하게 되거니와,
공(空)인 줄 통달하고서 사유하면 집착할 바가 있지 않고 마침내 권방편을 행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청정한 것인 줄 분별하느니라.
보살은 알아야 하느니라.
또 그 마음의 근본은 본래부터 오고 가는 것이 없고 고하(高下)나 존비(尊卑)나 귀천(貴賤)을 가리지도 않으며,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는 것이라고 보지도 않고, 지금은 있는데 본래는 없던 것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덕(德)의 근본도 생각하지 않나니, 덕의 근본을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공(空)이요 이것이 바로 무생(無生)이며 이것이 바로 열반[泥洹]이니라.”
여쭈었다.
“그 덕의 근본이란 마음의 근본[心本]을 분명히 아는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아니니라.”
“안[內]은 본래 공한지라 바깥[外]을 아나이까?”
“아니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하다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의 근본은 공하되 또한 근본이 아니나 근본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며,
공심정(空心定)의 보살이 만일 스스로 마음을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은 근본이 없고 바깥도 또한 근본이 없으며,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으며,
마음은 나의 마음[我心]이 아니고 마음은 마음에 없으며,
나의 마음은 마음도 아니기에 나[我]와 나에게 없으며,
빛깔[色]은 나의 빛깔[我色]이 아니요 빛깔이 빛깔에 없고 나는 빛깔의 나[色我]가 아니므로 나는 나에게 없으며,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은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이 아니고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心我]는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가 아니며,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細滑]ㆍ뜻ㆍ법에 이르기까지도 나의 뜻[我意]과 나의 법[我法]이 아니요, 또한 뜻의 나[意我]와 법의 나[法我]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마음의 근본은 공하며 바깥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니라.
바깥이 공함[外空]을 앎으로써 모든 법은 또한 다시 공과 같은 줄 분명히 통달하고,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모양[相像]도 없나니,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다시 지금은 있지만 본래는 없었다고 보지도 않으며,
없으나 또한 없지 않고 있으나 또한 있지도 않으며,
있다 해도 있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없다 해도 없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며,
없는 것은 없는지라 항상 스스로 없고, 있는 것은 있는지라 항상 스스로 있으며,
있는 것은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없는 것은 없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없는 것은 없지만 스스로 없지 않고, 있는 것은 있지만 스스로 있지 않으며,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온갖 음성도 모두가 공하여 진실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마음이 청정한 것이니라.
그 마음이 청정하다고 함은 36가지 막힘[湮]에 물들 수 없고,
마음의 근본은 티끌과 때[塵垢]에 영원히 집착한 바 없으며,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통달하고 또한 청정함에 대하여 생각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나니,
보살마하살로서 본말이 청정하고 공정의자재삼매(空定意自在三昧)를 환히 아는 이면 곧 자기 뜻을 굽히고 물러나 생사에 돌아다니고 5도에 오가면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느니라.
그 덕의 근본이란 마음[心]ㆍ뜻[意]ㆍ식[識]에는 마음ㆍ뜻ㆍ식이 없는 줄 아느니라.
또 근본의 마음[本心]으로써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며,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도 본말이 청정하며 다시 덕의 근본으로써 널리 온갖 것에 미치고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나아가 닦게 하며 중생과 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나니,
이렇게 관한 이는 이것이 바로 본말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다시 이 청정으로써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평등하니,
어리석음에 평등하고 도(道)에도 평등하면 도가 곧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요 어리석음이 곧 도이니,
도도 청정하고 어리석음도 청정하여 하나요 둘이 없고 또한 약간도 없나니,
보살은 본말이 스스로 청정함을 관찰하여 모든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몸의 행이 청정하여 악을 짓지 않고, 입의 말이 청정해서 항시 지성(至誠)에 돌아가며,
뜻의 생각이 청정하여 온갖 것에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나니,
이 모든 행이 완전히 갖추어져야 비로소 보살이라 일컫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본래 없는 청정품(淸淨品)을 설하실 때에 5천의 보살들이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를 얻었으며, 수없는 천(千)의 사람들이 모두 위없는 평등한 도의 뜻[無上平等道意]을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