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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기도 이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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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서신일(徐神逸) |
주요 집성촌 | 경기도 이천시 부본면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
주요 인물 | 서목, 서필, 서희,서봉,서눌, 서유걸, 원목왕후,서석, 서정,서균,서공,서순,서안정, 서린, 서릉,서념, 서윤, 서충, 서견, 서선, 서호, 서강, 서기, 서지,서경충, 서춘무,서인주,서병학, 서일, 서두수,서민호,서종채,서광조,서태석, 서정범,서정수, 서남표, 서향순,서성환,서재응,서영택,서영훈 |
인구(2000년) | 172,072명 (45위) |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목(徐穆)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이처럼 이천 서씨는 고려 건국에 협력해 서필(徐弼), 서희(徐熙), 서눌(徐訥), 서정(徐靖),서균(徐均),서공(徐恭)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명문 귀족가문이 됐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 세종 때 우군도총체(右軍都摠制)를 지낸 서선(徐選), 단종 때의 암행어사 서호(徐皞), 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한 서강(徐崗), 중종 때 반정(反正)에 참여해 대사간에 오른 서지(徐祉),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 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은 서춘무(徐春武) 등의 인물이 있다[1].
성씨제도(姓氏制度)는 원래 왕가(王家)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이다. 한국의 경우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三國時代) 고구려의 주몽이 고씨(高氏), 백제의 온조가 부여씨=여씨(扶餘氏=餘氏), 신라의 혁거세가 박씨(朴氏)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2].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장수왕(419∼491), 백제는 근초고왕(346∼376)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달리 신라 진흥왕(540∼576) 순수비에는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성(性)보다는 본(本)을 썼다는 것으로 풀이된다[3]. 고려 문종에 이르러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명문화하여 다양한 성씨가 생겨났다. 이와 함께 사대부 가문에선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정리한 가계 기록인 가승(家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족보는 양반의 자손임을 입증해야 과거를 볼 수 있었던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이며 훌륭한 조상에 뿌리를 둔 가문임을 내세우기 위해 시작됐다[4].
조선 세종 5년(1423년)에 발간된 문화 류씨(文化 柳氏)의 《영락보(永樂譜)》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다. 아쉽게도 《영락보》는 서문(序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다. 이천 서씨의 족보는 1524년 《갑신보(甲申譜)》가 최초로 발간됐다[5].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서아성 지명 유래설 등이 있다.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서우여(徐于餘)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駒王=徐駒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6].
서아성(徐阿城)의 지명 유래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를 따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 있다[7].
기자의 후손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8].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9].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신라(新羅) 때의 개국공신 아성(阿城) 대장군(大將軍) 서두라(徐豆羅)가 있다.
서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서신일(徐神逸, 817~902년)로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그의 생애 동안 헌덕왕에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그는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한천(漢川 : 지금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孝養山) 아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효양거사라 칭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니, 제자들이 몰려와 집 안팎으로 가득찼다.
서신일은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에 제자들이 “저희 가운데 스승님의 대를 잇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훗날 스승님의 묘(廟)를 누구에게 의탁하겠습니까. 다시 부인을 얻으시어 아들을 얻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청하여 그는 아내를 다시 얻었다. 어느 봄날 서신일이 노비들을 거느리고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에 꽂힌 사슴 한 마리가 불쑥 그의 앞으로 뛰어와 쓰러졌다. 서신일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른 다음 멍석 아래 사슴을 숨겼다.
곧이어 사냥꾼이 나타나 사슴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서신일은 “사냥꾼인 당신을 두려워하여 도망쳤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사슴이 왔겠소?”라며 사냥꾼을 돌려보냈다. 덕분에 사슴은 사냥꾼의 눈을 피했고, 상처를 치유받아 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낮에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宰相)에 올라 영달(榮達)을 누리도록 도우리라.”
그 일이 있은 뒤 서신일이 나이 85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내의령은 내의성(내사성과 문하성을 합친 최고의 중앙기관)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수상격에 해당한다. 서필의 아들이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의 땅을 회복한 장군이자 문신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11].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사하니 지금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마을 뒤의 효양산 산록에 있는 시조 서신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인주(인천) 이씨, 해주 최씨,남양 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으로 꼽힌다.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했다. [12].
서씨(徐氏)는 모두 이천서씨(利川徐氏) 서신일의 후손이며, 달성,대구(達城,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봉성(平當,逢城), 남평(南平), 남양,당성(南陽,唐城),부여(扶餘) 등 9파의 서씨로 나뉘었다.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뿌리는 이천 서씨(利川 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이천 서씨(利川 徐氏)에서 분관(分貫)되었다고 한다. 이천서씨 문헌에 서희(徐熙)의 네 아들 가운데 넷째 서주행(徐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내용이 있다[13]. 한편 《고려사》에는 서주행이 서희의 서자로 표기돼 있다[14].
달성 서씨(達城 徐氏)와 대구 서씨(大丘 徐氏)의 분리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은 《대구서씨족보》의 서문에서 “서씨는 본(本)이 둘이 아니었는데 뒤에 나누어진 모든 파(派)는 이천(利川)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모두가 아간공 서신일의 후손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15]. 이천 서씨에서 분관된 달성 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향파(鄕派)로 나뉘었다. 두 파는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제작해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 충돌이 심했다. 결국 영조(英祖)대인 1736년 경파(京派)가 단독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두 파는 완전히 갈라섰다. 족보상으로 달성 서씨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라 하고 대구 서씨는 소윤공(少尹公)파라고 갈래지운다. 소윤공파에 약봉파(藥峯派)가 있는데, 그 선대에 5세 실전(失傳)이라는 계대(繼代)의 단절이 있다.조선 3대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사람은 약봉 서성이다.
죽석공 서영보의 선대와 후대는 8대를 잇달아 대과에 합격했다. 그중에 두 명은 장원 급제자다. 조선 시대 초유의 일이다. 그의 고조부인 서종태가 영의정, 증조부인 서명균이 좌의정, 조부인 서지수가 영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삼대 정승집’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삼대 정승집은 이외에도 청송 심씨의 심덕부, 심온, 심회와, 동래 정씨의 정유길, 정창연, 정태화와 청풍 김씨 김구, 김재로, 김치인을 들 수 있다. 김구의 둘째사위는 서명균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공원 내에 있는 김구의 묘비문 글씨를 쓴 이도 서명균이다.
대구 서씨는 또한 ‘삼대 대제학’ 집으로도 유명하다. 대구 서씨의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과 광산 김씨의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과 연안 이씨의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과 전주 이씨 백강 이경여 집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대제학이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문은 대구 서씨가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극히 이루기 어려운 성취요 세상에 자랑할 만한 영예다. [16].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시조는 서진(徐晋)
달성 서씨의 원조(遠祖) 서진(徐晋)은 고려 사람으로 벼슬은 봉익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달성군이었고,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 주(周)씨였다[17]. 학유공파(學諭公派)는 달성 서씨 7세손 학유공 서도(徐渡)의 후손들로서, 학유공의 호는 군줍이었고, 일호는 월촌(月村)이다. 벼슬은 조선 무공랑 성균관 권지학유를 지냈고, 부인은 월성 정(鄭)씨였다. 묘소는 영천시 금호읍 귀암리 마당골 신좌(辛坐)이고 묘향일은 한식(寒食) 익일(翌日)이다[18]. 호잠파(湖岑派)는 달성 서씨 10세손 서수영(徐壽永)의 후손들로서, 서수영은 조선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고, 부인은 제주 양(梁)씨이며, 서기 1500년에서 1565년까지 살았다. 달성 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오늘날 달성공원의 주소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번지이다[19].
상서공(尙書公) 6세손 휘린(諱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상서공(尙書公) 13세손 휘연(諱演) 강호공파(江湖公派)
상서공(尙書公) 7세손 휘념(諱恬) 문한공파(文翰公派)
상서공(尙書公) 10세손 휘선(諱選) 공도공파(恭度公派)
상서공(尙書公) 8세손 휘윤(諱玧) 시랑공파증(侍郞公派證)
상서공(尙書公) 10세손 휘보(諱輔) 전서공파(典書公派)
상서공(尙書公) 현손(玄孫) 휘광(諱珖) 예빈공파(禮賓公派)
증손(曾孫) 휘익(諱翼) 부령공파증(副令公派證)
상서공(尙書公) 8세손 휘학종(諱鶴踵) 참봉공파역(參奉公派譯)
상서공(尙書公) 7세손 휘첨(諱詹) 소윤공파(少尹公派)
상서공(尙書公) 6세손 휘릉(諱稜) 절효공파(節孝公派)
상서공(尙書公) 2세손 휘눌(諱訥) 원숙공파(元肅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유(諱愈) 양경공파(良景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척(諱陟) 창사공파(倉使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진(諱晉) 교리공파(校理公派)
경기도 이천시 부본면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동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서희(徐熙, 942~998년)는 고려의 외교관이자 문신, 군인이다.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등용됐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돼 귀국했다. 성종 12년(993년) 거란(契丹)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히 반대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 결과고려는 거란과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 곧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를 포함한 강동6주의 영토를 수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숨을 거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됐다.
서일(徐一, 1881~192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우리정부는 서일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