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 중권
19. 부루나소문경(富婁那所問經)
실천해야 할 한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은 악지식(惡知識)을 위하는 까닭에 네 가지 인연으로 보리에서 물러나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성자(聖者)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이 네 가지 상응하는 법이 있어서 보리를 잃고 물러나 성문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악지식을 벗으로 삼으면 함께 나쁜 행[惡行]을 익히게 되고, 그리하여 나쁜 벗[惡友]들이 그로 하여금 부처님의 수행법을 멀리 여의게 하고, 중생들을 버리게 하느니라.
그렇게 하고서 보살에게 말한다.
‘그대는 이와 같은 행업(行業)에 만족해야 한다.
삼계는 장원(長遠)며 고뇌는 다함이 없다.
세간에 태어남을 받으면 번뇌가 맺혀 쌓이게 되어 잠깐도 멈추어 쉼이 없으니 부처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을 버리기란 더욱 어렵고 수고로운 마음이 끝이 없으니, 다시는 닦거나 익히지 말라.
그대는 또한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는 수기를 받지 못했고,
그대는 지금 힘이 약하여 5취의 중생들을 제도할 능력이 없으니,
중도에서 마땅히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수행하는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 나서 마음에 물러나고 오그라들며 잠기어 숨으며 축 늘어지면,
곧 보살의 수행법 가운데서 마음으로 즐거워할 것이 없느니라.
부루나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 첫 번째 법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에서 물러나 되돌아와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둘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살의 도행(道行)을 듣지 않고,
보살의 장경(藏經)을 듣지 않으며,
보살이 쌓고 모은 공덕과 보살이 말한 금지하는 계율과 6바라밀의 길에 나아가 서로 호응하는 법이 있어 증득하는 것임을 일찍이 다 듣지 못하고,
이미 일찍이 듣지 못하여 법답게 배우고 익히지 못하면,
어떤 행의 문으로써 수행해야 하며,
어떤 행의 문으로써 멀리해야 하며,
어떤 법으로써 업의 차례를 익혀야 하며,
어떤 법은 반드시 익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성문의 법행이며,
어떤 것이 보살의 법문인가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미 분명하게 익히지 못해서 어떤 법은 닦고 배워 반드시 닦아야 하고, 닦고 행하지 않아야 하며, 반드시 닦지 않아야 하고, 또한 닦아야 하는 것인 줄 모르느니라.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보리가 점점 줄어들며, 도의 마음이 점점 거만해져서 마음과 뜻이 방황하고, 옛날의 행과 원을 버려 보리를 잃고 마느니라.
부루나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이 이와 같이 보리에서 물러나서 보리를 버리고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셋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다른 견해의 행을 일으켜서 자기 몸을 싫어하는 것을 보면 삿됨과 올바름의 두 끝에 집착하여 이 행을 여의지 아니하며, 만약 위없는 매우 심오한 법의 요긴함을 들으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거늘 오히려 비방하고 가벼이 여기고 혐의하며 믿지 않는다.
법을 비방한 까닭에 죽어서는 무간지옥에 떨어져 다시는 불법을 들을 수도 없고, 또한 대승(大乘)을 닦지도 못하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도 못하느니라.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는 까닭에
선행(善行)을 잃고 악행(惡行)에 들어가 좋은 벗과 절교하고,
악한 사람과 화합하여 본래의 생각을 잃고,
보살승(菩薩乘)의 지위를 버리며 삼계의 중생들을 구제하지 않고 대승이 행하는 업을 익히지 않느니라.
부루나야,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에서 물러나 되돌아서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것이 세 번째 법과 상응하기 때문에 보리를 잃고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넷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매우 심오한 법의 요점을 듣고, 중생들을 위하여 해설해 주지 않으며, 태만하여 숨고 오그라들어 마음에 설법하기를 좋아함이 없느니라.
작은 힘을 쓰는 곳에서 닦고 배우겠다는 마음을 내며, 불법에 인색하여 중생들을 거두어 주지 않나니,
이런 죄악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없어지고 나면
반드시 법의 이치를 헤아리지 못하며,
또한 받은 법의 부분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이 몸을 버리고 보리를 잃느니라.
부루나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네 번째 법과 상응하는 까닭에 보리를 잃고 성문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