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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은 농사짓는 자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다. 그들이 각기 자기들의 소출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가서 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었으나 가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은 분노해서 아벨을 쳐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최초의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먹으면 먹는 대로 사는 것이 사람의 특색이다. 음식도 물론 먹는 대로 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안되는데 다른 것을 먹으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마치 연극배우가 오늘은 천사의 역할을 하다가 내일은 악마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형상이다. 사람은 무엇을 받아서 그것을 나타내도록 지어졌다. 거기서 천재적이다. 사람들은 다른 능력으로 사람의 우월성을 말하는데 근본적으로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표현해 내는데 천재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고 이것을 보고 심히 좋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해 줄 형상이 필요하다. 만물 중에 사람처럼 하나님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맨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사람은 구조적으로 받은 대로 표현하게 되어 있다. 착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받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사람이다. 윤리와 도덕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음 문제다. 명심보감에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면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바로 그것 때문에 나온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은 어렸을 때의 영향이 제일 크고 그 다음에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영향이 크고 그 다음에는 지식의 영향이 크다. 그렇게 자라다 보면 사람이 달라져 간다. 초등학교 때는 다 같은 것 같은데 학년이 높아지고 지식이 많아질수록 질수록 점점 달라진다.
인문계와 자연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인문학을 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한 사람은 생각 자체가 다르고 의식 구조가 다르다. 같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그릇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인문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구조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인다. 시인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고 미술가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클수록 달라지고 높아질수록, 많이 알수록, 많은 경험을 가질수록 사람은 점점 달라진다. 그래서 달라진 것을 보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소유지 사람 자신이 아니다. 이것을 명백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나의 소유는 같지 않다. 나는 나고 소유는 소유다.
이것이 완전히 해체되는 자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다. 거기 가면 다 해체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근본 존재만 남는다. 그 자리가 사람의 자리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찾으려고 출가한다. 집에 있으면 안되니까, 보는 것이 많고 자극이 많으니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결혼도 안한다. 결혼을 하면 걸그치는 것이 많고 생각이 복잡해지게 되니까 결혼도 안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계속 정진하라는 말이다. 수양을 해서 헛된 생각을 낱낱이 제거하고 원래의 어떤 것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근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수도를 한 사람은 뭔가 다르다. 지혜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그런 과정보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니까 잘못하면 이상한 사람이 돼 버린다. 비합리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잘못되면 치료가 곤란하게 된다. 물론 좋은 사람은 좋게 되지만 잘못 되면 아주 난처한 사람이 되고 만다.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최초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것, 이것이 종교다. 에덴동산에서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라는 것이 없다.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공유하는, 공생하는 영역이니까 제물이 있을 필요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편지를 보내는 것이지 한 집에 같이 살면 편지를 써서 보낼 필요가 없다.
왜 제물을 가지고 갔을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담은 “내가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려워서 제물을 가지고 가게 된 것이다. 루터는 “사람의 종교적인 것은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면서 내심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음성을 들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사람에게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미신적인 것들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자기가 죽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두렵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죽은 다음에 연락이 없으니까 두려운 것이다.
나는 숨이 끊어져 죽어 보았지만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두려움을 못느꼈다. 혼수상태에서 숨을 쉬지 못했으니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 깨어나 보니 죽었다 살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인공호흡을 안했으면 잠자듯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주관적으로 나는 죽음이 뭔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모르니까 그렇게 죽는 것이 가장 편하게 죽는 것 같다.
잠자다 죽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고 죽는다. 그런데 의식이 있으면 두렵다. 어머니는 나이가 많이 드셨을 때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음이 두렵다. 무섭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도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생겼다고 한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가인과 아벨은 누가 제사를 드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제사를 드리라는 계명도 없는데 스스로 농사짓는 자는 농산물을 가지고, 양치는 자는 양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러 왔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생겼는가? 동생의 제물은 받고 자기 제물은 안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떤 형상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제사를 지내면 마지막에 소지(燒紙)한다고 지방 쓴 것을 태운다. 지방을 태우면 연기가 올라가는데 위로 올라가면 제사가 잘 됐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가 잘못 됐다고 한다. 원시부족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낼 때 그런 징조를 보고 신이 열납했는지 안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람을 바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동물을 바쳤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을 바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이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목숨을 내놓고 “우리는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신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에밀레 종 신화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종을 만들어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니까 마침내 어린애를 가마솥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을 울릴 때마다 특이하게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던 시골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방파제를 쌓고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둑을 막아서 그곳을 농장으로 만든 간척지가 많았다. 거기 수문이 있어서 들어오는 바닷물은 막고 나가는 물은 내보냈다. 비가 많이 오면 내보내야 되지만 바닷물이 밀려 올 때는 막아야 되니까 큰 나무로 수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요즘처럼 쇠로 완벽하게 만든 것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 물이 새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을 저수해 놓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나무문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압력이 세서 문이 들썩들썩 움직였다. 그 소리가 특이했는데 원(방파제)을 막을 때 아이 둘을 넣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넌들 넌들 네 탓이냐. 낸들 낸들 내 탓이냐’ 이렇게 들렸다. 그런 일이 나라마다 많은데 다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있어서 정성을 드리면 신도 응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데서 종교가 생겼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나 심지어는 해를 보고, 아니면 달을 보고 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거기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지금도 시골에는 당나무라고 큰 정자나무에 온갖 울긋불긋한 것을 걸어놓았다. 특별히 제주 지방에 그런 것이 많다. 사람들이 나무에 색깔있는 천을 걸어놓고 지성을 드리고 음식을 차려 놓고 빈다. 운수가 좋게 해 달라고, 액운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간다. 그러니까 그 나무들이 귀신 나무가 된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있다. 우상숭배라는 말이 그런 데서 나왔다. 생명이 없는 것에게 절하고 비는 것이다. 그것이 발전해서 나무로 깎아서 무슨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돌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불교에서는 돌을 깎아서 부처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은 불교 본래의 가르침과 다르게 샤머니즘과 불교가 결합된 것이다. 불교의 근원인 힌두교는 엄청나게 신들이 많다. 우리나라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소를 보고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은 소를 보고도 신이라고 하고 강물을 보고도 신이라고 한다. 간지스 강은 신성한 강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 갔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소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소가 시내를 돌아다니고 똥을 싸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는 소의 천국인 셈이다. 사람 속에는 원시적으로 이런 마음이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방식의 우상 숭배가 없지만 다른 것이 있다. 돈이 있어야 안심이 되거나 지위가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알고 보면 종교성이다. 안심이 안되고 평안이 안되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안되니까, 예수와 하나가 안되니까 불안하고 그것이 기도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은데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있다. 불안하니까 기도를 해야 평안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자기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이 불안이 해소가 안되면 병이 된다. 정신병의 근원은 불안이다. 무슨 이유로든 불안이 생기면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쓰게 된다. 그래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면 ‘귀신 들렸구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말을 한다. 나도 전혀 몰랐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 보니까 그런 것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한다고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귀신 들렸다고 할 만하나 사실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깊은 불안을 감추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안정되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고 지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니까 너희도 안식해라. 내가 너희를 온전하게 지어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안식에 참여해라.’ 이런 뜻이다.
사람은 자기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힘이 없고 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종교가 나왔다. 뭔가를 의지해야 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물을 가지고 왔을까? 가인과 아벨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종교가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 써 놓은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성경을 볼 때 이렇게 알고 봐야 한다. 우리가 ‘산이 있구나.’라고 알기 전에 이미 산이 있었다. 이런 사실이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사람에게 있는 일이니까 허무맹랑한 소리를 써 놓은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써 놓았는데 다른 목적으로 써 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 목적을 알려고 성경을 읽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성경책이 아직도 없는 분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경책을 한 권 사야 한다. 우리 교회에는 성경책도 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돈이 없어도 제발 성경은 한 권 사기 바란다. 성경은 아주 귀중한 책이다. 말씀을 들으려면 성경책이 꼭 필요하다. 요즘은 새로운 번역이 나와서 옛날에 비해 잘 되어 있다. 책으로 생각하면 많이 팔려서 싼 편이니까 꼭 사기 바란다. 성경책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듣겠는가.
가인과 아벨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형제간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사람 속에서 그런 것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가만히 두면 “교회에 와서 예배하세요.”라고 하지 않아도 다른 것을 예배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회 와서 예배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어디 가서라도 예배할 것이니까, 무엇을 섬겨도 섬길 것이니까 교회에 와서 하는 것이 낫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교회에 가지 못하니까 예배를 못드린다고 난리라고 한다. 우리 교회는 형제들을 보고 싶어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못드린다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고 동네 주민들이 다 반대해도 예배를 강행해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예배라는 것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병이 전파되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부끄러운 일이 한국 교회에 생겼는데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시골에 몇 명 모이는 데는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데 많은 사람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의 근본에 종교성이 들어 있다.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이 들어 있다. 배워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배우지 않아도 그런 것이 있다. 교리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았어도 역시 예배를 드린다.
젊은이들을 보니 그렇게 티브에서 주의를 당부해도 못견딘다. 춤을 못춰서 환장을 하고 디스코텍을 폐쇄하니까 옆 식당에 모여서 춤을 춘다고 한다. 젊음이라는 것이 저렇게 좋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데 그 얘들에게는 그것이 그들 인생에 중요한 일이니까 몸이 부딪치거나 말거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건 말건 문제가 안된다. 예배라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배를 드리려고 생각한다.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형식을 찾게 되었는데 천주교에는 의식이 굉장히 많다. 개신교는 그것을 타파하고 나왔지만 너무 밋밋하니까 도로 하고 있다. 한 시간 동안 집회를 하면서 말씀하는 시간은 20분도 안된다. 나머지는 의식을 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다. 우리 교회에 처음 와서 어떤 사람은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예배를 드리던 습관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 교회에 와 보면 아무 의식도 없으니까 예배도 아니고 사람들끼리 모여서 말씀을 듣고 헤어지니까 허무하다는 것이다.
‘대구교회라는 데를 왔더니 뭐하는지 모르겠다. 예배도 아니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해 본 분이 있을 것이다. 의식(儀式)이 없으니까 말씀 듣고, 알아 듣고, 받아들이고 이런 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 천주교에 가면 떡 조각이라고 하나 얻어먹는데, 개신교에 가면 앉았다 섰다 하는 것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기가 뭐하는 데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은 말씀 듣는 데는 관심이 없다. 무엇을 하는가, 이것만 관심이 있다.
가인과 아벨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물을 들고 왔다. 이것이 중요하다. 각자 자기의 소출을 가지고 왔다는 말은 자기의 표현, 자기 노력의 표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어디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했습니다.”라는 대답은 할 수 있는데 어디 있다는 말을 못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가 어디 있다는 말을 못하니까 자기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와서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라며 내놓았다. “하나님, 보십시오.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요.”라고 고백한 것이고 “나는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양을 키우거나 농사를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직업은 이런 직업도 있고 저런 직업도 있다. 우리는 어업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생선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해 놓은 것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종교는 무엇을 하라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종교다.
영어로 religion은 관계를 의미하는데 동양에 오면서 religion을 ‘종교’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동양에서 종교(宗敎)라는 말은 머리 되는 가르침,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religion은 신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관계가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다. 중국 사람에게는 신이 없으니까 이런 개념이 없다. 그래서 religion을 종교라고 번역한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의 예배는 ‘관계’다.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어떻게 대답하는가 하는 문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니 대답을 해야 하는데 사람은 자기 위치가 없으니까 “나는 어디 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나는 국무총리입니다.”라고 하겠는가, “나는 육군대장입니다.”라고 하겠는가? 그런 말은 대답이 안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내놓는다. “나는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나는 양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시지 않았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제물을 보지만 하나님은 제물을 드린 그 사람을 받으신 것이다.
이것을 해석할 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제물을 중시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사람을 중요시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제물을 중시하는 해석은 아벨은 양을 드렸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구속사적인 면에서 볼 때 희생제물, 즉 동물제사가 속죄제였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았다는 교리적인 해석이다. 아벨은 양을 치니까 양을 가져왔지만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다. 그래서 농산물을 가지고 왔으니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농산물도 제물이 된다. 양은 번제가 되고 곡물은 소제가 된다. 제물이 나빠서 안받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뒤에 있는 사람, 제물을 내놓는 그 사람을 보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인은 받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벨은 받으셨는데 ‘가인’은 ‘획득하다. 취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아벨’은 숨이라는 뜻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런 일이냐 저런 일이냐를 떠나서 정말 어쩔 수 없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신다. 인정하신다. 그러나 내가 취한 것, 내 힘으로 얻은 것은 내 마음대로 한 것이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 같으면 무엇을 원하겠는가? 내가 마음대로 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은 싫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인정하신다. 다말을 인정하셨고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를 인정하신 것은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고 그 길이 생사를 가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안받으신다. 왜 안받으시는가? 또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는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표현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 버렸다면 그 사람을 인정하겠는가?
직장에 가면 상사가 요구하는 일을 해야 잘했다고 한다. 상사가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해 버리면 좋다고 하지 않는다. 직장 생활을 잘하려면 이 원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기 위해 직장에 간 것이고 주인은 필요해서 나를 고용한 것이니까 내 생각은 이럴지라도 주인이 다른 것을 원하면 그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내 생각은 이것이 옳은데 주인이 왜 저것을 시키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훈련을 하기 위해서 광야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생각에는 이렇게 가면 좋겠는데 왜 머물고 있는가? 삼 일씩 머물고 삼 일씩 움직이면 좋겠는데 어느 때는 한 달을 머물고, 어느 때는 일주일을 머물고, 어느 때는 하루 밤을 지나고 가자고 하니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며 불평을 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백 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두고 길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움직이라는 것이니까 자기 생각이 빠져야 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안된다. ‘오늘쯤 이동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오늘 이동해도 되고 내일 이동해도 되고,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은 괜찮은데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은 괴롭다.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왜 시키는지 아는가? 전쟁하는 데는 총만 잘 쏘면 되고 용감하면 되지 제식훈련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앞으로 가. 뒤로 가. 앉아. 서’를 반복하는가?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안그러면 다른 사람이 죽으니까 그 훈련을 제일 먼저 하는 것이다. 독재국가일수록 더 그렇다. 제식훈련을 하는 것을 보면 동작을 착착 맞춘다. 그렇게 칼처럼 맞추려면 굉장히 어렵다. 그런데도 그것을 시키는 이유는 절대복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군대에서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죽는다. 전시에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쏴 버린다고 한다. 전열이 틀어지면 많은 사람이 희생당해야 하기 명령불복종은 심각한 문제다.
전방에서 수색소대 소대장을 지낸 사람이 하는 말이 소대원을 데리고 매일 수색을 하는데 조금만 이상한 것이 보이면, 어제 없던 흔적이 보이면 소대원 중 하나를 보내서 그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흔적만 있지 아무것도 없으니까 거기 폭탄이 들었는지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대원 중에 한 사람을 지명해서 거기 들어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자기 집에서는 다 귀한 아들인데 소대장은 소대원 하나를 지명해서 “너 들어가.”라고 해야 한다. 폭탄이 터질지라도 가야 한다. 소위가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최전방에 가면 생살권이 있다. 그렇게 해야 군대라는 사회가 유지된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군대가 안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생사를 걸고 하는 것이다. 공무원과 다르다. 공무원은 일을 못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까 조금 잘못해도 크게 잘못될 일이 없다. 그러나 기업을 하다 부도가 나면 망한다. 돈 벌 때는 좋지만 돈을 못벌고 부도가 나면 비참하게 쫓겨다녀야 되고 잘못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돈을 그냥 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업은 기업인이 해야 되지 정부에서 하면 안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사를 걸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야 한다. 아무나 사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업원은 쇠고랑 찰 일이 없지만 사장은 쇠고랑을 찰 각오로 해야 한다.
맡긴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어떻게 보시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을 지으신 유일한 목적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를 온전하게 표현하는 사람에게는 계속 온전한 것을 맡기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맡기지 못한다. 자기 마음이 기쁜 것을 사람에게 맡겨 놓았더니 기쁜지 아닌지 모르게 된다면, 동으로 가려고 하시는데 사람이 서쪽으로 간다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겠는가.
중풍이 그런 것이다.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다. 걷고 싶은데 걸을 수 없다. 생각은 있는데 몸이 안따른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표현해야 되는데, 생각은 원하는데 안되는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하는 말이 그것이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데 안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며 탄식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되는가? 로마서 8장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였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겼다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을 때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참 좋았는데 왜 안되는가 했더니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안에’ 거기 밖에는 내가 있을 데가 없다. 그 외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 이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제일 좋은 교회에 다니며 좋은 설교를 들어도 이 자리 외에는 인생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가 안되는 것이다. 바울 서신의 전체적인 키워드는 ‘In Christ’다. ‘그리스도 안에’ 이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울 서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In Christ’가 먼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다. 냄새는 좋은데 먹지 못하는 것도 있고 아예 냄새가 속에 들어 있어서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수박은 껍질이 두꺼워서 껍질을 깨야 냄새가 난다. 나는 수박 향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수박을 그냥 두고 냄새를 맡으면 아무 냄새도 안난다.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만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만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다. 아무 데서나 주시는 것이 아니다. 애쓰고 기도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주실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주실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은 그분 자신이다. 기도해서 돈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병을 고쳤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은 주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밖에 주실 수 없다.
다른 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 아무리 해 봤자 무엇을 해도 종교, 즉 ‘거리를 두는 관계’밖에 안된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관계밖에 안된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밖에 안된다. 율법을 지키려는 것밖에 안된다. ‘그리스도 안’이 아니면 다 그렇게 되고 만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천 년을 왔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안오는 것이다. 내가 안바뀌는데 세상이 바뀌겠는가? 잘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이 많다. 정직한 사람도 많다. 애쓰는 사람은 너무나 애를 쓰지만 그 자리가 아니면 안된다. ‘In Christ’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박운봉 형제는 사랑방에 글을 쓸 때마다 마지막에 ‘In Christ’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보통 말이 아니다. ‘In Christ’, 그 안에 천국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그 바깥에는 없다. 고기가 물 속에 있을 때는 모든 축복을 누리지만 물 바깥에 나오면 축복이 없다. 고기는 그대로인데 물 바깥에 나오면 죽을 판밖에 없다. 헐떡거리다 죽는다. 아담이 동산에 있을 때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제물을 따로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동산 밖으로 나오니까 두려워졌다.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하나님을 떠났으니까 불안해진 것이다.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으면 불안할 것이 없는데 떨어져 있으니까 불안한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 안에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자세히 보면 남에 집에 가서도 엄마가 옆에 있으면 잘 논다. 엄마가 있을 때는 남의 품에도 가고 편안한데 엄마가 안보이면 대번에 불안해서 엄마를 찾는다. 아이의 눈은 항상 엄마를 보고 있다. 엄마가 어디로 가고 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사람도 똑같다. 자기를 지으신 이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내가 왜 있는지 모르니까 불안하고 내 용도대로 쓰이지 않으니까 불안하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신을 달래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달랠 수 있겠는가. 귀신을 달래듯이 하나님을 달래겠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동산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표현하니까 하나님이 안심하신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이제 아실 것이다. 헛된 것을 하면 안된다. 해봤자 소용없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장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르다.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과 아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잘하는데 저것은 못한다. 선생님을 기쁘게 하려면 공부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다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공부는 하나님께 해당이 안된다. 하나님의 필요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을 무슨 방법으로 연구한다고 알겠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이것을 하면 기뻐하실까, 안하실까?’ 이것이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오늘 저녁에 무엇을 해서 드릴까?’라고 생각한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르다. 형편없는 여자인 것 같은데 남편에게 굉장히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 여자는 남편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저런 여자와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그 여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이 ‘저 여자 괜찮다. 멋있다.’고 생각해도 남편이 싫어하는 여자가 있다.
하나님과 같이 살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회사에서 잘 살려면 사장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내가 살기 위한 길이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사장님을 기쁘게 하면 사장님도 좋고 나도 좋다. 그런 사람을 나가라고 하겠는가. 나간다고 해도 붙잡는다. 최대식 형제가 하는 말이 그것이다. 사장님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을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을 기쁘게 하고 사장님 편이라야 되는 것이다. 지혜롭다. 지혜라는 것이 묘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것이 지혜다. 어디서 온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 특별히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비밀이다. 일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분석이 되지만 사람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 사람만의 노하우가 있어서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른다. 미인박복(美人薄福)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가 예쁘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소박을 맞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제물을 가지고 왔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이 있어서 받으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니까 가인의 제물은 열납지 않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가인이 분노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왜 분노하느냐고 하셨다. “네가 옳게 행동했으면 왜 분노하느냐. 너는 너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그러지 못하고 아우를 죽였다. 이것이 종교의 행태다. 역사상 그런 일이 있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단으로 몰아붙여서 죽였다. 중세 시대에는 그런 일이 심했다. 사람을 죽이면서도 “네가 미워서 죽인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죽였던 것이다. 예수에게 핑계대고 자기는 빠져버린 것이다. 좋은 일은 자기 것이고 안좋은 일은 예수에게 미룬 것이다. 양심에 가책도 없이 사람을 불에 태워죽이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했던 것이다. 자기 이름으로 해야 되는데 자기 이름을 빼버리고 예수 핑계를 댄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말로다.
종교가 약할 때는 어린양 같은데 크면 호랑이가 돼 버린다. 그래서 종교에게 무기를 맡기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유럽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미국이 건설되었다. 그래서 미국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는 별의별 종교가 다 있다. 심지어는 사탄 종교도 있다. 그래도 사법적인 범죄가 없으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신 절대로 권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 무솔리니는 이태리에서 교황청을 분리시켰다. 이태리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바티칸 시티만 떼어 주었다. 지금은 바티칸 시티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국민은 바깥에 있고 정부는 바티칸에 있는 셈이다. 정부가 얼마나 무서운 짓을 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그래서 저주가 나왔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런데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다. “나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너무 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라고 하였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를 쫓아내시면 내가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예배를 못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이다. 동생을 죽여 놓고도 “나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 예배하라는 말입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했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셨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 묘한 벌이다. “내가 하나님이 없으면 어디 가서 예배하겠습니까?”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예배할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런 사람을 죽이면 더 벌을 받는다. 악한 자를 죽이면 상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악한 자와 싸워서 악한 자를 죽이는 놈은 그보다 더 악한 놈이다. 사람들은 악한 자를 죽이면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악한 자를 죽이면 더 악하다.
가인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 어디로 갔는지 흘러갔는데 기록이 없다. 더 이상 기록해도 똑같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인의 자손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나온다. 세 가지가 나왔다. 가축을 키우는 사람, 수금과 퉁소를 잡는 사람,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것은 인간 문화를 상징한다. 인류 문명은 이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생업을 위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고 하나는 농기계나 전쟁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퉁소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예술은 위로가 된다. 예술은 아주 어려운 데서 나오기도 하고 아주 부유한 데서 나오기도 한다. 중세의 예술을 보면 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데서 나온 것이 많다. 그런가 하면 이중섭처럼 아주 가난한 데서 나온 것도 있다.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어서 엽서에 그려놓은 것이 지금은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소설을 써도 어려운 가운데 쓰는 사람도 있고 배 두드려가며 쓰는 사람도 있다. 극단적인 것을 표현하면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뒤섞여 사는 것을 보면 재미있는 세상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렇게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좋게 한다고 했는데 나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 가인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종교를 제대로 세우려고 이렇게 했습니다.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저 놈은 양을 키워서 가져왔지만 나는 괭이질을 하고 농사를 지어 가져왔습니다. 누가 더 힘을 많이 썼습니까? 공평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공평한 종교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누구나 다 잘하려고 한다. 일부러 못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간다. 다 잘하니까 복잡한 것이다.
인간 사는 데는 평화가 없다. 계속 반복하고 혼란에 혼란이 계속되기 때문에 평화가 없다. 완전한 평등 사회는 꿈에 불과하다. 그런 사회가 오면 좋을 것 같지만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이 수없이 많은데 사람들은 가능하지 못한 것에 계속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생 동안 가능한 것만 찾아도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가능하지 못한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맨날 해도 안된다. 못할 것만 찾아다니고 자기 힘에 맞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산을 떠나서 분수를 잃어 버렸다. 위치를 떠났다는 말은 자기 분수를 떠났다는 말이다. 대통령은 한 사람뿐인데 다 자기가 대통령이 될 것처럼 생각하니까 세상이 평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정당이 서른 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세상은 이런 재미로 그냥 살아야 되지 거기서 진리를 찾거나 옳은 것을 찾으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알고 살아야 되지 거기는 진실이 없다. 판 자체가 진실할 수 없게 되어 있는 판이다. 동산을 떠나면 모든 것이 혼란인 것이다.
우리를 동산으로 회복시킨 것,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동산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관계가 회복되려면 위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위치 때문에 악을 행한 것이니까 위치가 회복되면 악이 행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악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자기도 위치가 틀린 사람이 남의 악을 어떻게 없애겠는가.
그리스도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할 위치 안에 있으면 사람은 저절로 겸손해지고 화평케 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지, 어떻게 하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지 아무리 연구해도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저절로 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설교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저절로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온다.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율법이지 복음이 아니다. 위치가 바르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고기는 물 속에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총괄적으로, 일괄적으로, 포괄적으로 다 해결된다. 그러나 물 밖에 나오면 아무것도 안된다. 세상 속에서 완전한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없는 데서 찾으니 되겠는가? 거짓말을 안하고는 정치를 못한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잘 해야 되지 서툴게 하면 당한다. 정치를 오래 한 사람은 거짓말이 능숙하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지 알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덤벙거리다 자기가 당한다.
세상은 세상대로 알고 우리 갈 길을 알아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모르고 덤벙거리면 혼란되어 아무것도 안된다. 주님이 부르신 길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안가게 되지 모르고 들어가면 큰일난다. 어려서부터 거기서 단련된 사람은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망신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다. 그러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당연히 선과 악이 나온 것이다. 가인과 아벨의 역사는 선과 악의 싸움의 역사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는 역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다. 성경을 잘 알면 세상을 다 알게 된다. 옛날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있는 일이고 지금 세상 속에 흐르고 있는 맥이니까 세상을 아는 것이 간단하다. 원리만 알면 다 알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