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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7권
9. 품조중서편(品藻衆書篇)
그 유생이 물었다.
“성인이 법을 제정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습니다. 청하건대 자세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그의 취지를 듣고자 합니다.”
보살이 그에게 알아듣게 타일렀다.
“옛적에 이름 없는 촌 늙은이가 있었으니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그의 이름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푸른 시내와 1천 길의 남쪽과 붉은 대(臺) 7반(盤)의 북쪽에 살고 있었고, 땅은 형세가 뛰어난 데를 차지하였고, 산은 기름진 데 있었으며, 문은 위태한 봉우리를 베개로 삼았고, 처마는 푸른 시내를 임하여서 근심을 잊고 길이 즐기기에 이미 한가한 뜰에는 풀이 곱게 자라나 있었고 연꽃으로 일산을 하고 연을 옷으로 하여서 또한 곡소(曲沼)에 분피(紛披)하였으며, 구름과 같은 누각이 잠시 일어남에 그림자가 아침 냇물에 곱게 비치고 노을 같은 비단을 잠깐 폄에 빛이 가까운 해를 머금었다.
널리 벌려 있어서 단(壇)을 삼는 대나무가 다투어 중원(中園)에 푸름을 벌렸고, 아름다운 잎이 우물을 덮은 오동나무는 다투어 야원(野院)에 그늘을 드리웠다. 계단에는 거꾸로 있는 버드나무가 번성하였고, 문에는 등 덩굴이 걸려 있었다. 드러누운 돌은 걸상과 같아서 오래도록 숲 아래에 비껴 있고, 솟아오르는 샘은 비와 같아서 마냥 창문 앞을 씻는다. 솔바람은 학의 울음과 함께 구슬프고, 봄 새는 나무하는 노래와 함께 운치가 있으니 참으로 마음을 쉬게 하는 복지(福地)요, 세상을 삼는 도원(桃源)이라 하겠다.
내가 오랫동안 신령스럽고 기이함을 들었기에 비로소 그곳을 지나게 되어서 기미년(己未年) 중하(仲夏)의 달에 책궤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고 멀리서 나아갔다.
그 촌 늙은이가 마침 급군(汲郡)의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소문(蘇門)의 북을 울려서 인하여 백설(白雪)의 곡조를 노래하고 잠깐 청산(靑山)의 편을 읊조렸으니, 그 가사에
‘원숙(元淑)은 세상의 지위가 낮았고, 장경(長卿)은 벼슬할 뜻이 적었지요.
두어 이랑의 밭을 경영하고 3전(錢)으로 말을 먹인다오.
높이 솟은 봉우리 흰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달은 푸른 산 아래 걸려 있소.
마음에 하고 싶은 말 있으나 말 잊은 자를 얻지 못하였다오’라고 하였다.
내가 그를 꾸짖었다.
‘대저 상(象)은 뜻을 표하지만 뜻을 얻으면 상을 잊게 되고, 말은 이치를 나타내지만 이치에 들어가면 말이 쉬게 되오.
그러기에 말로써 이치 얻음을 알면 청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말하고, 상을 빌려서 뜻을 알면 반드시 낌새에 의지한 뒤에 움직일 것이오.
그래서 저가 말 없는 데서 말을 하면 이도 들음이 없는 데서 들어서 그의 말하지 않음을 말하면 이치가 스스로 현묘하게 알 것이요, 들음이 없는 것을 들으면 크게 통하는 데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입에 선택하는 말이 없어도 천하가 본을 받고 말이 헛되이 운행되지 않기에 세계가 우러릅니다.’
이에 그 촌 늙은이가 거문고를 놓고 자리를 피하여 손을 잡으면서 기뻐서
‘내가 사람을 얻었소. 내가 사람을 얻었소’ 하고,
나를 인도하여 풍정(風亭)에 이르게 하고 월관(月館)에 노닐게 하여 문원(文苑)을 열고 서주(書廚)를 펴서 공자의 벽(壁)에 남겨진 경을 열람하게 하고 급(汲) 땅 무덤의 남긴 기록을 살펴보며 동관(東觀)과 남궁(南宮)의 전(典)을 찾고 옥함(玉函)과 단침(丹枕)의 비방을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살피다가 인하여 물었다.
‘빈도(貧道)가 몸을 타고난 것이 이롭지 못하여 항시 묵은 병을 안고 다닙니다. 그래서 병이 고황(膏肓)에 들어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어서 여러 해를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아니합니다.
그래서 눈을 비추고 개똥벌레를 모으는 근력(筋力)이 이미 틀렸고, 9류(流)와 7략(略)은 하늘을 끌어 잡는 것보다 어려우니 1만 권과 백가(百家)의 학설이 아득하기 바다와 같습니다.
선생은 이미 사달(四達)에 명백하여 세상에서 통인(通人)이라고 일컫기에 청하여 묻습니다.
인간의 서적이 무릇 얼마나 있으며, 엿보아 읽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어느 것이 가장 좋습니까?’
그 촌 늙은이가 이 말을 듣고서 상심하였다가 얼굴을 고쳐 한참 만에 말하였다.
‘옛날에 습욱(習郁)은 미천(彌天)이라는 대답에 굴복하였고, 감택(闞澤)은 등지(登地)의 말을 미루었다 하오. 그러니 기술자의 앞에서는 칼질하고 도끼질하기 어렵소.
비록 그렇지만 『예』에
≺말이 없으면 가르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응당 가만히 있겠소. 이제 대강 드러내어 덕음(德音)에 대답할까 합니다.
살펴보니, 먼 옛날 글이 없었을 때는 부적을 새겨 믿음을 나타냈습니다만 이미 거북의 등에서 글이 나오고 새의 발자취에서 글자가 나왔기에 성인이 명하여 기록하게 하니 창힐(蒼頡)이 채집(採集)하여 글을 이루었소. 그러기에 글이 없는 것은 요긴하지 않은 것이오. 지혜가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힐문하였다.
‘아름다운 사람이면 글을 읽지 않음을 보지 못하였소. 그러나 글을 읽는다 하여 반드시 사람을 아름답게 함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이 말이 이상하지 아니합니까?’
그 촌 늙은이가 거듭 나에게 대답하였다.
‘본래 지식은 민첩하기를 의뢰하였고 일은 쓰여짐과 쓰이지 않음을 겸하였으니 옥을 다듬어서 그릇을 이룬다 함이 어찌 헛된 말이겠소.
옛날 소의 머리와 뱀의 몸을 한 임금과 그물을 맺고 털을 깎는 임금들은 순박하여 자연스러우니 일찍이 전측(典則)이 없었소. 이(離)와 연(連)이 호(號)를 기록하고 율(栗)과 육(陸)이 비로소 일어났으니, 그런데 공자의 아는 것이 70여 대(代)로서 이외의 것은 너무나 멀어서 성인도 기억하지 못하오.
그러다가 복희씨(伏羲氏)와 염제씨(炎帝氏)로 내려오면서 헌원씨(軒轅氏)와 전욱씨(顓頊氏)가 교대하여 일어나서 봉건(封建)의 제도가 갑자기 열려서 그로 인하여 간책(簡冊)을 두게 되었고, 문(文)과 질(質)이 서로 무역함에 미쳐서 도(道)는 실패하였고, 사(詞)는 번성하였으니, 이에 우(虞)나라에서는 상상(上庠)을 두었으며, 하(夏)나라에서는 서서(西序)를 열었고, 은(殷)나라에서는 우학(右學)이라 일컬었고, 주(周)나라에서는 동교(東郊)를 설치하였으며, 진(秦)나라의 갱분(坑焚)에 이르러서는 전적들이 없어졌고, 한(漢)나라에서는 힘써 닦아서 선비를 높이고 업을 중하게 여겼기에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이 입으로써 전해 주었으며, 혹은 칠서(漆書)가 급(汲)의 무덤에서 나옴을 만났으며, 혹은 잔경(殘經)이 공자의 벽에서 나옴을 만나는 등 조금 있다가 불을 찾는 비둘기가 모이듯 하며 분삭(墳索:古書)이 차츰 많아졌소.
『예문지(藝文志)』에서는
≺6서(書)와 7적(籍)과 백씨(百氏)와 9류(流) 등 무릇 1만 3천2백69권 5백96가(家)로서 부(部)가 다른 것을 구분한 것이 서른여섯 가지인데 그 안에는 7경(經)과 아울러 악장(樂章)이 저절로 3천33권이 있었으나 지금의 세상 풍속에는 악장은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을 교훈하는 풍속은 오직 예와 효도뿐이니 효도는 몸을 세우는 근본이요, 예는 정치를 하는 데 우선하는 것이다≻ 하였소.
『원신계(援神契)』에
≺『효경(孝經)』의 한 부에 저절로 59권이 있으니, 이는 바로 시대가 질(質)과 문(文)을 변할 뿐 아니라 또한 학문에 우(優)와 열(劣)을 이룬다≻ 하였소.
후한(後漢)에 이르러서 좨주(祭酒)를 공경하여 천자가 건권(巾卷)의 의식을 행하였소. 그러기에 환영(桓榮)이 봉해진 것은 무력(武力) 때문이 아니요. 그러므로 궐리(闕里)에서 모인 무리와 화음(華陰)에서 저자를 세웠으나 그 시대가 계세(季世)에 속함에 사적(史籍)이 점점 은성하여 수레를 채우고 겸하여 두 시렁의 장옥(藏屋)이 넘쳤기에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옮겨갈 적에 2천여의 수레에 실었으나 비를 맞아 훼손되고 버려서 백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소. 그때에 가려서 견소(絹素)를 참구하였고 사람들이 또 취하여 등복(縢幞)을 하였기에 낙읍(洛邑)에 돌아올 때에는 거두는 것이 대개 적어서 처음과 끝이 공잔(空殘)하여 혹은 부질(部帙)이 아닌 것도 있었소.
상고하여 보니, 『논어』에서는 착한 말을 기록하였고, 『모시(毛詩)』에서는 완곡하게 간하는 것을 열었으며, 『상서(尙書)』에서는 조책(詔策)을 밝혔고, 『주역(周易)』에서는 길흉(吉凶)을 베풀었으며, 『3례(禮)』에서는 높고 낮음을 구별하였고, 『3전(傳)』에서는 7지(地)를 자세히 하였으며, 『전국책(戰國策)』에서는 권(權)과 정(正)을 베풀었고,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구릉(丘陵)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3사(史)』에서는 예전과 지금을 기록하였고, 『3창(蒼)』에서는 문자를 말하였으며, 다음으로는 한비자(韓非子)와 노자(老子)와 묵적(墨翟)과 장주(莊周)와 관중(管仲)과 맹가(孟軻)와 신불해(申不害)와 평중(平仲)이며, 대대(大戴)와 소대(小戴)는 성은 같으나 이름이 다르고, 대관(大冠)과 소관(小冠)은 자(字)는 같으나 씨가 달라서 그의 앞 뒤의 저술을 통괄하여 보면 편축(編軸)이 더욱 성하여서 혹은 두 사마씨(司馬氏)와 두 반씨(班氏)와 현안(玄晏)과 포박자(抱朴子)와 채옹(蔡雍)과 유향(劉向)과 손성(孫盛)과 왕충(王充)들이며, 방씨(防氏)의 『7록(錄)』과 왕씨(王氏) 집안의 『4부(部)』에 미쳤다.
조사하여 보니, 양나라 무(武) 황제가 완효서(阮孝緖) 등을 시켜서 문덕정(文德政)의 어전에서 문덕정 어서(御書) 4만 4천5백여 권을 편찬하였소. 그때에 무제는 내법(內法)을 닦았고 부처의 도를 많이 참구하였소.
또 유묘(劉杳)와 고협(顧協) 등 열여덟 명을 시켜서 화림원(華林苑) 가운데서 요어(要語) 7백20권을 편찬하니, 이를 『편략(遍略)』이라 이른다. 다 여러 책들을 추려 뽑아서 비슷한 부류로써 서로 모았을 적에 이에 문필(文筆)의 선비들을 검사하여 쓰니 머리털을 달아매고 송곳을 쥐는 데 이르러서 이를 연(緣)하여 게을러졌소.
또 『수광원(壽光苑)』 2백 권과 『요록(要錄)』 60권이 있으며, 『유원(類苑)』 1백20권이 있다. 이들은 마침내 주(周)나라가 은(殷)나라의 예(禮)를 인한 것이니, 덜하고 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래서 명목(名目)은 비록 다르나 도리어 전의 것을 넓혔으니 이는 마치 걸상 위에 걸상을 깔고, 집 밑에 집을 가설한 것과 같소.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서 ‘저궁(渚宮)의 저녁에 원제(元帝)가 손수 서적 14만 권을 불태웠다’ 하였으니, 이는 겸본(兼本)들이요.
가만히 많은 것을 의심하여 저 홍류(洪流)를 교정하였으나 다시 용천(庸淺)한 헤아림이 아닐런지 불이 펴서 이름에 전론(典論)이 침몰하였을까 두렵소. 그래서 법사(法師)가 읽고자 하나 완비되어 있기가 어렵겠고, 또 급한 것만 따르기에 두루 꾸리지 못하였소. 다만 현(絃)과 위(韋)는 짝할 수 없고 천(闡)과 약(約)은 같지 않소이다.
역사책으로 지은 것은 전적으로 척당(倜儻)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춘추(春秋)』의 말은 더욱 작사(斫射)가 있으며, 유교의 풍(風)은 싸우는 전쟁에 망하고, 노자와 장자는 유탕(遺蕩)에 지나쳤으며, 『국어(國語)』는 헛됨을 숭상하였고, 좌구명(左丘明)은 기롱하고 속였소.
가령 5경(經)과 백씨(百氏)는 한림(翰林)의 체와 뼈 아닌 것이 없으며, 『이아(爾雅)』와 『이소(離騷)』는 인연과 정의 근본이 되기에 족하오. 그러니 그 인륜을 근원해서 자세하게 갖춘 것은 어찌 『예경(禮經)』과 『효경(孝經)』에 지나겠는가?
『효경』은 서민으로부터 황제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은 전적이요, 생으로부터 사(死)에 이르도록 끝과 처음을 갖추고 있소. 효(孝)가 있고 충(忠)이 있으며 신(信)이 있고 의(義)가 있어야 이치에 있어서 익히기 쉽고 일에 있어서 살펴서 잊기 어려운 것이오.
대략 18장(章)에는 효로 다스림이 첫째에 있어서 생각하여 보니, 이임(吏任)들이 받드는 것이요, 민서(民胥)들이 힘입는 것이어서 신명을 관통하고 풍속을 다스리고 인도한다. 그러니 비록 5종(宗)의 항렬이 함께 한 번 열람하여 겸하여 외우더라도 바탕을 의론하면 이에 정신을 표명하고, 재주를 말하면 실지로 기량(伎倆)에 돌아오는 데는 오직 효가 포괄하여서 인(仁)하고 서(恕)할 뿐이니, 이는 집에서 스스로 이룸이 아니라 이와 같을 뿐이다.’
내가 또 꾸짖어 말하였다.
‘대저 5경(經)은 호한(浩汗)하고 백씨(百氏)는 부소(扶疎)하지만 뜻은 기미함을 아는 데 극하고 이치는 성품을 다함을 싸는 것이니, 비유하면 북극성이 온갖 사물에 응하는 것과 같고, 동쪽 바다가 온갖 냇물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공을 서로 미루지 못하고 덕에는 오로지 내림이 없거늘 어찌하여 『효경』 한 권을 찬탄하는 데 그치겠는가?’
그 촌 늙은이가 대답하였다.
‘3덕(德)의 기초는 인륜이 주가 되고, 백행(百行)의 우두머리는 요도(要道)가 근원이 되오. 그러기에 태호씨(太昊氏)와 염제씨(炎帝氏)는 근본을 힘쓴다고 일렀으며, 주나라 무왕 발(發)과 주공 단(旦)은 크다고 일컬었으며, 공자가 자하(子夏)에게는 색(色)이 어렵다고 교훈하였고, 자유(子遊)에게는 공경함을 알라고 교훈하였으며, 선왕(先王)이 법을 받들면 건상(乾象)이 나타나고, 밝고 밝은 임금이 어버이를 높이면 산과 냇물이 상서로움을 표명하기 때문에 드디어 푸른 매가 절(節)에 합하고, 흰 꿩이 날아가는 데 길들며, 분백(墳柏)이 봄에 마르고, 물 속에 잠겼던 물고기가 겨울에 뜀이 있게 되오.
이를 나라에 행하면 정령(政令)이 온 천하에 나타나고, 향인(鄕人)에게 쓰면 덕의 가르침이 백성들에게 더합니다. 그러기에
≺효도는 어버이 섬기는 데서 시작하고 임금 섬기는 것이 중간이 되고 자기의 몸을 세우는 데서 마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버이에 대하여는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서 감탄을 일으키고 차와 갈대를 품으면서 슬픔에 싸입니다. 찬 수풀의 아픔이 이미 더하였으며 바람과 나무의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이로써 구부려서는 위의 성인에게 돌아오고, 발돋음하여서는 하우(下愚)에게 미친다 하겠소.
조사하여 보니, 『예기』에
≺효라 함은 봉양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구명결(鉤命決)』에
≺효라 함은 나감이요 법도이고 기리는 것이요 연구함이요 봉양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이아(爾雅)』에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을 효라 하니, 효의 뜻은 이어서 어버이를 받드는 것이다≻ 하였으며,
『예기』에
≺기른다 함은 봉양하는 것이니, 효의 도는 덕을 기르고 이치에 따르고 때에 거스르지 않는 것으로서 이를 기른다고 이른다. 나간다 함은 이룸이니, 천자의 효는 우(禹)임금의 덕이 능히 용수로(用水路)에 힘을 다하여서 큰 공을 이루고는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고 궁을 낮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소.
그러기에 공자가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하였다.
법도라 함은 제후(諸侯)의 효니 위로는 천자를 받들어 한 나라를 거느리고 그의 법도를 지켜서 뜻에 어기고 범함이 없는 것이요,
기린다 함은 경대부(卿大夫)의 효니 덕을 부지런히 하고 안으로 살펴서 일심으로 윗사람을 섬기어서 진실로 사직(社稷)에 이로운 것이면 법으로 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이웃나라에 꽃다움을 전하여 맑은 법도가 저절로 멀리 가는 것이요,
연구한다 함은 다함이요, 선비라 함은 섬기는 것이니 능히 옳고 그름을 말하여서 한 관리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 덕을 살피고 힘씀을 바로하여 충순(忠順)함을 잃지 않고 정성을 다하고 섬김을 다하여 그의 뜻이 옮기지 않는 것이오.
『주례(周禮)』의 사씨(師氏)의 직책에
≺덕으로써 나라의 자식들을 가르친다.
첫째는 지덕(至德)이니 그로써 도의 근본을 삼음이요,
둘째는 민덕(愍德)이니 그로써 행의 근본을 삼음이요,
셋째는 효덕(孝德)이니 그로써 악하고 거슬림을 막는 것이다.
하늘이 덮고 땅이 싣는 공을 말한 것을 지덕이라 이르고, 그의 재성(裁成)의 공을 말한 것을 민덕이라 이르고, 그의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린 것을 효덕이라고 이른다≻고 하였소.
공자가 효를 펼 적에 먼저 어버이를 사랑하여 이름을 드날림을 진술하고, 그런 뒤에 천경(天經)과 지의(地義)를 말하였으며, 주공은 효를 논할 적에 먼저 부도(覆燾)와 재할(宰割)을 일컬었고 그러한 뒤에 좋은 것을 부모에게 폈소이다.
공자는 주나라 말기에 나고 말속(末俗)에 성장하였기에 효제(孝悌)가 끊어짐을 보았고, 예악(禮樂)이 무너짐을 개탄하였소. 증자(曾子)는 돈독히 행하여 어버이 섬기는 데 삼가하여서 어버이의 곁에 모시는 것으로써 효도를 밝혔으니, 제자들이 기록을 두어 『효경(孝經)』이라 이름하였소이다.
『구명결』에
≺1백 임금이 다 닦아서 만고에 바꾸지 않는 것은 효를 말함이다≻ 하였소.
진(秦)나라에서는 『여론(呂論:呂氏春秋)』의 한 글자를 걸어 놓아서 도리어 가책(可責)을 이루었고,
촉(蜀)나라에서는 『양언(楊言)』의 천 금을 걸어 놓아서 다시 더욱 괴이하게 되었소.
효경의 덕은 내[川]와 언덕으로도 셀 수 없지만 효는 신명을 감동시키고 공은 조화와 짝하여 무거움을 비기면 5악(岳)의 산이 가볍고 깊음을 비교하면 4독(瀆)의 흐름이 얕아서 바람과 비가 그의 파도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허공이 족히 그의 영예(令譽)를 깃들이지 못하오. 말은 간략하면서도 가르침은 커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오.
법사의 불교를 들려 주십시오. 간청하오. 말하여 제가 깨닫지 못한 것을 열어 주시오.’
내가 대답하였다.
‘안이 밖과 어긋나고 진(進)이 속(俗)과 어긋나서 비록 자취는 9류(流)가 달라서 이치가 일치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달관(達觀)한 선비는 회통(會通)하게 됩니다.
만일 그 가르쳐서 돌아오는 곳을 통괄하여 그의 시초와 종말을 자세히 하려면 성(性)과 상(相)으로서도 그의 문을 건널 수 없게 되고, 색(色)과 심(心)으로도 그의 경계에 이를 수 없소. 그러니 말함을 잊고 생각함을 끊어서 이미 유마(維摩)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비춤을 다하고 신(神)을 다하여서 부처님께서 이에 마갈타(摩竭陀) 나라에서 엄실(掩室)하였소.
깊고 깊어 그윽하고 간략하니 희화(羲和)의 직책이 어찌 알겠으며, 미세하고 은밀하며 희이(希夷)하니 상림(上林)의 서적에도 싣지 않았소.
찾아보니, 진사(眞士)와 응사(應士)가 다 자비한 바람에 목욕하였으며, 상방(上方)과 하방(下方)이 다 성스러운 가르침에 젖었소.
녹야원(鹿野苑)에서 시작하여 저 학림(鶴林)에서 마칠 때까지 곧 3장(藏)과 3륜(輪)의 글과 4승(乘)과 4계(階)의 말과 반자(半字)와 만자(滿字)의 큰 뜻과 관화(貫花)와 산화(散花)의 별담(別談)이 있어서 도도하게 마르지 않는 샘을 솟게 하고 담담하게 길이 사는 이슬을 드리웠소.
그의 말이 교묘하고 그의 뜻이 깊고 멀어서 여덟 하수가 바다에 돌아감과 같고, 1만 모양이 허공에 나아감과 같아서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모든 부처님의 이치에 맡기는 경(經)이라 부르고, 유(類)를 따르고 마땅함을 따르는 것은 지극한 사람의 권화(權化)하는 전적(典籍)이라고 부릅니다.
낙수(雒水)로부터 새서(璽書)의 송(頌)이 얽혀들고 방원(芳園)에서 화개(華蓋)의 사당을 세운 것은 주사행(朱士行)이며, 높은 무리들이 욕지(耨池)의 8미(味)를 마시는 것은 극가빈(郄嘉賓)이오.
세족(世族)이 가타(伽陀)의 일환(一丸)을 차고서 한가지로 자기의 몸에 평등하게 부처될 성품이 있음을 깨닫지 않음이 없으니, 이 번뇌가 곧 보리(菩提)임을 체달(體達)하는 것이오.
가령 소통지원(疏通知遠)의 글과 옥동금장(玉洞金章)의 글자와 장자방(張子房)의 신[履]을 주는 기술과 문희(文喜)가 도를 묻는 편(篇)은 다 말이 공공(空空)에 관계되지 않고 일이 유유(有有)에 마침내 걸리어서 아울러 여덟 가지 마(魔)의 그물에 걸리고 돌이켜 네 가지 전도(顚倒)되는 채롱에 얽히게 되니, 선생이 전에 말한 것과 어떤 것이 진선(盡善)합니까?’
그 촌 늙은이가
‘이 늙은이는 늙음이 장차 이름에 내가 제일이라 하였는데 대략 법음(法音)을 들으니 나의 잘못이 황연(恍然)합니다. 공경히 명함을 듣고서 모두 받들어 행하겠습니다’고 사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