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중권
17.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수행하는 복덕
【經】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능히 이 법문(法門)에서 그 뜻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수행하면,
여래는 부처님의 지혜로써 이런 사람을 다 알 것이요, 이런 사람들을 모조리 볼 것이며, 이런 사람을 다 깨닫게 하여 모두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의 덩어리를 성취할 수 있게 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른 아침에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고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다시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고 많은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 무렵에 또다시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고 많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한량없이 많은 몸과 이와 같이 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겁만큼 많은 몸을 보시하는 이가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고 신심을 내어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 복은 저 한량없는 아승기겁만큼 많은 몸을 보시한 복보다 뛰어날 것이다.
더구나 이 경을 베껴 쓰거나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며 수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히 설법한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論】
이 아래는 다시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어떤 법을 수행하여
어떠한 복덕을 얻는가?
또는 어떤 업(業)을 성취하는지
이와 같은 수행법을 설한 것이다.
‘어떤 법을 수행하는가’라고 한 것은 그 수행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떻게 나타내 보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명자(名字)에 세 가지 법 있으니
받아 지니고 듣고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이다.
수행은 다른 이로부터 자신에게 미치고
듣고 사색하여 수(修)의 지혜를 증득한다.
이 게송에서는 무슨 뜻을 말했는가?
저 명자(名字)에서 문혜(聞慧)를 성취할 수 있다.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받는 것이요,
둘째는 지니는 것이며,
셋째는 읽고 외우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게송에서 이르기를 “받아 지니고 듣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받아 지니는 수행은 법을 그대로 보호하여 지니는 마음에 의지하기 때문이요,
읽고 외우는 수행은 문혜(聞慧)를 넓히는데 의지하기 때문이니,
널리 많이 읽고 익히는 것을 문혜라고 한다.
이 명자(名字)에 세 가지 수행법이 있으니, 경에서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능히 이 법문에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라고 한 것과 같다.
그 수행으로 어떤 것을 얻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수행은 다른 이로부터 자신에게 미치고 듣고 사색하여 수(修)의 지혜를 증득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닦아서 얻는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에게 미치는 형태이다.
어째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에게 미친다고 하는가?
법문을 듣고 나서 닦기 때문에 이러한 차례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듣고 안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명자를 말하여 수행한다 했는데, 여기서는 왜 자신(自身)을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기서는 스스로를 순숙(淳熟)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중생도 교화하나니
일과 시간이 크기 때문에
복 가운데 가장 뛰어난 복덕이 된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저 명자는 문혜(聞慧)와 수행(修行)이 자기 자신을 순숙하게 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널리 설법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복덕을 얻는가?
어느 복덕이 더 뛰어난지 비교하여 헤아려본 것을 나타내 보였으니,
게송에 이르기를
“일과 시간이 크기 때문에 복 가운데 더 뛰어난 복덕이 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몸을 버린 복덕이 앞에서 몸을 버린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어째서 더 뛰어난가?
일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니, 곧 하루 동안에 많은 시간 동안 몸을 희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시간에 몸을 희사하기 때문에 경에서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첫 아침에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고 많은 몸을 보시하고 나아가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신심을 내어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 복은 저 한량없는 아승기겁만큼이나 많은 몸을 보시한 복보다 뛰어날 것이다.
더구나 이 경을 베껴 쓰거나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며 수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히 설법하는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