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7월 5일(금)
장소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장릉(長陵): 조선16대 인조와 첫번째 왕비 인열왕후의 능(합장릉)
찾아가는길 : 합장역 1번출구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2200번 버스 탑승하여 '법흥1리 이주단지'(합정역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에서 하차하여 길건너 장릉쪽으로 도보로 10분정도 가면 장릉이 보임. 300m정도 걷다가 작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300m 정도 가면 주차장과 장릉매표소가 보임.
▷ 장릉(長陵) 이야기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인조, 오른쪽에 인열왕후를 모셨다. 장릉은 1635년(인조 13) 인열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운천리에 조성되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었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인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장릉이 풍수상 불길하고, 화재가 자주 일어나며 뱀의 피해가 잦자 1731년(영조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능의 형식을 쌍릉에서 세종의 영릉(英陵)의 예에 따라 합장릉으로 바꾸었다.
현재 장릉 능침 석물은 옛 장릉의 석물과 옮긴 후 새로 만든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옛 장릉의 석물로는 병풍석 일부(인석), 난간석 일부, 석상(혼유석) 2개,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양, 석호이며, 그 외 병풍석과 난간석은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다. 특히 기존 병풍석의 면석(面席)과 우석(隅石)의 무늬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이기 때문에 예에 어긋난다 하여 모란과 연꽃무늬로 바꾸었다. 이는 이후에 조성된 병풍석 조각에도 영향을 끼쳤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고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다.
▷ 인조(仁祖) 이야기
인조(재세 : 1595년 음력 11월 7일 ~ 1649년 음력 5월 8일, 재위 : 1623년 음력 3월 13일 ~ 1649년 음력 5월 8일)는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이 되었고 이후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정권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한 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반정공신 책록의 불만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는 등 즉위 초 반정으로 잡은 정권이 불안정하였다. 이괄의 난 이후에는 총융청(摠戎廳)을, 정묘호란 이후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만들어 군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정책으로 인해 두 차례의 침략(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1649년(인조 27)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열조(烈祖)라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인조라 정하였다.
▷ 인열왕후(仁烈王后) 이야기
인열왕후 한씨(재세 : 1594년 음력 7월 1일 ~ 1635년 음력 12월 9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년(선조 27)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와의 사이에서 6남(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1녀를 낳았으며, 1635년(인조 13) 아이를 낳은 후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사거리가 나타나면 왼쪽방향으로 가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