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장엄경론 제5권
12. 술구품 ②[3]
[선근을 더욱 기름을 구하는 것]
이미 명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선근을 더욱 기름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겠다.
이른바 작의에 여러 바라밀을 만족하는 것으로,
작의에는 마흔네 가지가 있는데,
처음의 인을 아는 작의로부터 마지막의 내가 뛰어남을 아는 작의까지이다.
이들 작의에 대하여 이제 마땅히 나타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인을 알고 염(念)을 의지하고
과(果)를 함께 하는 것과 믿어 아는 것,
이 네 가지의 뜻을 순서에 따라서
여러 선근을 닦아 익힌다.
[釋] 이 게송에는 네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인을 아는 작의요, 둘째는 염을 의지하는 작의요, 셋째는 과를 함께 하는 작의요, 넷째는 믿어 아는 작의이다.
보살이 가장 처음에 성품에 머물러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스스로 바라밀의 성품을 보았으니 이를 증장하게 함을 알아야겠다’고 한다.
이를 인을 아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큰 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니 여러 바라밀이 결정코 원만히 됨을 얻어야 하겠다.
어찌하여 그런가? 이 큰 보리의 마음으로써 의지를 삼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를 염을 의지하는 작의라고 이른다.
다음에는 생각하기를
‘내가 이미 마음을 발해서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여러 바라밀을 닦았으니,
이 과보를 만일 남과 함께 하면 곧 받기를 원하고
만일 남과 함께 않으면 곧 받지 않겠다고 원한다’고 한다.
이를 과를 함께 하는 작의라고 이른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자기와 남의 이익을 부지런히 행하였으니 때로 마땅히 열반의 진실한 방편에 통달해야겠다.
이른바 염오되지 않은 3륜(輪)이니,
마치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일찍이 아셨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땅히 아실 것이요,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제 아시는 것을 내가 다 바로 믿겠다’고 한다.
이를 믿어 아는 작의라고 한다.
이와 같아서 뒤와 뒤의 뜻을 지음도 순서가 또한 그러한 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기쁨을 얻는 데 네 가지가 있고
두 가지의 악에서 능히 물러서지 않는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따라 닦는 의미를.
여기에 다시 네 가지가 있다.
[釋] 이 게송에는 세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기쁨을 얻는 작의요, 둘째는 물러서지 않는 작의요, 셋째는 따라 닦는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을 믿고 알아서 네 가지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른바 장애가 끊어지는 기쁨, 원만을 모으는 기쁨, 자기와 남의 두 가지 이익을 섭수하는 기쁨, 의보(依報)의 두 과를 주는 기쁨이다’라고 한다.
이를 기쁨을 얻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자타가 부처님 법을 닦아 행하는 여러 바라밀을 성취할 때에 비록 악한 사람의 거슬림과 악한 일의 핍박을 만나도 끝내 물러서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이를 물러서지 않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위없는 보리를 얻기 위하여 여러 바라밀에 있어서 마땅히 네 가지의 따라 닦음을 일으킨다.
이른바 마땅히 여섯 바라밀의 여러 장애를 참회하고,
마땅히 여섯 바라밀의 여러 행을 따라 기뻐하고,
마땅히 여섯 바라밀의 법과 뜻을 권하여 청하고,
마땅히 여섯 바라밀로써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고 한다.
이를 따라 닦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한 믿음과 받아들임과
좋은 말과 더불어 갑옷을 입음과
원을 일으킴과 또한 희망함과
방편을 다시 일곱 가지라 이른다.
[釋] 이 게송에는 일곱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믿음의 작의요, 둘째는 받아들이는 작의요, 셋째는 좋은 말을 하는 작의요, 넷째는 갑옷을 입는 작의요, 다섯째는 원을 일으키는 작의요, 여섯째는 희망하는 작의요, 일곱째는 방편의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여러 바라밀의 법과 뜻에 있어서 깊은 믿음의 힘을 일으켜서 가지겠다’고 한다.
이를 청정한 믿음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법과 뜻에 있어서 마땅히 한결같이 구함을 일으켜서 비방하지 아니하겠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법과 뜻에 있어서 남에게 열어 보이겠다’고 한다.
이를 좋은 말을 하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여러 바라밀을 만족하게 행해서 큰 용맹의 마음을 일으키리라’고 한다.
이를 갑옷을 입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원과 가치를 만족하기 위하여 만족스런 여러 인연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를 원을 일으키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바른 성취의 인연을 구한다’고 한다.
이를 희망하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업과 짝의 방편을 사유한다’고 한다.
이를 방편의 작의라고 한다.
이 가운데서 갑옷을 입음의 작의와 원을 일으킴의 작의와 희망의 작의는 가르치는 가운데 마땅히 분별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용맹과 연민(憐愍)함
이와 같은 두 가지 작의는
마땅히 알아야 하니 두 가지의 차별에
하나하나 네 가지가 있다.
[釋] 이 게송은 두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하나는 용맹의 작의요, 또 하나는 연민의 작의이다.
이 둘에 각기 네 가지의 차별이 있다.
보살이 방편을 사유하여 마치고서 다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네 가지의 용맹을 일으키겠다’고 한다.
굳고 굳기 때문이요, 성숙하기 때문이요, 공양하기 때문이요, 친근하기 때문이다.
굳고 굳다고 함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여섯 바라밀을 닦음이다. 이른바 여섯 가지 보시로부터 여섯 가지 지혜에 이르기까지이다.
여섯 가지 보시라 함은, 이른바 베푸는 보시로부터 지혜를 주는 보시까지이니, 지계(持戒) 등의 여섯 가지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성숙한다고 함은, 여러 바라밀로써 중생들을 섭수하는 방편을 삼아서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공양을 한다고 함은, 단바라밀(檀波羅蜜)로써 이익 공양(利益供養)을 삼고 지계 등으로써 수행 공양(修行供養)을 삼는 것이다.
친근하다고 함은, 전도되지 않은 여러 바라밀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가까이함이니
이를 용맹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을 일으켜서
여러 바라밀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마땅히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간탐하는 마음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다른 사람들의 여러 바라밀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마땅히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이 여러 바라밀을 믿을 때에 마땅히 염오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이를 연민의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끄러움이 있고 또한 즐거움이 있고
후퇴하여 굴복함이 없는 마음과
닦고 다스리는 것과 칭찬하여 말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다시 다섯 가지라 한다.
[釋] 이 게송은 다섯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부끄러움이 있는 작의요, 둘째는 즐거움이 있는 작의요, 셋째는 후퇴하여 굴복함이 없는 작의요, 넷째는 닦고 다스리는 작의요, 다섯째는 칭찬하여 말하는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에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여러 바라밀에 있어서 게을러서 짓지 아니하고 삿된 지음을 하면 마땅히 깊이 참괴(慙愧) 등을 일으키고 마땅히 변하지 않는 단바라밀 등을 전하리라’고 한다.
이를 부끄러움이 있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반연하는 것의 여러 바라밀의 경계에서 마땅히 마음을 가져 어지럽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를 즐거움이 있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여러 바라밀에서 물러나는 방편에 대해서 원수의 집안인 것 같은 생각을 낸다’고 한다.
이를 후퇴하여 굴복함이 없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과 서로 응하는 여러 논(論)에 있어서 마땅히 잘 모아서 닦고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이를 닦고 다스리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남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바라밀의 법과 뜻을 찬양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칭찬하여 말하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바라밀을 의지하여 보리를 얻고
자재천(自在天) 등을 따르지 않는다.
허물의 나쁨과 공덕,
이 두 가지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이 게송에는 두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하나는 바라밀을 의지하는 작의요, 또 하나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작의이다.
보살이 앞에서와 같이 칭송하고 나서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을 의지하여 큰 보리를 얻은 것이요, 자재천 등을 의지함이 아니다’라 한다.
이를 바라밀을 의지하는 작의라고 이른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여러 바라밀을 장애하는 허물의 나쁨과 여러 바라밀의 공덕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를 마땅히 알아야 하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기쁘게 모음과 뜻을 봄과
즐겁게 구함에 있어서 구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평등과 분별이 없음과
현지(現持)와 당연(當緣)이다.
[釋] 이 게송은 세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기쁘게 모으는 작의요, 둘째는 뜻을 보는 작의요, 셋째는 즐겁게 구하는 작의이다.
보살이 이를 알고서는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기쁘게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를 모아야겠다’고 한다.
이를 기쁘게 모으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자기 성품을 보아서 능히 위없는 보리의 이익을 얻겠다’고 한다.
이를 뜻을 보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이 이익을 보았으니 마땅히 네 가지의 구함을 일으켜야겠다.
첫째는 평등을 구함이니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기 때문이요,
둘째는 분별이 없음을 구함이니 3륜(輪)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현지를 구함이니 구하여서 능히 여러 바라밀의 법과 뜻을 이루어 가지기 때문이요,
넷째는 당연을 구함이니 미래에 여러 바라밀의 연을 성취함을 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를 즐겁게 구하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곱 가지의 비유취(非有取)의 견과
네 가지의 희유한 생각에서
이를 번복하면 희유가 아니니
이 생각도 또한 네 가지이다.
[釋] 이 게송에는 세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비유취(非有取)를 보는 작의요, 둘째는 희유하다는 생각의 작의요, 셋째는 희유하지 않다는 생각의 작의이다.
보살이 즐겁게 구하기를 마치고서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일곱 가지의 비유취를 내가 이제 마땅히 보겠다.
첫째는 유(有)가 아닌 것을 유로 삼는 비유취요,
둘째는 허물의 실수가 실수가 아니라고 하는 비유취요,
셋째는 공덕을 공덕이 아니라고 하는 비유취요,
넷째는 항상함이 아닌 것을 항상하다고 여기는 비유취요,
다섯째는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겁다고 여기는 비유취요,
여섯째는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여기는 비유취요,
일곱째는 적멸(寂滅)을 적멸이 아니라고 하는 비유취이다.
여래께서 이 일곱 가지의 비유취를 대치하기 위하여서 순서대로 공(空) 등의 세 가지의 삼매와 네 가지 법의 우다나(優陀那)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를 비유취를 보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에 있어서 마땅히 네 가지의 희유한 생각을 일으키려 하니,
이른바 큰 생각과 넓은 생각과 보은을 구하지 않는 생각과 과보를 기약하지 않는 생각들이다’라고 한다.
이를 희유한 생각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이를 번복하면 희유는 여러 바라밀에 있어서 또한 네 가지의 희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으니,
이른바 여러 바라밀이 넓고 큼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위없는 보리를 얻어서 능히 자기와 남이 평등한 데 머무르고
능히 일체 세간의 공양을 구하지 아니하며,
능히 여러 세간을 지나는 뛰어난 몸과 뛰어난 재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희유함이 아닌 생각의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의 가장자리에 떨어짐을 벗어나고
큰 뜻과 전시(轉施)와
구경(究竟)과 무간(無間),
다시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있다.
[釋] 이 게송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작의가 있다.
첫째는 가장자리를 벗어난 작의요, 둘째는 큰 뜻의 작의요, 셋째는 전시(轉施)의 작의요, 넷째는 구경의 작의요, 다섯째는 무간의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여러 바라밀로써 일체 중생에 있어서 전하겠다’고 한다.
이를 가장자리를 벗어난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여러 바라밀로써 널리 일체의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다’고 한다.
이를 큰 뜻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있는 것의 여러 바라밀로 공덕을 일체의 중생에게 베풀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를 전시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바라밀로 세 가지 처소에 마침내 이르기를 원한다.
세 가지 처소에 마침내 이른다 함은,
이른바 보살지(菩薩地)에 이르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고, 중생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이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를 구경의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여러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어떠한 경우라도 끊어짐이 없게 하겠다’고 한다.
이를 간단이 없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방편으로 항상 따라 섭수하고
마음이 뒤바뀌지 않으며
물러서면 곧 기뻐하지 아니하고
나아가면 환희가 난다.
[釋] 이 게송에는 세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따라 섭수하는 작의요, 둘째는 기뻐하지 않는 작의요, 셋째는 환희하는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마음이 뒤바뀌지 않아서 마땅히 부처님께서 아시는 것을 여러 바라밀로써 항시 섭수하겠다’고 한다.
이를 따라 섭수하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에서 물러나 굴복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기쁨을 내지 않겠다’고 한다.
이를 기뻐하지 않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을 증진(增進)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경열(慶悅)함을 내겠다’고 한다.
이를 환희의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서로 비슷한 것을 닦으려 하지 않고
진실한 것을 닦아 익히려 하며
따르지 아니함과 얻고자 함이니
얻고자 함에 두 가지가 있다.
[釋] 이 게송에는 네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닦지 않고자 하는 작의요, 둘째는 닦고자 하는 작의요, 셋째는 따르지 않는 작의요, 넷째는 얻고자 하는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서로 비슷한 여러 바라밀은 마땅히 닦아 익히지 않겠다’고 한다.
이를 닦아 익히고자 않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진실한 여러 바라밀에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고 한다.
이를 닦고자 하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여러 바라밀의 장애에 있어서 작의로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한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수기(授記)하는 지위를 얻어서 여러 바라밀에서 결정된 지위의 여러 바라밀을 얻고자 한다’고 한다.
이를 얻고자 하는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결정코 미래에 행을 짓고
항상 남의 행의 원만을 관하고,
믿고 이해함이 스스로 제일이다.
체가 위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釋] 이 게송은 네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코 짓는 작의요, 둘째는 남을 관하는 작의요, 셋째는 내가 뛰어난 작의이다.
보살이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다가오는 여러 취(趣)를 보아서 지혜의 방편으로써 일체의 바라밀을 결정코 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결정코 짓는 작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마땅히 시방의 여러 큰 보살이 여러 바라밀에 만족을 얻었음을 관할 때에 원컨대 나도 또한 만족을 얻어야겠다. 그것은 동일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를 남을 관하는 작의라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행하는 것의 여러 바라밀을 믿고 모든 행 가운데 있어서 제일로 삼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내가 이 체를 보니 다시 위없음을 관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를 내가 뛰어난 작의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 여러 작의로써
여러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보살이 일체의 때에
선근이 원만함을 얻는다.
[釋] 이 게송은 통틀어 앞의 뜻을 맺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