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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20권
5. 분별수면품 ②
1) 수면과 개박
온갖 유정류가 이러한 사(事, 즉 소연) 중에서 수면을 수증(隨增)하는 경우,1) 이러한 ‘사’를 계박한다[繫]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어떠한 수면이 능히 어떠한 ‘사’를 계박하는가에 대해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 이러한 경계에 대해 계박하는 것이면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탐ㆍ진ㆍ만으로서
과거의 것과, 현재에 이미 생겨난 것이다.
미래의 의식상응의 그것은 변행(遍行)이며
5식상응으로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미래[自世]의 경계를 계박하며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역시 변행이며
그 밖의 것(견ㆍ의ㆍ치)으로서 과거ㆍ미래의 것은 변행이며
현재의 그것은 지금의 경계를 연으로 할 때만 능히 계박한다.2)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수면에는 모두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상혹(自相惑)으로 이를테면 탐(貪)ㆍ진(瞋)ㆍ만(慢)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공상혹(共相惑)으로 이를테면 견(見)ㆍ의(疑)ㆍ치(癡)가 바로 그것이다.3)
‘사(事)’에는 비록 다수가 있을지라도 여기서는 소계사(所繫事)를 설한 것으로,
[본송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는[未斷]’이라고 하는 말은 상응하는 바대로 이후에도 두루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4)
만약 이러한 소연의 경계 중에 존재하는 탐ㆍ진ㆍ만으로서 과거세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과,5) 현재 이미 생겨난 것은 능히 이러한 소연의 경계를 계박한다.
즉 탐ㆍ진ㆍ만은 바로 자상혹으로서 온갖 유정에 대해 결정코 두루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제2ㆍ제3구)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탐ㆍ진ㆍ만 세 가지는 삼세를 두루 연으로 하기 때문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모두 [삼세의 소연의 경계를] 능히 계박한다.7)
(제4구)
그러나 미래세의 5식상응의 탐ㆍ진으로서, 만약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로지 미래세의 경계만을 계박하며,
(제5구)
미래세의 5식과 상응하는 탐ㆍ진으로서 만약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결정코 생겨나지 않은 것이라면 역시 삼세의 경계를 능히 계박한다.8)
(제6구)
그 밖의 일체의 견ㆍ의ㆍ무명의 경우, 과거ㆍ미래의 것이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두루 삼세의 경계를 계박한다.
(제7구)
즉 이러한 세 종류의 수면은 바로 공상혹이어서 일체의 유정은 [그것에 의해 삼세의 소연을] 모두 두루 계박하기 때문이다.9) 그러나 만약 현재세의 그것은 바로 지금[正]의 경계를 연으로 할 때만 상응하는 바대로 능히 이러한 소연의 경계를 계박한다.
(제8구)
[논쟁: 온갖 소연의 경계로서 과거ㆍ미래의 그것이 실로 존재하는 것인가]
온갖 소연의 경계[事]로서 과거ㆍ미래의 그것을 실로 존재한다[有]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無]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으로, 그런 후 비로소 계박에 대해 논설할 수 있을 것이다.10)
그런데 만약 [소연의 경계로서 과거 미래의 그것이]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행(行)은 항시(恒時)에 존재하기 때문에 마땅히 상주한다고 설해야 하며,
만약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능히 계박함[能繫]과 계박되는 것[所繫]과 그리고 그러한 계박으로부터의 떠남[離繫]이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결정코 실유(實有)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행(諸行)을 일컬어 ‘상주하는 것[常]’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유위의 온갖 상(相, 즉 생주이멸)과 화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바사사가] 주장한 바를 결정코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마땅히 그 종의를 간략히 밝히고 그 이취(理趣)를 드러내어 보아야 할 것이다.11)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세의 실유는 교설과
두 가지와, 대상과 과보가 있기 때문으로,
삼세의 실유를 설하였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삼세는 실유(實有)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계경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 설하기를,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그 염사(厭捨)를 부지런히 닦을 수 없을 것이니,
과거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그 염사를 부지런히 닦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미래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문의 성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그 흔구(欣求)를 부지런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니,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그 흔구를 부지런히 끊을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12)
또한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식(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식은 두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안과 색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의(意)와 온갖 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3)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가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연으로 하는 식은 마땅히 두 가지 연 [중의 하나]를 결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과거 미래의 실유를 논증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정리(正理)에 의거하여 과거나 미래의 실유를 논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대상이 존재하여야 식은 생겨날 수 있으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생겨나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라는 대상 자체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소연을 갖지 않는 식[無所緣識]이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식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에는 당래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진실로 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선과 악 두 업의 당래 과보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과보가 생겨날 때 현재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4)
이 같은 교증과 이증으로 말미암아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결정코 과거ㆍ미래의 2세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 ‘일체의 실유를 설하는 종의[說一切有宗]’라고 말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과거ㆍ미래세도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삼세는 모두 결정코 실유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설일체유종에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니,
이를테면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의 실유를 설하면 바야흐로 그는 바로 설일체유종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오로지 현재세와 아직 과보를 낳지 않은 과거세의 업만이 실재한다고 설하고, 미래세와 이미 결과를 산출한 과거세의 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면,
그는 분별설부(分別說部)로 인정되는데, [유부종은] 이러한 부파에 포섭되지 않는다.
2) 시간에 관한 부파 중의 네 개의 학술
지금 이 부파 중의 [학설의] 차별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누구의 주장이 시간[世]에 관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의지할 만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부파 중에는 네 종류의 학설이 있어
존재[類]ㆍ양상[相]ㆍ상태[位]ㆍ관계[待]가 다르다 하니
세 번째 작용의 상태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시간에 관해 가장 잘 정립된 것이다.15)
논하여 말하겠다.
존자 법구(法救)는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현상적 존재[類, bhva]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일어날 때 현상적 존재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 시간적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그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깨어져 다른 물건이 될 때 비록 형태상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금 자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될 때 맛 등은 버리더라도 현색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미래로부터 현재세에 이르고,
현재로부터 과거세로 들어가는 동안 오로지 그 현상적 존재만을 버리고 획득하는 것일 뿐,
본질 자체는 버리고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양상[相, lakṣaṇa]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과거법은 바로 과거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현재ㆍ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미래법은 바로 미래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ㆍ현재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법은 바로 현재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ㆍ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한 명의 부인[妻室]을 더럽힐 때에도 그 밖의 다른 무희나 계집종 등의 여인에 대해 염오함을 떠났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16)
존자 세우(世友)는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작용하는 상태[位, avasthā]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어떤 상태로부터 어떤 상태 중에 이르면서 [삼세에] 각기 다름이 있다고 설한다.
즉 [작용하는] 상태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수를 헤아리는 산가지[籌]가 일의 위치에 오게 되면 일로 불리고,
백의 위치에 오게 되면 백으로 불리며,
천의 위치에 오게 되면 천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존자 각천(覺天)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고 있다.
“관계[待, apekṣ]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전후의 상호관계에 따라 [삼세의] 명칭에 다름이 있는 것으로,
마치 어떤 한 여인을 [딸과 관계하여서는] 어머니라 불리고, [
어머니와 관계하여서는] 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17)
일체법이 실재한다는 이 같은 네 종류의 학설 중, 첫 번째(법구의 설)는 법에 전변(轉變)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마땅히 수론(數論)의 무리 중에 포함시켜야 한다.18)
두 번째 주장은 삼세가 서로 뒤섞이게 되니, 삼세가 모두 삼세의 상을 갖기 때문이다.19)
즉 어떤 사람이 한 명의 부인에 대한 애탐이 현행할 때 그 밖의 다른 대상에 대한 애탐은 오로지 성취되기만 할 뿐 현재 [그들에 대한] 애탐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데, 어떠한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네 번째 주장에 따르면 전후의 상호관계에 따라 일세법 중에도 삼세가 존재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과거세의 전후 차별을 과거와 미래라 이름하고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해야 할 것이며,
미래세와 현재세의 경우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20)
따라서 이 네 가지 설 중에 세 번째의 설이 가장 뛰어나다.
즉 작용에 근거함에 따라 상태에 차별이 있는 것으로, 작용하는 상태[位]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
즉 그(세우)는 말하기를,
“제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을 때를 일컬어 ‘미래’라 하고, 작용하고 있을 때를 일컬어 ‘현재’라고 하며,
이미 작용이 소멸한 때를 일컬어 ‘과거’라고 하지만, 본질상으로는 어떠한 다름도 없다”고 하였다.
이(실유에 관한 4종학설)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알았다.
그는 마땅히 다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과거ㆍ미래세의 법체가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현재라고 이름해야 할 것임에도 어찌 과거ㆍ미래라고 말하는 것인가?21)
앞에서 작용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 안(眼) 등의 근도 피동분(彼同分)에 포섭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작용이 있다고 하겠는가?22)
그것(피동분의 안근)에도 어찌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공능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와 같다고 한다면 과거의 동류인(同類因) 등에도 여과의 공능이 있으니 마땅히 작용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취과와 여과의 공능 중] 절반의 작용을 갖을 경우 삼세는 서로 뒤섞이고 말 것이다.23)
[삼세 실유설에 대한 비판]
[삼세 실유설에 대해] 이미 간략하게 따져 보았으니, 다음으로 마땅히 널리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엇이 작용을 장애하며, 작용이란 무엇인가.
[작용이 법체와] 다르지 않다면 시간의 차별은 바로 허물어질 것이며,
[미래ㆍ과거가] 실재한다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미 멸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법성은 매우 깊고도 깊도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법 자체가 항유(恒有)한다면 응당 마땅히 모든 때에 걸쳐 능히 그 작용이 일어나야 할 것인데, 어떠한 힘이 장애하여 이러한 법체로 하여금 어느 때는 그 작용을 일으키게 하고 어느 때는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인가?
만약 중연(衆緣)이 화합하지 않을 때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같은 해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4)
또한 이러한 [또 다른] 작용은 어떻게 과거ㆍ미래ㆍ현재가 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작용 중에 또다시 다른 작용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25)
만약 이러한 작용은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럼에도 다시 설하여 말하기를, ‘작용은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무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항상 존재해야 할 것[非無]이며,
따라서 마땅히 ‘작용이 이미 소멸한 법을 과거라 하고 아직 작용을 갖지 않은 법을 미래라고 이름한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작용이 법체와 다른 것이라고 인정할 경우 이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지만,
[작용과 법체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이 같은 과실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앞에서] 설정한 삼세의 의미는 바로 허물어지고 만다.
이를테면 만약 작용이 바로 법체라고 한다면,
법체가 이미 항유(恒有)이기 때문에 작용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어떻게 어느 때를 일컬어 과거니 미래니 할 수 있을 것인가?26)
따라서 그들(유부종)이 설정한 삼세의 의미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유위의 법으로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라 이름하고,
이미 생겨나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을 ‘현재’라 이름하며,
이미 소멸한 것을 ‘과거’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유부종)은 마땅히 다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현재의 법체가 실유인 것처럼 과거ㆍ미래의 법체도 역시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다시 무엇이 ‘이미 소멸한 것’인가?
이를테면 유위의 법체가 진실로 항유라고 한다면,
어떻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과 ‘이미 소멸한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무엇이 결여되어 그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즉 미래)’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생겨난] 후에 다시 무엇이 결여되어 그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소멸한 것(즉 과거)’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따라서 ‘법은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本無今有, 즉 현재]하며, 존재하다가 다시 비존재로 돌아간다[有已還無, 즉 과거]’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삼세의 의미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마땅히 일체종(一切種)의 유위법도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유부종)이 설한,
‘항상 유위의 온갖 상(相, 즉 생주이멸)과 화합하고 있기 때문에 제행(諸行)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非常]’는 사실,
이것은 다만 헛된 말일 뿐이니, 생멸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법체는 항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존재[性]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니,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체가 항유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존재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지만
법체와 그 존재는 더 이상 다르지 않으니,
이러한 주장은 진정코 자재신의 조작인 것인가?27)
또한 그들(유부종)이,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에 과거ㆍ미래 2세의 법체 실유이다”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경부사)도 역시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설한다.
이를테면 과거세는 증유(曾有) 즉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서의 존재이고,
미래세는 당유(當有) 즉 앞으로 있을 것으로서의 존재이니,
원인과 결과이기 때문이다.28)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지만, 과거ㆍ미래가 현재와 같은 실유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경부)
누가 그러한 [과거ㆍ미래세의] 존재[有]가 현재세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던가?
(유부)
현재세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면 그러한 존재는 어떠한 것인가?
(경부)
그것은 과거ㆍ미래 2세의 법 그 자체[自性]로서 존재한다.
(유부)29)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시 힐난해야 할 것이니,
만약 [과거와 미래의 법이] 다 같이 실유라고 한다면 어떻게 과거ㆍ미래의 존재[性]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계경에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일찍이 있었든 원인적 존재[曾因性], 앞으로 있을 결과적 존재[當果性]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일 뿐 그 자체 실유라는 말이 아니다.
즉 세존께서는 인과를 비방하는 견해를 부정하기 위하여 증유와 당유의 의미로써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30)
‘존재한다[有]’는 말은 실재하는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법 모두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간에서,
‘등불은 [그것을 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先無]’거나
‘등불은 [그것을 끈] 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後無]’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등불이 이미 꺼져 있다[有燈已滅]. 그러나 지금 내가 끈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할 경우, 그 뜻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존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들 장계외도(杖髻外道)를 위해,
“업이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滅盡) 변괴(變壞)하였을지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오히려 존재한다”고 설하였겠는가?
어찌 그들(외도)이 업이 일찍이 존재하였음[曾有性]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세존께서 거듭하여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라고 하겠는가?31)
그것(‘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업에 의해 인기된 현재 상속신 중의 여과(與果)의 공능에 근거하여 은밀히 ‘존재한다’고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같은 과거의 업이 현재 실유하는 존재라면 과거를 어찌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32)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박가범께서 『승의공경(勝義空經)』 중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그것은 어디(즉 미래)로부터 온 곳이 없으며,
안근이 멸할 때에는 [어떤 다른 곳으로 가] 조작하여 집기[造集]하는 바도 없다.
그것은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비존재가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33)
그러나 만약 과거ㆍ미래의 안근이 실유한다면,
경에서 마땅히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등의 말씀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말씀(『승의공계경』)이 현세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해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현세의 존재[性]와 그러한 안근은 그 자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즉 만약 현세에 [근거하여]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없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안근이 과거ㆍ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이미 성립한 것이다.34)
또한 그들(유부종)이 설한,
“요컨대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식(識)이 생겨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 2세 자체는 실유이다”고 한 것에 대해,
마땅히 다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의근과 법경을 연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법경은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能生緣]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所緣境]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법경이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래 백천 겁 후에 응당 존재하게 될 그러한 법이나 혹은 응당 존재하지 않을 법이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되어 지금 의식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열반의 존재는 생겨난 일체의 모든 존재와 상위하는 것인데, 그것이 능히 [의식을]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가 될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경부사)도 과거ㆍ미래 역시 소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35)
만약 [과거ㆍ미래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면, 어떻게 소연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인가?(유부)
우리는 ‘그것(과거ㆍ미래법)은 소연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설한다.(경부)
어떠한 방식으로 소연을 성취하는 것인가?(유부)
말하자면 증유(曾有) 즉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과 당유(當有) 즉 앞으로 존재할 것으로서의 소연을 성취한다.
즉 과거의 색계ㆍ수 등을 기억할 때 현재처럼 분명하게 그것을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이 일찍이 존재하였을 때의 형상을 추억할 뿐이다.
또한 반대로 미래의 당유를 관찰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일찍이(즉 과거) 현재시점에서 지각[領]하였던 색상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여 ‘존재한다’ 하고,
역시 또한 당래(미래) 현재시점에서 지각될 색상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거슬러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과거ㆍ미래가] 현재처럼 존재한다면 응당 마땅히 현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과거ㆍ미래] 자체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그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과거ㆍ미래는 극미가 산란(散亂)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치 또한 그렇지 않으니, 그것의 상을 취(인식)할 때에는 산란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6)
또한 그러한 [과거ㆍ미래의] 색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의 색과 동일하지만 오로지 극미의 산란만이 다르다고 한다면, 극미의 색법 자체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37)
또한 [삼세의] 색법은 오로지 극미의 취집ㆍ산란일 뿐이기에 궁극적으로 생성ㆍ소멸이라고 이름할 만한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사명자(邪命者)의 주장을 존중하고 선서(善逝, 여래의 다른 이름)가 설한 계경을 버리고 배반하는 꼴이 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8)
또한 수(受) 등은 극미가 취집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과거ㆍ미래를 [극미가] 산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수’ 등에 대해 [과거의 그것을] 추억하고, [미래의 그것을] 거슬러 관찰하는 경우에도 역시 아직 소멸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때(즉 현재)의 상에 대해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현재의 그것처럼 [과거ㆍ미래의 그것도] 그 자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자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마땅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그 이치 역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연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소연은 마땅히 제13처(處)가 되어야 할 것이다.(유부)39)
모든 이가 제13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데,
이러한 능연(能緣)의 식(識)은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만약 ‘그 같은 [제13처라고 하는] 명칭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마땅히 그 같은 명칭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40)
또한 만약 일찍이 [발성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말[聲先非有]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
이 때 이러한 능연의 식은 무엇을 소연으로 삼은 것인가?
만약 ‘그러한 말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 때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구하는 자[求聲無者]도 응당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기 앞서] 발성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의 미래 상태이다’고 한다면,
[그대의 종의에서는] 미래가 실유인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과거ㆍ미래의 말은 현세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본질[體]은 [삼세에 걸쳐]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 본질상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므로 식은 존재하는 대상이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 모두를 소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즉 석가보살)께서,
“세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는 알고 나는 본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결코 없다”고 설하였지만,
이 말의 뜻은,
‘다른 이들은 증상만을 품고 또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에 대해 [존재의] 상을 드러내어 존재한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오로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존재한다고 관찰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일 뿐이다.
만약 그 뜻이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만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일체의 지각[覺, 심소를 말함]은 모두 [실재하는] 소연을 갖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대상에 대한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을 수 있고, 혹은 차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41)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박가범께서 다른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왔도다, 필추여! 그대들이 만약 능히 나의 제자가 되어 아첨함[諂]이 없고 거짓[誑]이 없고 믿음[信]이 있고 부지런함[勤]이 있으면 나는 아침에 그대들을 가르쳐 저녁에 수승함을 획득하게 할 것이며,
나는 저녁에 그대들을 가르쳐 아침에 수승함을 획득하게 할 것이니,
바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유상(有上)은 바로 유상이고, 무상(無上)은 바로 무상임을 알게 할 것이다.”42)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유부종)이 설한,
“인식에는 그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는 실유이다”는,
사실 역시 [삼세실유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유부종)이 설한,
“업에는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는 실유이다”는,
사실 역시 이치상 그렇지가 않으니,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과거의 업이 능히 미래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된 상속(相續)이 전변(轉變) 차별(差別)되어 미래의 결과로 낳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파아품(破我品)」(본론 권제30) 중에서 널리 현시(顯示)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ㆍ미래가 실유라고 주장한다면, 결과 자체[果體]도 모든 때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업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 어떠한 공능을 갖는 것인가?
만약 능히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겨난 결과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는 것[本無今有]으로, 그 같은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법이 모든 때에 존재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대해 능생(能生)의 공능이 있을 것인가?
또한 [그럴 경우] 우중외도(雨衆外道)의 사론(邪論)을 드러내어 성취하게 될 것이니,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시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필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필시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필시 소멸하지 않는다.”43)
그러나 만약 [과거의 업이] 능히 결과로 하여금 현재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결과로 하여금 현재를 성취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44)
만약 [결과를] 인기(引起)하여 다른 처소(즉 현재)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기된 결과는 그 자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무색법은 당래 어떻게 인기하여 [다른 처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결과가 인발(引發)된 것(낳아진 것)이라면 마땅히 그 자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과거의 업이 결과를 인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본질 상에 차별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그 같은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만약 ‘과거와 미래가 실로 존재한다’고 설할 것 같으면,
이는 성교(聖敎)에 대해 잘 설한 것[善說]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 만약 ‘일체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설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계경에서 설한 바대로 설해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범지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존재는 오로지 12처(處)이며, 혹은 삼세는 오로지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말을 설할 뿐이다.”45)
만약 과거ㆍ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히 계박함[能繫]과 계박되는 것[所繫]과, 그리고 그러한 계박으로부터의 떠남[離繫]이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과거번뇌)에 의해 생겨나 [미래번뇌의] 원인이 되는 수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의 능히 계박하는 번뇌가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이며,46)
그것(과거ㆍ미래의 경계)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의 수면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의 경계에 의해 계박되는 일[所繫事]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수면이 끊어지는 경우 이계(離繫)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실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능히 회통하여 해석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종의를 애호하는 모든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니,
‘법성(法性)은 너무나 심오하여 헤아릴 만한 경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어찌 능히 해석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곧 다른 갈래[異門]가 있기 때문으로, 이것이 생겨나면 이것이 멸하니, 이를테면 색 등이 생겨나면 바로 색 등이 멸한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다른 것이 생겨나면 다른 것이 멸하니, 이를테면 미래세가 생겨나면 현재세가 멸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시간[世]을 ‘생(生)’이라고 이름하니, 바로 생겨나는[正生] 때는 시간에 의해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시간에 [제법의] 생이 존재한다고 설하니, 미래세는 다찰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47)
방론(傍論)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소연의 경계[事]가 이미 끊어졌으면, 그것은 계박을 떠난 것(즉 離繫)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가 계박을 떠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온갖 소연의 경계가] 끊어진 것인가?48)
만약 소연의 경계가 계박을 떠난 것이면 그것은 반드시 이미 끊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소연의 경계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계박을 떠나지 않은 경우가 있다.49)
끊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계박을 떠나지 않은 그 같은 소연의 경계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 밖의 변행수면과,
아울러 전품(前品)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이를 연으로 하는 그 밖의 수면이 여전히 그것을 계박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견도위(見道位)에서 고지(苦智)가 이미 생겨났으나 집지(集智)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견고소단의 온갖 소연의 경계는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고,
능히 이(견고소단의 소연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견집소단의 변행수면이 여전히 이를 계박한다.
아울러 수도위(修道位)에서 어떠한 도가 생겨나 9품(品)의 소연의 경계 중에서 전품(前品)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능히 이(이미 끊어진 소연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그 밖의 아직 끊어지지 않은 품류의 수면은 여전히 이것을 계박한다.50)
[소연의 경계는] 끊어졌을지라도 계박을 떠나지 않은 경우는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수면과 소연에의 수증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에 따라 각기 개별적으로 답하게 되면 많은 말과 논의를 허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간략한 비바사(毘婆沙)를 지어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에 의해 적은 공력을 들이고서도 능히 크나큰 물음의 강물을 건널 수 있는 것이다.
즉 법은 비록 다수일지라도 간략히 분별하면 열 여섯 종류가 되니, 3계의 5부(部)와 무루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능히 그것을 연으로 하는 식(識)의 명칭과 수(數)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마땅히 어떠한 법이 어떠한 식의 경계가 되는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어떠한 수면이 수증하는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야흐로 어떠한 법이 어떠한 식의 경계가 되는지 마땅히 알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으로서,
만약 욕계에 계속되는 것이라면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와
무루식에 의해 현행한다.
색계의 그것은 자계와 하계의 각 세 가지와
상계의 한 가지와 정식(淨識, 즉 무루식)의 경계가 되며
무색계의 그것은 삼계 모두의
각 세 가지와 정식에 의해 현행한다.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모두
여기에 자계ㆍ자부의 식을 더한 것의 경계가 되며
무루의 법은 삼계 중의
뒤의 세 가지(즉 견멸ㆍ도ㆍ수소단)와 정식의 경계가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은 각기 다섯 가지 식(識)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색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다섯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51)
만약 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제법은 각기 여덟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자계와 하계(즉 욕계)의 세 가지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상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여덟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52)
만약 무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의 제법은 각기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삼계 각각의 세 가지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무루의 식은 열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견멸ㆍ견도소단의 제법은 각기 자식(自識, 자계ㆍ자부의 식)의 소연이 된다는 사실을 더해야 한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멸소단의 법은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욕계 견고소단)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멸소단의 식을 더한다는 말이다.53)
그리고 견도소단의 경우도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도소단의 식을 더한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계속되는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가지와 열한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만약 무루법의 경우라면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삼계 중의 각기 뒤의 세 부(部), 즉 견멸ㆍ견도ㆍ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열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논설의 뜻을 포섭하기 위해 다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면 이와 같다.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으로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계속되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다섯ㆍ여덟ㆍ열 가지 식(識)의 소연이 된다.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각기 자식(自識)의 소연이 되는 것도 더하며,
무루법의 경우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열 가지 식(識)의 경계가 된다.
이와 같이 열여섯 가지 종류의 법은 열여섯 가지 식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알았다. 이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어떠한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
만약 각기 개별적으로 밝힌다면 글월이 너무나도 번잡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것의 일부분만을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바야흐로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계박되는 소연의 경계[所繫事] 가운데 낙근(樂根)에는 몇 가지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낙근에는 모두 일곱 가지 종류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욕계 한 가지 즉 수소단과 색계의 5부와, 일곱 번째로서 무루단이 바로 그것이다.54)
그러나 일체의 무루식은 온갖 수면에 의해 수증되지 않는다는 것은 앞(본론 권제19)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 중에서는 앞의 여섯 가지에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 수소단과 아울러 온갖 변행수면, 그리고 색계의 일체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에는 다시 몇 가지 종류의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는 모두 열 두 가지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즉 욕계에는 견멸소단을 제외한 네 가지가, 색계에는 5부가, 무색계에는 견도제소단과 수소단의 두 가지가, 그리고 무루가 열두 번째가 되니,
이것들은 모두 능히 낙근을 연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의 4부와 색계의 유위연과 무색계의 2부와 아울러 온갖 변행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을 연으로 하여서는 다시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는 모두 열네 가지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열두 가지에다 다시 두 가지 종류를 더한 것이니,
바로 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이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열네 가지 식은 능히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을 연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와 색계에 수증하는 수면은 앞에서와 같고, 무색계에는 4부의 수면이 수증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부분적인 논설에 준하여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이 그것(즉 수면)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유수면(有隨眠)’이라 이름한다.55)
그렇다면 그것은 이러한 마음, 즉 유수면심에서 반드시 수증하는 것인가, 수증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혹 수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그러한 수면이] 마음과 상응하고, 아울러 마음을 연으로 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수면이] 마음과 상응하고 나서 끊어졌을 때에는 더 이상 수증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뜻에 의거하여 마땅히 이같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염(有染)과 무염(無染)인데,
유염의 마음은 두 가지와 통하지만
무염의 마음은 수증에 국한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염과 무염의 마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6)
이 중에서 [수면은] 유염의 마음에 수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상응수면과 소연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런데 상응수면이 이미 끊어져 수증하지 않을 때에도 ‘유수면’이라고 설하는 것은 항상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57)
그러나 만약 무염의 마음인 경우 오로지 수증하는 때에 국한하여 [유수면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이것을 연으로 하는 수면은 반드시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로지 수증에 의거하여서만 ‘유수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58)
이상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이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무엇이 앞에 생겨나고 무엇이 뒤에 생겨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명과 의(疑)와 사견과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와 견취와
탐(貪)과 만(慢)과 진(瞋)의 순서대로,
앞의 것에 의해 뒤의 것이 인기되어 생겨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온갖 번뇌가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먼저 ‘무명’으로 말미암아 진리[諦]를 알지 못하여 고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지 않으려고 한다.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으로 ‘의(疑)’를 낳게 되니,
이를테면 [진리를] 듣고도 바로,
‘괴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괴로움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하는,
두 가지 갈래의 유예(猶豫, 즉 의심)를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예로부터 ‘사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그릇되게 듣고 그릇되게 생각하여 그릇된 결정을 낳아,
‘고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함에 따라 ‘유신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5취온 중의 괴로움의 이치가 없다고 부정하여,
‘이것(오취온)은 바로 나[我]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신견으로부터 ‘변집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아’에 근거하여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집견으로부터 ‘계금취’를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아’에 따른 그 중의 한 극단에 집착하여 이러한 집착을 능정(能淨, 청정도를 말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계금취로부터 ‘견취’를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한 극단에 대한 집착을] 능정이라고 간주하고서 반드시 그 같은 집착을 수승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취로부터 다음으로 ‘탐’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으로부터 다음으로 ‘만’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여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이를 능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으로부터 그 후 ‘진’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여 자기를 믿고 다른 이가 일으킨 견해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능히 이를 참지 못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자신의 견해를 취하고 버리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진을 낳아 버려지는 견해에 대해] 미워하고 싫어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견제소단(見諦所斷)의 탐 등을 낳을 때에도 자상 속의 견(見)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9)
이상과 같은 논설은 바야흐로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이지만,
만약 그러한 순서를 뛰어넘어 논설한다면 전후로 정해진 바가 없이 일어난다.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 인연에 의해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면을 끊지 않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경계가 현전하며
비리의 작의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것을 혹(惑)에 인연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60)
바야흐로 장차 욕탐의 전(纏)을 일으키려고 하는 때는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아직 변지(遍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61)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가 현재전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연으로 하는 비리(非理)의 작의(作意,올바르지 못한 의욕ㆍ경각)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힘으로 말미암아 욕탐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세 가지의 인연은 그 순서대로 바로 원인과 경계와 가행의 세 가지 힘인 것이다.
그 밖의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상의 논의는 바야흐로 인연을 모두 갖춘 번뇌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만,
혹 어떤 경우 오로지 경계의 힘에만 의탁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일도 있으니, 이를테면 퇴법근(退法根)의 아라한 등이 그러하다.62)
3) 누ㆍ폭류ㆍ액ㆍ취
앞에서 논설한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는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라고 설하고 있다.63)
‘누(āsrava)’란 3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루(欲漏)이며,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이다.
‘폭류(ogha)’란 4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폭류(欲瀑流)이며, 둘째는 유폭류(有瀑流)이며, 셋째는 견폭류(見瀑流)이며, 넷째는 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액(yoga)’이란 4액을 말하는 것으로, 4폭류에서 설한 것과 같다.
‘취(upādāna)’란 4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취(欲取)이며,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이며,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64)
이와 같은 ‘누’ 등의 본질 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것을 욕루라고 하며
유루는 상 2계의 번뇌로서
오로지 치를 제외한 것이다.
즉 다 같이 무기이며, 내면에서 생겨나고
정려지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합한 것이며
무명은 모든 유(有)의 근본이기 때문에
따로이 하나의 ‘누’로 삼은 것이다.
폭류와 액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지만
견(見)을 따로이 건립한 것은 날카롭기 때문으로
견은 ‘머물게 한다’는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누’에서는 따로이 독립시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욕액과 유액과 아울러 ‘치’와,
‘견’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을 ‘취’라고 이름하니
무명(즉 치)을 따로이 설정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유(有)를 능히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마흔 한 가지의 법[物]을 모두 ‘욕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서른한 가지의 근본번뇌와 아울러 열 가지 전이 바로 그것이다.65)
색계ㆍ무색계의 번뇌 중의 치를 제외한 쉰두 가지의 법을 모두 ‘유루’라고 이름하니,66)
이를테면 상 2계의 근본번뇌로서 각기 스물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 거기에도 혼침(惛沈)과 도거(掉擧,각기 10전의 하나)의 두 종류의 전(纏)이 존재하지 않는가?
『품류족론』 중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유루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색계ㆍ무색의 2계에 계속되는 결(結)과 박(縛)과 수면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이 바로 그것이다.”67)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것을 어찌 설하지 않는 것인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말하기를,
“그 같은 2계에는 ‘전’이 적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68)
어떠한 이유에서 상 2계의 수면을 모두 함께 설하여 하나의 유루로 삼은 것인가?
다 같이 무기성이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며, 동일한 삼매의 상태[定地]에서 생겨나니, 이러한 세 가지 뜻이 동일하기 때문에 [상 2계의 수면을] 합하여 하나로 삼은 것이다.69)
즉 앞(본론 권제19 초두)에서 설한 ‘유탐(有貪)’이라 이름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여기서도 ‘유루’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3계의 열다섯 가지의 무명을 무명루로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것(즉 무명)만을 따로이 ‘누’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인가?
무명은 능히 모든 존재[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70)
폭류와 액의 본질은 ‘누’와 동일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견(見)을 따로이 설정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한 욕루는 바로 욕폭류와 욕액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는 바로 유폭류와 유액이다.
그리고 거기서 온갖 견을 따로이 떼어내어 견폭류와 견액으로 삼은 것은, 이를테면 그것의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견루(見漏)는 별도로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
[생사의 바다 중에] 머물게 하는 것을 일러 ‘누’라고 이름하니, 뒤(다음 본송)에서 마땅히 논설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견’은 그러한 뜻에 따르지 않을 뿐더러 그 성질 또한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누’에서는 [견루(見漏)라는] 독립된 명칭을 건립하지 않고 다만 다른 번뇌와 합하여 ‘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스물아홉 가지의 법을 욕폭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에 각기 다섯 종류가 있고, 의(疑)의 네 가지와 전(纏)의 열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71)
스물여덟 가지의 법을 유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색계ㆍ무색계의] ‘탐’과 ‘만’의 각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서른여섯 가지의 법을 견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삼계 중의 각기 12견이 바로 그것이다.
열다섯 가지의 법을 무명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삼계의 무명 각각에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액와 4폭류는 동일하다.
다시 4취의 본질은 4액과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욕취와 아어취에 각기 무명을 더한 것과, ‘견’을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은 앞의 액(軛)과 다르다.72)
즉 앞의 욕액에 욕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네 가지의 법을 모두 욕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무명의 각기 다섯 가지와, ‘의’의 네 가지와 아울러 10전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유액에 상 2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여덟 가지의 법을 모두 아어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만ㆍ무명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견액 중의 계금취를 제외한 나머지 서른 가지의 법을 모두 견취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나머지 여섯 가지(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의 법을 계금취라고 이름한다.
어떠한 이유에서 계금취를 별도로 설정한 것인가?
이것만이 홀로 성도(聖道)에 적대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며,
두 가지(즉 非因計因과 非道計道) 모두 출가와 재가의 무리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73)
이를테면 재가의 무리들은 이것에 속아서 스스로 굶주리는 일 등을 하늘에 태어나는 도라 여기기 때문이며, 온갖 출가의 무리들은 이것에 속아서 애호할 만한 경계를 버리는 것(즉 고행)을 청정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무명을 별도의 ‘취’로 건립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온갖 존재에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인데, 모든 무명은 능히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한 것으로, 그것은 지극히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능히 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만 다른 번뇌와 합쳐서 ‘취’로 건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계경에서 설하기를,
“욕액(欲軛)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욕’ 중의 욕탐(欲貪)ㆍ욕욕(欲欲)ㆍ욕친(欲親)ㆍ욕애(欲愛)ㆍ욕락(欲樂)ㆍ욕민(欲悶)ㆍ욕탐(欲耽)ㆍ욕기(欲耆)ㆍ욕희(欲喜)ㆍ욕장(欲藏)ㆍ욕수(欲隨)ㆍ욕착(欲著)이 마음을 묶어 누루는 것이니, 이것을 욕액이라 이름한다.
유액(有軛)과 견액(見軛)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74)
또 다른 경에서는,
“욕탐을 취(取)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욕’ 등의 네 가지에 대해 일으키는 욕탐을 ‘욕’ 등의 ‘취’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75)
이와 같이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 누ㆍ폭류ㆍ액ㆍ취라고 설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면 등의 명칭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세, 두 가지에서의 수증
수축(隨逐)과 수박(隨縛)
머묾과 유전ㆍ표류ㆍ화합ㆍ집취
이것이 바로 수면 등의 뜻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번뇌(즉 10수면)가 현재전할 때 그 행상(行相)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微細)’라고 이름한다.76)
‘두 가지에서의 수증’이란,
말하자면 [수면은] 능히 그것의 소연 및 그것에 상응하는 법과 뒤엉켜[惛滯] 증장하기 때문이다.
‘수축’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의] 득(得)을 일으켜 항상 유정을 쫓아다니면서 과환(過患)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가행을 지어 그것(수면)을 생겨나지 않게 하더라도, 혹은 애써 노력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지라도 자꾸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수박(隨縛)’이라고 한다.
곧 이와 같은 뜻으로 말미암아 수면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수면은] 유정을 생사(生死)에 체류시켜 오래 머물게[住] 하며, 혹은 유정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流轉)시키는 것으로,77)
그들의 상속은 육창문(六瘡門, 즉 6근을 말함)에서 끊임없이 번뇌를 누설하기 때문에 수면을 일컬어 ‘누(āsrava)’라고 하였다.
또한 선품을 극심히 표탈(漂奪)시켜 버리기 때문에 ‘폭류(ogha)’라고 이름하였고,
유정을 [3계ㆍ5취ㆍ4생과] 화합시키기 때문에 ‘액(yoga)’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능히 의지하여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취(upādāna)’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만약 좋은 해석이 되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78)
온갖 경계 중으로 상속(相續)을 흘러들게 하여 끊임없이 허물을 누설(漏泄)하기 때문에 ‘누’라고 이름한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구수(具壽)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배를 당기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설혹 크나큰 힘을 들이더라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 배를 그대로 놓아두어 강물의 흐름에 따라 가게 하면 비록 힘을 들이지 않을지라도 [내려]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심이나 염심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9)
즉 이 경의 뜻에 준하여 본다면, 경계 중에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수면의] 세력이 강력하게 될 때를 설하여 ‘폭류’라고 이름한다.
즉 모든 유정이 거기에 떨어질 경우 오로지 거기에 따라야 할 뿐 능히 어기거나 거역할 수 없으니, 솟구치거나 떠오르거나 떠내려가거나 물결치면 그것을 어기거나 거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현행할 때 지극히 두드러지지 않은 수면을 설하여 ‘액’이라 이름하니,
다만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종류의 괴로움과 화합하게 하기 때문에, 혹은 자주자주 현행하기 때문에 ‘액’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수면은] 욕경(欲境) 따위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취’라고 이름한 것이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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