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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추천.서문 |
제임스 패커‧ 7 |
서 론 |
평신도와 성직자의 협동작전 ‧ 11 |
제 1 장 |
성경 교사와 평신도 설교자 ‧ 25 |
제 2 장 |
소그룹과 소그룹 리더.이철민 ‧ 77 |
제 3 장 |
평신도 목회자와 양육 상담자 . 105 |
제 4 장 |
예배 인도자와 은사 중개인 . 127 |
제 5 장 |
직장 사역자 ‧ 127 |
제 6 장 |
이웃전도자.마이클 그린 ‧ 157 |
제 7 장 |
결혼 및 가정 사역자 ‧ 175 |
제 8 장 |
사회 정의사역자 ‧ 193 |
후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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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평신도와 성직자의 협동 작전
모든 평신도-성직 평신도와 비성직 평신도-가 제도화된 기독교의 올무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은혜로운 협동 작전이 필요하다. 평신도(laity)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laos)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류 계급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나 아마추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찬사를 나타낸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머리속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평신도이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보조자나 교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능한 사역자로 부름받았다.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표현을 빌리면, 이 둘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나-너 관계에서 모두 상대편의 ‘너’이다. 평신도와 성직 평신도는 한 옷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잘 연결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비성직 평신도에게 신약 성경의 권위를 힘입어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렸군요. 당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거룩한 제사장이고,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세상에 있는 화해의 대리인이고, 빛이며 소금이고 누룩입니다. 당신은 목회자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사역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돕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구비시켜야 한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구비시킨다(equip)는 것은 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으로, 저자의 주요 개념이다. -[편집자 주]. 그러나 이것은 쉽게 충족될 수 있는 필요가 아니다.
한편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정중한 태도로 목회자의 목을 조이면서 자리를 지켜 달라고 요구하기 쉽다. 목회자가 자리를 비우고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전문 사역자를 위한 수련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진지하다면, 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권력, 명성, 지위 같은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를 ‘유일한’ 사역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해도, 그는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고, 항상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전지전능하고 유일한 목회자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수백 가지의 기대와 요구, 불평으로 인해 이미 그런 위치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이, 하나의 짐을 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1인 교회 악단의 리더가 되어 달라는 성도 대부분의 요구도 이루기 불가능한데, 여기에 더하여 구비 사역자가 되라는 더 큰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에 있는 진보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이제 목회자는 모든 성도들의 은사를 촉진해 주어야 한다.
성실한 목회자들에게 사역은 그저 일만은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일에 투자하는 시간에다가 그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을 합한 것만큼을 정서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사역에 투자한다. 목회 사역처럼 바쁘고도 보람 있는 소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만약 목회자가 가정을 교회보다 더 중요한 우선 순위로 여기지 않으면, 모든 일이 뒤죽박죽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결혼 생활에 어떤 틈이 생기거나, 양육하던 십대 자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쩔쩔매는 상황이 벌어지면, 목회자에게는 사역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역조차 의문시된다.
이런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우리를 지금의 위치로 몰고 왔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목사님, 조금 비켜 서셔서 제 자리를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이봐요, 좀더 올라오시구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구비 사역의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한다.
구비 사역에 대한 오해
구비시킨다는 것은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사역에서 특정 부분을 평신도에게 위임할 때, 평신도들을 구비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교회에는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사역 외에 그것보다 더 많은 사역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 즉 이 사역은 목회자가 인계해 주어야 하는 목회자의 것이 아니라 본질상 평신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주어진 사역의 은사들이 복수형(pleroma, 충만)인 점은, 밝은 햇빛을 구성하는 전체 스펙트럼의 한 색깔과 마찬가지로, 각 성도가 그리스도 사역의 일부분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모든 색이 다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 혼자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은사와 사역을 실천해 볼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잘못이다.
가려운 곳 긁기
진지한 평신도에게 가려운 곳이란 바로 불완전하게 고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만약 평신도가 불완전 고용 때문에 가려워하고 있다면, 목회자는 과잉 고용 때문에 가려워한다. 목회자는 설교자, 목회자, 상담자, 전도자, 행정 책임자 그리고 사무실 사환 등 1인 교회 악단이 되어 달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구비 사역에는 단순히 주변의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 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가르침과 반 해방적인 교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목회자의 역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의 사역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더 중요하다. 한 번 말하거니와, 헬라어 ‘라오스’는 백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따라서 목회자도 이 세상에서 평신도가 되는 것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는 없다!
성도들을 묶음
사람들은 이제 구비 사역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교회를 (분주한 운전 기사 한 명과 졸리운 승객 다수로 구성된) 버스로 보기보다는 (모든 지체가 활동적이며 필수적인) 몸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무수한 훈련 과정, 비디오 테이프, 프로그램 그리고 지침서가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 결과 교회의 성도로 만드는 것은 하나의 기술로 전락했다. 자신들의 신학 훈련을 이리저리 활용하면서 실험하는 목회자들은, 수도원 같은 신학교의 상아탑에서 자신들이 받았던 인식론적, 합리적 기술과 정보를 조금 희석하여 굶주린 성도들에게 먹인다. 그런데 그들은 떡 대신 돌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다. 때로 비전문 사역자(평신도)들은 자신들이 진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프로그램을 갈망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기술 전수 과정에서, 교회는 훈련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가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좀더 유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혹은 평신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참으로 해방된 사역에서 서로 상대방의 ‘ 너’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호 존경하는 가운데, 은혜로운 협동 작전을 펼쳐야 한다.
교회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킴
하나님은 전략적으로 평신도를 사회에 심어 두셨다.
“평신도는 세상 속으로 매일 반복되어 비치는 하나님의 영상이다 교회는 절대로 외진 구석에 세워진 건물일 수가 없다( 핸드릭 크레머).
만약 성도들이 충분하게 양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넘쳐나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신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뻗어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양육은 예수님의 선교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도록 평신도 지도자를 해방시킬 때 이루어진다. 즉 구비되어 사역에 참여할 대 양육은 그 부산물로 주어진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교회의 모든 잠재력을 세상에서 펼칠 최선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사랑으로 협력할 때, 그들은 우리보다 이 협동 작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철저히 헌신하기 때문이다.
1. 성경 고사와 평신도 설교자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전혀 격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곳곳에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왜 당연히 그렇다는 듯이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좀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성경 공부
그 대답은 믿기지 않을 만큼 간단하다. 즉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이상으로 성경의 내용을 노출시키기 때문이고, 그것도 현실 생활과 분리된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개인적인 실천이 아니라 성경의 사실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의 기준이다. 만약 우리가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채 정보를 수집하거나 혹은 영감을 얻으라고 권면한다면, 무의식 중에 불순종을 조장하는 것이다.
질문의 폭발적인 힘
귀납적인 성경 공부는, 다른 곳에서 발견된 원리를 성경에서 찾으려 하기보다는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게 하는 공부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질문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구조적 생활을 이해하는 구비 사역 목회자는, 리더가 올바른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올바른 질문을 제기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질문은 폭발력이 있는 도구이다. 질문은 우리의 생각을 파고들어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만든다. 질문은 우리의 세계관을 넓혀 준다. 질문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을 일깨워, 우리로 하여금 발견의 길을 걷게 한다. 질문은 우리의 편견과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구비 사역 목회자는 특히 성경 공부 교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질문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수사적 질문 (rhetorical questions)
수사적 질문이 듣는 사람들의 흥미를 일깨우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성경 공부 교재에서 수사적 질문은 실제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
관찰 질문(information questions)은 학생들에게 사실에 대한 답을 찾도록 요구한다.
성경공부 교재를 집필할 때 관찰 질문은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는 데 핵심적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잠시 멈추어,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기 전에 곧장 해석으로 뛰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인도 질문(leading questions)은 학생들이 관찰된 사실과 관련하여 자신들 내부에서 대답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질문들은 관찰 질문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며, 질문자나 질문 작성자는 자신이 원하는 한가지 올바른 대답을 학생이 발견할 수 있도록 충분한 단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탐색 질문(probing questions)은 가장 심오한 것이다. 이 질문에는 정말로 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교사는 학생들이 어떤 답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던진 질문의 반 이상이 탐색 질문이다. 따라서 구비 사역 목회자는 공동체적인 성경 학습 모델을 개발할 때, 여러 종류의 질문들 특히 탐색 질문을 사용해야 한다.
왜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시켜야 하는가?
성경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말씀의 사역은 모든 성도들의 특권이자 소명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면, 우리는 이러한 ‘말세’를 요엘서 2장의 성취라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모두 예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고),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게 되기를 기대해야 한다(행 2;14-18).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값진 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실제적딘 취지가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때 모든 사람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믿음의 공동체 전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나의 고향에 대학교회에서는 일년에 두세 차례 설교하는 의사와 주부, 목수가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 때, 설교자의 문화와 청중의 문화 사이에는 즉각적인 일체감이 형성된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은 책에서 수집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짜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문 서기관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설교를 전문화하면 복음은 오히려 방해를 받는다. 각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교회 전체로 하여금 말씀을 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받은 은사가 많은 설교자라 하더라도 똑같은 사람들에게 한 달에 두 번 이상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도 자신의 설교를 삶에 적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석교자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한 주에 3-4회 이상 설교하면, 보통 신뢰성에 문제가 생긴다.
나는 전문 설교자들은 모두, 무엇보다 먼저 청중의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쟁적인 제안을 제시한다. 귀는 둘이지만 입은 하나인 것은 그저 인체 해부학상의 사실일 뿐 아니라,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분량의 두 배를 들어야 한다. 그럴때 즐거운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평신도 설교자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말씀하실 것이다.
선지자 학교
평신도 설교자를 구비하는 최상의 길은, 구약 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인물 주위에 있었던 (왕상 19:19-21; 왕하 2:7)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과 바울의 선지자 학교를 통해서 열린다.
선지자 학교에서, 통합 커리쿨렴을 실행할 때 본문을 몇 주 전에 미리 연구하며, 전체 선지자 학교에 설교 사역의 주인 의식을 심어 줄 수 있다고 본다.
세상에 있는 모임에는 거의가, 교육적 목적을 위해 지난 주일 메시지를 재생할 수 있는 카세트 녹음기가 갖추어져 있다. 또 제스처와 표현법, 몸짓 언어를 돕기 위해 비디오 녹화기를 사용할 수 있는 교회들도 많다.
목회자들에게는 헌신적인 성경 해석학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필요하다. 이런 모임은 우리 목회자들이 평가하고, 계획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기 위해, 본문의 핵심 급소를 발견하고 회중의 의식을 분별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설교에 관해 유용한 반응을 얻기가 매우 힘든데. 이런 모임은 건설적으로 그런 반응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설교 후보자들에게 좋은 도전을 줄 것이 분명하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평신도들의 손에 되돌려주었지만, 이제 평신도들은 성경을 다시 셩경 학자들과 전임 설교자에게 되돌려주고 말았다.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2.소그룹과 소그룹 리더
목회자가 모든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우리 나라 상황에서는 교회의 전반적인 구조가 목회자에 따라 그 성격이나 특성을 크게 달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목회자 한 사람이 자리를 옮기게 되더라도 혼란을 겪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3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 즉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도 스스로 자립해서 설 수 있는 12명의 제자들을 키워 놓으신 것이다.
한국 교회에도 이러한 성경적 전통과 정신을 이어갈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들은 바로 소그룹이라는 작은 은혜의 공간에서 훈련받아 만들어질 수 있다.
소그룹은 가장 효과적으로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구조이다.
소그룹이란?
한국 교회에서 대학, 청년부, 장년부를 되살리는 데 지대한 공현을 했던 소그룹이란 무엇인가?
소그룹은 ‘3-12명의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정기적으로 만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제자로성장하기 위해서 모이는 모임’이다.
□ 3-12명의 사람들: 경험을 통해 볼 때 3-12명의 사람들이 모여야 소그룹 본래의 특성을 갖출 수 있다.
□ 일정한 기간: 소그룹은 영원히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기간 동안만 모이는 사역 중심의 모임이다.
□ 정기적으로 만남: 또한 소그룹은 시간이 날 때, 시간이 나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모임이 아니라, 모임의 시간과 내용에 대해 서로 약속하여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다.
□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제자로 성장하기 위해 : 이것은 소그룹으로 모이는 목적에 대한 규정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제자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취해야 할 일생의 목표이다. 이것은 소그룹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소그룹은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소그룹 안에 있는 네 가지 요소 (양육, 예배, 교제, 선교)를 통해 가능하다.
소그룹의 특징
소그룹이 평신도 사역에서 가장 핵심적 전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소그룹에 있기 때문이다.
□ 소그룹은 성경적인 모델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소그룹을 통해 일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성경적인 모임이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소글부의 전형이시다. 또 하나님은 구약 역사 속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의 소그룹을 사용하셨다. 타락한 인류 가운데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기 위해 선택하셨던 노아 가족의 소그룹(창 6-8장), 출애굽할 때 이스라옐 백성의 기본 조직 구도였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제도(출 18:13-27)그리고 이방의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주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소그룹(단 1:6-7)등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소그룹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신약 시대에 이르며, 예수님 자신이 소그룹을 활용하셨다.
□ 소그룹은 현실적인 모델이다.
소그룹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반 사회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그룹은 형무소, 정신 병원, 사회 단체 등에서 정신 질환의 치료와 상담에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생산 능률을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현대인들의 깊은 고독은, 안정된 소속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인 소그룹 모임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동기가 되었다. 사회 구조는 나날이 규모를 더해 가고, 과학 기술은 초를 다투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인간은 더욱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이런 인류의 실존적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할 교회 역시 거대화되어 현대인들의 갈증을 전혀 풀어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친밀한 관계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깊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 모임에서만 가능하다.
소그룹의 한국적 적용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소그룹이 장년층에까지 넓게 확대되어 있지는 못하다. 그동안 대학. 청년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오던 소그룹을 장년층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론적 제안에 가깝다. 교회 전반에 좋은 영향을 주는 소그룹 모델이 많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성경 공부팀 : 가장 보편적이고 초보적인 소그룹 형태로, 목회자나 소그룹 경험이 있는 리더를 중심으로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인다.
이때 연령이나 생활 환경, 관심사 등이 비슷한 또래 집단을 한 소그룹으로 편성하면 좀더 높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구역 및 속회 소그룹 : 여러 차례 성경 공부팀을 운영하여 소그룹의 특성과 운영 방법을 어느 정도 익혀 경험을 축적한 리더층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이것을 좀더 확대하여 구역 및 속회 조직으로 편성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런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는 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구역과 속회의 장을 소그룹 리더로 훈련하여 구역 조직이 소그룹의 특성을 띠게 한다면,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가정 소그룹 : 앞으로 한국 교회가 사역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은 가정이다. 초대교회는 말 그대로 가정에서 모였던 가정 교회였고, 또 소그룹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도 바로 가정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정 소그룹(혹은 가정 교회)이 좋은 모델로 자리를 잡고 있다.
소그룹 리더의 자질
이렇듯 소그룹 운영 전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그룹 리더는 어떤 사람이며, 또 그런 소그룹 리더를 어떻게 길러 낼 수 있겠는가?
□ 헌신과 섬김 : 무엇보다 먼저, 리더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혹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은사와 시간, 재물 등을 사용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언제든지 자기 것을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리더의 이러한 태도는 소그룹에서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 비전(꿈)과 열정: 리더는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 사역인지 알고 있어서, 그 일에 비전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 소그룹 운영 기술 : 소그룹의 특성과 소그룹 리더로서 필요한 기술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소그룹의 특성을 살려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할 수 있다.
리더 훈련의 내용
흔히 훈련이란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오해하는데, 오히려 리더 훈련에서는 리더의 자세와 헌신 그리고 열정을 훈련해야 한다. 기술이란 한 두 번의 실수를 통해 다시 익힐 수도 있지만, 헌신과 비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소그룹 리더에게 필요한 훈련의 영역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하나님과의 관계 : 소그룹 리더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키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 가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 사람들과의 관계 : 소그룹 리더는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리더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 상황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로볼 수 있으며, 또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소그룹 운영 전반 : 소그룹 리더는 하나님이 부르신 섬김의 장인 소그룹의 독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십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소그룹은 리더의 리더십에 영향을 밚이 받기 때문에, 소그룹에 적합한 리더십이 어던 것인지 알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3 평신도 목회자와 양육 상담자
평신도 목회자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평신도(laos)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최고의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벧전 2:9-10).
평민에 해당하는 즉 성직자와 구별되어 ‘일반 백성에 속하다’는 의미의 일반적인 헬라어 라이코스(laikos)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주후 95년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사용하기 전 까지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교회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인 ‘에클레시아’(ekklesia)는 모인 백성을 의미한다. 회중이라는 단어에도 ‘에클레시아’의 의미 중 일부가 담겨 있다. 이 말은 또한 회중 공동체 안에서 사역의 보편성을 보증한다. ‘모인’ 혹은 ‘함께 부름받은’ 백성을 형성하는 ‘부르심’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엡 4:1). 신약 성경에서 목회 양육(pastoral care)은 ‘성도 상호간의’ 책임이고, 회중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의 일부분이다.
신약 교회의 비전
중요한 영적 부흥은 모두 신약 교회의 비전이 불을 붙였다. 이 비전의 중심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살게 하려고 성령이 일으킨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다. 이것은 침례교 운동, 영국 감리교 운동 그리고 플리무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경우에도 사실이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전에도 다양한 부흥 운동은 이 평신도 원리를 되살렸다. 중세동안, 세속화된 교회와 복음의 순전함에 대한 갈망은, 평신도들이 평신도 원리와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카타리 파, 왈도 파, 롤라드 파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참된 기독교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평신도 운동이었다.
유럽 대륙과 영국 모두에서 종교개혁의 추진력을 제공해 준 사람들을 살펴볼때 종교개혁은 일적으로 평신도 운동이었다.
참으로 교회사에서 볼 수 있는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평신도들로 인한 경우가 많았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역사에서 자력으로 신학자가 되었던 평신도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이 유명한 「기독교 강요」는 성직자나 신학자의 작품이 아니라 평신도의작품이었다. 17세기의 번연(Bunyan),밀턴(Milton),리이프니츠(Leibniz)그리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같은 평신도 신학자들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라비안 형제단 (Moravian Brethern)에게 영향을 받은 평신도 니콜리우스 진젠도르프(Nicolaus von Zinzendorf)는 세계 선교를 위해 평신도 남녀로 구성된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경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자신들의 기독교적 소명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표현했던 두 명의 평신도였다.
20세기에 이르면 평신도 존 모트(John R. Mott)는 학생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영국 출신의 평신도 하워드 기니스(Howard Guiness)는 자신의 운동 장비를 팔아 캐나다행 배삯을 지불하고, 기독학생회운등올 캐나다에 전해 주었다.
평신도 목회자의 죽음
□ 다른 평신도 목회자들은 성직자들 때문에 자리를 빼앗겼다.
4세기에 이르면 재정과 교회 재산의 관리라는 평범한 일까지도 성직자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요컨대 평신도들은 세속주의로 인해 세상에서도 잃어버린 바 되었고, 성직자들로 인해 교회에서도 자리를 빼앗겼다.
현재의 1인 목회자 모델은 성경이나 교회사에서 볼 때 폭 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현재의 체제가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전능한 목회자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단지 전통적인 목회자의 역할인 목회 양육(pastoral care)이라는 한 가지 측면에서 평신도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그 교회에 필요한 목회 사역의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방, 목회 상담. 기도 상담. 결혼 사역, 영적 교제와 지도, 병자에 대한 치유 사역, 중재와 화해, 훈련 그리고 생의 통과 의례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
모세의 원리 : 위임
오늘날 평신도의 목회 양육 문제에 관해 다루는 책들은 대부분 모세의 원리에 근거해서 논의를 전개한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모든 사람의 필요을 충족시키느라 탈진해 있는 것을 보고는 단도 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출 18:17). 뒤이어 효과적인 교회 행정에 대한 성경적인 사례 연구가 나온다. 이드로는 천명, 백명, 오십명, 열명의 무리를 관할하는 ‘재덕이 겸비된 자’에게 모세의 일을 대부분 위임하게 한다.
바로 여기서 전지전능한 목회자에게 한 가지 해답이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위임이다.
모세의 원리는 분명 커다란 진일보이다. 오늘날 과중한 업무로 지쳐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것은 양적 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목회 사역의 형태로는 모세의 원리도 적합한 것이 아니다.
의지있고 훈련받은 자원자들에게 신속하게 위임함으로써 자신의 목회 양육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는 아니다. 오히려 에베소서 4:11-12에 의하면 목회자-교사는, 성도들을 목회자의 사역이 아니라 성도 자신들의 사역을 하도록 구비시키기 위해 부름받는다.
전문화의 원리 : 전문화된 목회 양육
전문화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의 기대를 바꾸었다.
전문가는 자신이 철저하게 훈련받은 부분에서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인생은 너무 짧은 반면, 정보는 넘치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한 영역 이상에서 앞서가기가 어렵다. 그와 같은 전문 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목회양육이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단어는 본래 의미로, 어떤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의 직업상의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친구가 필요하지만, 정신과 의사나 직업 상담가를‘ 전문가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이란 결코 전문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하는 상담 전문 기술 때문에 풀이 죽은 목회자들은 가장 힘든 사례를 비그리스도인 전문가에게 의뢰한다.
하나님 백성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목회적 도움을 주기 위해 상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필요이다. 사랑은 없고 전문 기술만 갖춘 목회자는 영혼을 불안하고 지친 상태에 빠뜨린다. 우리 사회의 전문 기술 주의는 우상 숭배에 가깝기 때문에, 사랑만이 유일한 본질이라고 마음속으로 결심할 때라야 우리는 안전하게 기술을 추구할 수 있다. 사역에서 기술이나 전문 기술은, 알코올과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위험한 습관성 약품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마추어에게 주어야 하며, 그 다음부터 전문가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이순서가 뒤바뀌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다.
교회가 교회를 목회하도록 하라
사람들은 올바른 훈련과 지도만 있으면, 비전문 양육 상담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들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구조이다. 그것은 지역 교회에서 근본이 되는 관계적, 신학적, 구조적, 영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목회 양육은 교회의 전반적인 삶 즉 교회의 관계적 삶과 영성의 질에 관련된 문제이다. 교회가 건강할 때 사람들은 서로 보살핀다.(골 3:12-17; 엡 4:15-5:2). 이제 평신도 목회자와 양육 상담자를 구비시키는 몇 가지 실제적인 방안을 탐구해 보겠다.
마음으로 시작하라
나는 교회의 머리는 목회자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교회의 머리라고 불렸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구비 사역 소그룹을 개발하라
평신도 목회자들에게는 사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데, 이때 소그룹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회중의 주인 의식을 얻으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평신도의 목회 양육 사역을 펼치고자 하는 목회자는 전략적으로 장로회 그리고(혹은 ) 제직회를 인내하면서 설득해야 한다.
존 모트가 처음으로 언급했듯이, 나는 열 사람의 일을 하기보다는 목회 일을 할 수 있는 열 사람을 훈련시키겠다.!
4 예배 인도자와 은사 중개인
성경적인 예배
내가 자란 교회에서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반주자, 성가대 그리고 목회자에 의해 장엄하게 전개되는 일종의 연극이었다. 주보에 인쇄된 대로 예배 순서가 하나하나 진행되었다.
우리들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회중들 안에 있는 은사를 자극하면서 나타나신 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하고 우리는 궁금해 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었지만, 가장 먼저는 회중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소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체제가 잘 맞는다. 그러나 성경적인 예배에서는 이 역할이 뒤바뀐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고, 회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이며, 예배 인도자는 사람들의 각양 각색의 음색을 가지고 화음을 만드은 성가대 지휘자와 비슷하다.
예배는 경외드리는 것이다
성경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고양된다. 또한 예배의 목표는 그 분을 기쁘게 하는 데 있다. 예배 시간은 ‘나는 과연 예배에 만족했는가? 라는 식의 오만한 생각이 아니라, 만물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겸손히 인식하는 것으로 마쳐야 한다.
중심이 없다면, 원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삶이 하늘의 삶에 스며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여호와께서 통치’(시 93:1)하시는 삶의 실재를 실현한다. 하나님이 자리에 계신데도 우리는 피조물을 경배하는 데서 우리의 자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흔히 성경적인예배라고 인정되고 있는 것과 다음의 것들을 비교해보라. 얼마나 다른가! 관계 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서로 이야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은사중심’의 예배는 재부분, 우리 경험 저편에 계시는 하나님보다는 예배라는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예배는 예배로 인한 영적 쾌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일어나게 하는 데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묵상 중심의 예배는 한 사람의 독특한 영적 여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배꼽만 들여다본 채 끝나 버릴 수 있다. 대중적인 전도 예배는 예배를 개인적인 성취의 도구로 만든다. 즉 에배를 통해 당신의 병은 치유되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열망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마친다.
성경적 요인
돈은 우리 공동체에서 뛰어난 예배 인도자이다. 돈은 예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 위해 기다릴 줄 안다.
우리 교회에서는 가르침-설교가 예배 전반부에 있는데, 보통 20분 정도의 준비 예배가 있은 후이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 50분 동안 응답하는 예배가 진행된다. 이런 식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고, 원형은 아니지만 주님의 만찬 식탁이 우리 예배의 중심이 된다.
그는 메시지가 단지 사람들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도 남기를 원한다. 때로 자신이 이미 계획했던 것을 포기하거나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때도 있다.
돈의 예배 인도가 처음부터 끝가지 철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찬양, 고백, 용서, 성경 봉독, 중보 기도 등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토요일 저녁에 벼락치기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달에 한 번 정도 예배 인도를 담당한다면 그는 한 주 내내 주일 아침을 준비한다. 예배 준비는 그가 매일 갖는 경건의 시간의 일부분이 되며, 한 주 동안 강해할 설교 본문을 묵상하면서 설교 주제에 맞추어 예배 전체의 주제를 계획한다. 돈은 실제로 찬양을 불러 보고, 예배를 놓고 기도하기 위해 목요일 저녁에 음악 소그룹- 악기 네 대와 찬양자 세명-과 함께 만난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데 그러하듯 어떤 주엔 돈도 예배를 준비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구비 사역의 환경
지금까지 나는 목회자가 평신도 예배 인도자를 구비시켜야만 하는 이유와 좋은 에배 인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살폈다. 구비 사역을 위한 작전은 성경적인 예배의 해방을 뜻한다. 왜냐하면 예배 인도자는 치유, 예언, 환상 그리고 지식의 말씀 등과 같이 논란이 되는 은사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이 특별한 공동체에 주신 은사들이 해방되도록 회중 공동체를 구비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중 공동체의 참여에 개방될수록 좀더 강하고 분별력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예배 인도자는 회중 공동체 안에서 은사의 중개인(gift-broker)이다.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예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놀라기 위해서는 공동 예배가 재구성되어야(혹은 해체되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우리를 놀라게 할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 그분이 인격체라는 표식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실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사실 미리 정해진 순서 때문에 그 분이 개입할 여지가 때때로 없게 된다.
우리는 매주 드리는 예배와 별도로 일 년에 3-4회 정도 성찬식을 거행한다. 어려 사람이 한팀을 이루어(보통 7-8쌍이다) 특별히 마련된 긴 탁자 뒤에 선다. 떡과 잔을 받기 위해 한 사람 한사람 앞으로 나올때, 탁자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특별히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 있는지를 묻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필요에 반응하는 가운데,치유와 예언의 은사가 표현되는 때도 있다. 이 기도 사역에 장로가 아닌 사람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일반적으로 장로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기도 사역(약 5:4)을 공동체 안에서 아주 새로운 사람들도 접해 볼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해 왔던 은사들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주권적이시다. 그분은 놀라운 지혜를 따라 몸 된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5 직장 사역자
이윤은 잘못된 것인가?
예수님은 전문 광고와 사업 장려의 대가라는 바톤의 대담한 묘사에 뒤이어, 미국적 이윤 추구 방식과 기독교적 실용주의를 연결시킨 책과 논문들이 솓아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개신교 직업 윤리의 적용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청교도주의의 왜곡이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이 잠재력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 청교도주의는, 특히 소명에 대한 원래의 교리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섬기고자 하는 욕구에 연결시킨다.
이체제는 사단적인가?
기업적인 사업이 곧‘ 체제를 속여 갈취하는’ 길을 찾는 것과 같은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하려면 직업적인 회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체 생명- 변황에 대해 비타협적이며 그것을 거부하고, 때로 우상 숭배적인 요구를 하는 -에 몰두해 있는 듯한 거대한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기독교적인 일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적인 일은 설교, 기독교 도서 판매 혹은 목회 심방 등과 같이 기독교적인 특성을 가진 일인가? 혹은 의사나 사회 사업가의 일처럼 절실한 필요를 채우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자기 상사라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태도인가?
그들은 전도, 설교, 목회 양육, 주일 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것, 교회의 장로가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책상 너머로 종이를 넘겨 주는 일이나 전화받는 일 등은 궁극적인 가치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역’을 ‘일’보다 우선시하는 현상은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치명적인 병이다. 사역의 일이 일의 사역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직업과 업무는 거룩 및 영원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계층별로 위에서 아래까지 나열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교사나 목회자는 맨 위에, 주식 매매인은 맨 아래에 있다.
‘만인 제사장’에 대해 설교를 하고‘ 매일 일에서 믿음을 실천하라’는 권고를 해주지만, 조직과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의 관행은, 교회 조직 밖에는 참된 사역이 없다는 가정을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다.
위로부터 하는 신학
성경에 제시된 일의 열가지 긍정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다.
1. 일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창 1:26-31; 2;15).
세상속에 있는 일은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해준다 일은 세상과 우리 모두에게 선한 것이다. 쓰레기 수거와 같은 일상적인 업무, 경찰직같이 힘든 업무 그리고 시를 쓰거나 오보에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얼핏 보기에 불필요한 듯한 일까지도 심오한 목적에 기여한다.
2.일이란 단순히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처음 세 장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세 가지 전담 업무가 있다. 즉 하나님과의 연합(1:26-31;3:9; 3;13). 이웃 및 거정 공동체 형성(창 1;26; 2;18),하나님의 창조에 동역(1:26-28; 2:15)하는 것이다.
3. 인류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일의 세 가지 측면 모두가 뒤틀렸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는 소외되고, 공동체는 분열되었으며, 창조에 동역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착취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죄 때문에 일은 저주를 받았다(창 3:17). 일 자체가 하나의 유혹이 되었으며, 에덴동산에서의 대 반역 이후 계속 그래 왔다. 사람들이 매일의 일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할 때, 심지어 그것은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전문직업을 원하는 우리들은 성찰하는 시간과 일에 참여하는 시간이 잘 조화된 삶을 살 따라야, 일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아마추어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고 말했을 때, 그는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교회나 세상에서 하는 일을 일컫고 있다. 분명하건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의 봉사 중에서 많은 것들이 건초와 그루터기처럼 탈 것이며,소위 세속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믿음으로 이룩된 것은 지속될 것이다.
4. 일은 우리를 향한 부르심의 한 부분이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함으로써 구약 성경을 폭 넓게 성취했다고 지적하는데, 그 중에서도 부르심 혹은 소명의 문제를 다룰 때 더욱 그렇다.
소명 혹은 부르심의 사상은, 우리가 어떤 분- 바로 하나님-에 의해 그의 뜻에 맞게 살도록 명령받았다는 것이다.
5. 본업(우리가 부름받아 하는일 )과 부업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은 하나여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취미, 스포츠, 여행 그리고 그외 다른 여가 활동 같이 정말 경험해 보고 싶은 일에 쓸 돈을 벌기 위해, 재미도 없는 직업을 갖고 일한다. ‘본업’ 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다. 반면‘ 부업’은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업과 부업이 같기를 원하셨다.
6.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의 이분법은 서글픈 현상일 뿐 아니라 일종의 죄악이다.
복음은 사람다움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지,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회 선교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들의 구속 이어야 하지만, 선교라는 원 안에는 이 세상 삶의 모든 부분이 포함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이 주로 복음 증거를 위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모두 일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7.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인격과 구조 둘 다를 대상으로 한다.
이땅 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모방하는 인류의 임무에는 자연과 더불어 문화와 인간 사회 구조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8. 아무리 사단적이라 하더라도, 사역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다.
9. 우리의 일을 통해 성취될 사역이나 봉사에사 상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10.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평신도 신학을 함께 하는 것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서, 가장 연약한 고리는 바로 세상으로 재파송하기 위한 준비이다. 주일은 월요일과 너무 깊게 단절되어 있다. 일의 사역보다 사역의 일에 우선권이 있다.
주일과 월요일의 단절은 바로 주일과 월요일의 영성의 차이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은 주일에만 있는 반면, 일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은 월요일에만 있다. 따라서 나는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에서 직장 을 위한 구비 사역에 대해 던진 피상적 제안을 이제 진일보시키고자 한다.
소명에 관한 상담
매일의 일을 단순히 노동이나 실망스러운 우상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역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 초월 의식’이다. 만약 이런 초월 의식이 일의 영성에 대한 설교를 통해 생길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은 동시에 기도와 전도가 될 수 있다. 러시아 정 교회의 신학자인 베르디예프(Berdyaev)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에 계속 동참할 때 창조의 제8일인 부활절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6 이웃 전도자
비전을 품어야 한다
교회에 주어진 신약 성경의 모든 진리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몇몇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는 점이다. 기독교라는 열차에는. 1등칸은 목회자 전용이고 2등칸은 일반 성도 전용이라는 식의 객실 구분이 없다. 신약 성경에는 사역자가 아니거나 전도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은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지도자들이 회중 공동체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태도를 하룻밥 사이에 뜯어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다한 지속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먼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목회자의 가르치는 역할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증인으로 부르셨다는 사실과, 일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전도인의 은사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 모두는 간중거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간중하도록 부름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전도자가 되도록 구비시키지는 않으신다.
훈련시켜야 한다
회중 공동체 안에서 전도인으로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몇 사람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과 그들의 은사가 발휘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그들에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전임 목회자에게서 훈련을 받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본을 보여야 한다.
선생보다 나은 제자가 없다는 것은 리더십의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다.
대다수의 교회에서 전도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즉 목회자가 전도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것보다 더 심각한것으로는 목회자가전도하는 모범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도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은사를 특별히 부여받지 못했더라도 지도자들은 전도 설교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본을 보이는 것에서 빠져 나와 나눔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 두가지를 따로 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단 당신이 설교했던 내용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회중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은 주목하게 될 것이고, 전도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서 참여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교회가 점차 전도의 영역에서 여유를 갖게 됨에 따라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목회자가 전도에 관해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선교나 개척 사역을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때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회중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가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시도해 보고자 할 때, 혹시 일이 망쳐지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미묘한 순간이 있다. 그래도 당신은 “ 내가 갈 수는 없지만, 아무개를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한다.
계속 격려해야 한다.
전도는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복음전도 사역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탈진할 우려가 있다.
만약 당신이 어린 전도자를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효과적으로 격려하고 싶다면, 새신자 모임을 인도하게 하라.
새신자들은 자신들이 내딛은 발걸음, 그리스도인이 갖는 확신의 근거, 영적 생활에서 성장하는 방법, 교회와 성령의 역할, 유혹에 대처하는 법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내용 등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전도자로서 가끔 이러한 소그룹의 리더로서 활동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리더로서 처음 두 달 동안에 성장할 때는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린 전도자의 걸음마에 원동력을 제공하려고 한다며, 그것은 바로 이렇게 해주는 것이다.
믿음의 향기를 발산해야 한다.
수영을 이제 갓 배운 사람과 오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 혹은 이제 가까스로 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 새와 어미새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확신이다. 그리고 확신은 전도에서도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바로 전도자이시다. 사람의 마음밭에 일단 뿌려지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아바 아버지로 확신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그의 성령이다. 우리중에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전도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우리가 구 분의 방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에 대해 이렇듯 확신하고 있어서, 말하는 것이나 일상 생활속에서 믿음을 발산하는 군사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어린 전도자의 세대가 한 교회 한 교회마다 열매 맺는 것을 볼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이웃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7 결혼 및 가정 사역자
오늘날 교회에서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는 결혼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생각해 보자.
°미혼 남녀의 결혼 준비 °청년들의 혼전 성관계 문제를 다루는 성교육
°그리스도인 다운 데이트 방법 훈련 °결혼 생활의 향상을 돕는 사역
°소그룹과 개인적인 상담을 통한 부부 관계의 치유
°배우자 학대 및 가저의 위기에 간여
°부부 관계의 조정 및 화해 사역
°이혼의 회복 및 이혼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
°재혼하는 부부를 위한 결혼 상담
°성적인 상처나 가슴 아픈 기억의 치유
°부부 사이의 영적 우정 형성
실무자가 한 사람밖에 없는 적은 교회는, 목회자만이 교회의 사역자는 아니라고 분명하게 확신하지 않는다면, 결혼 사역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꺾일 수도 있다. 예수님도 사역자이시지만, 그 분은 단순히 목회자 한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 전체를 통해 사역하기로 선택하신다. 결혼 사역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결혼 사역
나는 결혼 사역에 필요한 모든 역할은 단순히 목회자 한사람의 역할이 아니라 교회의 역할이라고 확신한다. 그 역할들을 살펴보자.
°성경적인 결혼의 모습을 가르쳐 주는 교사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남녀를 위해 다양한 모델을 제시해 주는 모델
제시자
°의미 있고 서로 돕는 관계를 개발하는 관계 형성자
°상담자
°결혼 서약의 증인
°가정 및 결혼에서 생긴 상처의 치유자
°결혼 서약을 풍성하고 새롭게 하는 사람
슈퍼 스타와 같은 목회자 한 사람이 모두 맡기에는 이러한 역할들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것들은 몸 된 교회에 의해 공유되어야 한다.
지역 교회에 있는 목회자와 지도자의 역할은 이 모든 사역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사역의 일로 구비시키는 것이다(엡 4:11-12)
□ 결혼 생활에 관한 주말 세미나는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부부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움거리들 중 하나이다.
“결혼 세미나 목적은
(1)부부들이 중요한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여 ,
(2)그것을 지식으로 소화하고,
(3)이것을 행동을 교환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해 보면서 자신들의 상호 관계에서 더 깊은 통찰력을 얻는 데 사용하며,
(4)필요한 행동의 변화를 통해 더 깊은 관계로 성장하는 데 함께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결혼 주례를 담당한 목회자는 결혼 첫 해 동안 부부들에게 여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 계획은 급박한 필요에 처해 있는 부부를 위한 처방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부부들에게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 제2단계 주말 행사는 결혼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부들을 구비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평범한’ 주말로 되돌아온 그들은 좀더 강화된 성장 경험과 의사 소통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런 후 결혼 사역의 지도자는, 이와 같이 좀더 숙련된 사람들로부터 ‘대표 부부’를 선정하여 앞으로 있을 일반적인 주말 행사에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도록 할 수 있다.
□ ‘부부 여행’ 혹은 ‘ 좋은 동반자’ 행사가 계획되어 경험 많은 부부들이나 식견이 풍부한 사람이 결혼을 주제로 교회에서 매달 강의할 수 있다.
이것은 효과적인 이웃 전도 사역이 될 수도 있다.
□ 주일 학교 성인반이나 성인 교육을 위한 강의에 있는 결혼 생활을 위한 선택식 강의는, 결혼 사역을 기독교 교육의 주요 내용으로 끌어들이는 좋은 방법이다.
결혼에 관해 내가 쓴 두 권의 책, 「영원한 결혼」과「결혼 생활의 영성」은 소그룹이나 강의에 사용할 수 있는 실숩및 연구 질문들을 제시하고 있다.
□ 결혼에 관한 성경 공부 교재가 가정에서 만나는 소 그룹 모임에서 사용될 수 있다.
아내 게일과 나는 헤롤드 쇼 출판사에서 「결혼 : 성경의 부부들로부터 배움」(Marriage : Learning from Couples in Scripture)을 출간했다 (그외에 IVP의 성경 공부 교재「결혼」도 권할 만하다-역주).
□ 부부들을 함께 소개하고, 가능하면 부부가 함께사역하도록 해준다.
이것은 부부 관계라는 하부 구조에 위임하는 것을 상징한다.
□ 부부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책임을 맡길 경우, 두 사람 모두와 상의한다.
이는 결혼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부부 중 하나 사람이 장로가 되거나 주일 학교 부장이 되었을 때, 다른 배우자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
□ 공동체 생활 가운데서 약혼, 결혼 그리고 기타 기념일을 기억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각 부부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기념일 행사를 통해 우리가 그들에게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어떤 교회는 매주 사람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기도해 주기 위해 혹은 치유 기도를 해야 할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혼 사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뼈-근육 구조 : 구비 사역자는 정형 외과 전문의이다.
뼈 하나가 부러지거나 탈골되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카타르티조’라는 말은 의학적인 의미에서 뼈를 곧게 맞춘다는 의미이다. 구비 사역은 뼈대에 관심을 두느 사역이며, 가죽 부대를 바꾸는 사역이다. 새 포도주는, 살아 있는 효소 즉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그릇, 새 가죽 부대(마 9:17)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교회는 발효와 실험이 너무나 활발하게 일어나는 양조장이기 때문에, 새로워지는 작용을 담아 전달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항상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신다. 만약 우리들이 적절한 구조를 발견하지 못하고 묵은 구조에 머물러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은 쇠약해지고 묵은 구조에 머물러 있을대, 새로운 생명은 쇠약해지고 묵은 용기는 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8 사회 정의 사역자
교회의 선교에 대한 이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분이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거 하게 하시는 모든일이 바로 선교이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그리스도 안에서 실고 있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계속 그 분의 선교를 수행하는 도구이다. 이러한 선교는 개인의 구원이라난 개인화된 종교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분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선교이다.
교회 자체가 ‘선교’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평신도는 교회의 선교하는 몸 그 자체이다.
크레머는 이렇게 말한다. “ 만약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평신도들이 부름받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 된다면, 교회와 세상 사이에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던 대화가 바로 그들을 통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 속으로 매일 반복해서 비치는 교회의 영상이 될 것이며, 교회와 세상의 만남을 실현할 것이다.”
교회의 감동적인 역사
‘교회는 세상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다’는 비아냥거림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이 ‘ 매일 반복해서 비치는 영상을’ 통해 이룩했던 것들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교적인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재앙을 맞았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으로 장례보험 조합을 만들었고, 피해 입은 피난민과 추방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노예들을 귀중한 한 인격으로 보살피고, 일자리가 앖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낙태가 처벌받아야 할 범죄임을 각성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어린이의 유기를 막았고, 검투사의 결투를 제한했으며, 재산 침해에 관한 법률을 완화하였다. 노예 제도의 폐악을 경감시켰다. 또한 주일 성수를 장려했고, 죄수들을 보호해 주었으며,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 교회의 선교
전도가 없는 사회정의는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지만, 사회 정의가 없는 전도는 금새 미신으로 전락사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따라서 선교의 이러한 두 측면은 가위의 두 날과 같이 다시 결합되어야 했다.
갈등의 회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엡 6:12).
성경은 이러한 세력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주관자’, ‘권세’,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보좌’(롬 8:38; 고전 15:24;엡 1:21; 3:10; 6:12; 골 1:16; 2:10, 15)가 그것이다. 평신도는 이러한 세력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 같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 구조, 대준 매체, 이데올로기, 체제 순응적인 세력, 유명 인사, 영향력과 구조 등으로서 직면한다.
때로 다국적 기업들이 선교 단체에서 섬기는 기독교 사역자들도 좀더 미
묘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단체에서 이와 유사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교회를 변화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평신도인가 목회자인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이러한 세력을 다루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으로 선교를 실천함
우리는 에덴과 새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어떤 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마치 지금 하나님의 도성에서 살고 있다는 듯이 가장할 수는 없다 (계21-22장).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이 에덴에 대한 추억과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성경적인 신앙의 표식 중에 한 가지는 우리의 현재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히 11:9), 하늘 나라를 애타게 갈망하는 것이다.(히 11:16)
하늘 나라 의식은 우리를 압도하는 인류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목적과 더불어 구체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일하도록 해준다. 물론 그 문제들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해결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군비 축소나 낙태등과 같은 세계의 주요 문제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메시아니즘(messianism)으로 인해 기진 맥진해 버렸거나 실망해서 포기했다. 하늘나라 의식은 우리를 이 두 가지 모두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교회 선교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한 체험에는 ‘지금 여기’ 와 더불어 ‘아직’ 이라는 차원이 모두 있음을 잘 인식하면서, 이 일을 믿음 가운데 해야 합니다. 비록 성공적이지 못한 수고로 느껴지더라도 ‘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고전 15:58)알기에, 우리는 복잡하고 불명확한 현대 생활의 실체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애타는 갈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선교하게 됩니다.” [마빈 목사]
결과에 대한 희망에 좌우되지 마십시요. 당신이 지금까지 실천해 온 것과 같은 일을 할 때.......그 결과가 당신이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는 아니더라도, 당신의 모든 노력이 분명히 아무 가치도 없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점차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을 위해 싸울 때, 참으로 많은 일을 겪어야 합니다. 범위는 좁아져 가지만, 더욱 실제적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만물을 구원하는 것은 인격적 관계라는 실체인 것입니다.
큰 열매는 당신이나 나의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열매는 예상치 못한 가운데 얻게 되며,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당신의 일 속에서 당신의 일과 증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 가려고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일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선한 일은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당신을 내어 주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대의명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그리스도와 진리를 섬기게 되면, 점차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실망으로 인해 좌절하는 경우는 점차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소망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들의 일을 통해) 우리들이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선을 만드시는 하나님 그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톰 머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