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 제5권
[게송의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상희기(常希奇)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말씀드렸다.
“이 게송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저 허공장보살에게 물어보면, 너를 위하여 연설해 주리라.”
상희기보살은 곧 허공장보살에게 질문하였다.
“대사여, 저는 지금 이 법문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지 못하니, 원컨대 어진이께서는 저를 위하여 그것을 연설해 주십시오.”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저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아는가요?”
상희기보살이 말하였다.
“그 메아리는 어떤 소리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허공장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저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몸인가요, 마음인가요, 물질인가요, 소리인가요, 또는 그 진실한 것인가요, 진실하지 않은 것인가요?”
“대사여, 메아리란 그 자체의 소리가 없고, 어떤 소리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므로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남자여, 메아리는 곧 진실된 것이 아니고 어떤 소리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니, 허공에서 나는 법음의 소리도 그러합니다.
범음은 부사의한 지혜로부터 나고, 마음을 거두어 지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메아리는 그 법문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일 뿐이니, 전달하는 것이 곧 법음의 소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선남자여, 그대는 인연의 화합으로 일어나는 이 깊고 깊은 이치에 대해 관찰해야 합니다.
인(因)에 의지하여 과(果)를 불러들이는가 하면, 또한 인과의 성품에는 유전(流轉)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두 가지의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조작하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연이 능히 과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법이 본래 화합함이 없음을 깨닫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설법하시기를,
‘번뇌를 아는 것도 곧 청정함이고, 번뇌를 끊지 않는 것도 곧 스스로 청정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뇌의 그 성품도 본래는 청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법을 시설구(施設句)라고 합니다.
저 번뇌라든가 청정함이라는 것은 다 수승한 이치의 근본 경지에 의지하여 건립(建立)되기 때문에, 수승한 이치의 근본 경지에서는 번뇌도 청정함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수승한 이치의 경지가 곧 아무 것도 없는 경지이고, 그 아무 것도 없는 경지가 곧 진리의 경지이고,
그 진리의 경지가 곧 공(空)의 경지이고, 그 공의 경지가 곧 나[我]의 경지이고,
그 나의 경지가 곧 일체 법의 경지이므로,
만약 일체 법의 경지가 위없는 공의 경지이고 고요한 경지이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임을 안다면, 그야말로 일체의 법에 집착함이 없어서 걸림 없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사리자가 상희기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어떤 연유로 그대의 명호를 상희기(常希奇)라고 하는 것입니까?”
상희기보살이 대답하였다.
“대덕 사리자시여, 저는 항상 일체의 법에 희유한 마음을 내어서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나 만족스러운 욕락(欲樂)을 얻지 못하였고,
또 일체 보살의 행에 항상 희유한 마음을 내어서 모든 유정들의 마음과 행을 깨닫는 지혜에 들기를 원하였으나 그렇지 못하였고,
또 일체 번뇌의 마업(魔業)으로 하여금 틈을 엿보지 못하게끔 항상 바른 법에 희유한 마음을 내었으나 그 역시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있어서 상희기라는 명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장로 사리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상희보살의 변재(辯才)가 이와 같이도 명료하니, 그는 일체의 부처님 법을 더럽힌 바가 없고 설법도 아무런 집착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삼매]
때마침 그 모임에 있던 보길상(寶吉祥)이라는 보살이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원컨대 그대가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삼마지를 연설해 준다면 그대의 연설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이에 허공장보살이 보길상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다음과 같은 삼마지(三摩地)가 있으니, 이른바 보살청정의락(菩薩淸淨意樂)이라는 삼마지는 그 모든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보리에 나아가기 때문이고,
일체유정무애광명(一切有情無礙光明)이라는 삼마지는 그 일체의 유정들에게 밝은 광명을 비춰주기 때문이고,
호자타(護自他)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고뇌와 위해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무구(無垢)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마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변조(遍照)라는 삼마지는 모든 선한 법을 증장하기 때문이고,
단엄(端嚴)이라는 삼마지는 맑고도 깨끗한 성품을 얻기 때문이고,
고광(高廣)이라는 삼마지는 능히 볼 수 없는 정수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고,
원리(遠離)라는 삼마지는 모든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이고,
회선(廻旋)이라는 삼마지는 부처님의 오른쪽으로 돌아 진정한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퇴전(退轉)이라는 삼마지는 온갖 외도의 삿된 소견을 물리치기 때문이고,
작락(作樂)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법의 동산을 거닐며 쾌락을 얻기 때문이고,
도구경(到究竟)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청정한 행을 닦아 피안(彼岸)에 이르기 때문이고,
위덕(威德)이라는 삼마지는 자재로운 마음을 얻어 나약함을 벗어나기 때문이고,
입평등(入平等)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유정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베풀기 때문이고,
지작업(知作業)이라는 삼마지는 짓는 업에 따라 과보를 알기 때문이고,
사자당(師子幢)이라는 삼마지는 몸의 터럭이 곤두서는 그러한 두려움을 다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심용건(心勇健)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번뇌의 마군들을 다 소멸시키기 때문이고,
분타리(芬陀利)라는 삼마지는 그 어떤 세간에서라도 물들지 않기 때문이고,
파도마(跛度摩)라는 삼마지는 마음의 장엄함을 갖추기 때문이고,
광장엄(光莊嚴)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불국토에 광명을 비추기 때문이고, 선작업(善作業)이라는 삼마지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영원히 끊어버리기 때문이고,
당장엄(幢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밝게 비추기 때문이고,
유거(有炬)라는 삼마지는 일체 번뇌의 습기를 비추어 없애기 때문이고,
일등(日燈)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어둠을 다 제거하기 때문이고,
일선(日旋)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유정들의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공덕장(功德藏)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공덕이 법장에 수순하기 때문이고,
나라연(那羅延)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다른 논란(論難)을 다 굴복시키기 때문이고,
견고(堅固)라는 삼마지는 금강처럼 파괴되지 않는 몸을 획득하기 때문이고,
구견(具堅)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세간의 지혜를 초월하기 때문이고,
만다라(曼茶羅)라는 삼마지는 물러서지 않는 모든 신통을 얻기 때문이고,
금강장(金剛場)이라는 삼마지는 보리(菩提)의 도량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기 때문이고,
금강유(金剛喩)라는 삼마지는 온갖 번뇌의 법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고,
구행(具行)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마음의 행을 잘 알기 때문이고,
치지(治地)라는 삼마지는 애욕의 허물을 다 멀리 여의게 하기 때문이고,
최괴(摧壞)라는 삼마지는 네 부류의 마군을 꺾어 부수기 때문이고,
일관신(日觀身)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색신(色身)의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불현(不眴)이라는 삼마지는 한 가지 법의 성품에 몰입하게 하기 때문이고,
입허공(入虛空)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정진하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무쟁(無諍)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인연의 경계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무구륜(無垢輪)이라는 삼마지는 미묘하고도 청정한 법륜(法輪)을 굴리기 때문이고,
전광(電光)이라는 삼마지는 찰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선작승연(善作勝綠)이라는 삼마지는 속히 모든 선한 법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고,
능정(能淨)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선하지 않은 법을 다 끊어버리기 때문이고,
신장엄(身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대인의 상호를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고,
어장엄(語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범음(梵音)으로 설법하여 유정들을 다 즐겁게 하기 때문이고,
심장엄(心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선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무외(無畏)라는 삼마지는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하기 때문이고,
등시(等施)라는 삼마지는 어떤 유정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이고,
계적집(戒積集)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소원을 다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고,
인갑주(忍甲冑)라는 삼마지는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기 때문이고,
정진견고(精進堅固)라는 삼마지는 속히 모든 신통을 얻기 때문이고,
무량장(無量藏)이라는 삼마지는 범왕(梵王)으로 하여금 능히 모든 것을 잘 거두어들이게 하기 때문이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삼마지는 무색계(無色界)로 하여금 능히 감내하게 하기 때문이고,
고당(高幢)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에게 깔보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고등(高燈)이라는 삼마지는 시방을 잘 관찰하기 때문이고,
혜거(慧炬)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걸림과 얽매임을 없애기 때문이고,
해인(海印)이라는 삼마지는 능히 갖가지의 업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무량선(無量旋)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악한 소견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고,
공성(空性)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상(相)과 견해를 여의기 때문이고,
무상(無相)이라는 삼마지는 헤아려 생각하는 모든 분별을 끊기 때문이고,
무원(無願)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서원의 모습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부동(不動)이라는 삼마지는 동요하는 일체의 뜻을 없애기 때문이고,
구족음(具足音)이라는 삼마지는 항상 걸림 없는 변재를 얻기 때문이고,
변지(遍持)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을 들은 그대로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정념(淨念)이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무진(無盡)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로 하여금 다함이 없는 환희심을 내게 하기 때문이고,
보엄(寶嚴)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유정들로 하여금 보배로운 손[寶手]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수거(隨去)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근기에 따라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지소취(知所趣)라는 삼마지는 유정들로 하여금 그 각자의 나아갈 곳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고,
의입(意入)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마음을 다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법운(法雲)이라는 삼마지는 그 수승한 지혜로 법의 비를 내리기 때문이고,
염불(念佛)이라는 삼마지는 감로(甘露)의 청정한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염법(念法)이라는 삼마지는 욕심을 여읜 일체의 선한 법을 증득하기 때문이고,
염승(念僧)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에 물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염사(念捨)라는 삼마지는 모든 물자를 다 보시하기 때문이고,
염계(念戒)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의 근본을 건립(建立)하기 때문이고,
염천(念天)이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법에 허물이 있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입법계(入法界)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을 알아 그 법계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허공성(虛空性)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으로 하여금 다 걸림이 없게 하기 때문이고,
무생성(無生性)이라는 삼마지는 무생법인을 얻기 때문이고,
유불류(類不類)라는 삼마지는 차별된 문구(文句)를 뛰어난 지혜로써 능히 다 간직하기 때문이고,
묘설무구인(妙說無垢印)이라는 삼마지는 보살이 이 삼마지를 얻음으로써 한 찰나 사이에 능히 지혜로써 큰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러한 여든 세 가지의 삼마지문(三摩地門)이 있는가 하면
그 낱낱의 삼마지문마다 5백의 삼마지문이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삼마지문까지 합하면 4만의 삼마지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청정한 삼마지와 번뇌로 물든 삼마지를 합해 8만의 삼마지문이 있고,
다시 그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한 전후 중간의 삼마지문이 각각 5백 가지가 있어서
이 모든 청정한 삼마지와 번뇌로 물든 삼마지를 합해 8만 4천의 삼마지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8만 4천의 삼마지문은 유정들을 위한 오타남(鄔馱南)으로서 유정들의 8만 4천 가지 마음의 행에 따라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체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 유정들의 마음의 행에 들어가 널리 설하는 법장이므로, 그 법장은 한량없고 그지없고 부사의한 것이어서 백천 겁에 걸쳐서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말씀드린 삼마지문은 그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허공장보살이 이 법을 설할 때에, 그 모임에 있던 1만 6천 명의 보살들이 삼마지문으로 말미암아 무생법인을 얻었고 8만 4천의 천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허공장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선남자여, 이러한 삼마지의 공덕 법문을 쾌히 널리 설하여서 여래의 미묘하고도 수승한 지혜를 잘 나타내었으니,
이 법문이야말로 네 자신이 증득한 것이지 다른 힘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것이 아니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