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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인용된 자료들은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에서 ‘참나’와 ‘진아’와 ‘眞我’라는 주제어로 검색하여 여기에 실린 ‘통합대장경’에 사용된 ‘참나, 진아(眞我)’를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불경의 용법를 살펴, ‘참나, 진아(眞我)’의 용법을 간략히 살피보기로 한다.
1.
먼저 (1-1)과 (1-2)를 보면, ‘참나’는 ‘불성’임을 알 수 있다.
(1-3)에서는 중생은 하늘눈이 없고 번뇌 속에 있어서 스스로 여래의 성품인 ‘참나’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1-4)와 (1-5)에서는 내가 없음을 알면 <참나>를 얻을 것이라고 한다.
(1-3), (1-4). (1-5)의 ‘참나’는 ‘여래장’과 같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1-1) 대반열반경_4. 여래성품④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15
5음의 모양은 만들어진 것이니,
만들어진 것은 모래나 돌과 같아서 뚫을 수 있고 깨뜨릴 수 있지만,
불성인 <참 나>는 금강륜과 같아서 깨뜨릴 수 없다.
(1-2) 대반열반경_4. 여래성품⓹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16
선남자야, 오늘 여래가 말하는 <참 나>는 이름이 불성이니,
이러한 불성은 나의 불법 중에서 훌륭한 칼과 같다.
(1-3) 대반열반경_4. 여래성품⓹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18
사람이 땅에서 공중을 쳐다볼 때 새가 날아간 자리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선남자야, 중생도 그러하여, 하늘눈이 없고 번뇌 속에 있어서 스스로 여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아의 비밀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늘눈이 없는 자는 <참 나>를 알지 못하여 제멋대로 나라는 것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1-4) 대반열반경_8. 범행품⑥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45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내가 없다.
만일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내가 없다면, 무엇이 죽일 바가 되겠는가?
무상함을 죽이면 항상한 열반을 얻고, 괴로움을 죽이면 즐거움을 얻고, 공함을 죽이면 참됨을 얻고, 내가 없음을 죽이면 <참나>를 얻을 것이다.
(1-5) 대반열반경_12. 가섭보살품⑥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97
세상을 연민(憐愍)하는 큰 의왕[大醫王]이시며
몸과 지혜 모두 다 고요하시고
내가 없는 법 가운데 <참나> 있나니
그러므로 위없이 존귀하신 분께 예배합니다.
2.
(2)에서는 세존은 법왕이고 ‘참된 나[眞我]’이라고 하였다.
(3)과 (4)의 ‘참나, 진아’는 위의 (1-3), (1-4). (1-5)의 ‘참나’과 같은 용법으로 생각된다.
또 ‘여래장’과 같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2) 대방등무상경_1. 대운초분 대중건도(大衆健度)
https://cafe.daum.net/sutta-nipata/RSSL/5
법에 있어서 자재로움을 성취하시어
세존은 법왕이라 불리며
이 때문에 <참된 나[眞我]>라 하시고
위없는 즐거움 성취하셨습니다.
여래께서는 보배 자리에 올라
사자처럼 외치시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연설하시며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다 하십니다.
(3) 대승입능가경_10. 게송품 ②
https://cafe.daum.net/sutta-nipata/RT8y/28
“마치 땅 속에 묻힌 보물같이
또한 지하에 흐르는 물같이
비록 있지만 볼 수 없으니
온(蘊) 가운데 <진아(眞我)>도 또한 그러하네.”
“<진아(眞我)>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법을 훼방하고 유ㆍ무에 집착함이니
비구는 마땅히 갈마(羯磨:참회 작법)하여
물리쳐 버리고 함께 말하지 말라.”
“<진아>를 치연(熾然)하게 설함이
마치 겁화(劫火)의 불이 일어나듯 하여
무아의 빽빽한 숲 태워
모든 외도의 과실을 여의게 하라.”
“어찌 무아(無我)가 있으며,
환(幻) 등과 법의 유ㆍ무를
어리석은 이도 마땅히 진여를 나타내는데
어찌 <진아(眞我)>가 없으리오.”
(4) 백유경(喩經卷) 제3권
모든 범부들도 그와 같아서 번뇌 속에 살면서 선한 법에 굶주려, 멀리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위없는 법의 음식을 구하다가, 5음(陰) 가운데 나[我]가 있다고 제멋대로 헤아린다.
그래서 나라는 견해 때문에 나고 죽음에 흘러 치달리면서 번뇌에 쫓겨 자유를 얻지 못하고 세 갈래 나쁜 세계[惡趣]의 구렁에 떨어지고 만다.
날이 밝았다는 것은 나고 죽음의 밤이 다하고 지혜의 밝은 새벽이 되어 비로소 5음 속에는 <참 나[眞我]>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에 비유한 것이다.
3.
(5)의 ’진아, 참나’는 ‘보리의 위없는 승과’의 하나이며,‘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용법은 (1)의 ‘불성’이나 (2)의 ‘법왕’과 같은 용법으로 생각된다.
(6)에서는 참나[眞我]를 보는 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하였으니, (1), (2), (5)의 용법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5) 불설무상의경_3. 보리품(菩提品)
https://cafe.daum.net/sutta-nipata/RT9y/3
“아난아, 네 가지 보리의 위없는 승과(勝果)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가장 깨끗함이며, 둘은 <진아(眞我)>이며, 셋은 묘락(妙樂)이며, 넷은 항상 머무름이다.”
“이 전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나는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설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상주바라밀(常住波羅蜜)이며, 둘은 안락바라밀(安樂波羅蜜)이며, 셋은 <진아>바라밀(眞我波羅蜜)이며, 넷은 청정바라밀(淸淨波羅密)이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으뜸이며, 오묘한 즐거움의 수행을 등지고 괴로움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난 <참다운 나[眞我]>의 수행에 머문다.“
(6) 우바새계경_20. 정삼귀품(淨三歸品)
https://cafe.daum.net/sutta-nipata/RT3o/21
만약 해탈을 항상 함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알라. 곧 환(幻)이니 부처를 환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느니라.
만약 분명히 바로 <참나[眞我]>를 보면 이것이 해탈이니라.
4.
(7)에서는 (문맥상 명확하지는 않지만,) ‘참나’를 ‘깨달음의 인연’과 대조하고 있는 듯 보이며, 또 외도들이 말하는 ‘참나’에 부정적 의미가 함의된 것으로 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8)에서는 ‘참 나[眞我]를 인정하는 말’를 버려야 한다고 하였기에, 이것도 역시 ‘참나’의 부정적 의미가 함의된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겠다.
(7)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2권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覺緣]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梵志)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8) 보살염불삼매경_10. 정관품(正觀品)
https://cafe.daum.net/sutta-nipata/RS2Q/10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생기는 곳에 이와 같이 마음을 진실하게 하여 교만을 꺾고 지극한 뜻으로 들어서 바른 법을 길러 나가야 한다.
죽임과 도적질과 음란함과 게으름과 잘난 체와 시비(是非)하는 마음을 여의며,
<참 나[眞我]>를 인정하는 말과 삿된 비방을 여의고,
더럽고 어지러운 말을 제거하며, 모든 쟁론(諍論)을 없애야 한다.”
5.
이상에서 살핀 ’참나, 진아’의 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면 (1)-(6)에서는 ‘불성, 법왕, 해탈’ 등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또 ‘여래장’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여래장’은 ‘불성’을 함의하고 있으니, 결국은 둘 다 ‘불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7)과 (8)에서는 ‘참나, 진아’도 버려야 할 것으로 보는데, 이러한 ‘참나, 진아’는 결국 ‘나, 아’의 다른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6.
다른 한편으로, (9)에서는 ‘참나, 진아’를 설법의 방편으로 사용한 것을 말한다. 곧 실제로는 ‘참나, 진아’가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참나, 진아’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9)의 인용에서는 ‘참나[진아]’로 되어 있지만, <대반열반경>에서는 ‘참나[진아]’가 ‘나’로 되어 있다.
(9)와 (10)의 ‘참나[진아]’와 ‘나[아]’의 용법을 보면, (9)의 저자는 ‘나[아]=참나[진아]’로 보고 있는 셈이다.
(11)에서는 ‘나’는 여래장이고, 불성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이러한 서술과 (9)와 (10)에 관한 논의를 미루어 생각하면, ‘나=참나=여래장’이며, 이것들은 모두 불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9)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제4권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어린아이를 위해 행한다고 하는가? 가령 저 어린아이가 울 때 부모는 즉시 버드나무의 누런 잎을 가지고 말한다.
‘울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 내가 너에게 황금을 주마.’
어린아이가 보고는 진짜 황금이라고 생각하면서 문득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이 버들잎은 진짜 황금은 아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온갖 악을 지으려고 하면, 여래께서는 그를 위해 삼십삼천三十三天은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眞我]>이며 청정해서[常樂我淨] 오욕락五慾樂을 받는다고 설하신다.
중생은 이 즐거움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마음에 즐거움에 대한 탐착貪着이 생겨 더 이상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부지런히 삼십삼천의 선업善業을 짓는다.
그러나 실제로 생사는 항상하지 않고 즐거움도 없고 <참나>도 없고 청정함도 없는데, 방편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청정하다고 설하는 것이다. (....)”
(10) 대반열반경_9. 영아행품(嬰兒行品)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46
“또 어린 아기의 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기가 울 때에 그 부모가 누런 버들잎을 주면서 달래기를,
‘너에게 돈을 줄 터이니 울지 말라’ 하는데,
아기가 보고는 진짜 돈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돈이 아니다. 나무로 만든 소와 나무 말과 나무 남자와 나무 여자를 어린아이가 보고는 참으로 남자나 여자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데,
참으로 남자와 여자가 아닌 것을 남자와 여자라고 생각하므로 어린 아기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만일 중생들이 나쁜 업을 지으려 하면,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삼십삼천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과,
단정하고 자재하여 훌륭한 궁전에서 5욕락을 받는 일과,
6근으로 상대하는 것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중생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들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쁜 업을 짓지 않고 삼십삼천에 태어날 선한 업을 짓는데,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며 무상하고 낙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건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방편으로 말하는 것이다.”
(11) 대반열반경_4. 여래성품④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c2/15
“나라는 것은 여래장이라는 뜻이다.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진 것이 곧 나라는 것이다.
이 나란 것이 본래부터 한량없는 번뇌에 덮였으므로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7.
마지막으로 덧붙여 두기로 한다.
‘참나[진아]’라는 용어는 이른바 소승경전에서는 아예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승견전에서도 위의 몇몇 경전에서만 쓰였고, 거의 대부분의 대승경전에서는 쓰이지 않았다.
‘참나[진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오리혀 불교를 더 이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나[진아]’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의 성품은 무엇인지 등의 쓸데없는/잘못된 생각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가 아니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찌 따로 <참나>라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