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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요의론 제9권
[여래장]
『입능가경(入楞伽經) 』 안에서 말한 것과 같다.
“대혜보살(大慧菩薩)이 여래장(如來藏)에 대해 여쭙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그대는 지금 어떤 까닭으로 여래께서는 자성이 밝고도 밝고 청정하시며 본래부터 청정하시다는 이러한 말에 대해 묻느냐?
여래께서는 서른두 가지의 모습을 갖추시고 일체 유정들의 육신 가운데에 머무르신다.
비유하자면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가 낡고 때 묻은 옷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다.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옷에 뒤덮여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 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실답지 않고 헤아려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때에 물드는 것이며, 이것은 무상한 법이다. 이것은 단단하지 않으며 이것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외도(外道)들이 말하는 신아(神我)라는 말은 어떤 까닭에서 능히 이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말과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습니까?
신아(神我)는 영원하고 나는 능히 만들고[造作] 묶임[繫]을 여의고 자재(自在)하여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저 외도들은 이와 같이 신아라는 말을 설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외도가 말하는 나라는 말은 가히 여래장이라는 말과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다.
대혜여, 그러나 내가 설하는 바의 실제(實際)와 열반과 생겨남이 없음과 공(空)과 모양 없음[無相]과 바람 없음[無願] 등의 모든 어구(語句)의 뜻은,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등정각(正等正覺)께서 어리석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없다는 놀랍고 두려운 법을 여의도록 하기 위한 까닭에 방편으로써 분별이 없고 맞서 가로막음이 없는 여래장의 문을 설하신 것이다.
이 안에서는 역시 미래와 현재의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내가 지었다고 집착하지 않는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도공(陶工)이 흙을 가져다가 물로 반죽을 만든 다음, 노끈과 그 도구들을 써서 부지런히 힘껏 만들어 여러 가지 그릇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여래께서도 역시 이와 같으셔서 만유에 실다운 체성(體性)이 없음에 머물러 분별의 모양을 여의시는 까닭에 여러 가지 훌륭한 지혜와 방편과 훌륭하고 교묘한 상응(相應)으로써 혹은 여래장을 설하시기도 하고 혹은 내가 없다는 법을 설하시기도 하여 미묘하고 교묘한 수많은 문구(文句)와 말씨로써 비유하여 설하신다.
이러한 연(緣) 때문에 외도가 말하는 나라는 말은 가히 여래장이라는 말과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다.
대혜여, 또한 내가 말하는 바의 여래장이라는 말은 단지 모든 외도들의 무리와 나의 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항복받기 위한 방편으로써 여래장을 설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어떤 까닭에 실다운 주재(主宰)가 없는 것을 헤아려 집착하는 견해 안에 빠져서 즐거워하느냐?
만약에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에 대해 즐거운 생각이 고루 갖추어지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보를 신속히 얻는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께서 설하시는 여래장법(如來藏法)은 외도가 말하는 나라는 말과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대혜여, 외도들로 하여금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여의도록 하며 마땅히 여래의 무아장(無我藏)의 법을 순순히 따라 얻도록 하라.
이렇게 펼쳐 말하는 이것은 위없는 성취의 구경법(究竟法)이다.
이것은 모든 보살의 공(空)과 생겨남 없음과 둘 없음과 자성 없음의 법이라고 하며, 이것은 심히 깊은 법이라고 한다.
만약에 펼쳐 설하거나 아울러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능히 일체 대승경전 안의 심히 깊은 뜻을 널리 거두어들인다. 왜냐하면 이 심히 깊은 법은 일체 법과 일체의 경전 안에서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전에서 다시 말한다.
“대혜여, 이 공(空)과 생겨남 없음과 둘 없음과 자성 없음의 모양은 널리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과 아울러 일체의 경전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안에서 여래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세계 안에서
내가 펼쳐 설한 바의 모든 경전의
온갖 문구는 모두 한 뜻이기 때문에
다시 능히 두루 설할 것이 없다.
나아가 일체 모든 여래들께서는
더불어 온갖 법을 널리 펼쳐 설하셨으나
한 구(句) 안에서 이미 배움을 닦으면
일체를 닦아서 성취를 얻네.
일체의 모든 법은 한결같이 공의 성품이므로
만약에 누군가 그 뜻을 밝게 안다면
이 말뜻 안에서 배워 이룰 수 있으니
모든 불법은 얻기가 어렵지 않다.
심히 깊은 법을 능히 믿고 알면
일체의 훌륭한 복이 생겨남을 얻고
모든 유(有)의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
할 일을 갖추고 성불(成佛)에 이르네.
[정법을 설하는 복]
『보수경(寶授經)』에서 말하였다.
“또다시 묘길상이여, 설령 보살이 백천의 겁(劫)이 지나도록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잘 닦아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갖추더라도,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정법(正法)을 부지런히 구하여 받아 듣는다면 앞의 복덩어리에 비해 이것이 거듭 배가 많거늘,
하물며 구하는 바가 없는 마음으로써 받아 듣고 베껴 쓰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함이겠느냐?”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에서는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
긍가하(殑伽河) 안에 있는 모래알 수의 그 하나하나의 모래알을 긍가하라 하면, 이 모든 강 안에 있는 모래알 수는 정녕 많겠느냐, 적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모든 긍가하가 이미 많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하물며 어찌 그 모래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내가 이제 참으로 너에게 일러 말하겠다.
만약에 선남자와 선여인이, 모든 긍가하 안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 많은 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일곱 가지 보배로써 모든 부처님ㆍ여래에게 보시한다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이러한 연(緣) 때문에 복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심히 많습니다. 선서(善逝)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설령 어떤 사람이 이 정법에서 나아가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범왕문경(梵王問經)』에서는 말한다.
“인자(仁者)여, 만약에 선남자와 선여인이 여래에 대해 복된 일을 즐거이 닦아서 마땅히 이 정법을 귀 기울여 듣고 믿고 이해하며 아울러 받아 지니거나 하면,
곧 능히 재산을 얻어 부자가 되고 법에 대해 자재(自在)하여 많은 권속들을 거느리고 인간과 천상의 세계 안에서 온갖 쾌락을 받는다.”
『사리자설반야바라밀다경(舍利子說般若波羅蜜多經)』에서 말하였다.
“사리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것을 얻어 듣고 이미 들은 대로 믿고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곧 보리에 대해 물러나 되돌아가지 않음을 얻습니다.’
자씨(慈氏)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것을 듣고 이미 들은 대로 믿고 이해한다면, 이 보살은 곧 부처님의 과보를 이루는 자리에 가까워짐을 얻습니다.’
묘길상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것을 듣고 이미 들은 대로 믿고 이해한다면,
이 보살 보기를 마땅히 부처님처럼 생각하며,
일체의 죄와 더러움과 악한 일이 한결같이 풀려 없어지며,
일체의 업장(業障)이 한결같이 청정함을 얻으며,
심히 깊은 법에 대해 능히 훌륭한 이해를 낳습니다.’”
[열 가지의 선하지 않은 업]
『여래장경(如來藏經)』에서는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가장 극심한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業)이 있다.
첫째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연각(緣覺)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이를 살해(殺害)한다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살생의 죄라고 한다.
둘째는 삼보(三寶)의 재물을 침범하여 빼앗으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불여취(不與取)의 죄라고 한다.
셋째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라한을 어미라고 하면서도 물들어 집착함을 낳는다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사염(邪染)의 죄라고 한다.
넷째는 설하여 말하기를 ≺나는 여래와 같다≻고 하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망어(妄語)의 죄라고 한다.
다섯째는 거룩한 스님들에 대해 이간질을 부리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양설(兩舌)의 죄라고 한다.
여섯째는 거룩한 스님들을 흠잡아 헐뜯으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악구(惡口)의 죄라고 한다.
일곱째는 정법에 대해 잡되게 꾸며 장애를 일으키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기어(綺語)의 죄라고 한다.
여덟째는 그 정취(正趣)와 정도(正道)의 이익이 있는 바에 대해 침범하여 빼앗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탐욕의 죄라고 한다.
아홉째는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칭찬하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진에(瞋恚)의 죄라고 한다.
열째는 간교하고 악한 견해를 일으키면 이것을 가장 극심한 사견(邪見)의 죄라고 한다.
가섭아, 이러한 것들을 열 가지의 선하지 않은 업이라고 하는 것으로 모두가 더없이 큰 죄이다.
가섭이여, 설령 한 유정이라도 이와 같은 죄를 갖춘 열 가지의 선하지 않은 업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여래께서는 곧 인연(因緣)이 서로 어우러져 합하는 법을 펼쳐 설하시어 이해하고 들어가도록 하신다.
이때는 역시 나라는 생각도 없고 인간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고 일정한 목숨이 있다는 생각도 없다.
만약에 능히 이러한 법을 모두 알아서
마치 마술과 같은 법을 지어내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으며,
더러움을 여의고 청정하여 자성이 밝고도 밝으며,
일체 법이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것을 알며,
일체 법에 대해 청정하게 믿고 훌륭히 이해한다면,
나는 저 유정들이 악한 업에 따라 나아가는 곳에 떨어진다고 설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번뇌의 덩어리라는 성품은 가히 붙잡을 수가 없으니, 이미 생겨난 즉시 일체가 깨어져서 흩어진다.
따라서 모든 번뇌의 덩어리는 인연이 어우러지고 합하여 이미 생겨난 바이므로 생겨나는 대로 곧 멸한다.
만약에 마음을 일으켜서 보내거나 나누어 주면 모든 번뇌도 따라서 즉시 생겨난다고 알아야 한다.
만약에 이와 같이 믿고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다시 그에게 죄의 분위(分位)가 있겠는가? 받아들일 곳이 없는 까닭이다.
만약에 모든 죄장(罪障)이 있더라도 가히 머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진실하게 계율의 행을 지킨다]
「지율우바리존자문항마품(持律優波離尊者問降魔品)」에서는 말하였다.
“‘너희 모든 악마들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이 모든 비구들이 진실로 계율의 행을 지킨다고 말하느냐?’
악마가 말했다.
‘존자시여, 만약에 비구가 일체 법은 끝내 조복(調伏) 받으며 모든 죄는 본래 앞의 때와 뒤의 때가 없으니 끝 간 곳을 여의기 때문이라고 온통 알면, 설령 지옥에 떨어지는 죄 및 다른 악한 짓을 범했더라도 한결같이 풀어 없어져 굳은 집착을 낳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법을 남을 위해 열어 보여서 저들이 가진 5무간죄(無間罪)도 이미 모두 말끔히 없어지는데, 하물며 다시 약간의 계를 범하고 더러움에 물듦이겠습니까?
이렇게 법과 율을 아는 사람은 떠도는 먼지와 같은 번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않고 벗어나 여의는 생각을 일으키며, 모든 번뇌는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 있지도 않음을 압니다.
더러움을 여읜 지혜라도 능히 번뇌를 없애지 않으며 더러움을 여읜 성품이라도 역시 가히 버리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으로 이와 같이 관찰하니, 모든 번뇌는 마치 뜬구름과 같이 바람에 날려 흘러가고 흩어져서 향하는 바의 방향을 따라 어디든지 가서 어디든지 머무릅니다.
또한 모든 번뇌는 물속의 달과 같아서 망상의 그림자가 그 앞에 마주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번뇌는 캄캄하고 어두운 대상물이니 지혜의 등불의 광명이 능히 비추어 깨뜨립니다.
또한 번뇌는 육신을 도둑질하고 몰래 해치니 마치 야차(夜叉)나 나찰(羅刹)과 같지만, 만약에 깊고 단단하게 뜻을 세워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곧 머무르는 바가 없습니다.
또한 모든 번뇌는 항상 그 편리함을 엿보아 살피다가 만약에 뜻을 깊고 단단하게 세우지 않으면 즉시 번뇌가 불어나고 자라나지만, 공(空)하고 모양 없고 바람 없는 지혜의 법 안에서는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모든 번뇌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써 저 번뇌에 물들고 집착하는 모든 유정에 대해 그 앞에 마주하고 머물러서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나도 없고 유정도 없는 법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러움을 여의도록 합니다.
이것을 바로 진실하게 계율을 지킨다고 합니다.’”
[보살의 상응정법]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에서는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이제 내가 너에게 진실한 말을 일러 주겠다.
만약에 오무간죄를 지었더라도 이와 같은 정법을 이미 듣고 능히 훌륭한 이해를 낳는다면, 나는 저 사람이 업이나 업장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아난이여, 요점을 들어 이것을 말하자면,
이 펼쳐 설한 심히 깊은 정법은 마땅히 훌륭한 이해를 낳고 널리 크게 칭찬해야 하며,
수많은 저 경전들 중에서 오로지 부지런히 받아 들어서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보살은 마땅히 심히 깊은 법을 이와 같이 부지런히 행하고 설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지혜와 방편의 두 법은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보살의 상응정법(相應正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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