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의 방식
작가의 책가방 / 이병승
아기 토끼와 채송화 꽃(권정생 지음, 창비 펴냄, 2012)
내가 동화작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시절, 우연히 강아지 똥이라는 그림책을 보았을 때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그림책 속의 강아지 똥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 예수를 생각나게 했다. 나중에 권정생 선생의 얼굴 사진을 보니 참 그런 작품을 쓰게도 생겼구나 싶었다. 한 마디로 ‘성자가 된 청소부’ 같은 인상이었다.
그 후 몽실 언니를 읽고 권정생 선생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거지 생활도 했고 교회 종기기 노릇을 했고 병마와 싸웠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못 해봤고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새싹문학상과 관련된 일화였다. “상을 주는데 수상자를 오라 가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우리가 직접 찾아가서 상을 드립시다.” 라는 게 고 윤석중 선생의 뜻이었고, “작가가 글만 잘 쓰면 됐지 무슨 상을 주고받습니까? 나는 받지 않겠습니다.”라는 게 권정생 선생의 뜻이었다는 것. 두 분 다 참으로 멋지다!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책의 인세를 북한의 어린이들과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유언도 인상적이었다. 누굴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온전히 내놓는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 유언인가!
아무튼 권정생 선생에 대한 내 인상은 이렇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간의 깊은 밑바닥과 심연을 겪어 본 작가. 섬세하고 수줍은 소년 같은 노총각 작가. 무소유의 성자 같은 작가. 설움과 한이 많은 김소월 같은 작가.
작가의 책가방을 청탁 받고 부랴부랴 권정생 선생의 책을 몇 권 더 읽었다. 그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과 밤 다섯 개라는 아주 짧은 단편이었다. 이 단편은 아기 토끼와 채송화 꽃이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 이 짧은 단편이 주는 의미가 만만치 않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고수들의 방식이 아닌가!
뜬금없이 <모래시계>와 <추적자>,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드라마를 떠올려 본다. 이 엄청난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가득한 드라마는 뜻밖에도 SBS라는 상업방송국에서 전파를 탔다. 가장 상업적이어야 할 방송국에서 가장 민감한 소재와 불온한(?) 주제 의식을 가진 드라마를 방송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마저 상품화할 만큼 자신만만할뿐만 아니라 또 그럴만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80년대 노동시로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는 386 세대의 기질대로 동화를 쓰면서도 항상 무거운 주제 의식을 담으려 했고 표현 수위 조절에 애를 먹곤 했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의 짧은 동화 두 편에서 정치 경제 어려운 이야기 한 마디도 없이 자본주의를 가볍게 넘어서버리는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발견한 것이다.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천 원어치의 콩나물을 사러 간 또야의 이야기다. 엄마는 또야에게 콩나물 값 말고 따로 백 원을 준다. 심부름 값이냐고 묻는 또야에게 엄마는 ‘그냥’ 주는 거라고 한다. 또야는 콩나물을 파는 할머니에게 신이 나서 말한다.
“이 돈 백 원은 엄마가 그냥 줬어요. 그냥 줬다니까요. 심부름 값이 아니고요.”
또야는 집으로 오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사탕을 사 먹으면서도 다시 한 번 이 말을 반복 한다. 또야는 그냥 심부름을 한 것이고 엄마는 그냥 백 원을 준 것이라는 사실이 또야를 엄청나게 신나고 행복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노동이 되고 존재는 곧 상품이 된다. 또야가 콩나물 파는 할머니와 문방구 아저씨에게 이 돈 백 원은 심부름 값이 아니라 그냥 준 거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돈의 의미가 노동의 대가를 넘어선 사랑의 마음이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감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순수한 노동의 즐거움을 앗아간다. 먹고 살기 위해 즐겁지 않은 일을 선택하게 하고 이를 무한 반복하다가 노동력 상실과 더불어 폐기 처분 된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도 사실은 비싼 노동력을 가진 상품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또야 너구리는 이 자본주의의 규칙을 너무나 쉽고 가볍게 깨버린다. 물론 자본주의 어쩌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어쩌면 권정생 선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쓴 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또야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돈으로 거래하는 자본주의에서 슬쩍 비켜나 스스로 마음이 흐르는 길을 걸으며 마냥 행복해 한다. 신이 나서 계속 그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그에 비해 콩나물 파는 할머니와 문방구 아저씨는 또야의 기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시큰둥할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받고 콩나물을 팔고 돈을 받고 사탕을 판다. 잘해야 덤으로 콩나물 한 줌을 더 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평론가가 되고 보니 영화 보는 일이 재미없어졌다는 말을 하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동화가 좋아서 동화작가가 되었는데 막상 되고 보니 글 쓰는 게 재미없어졌다는 말을 하는 작가도 보았다.
왜 그럴까? 내가 쓰는 글이 재미와 놀이가 아니라 상품(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쓰고’ ‘그냥 읽고’ ‘함께 즐거워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리를 깨고 순수한 마음의 관계로만 일하는 분들을 보면 샘솟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이제 다른 한편, 밤 다섯 개를 보자. 이 단편은 더 짧다. 또야 엄마가 밤 다섯 개를 주면서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한다. 또야는 골목에 나가 다섯 친구들에게 밤을 하나 씩 나눠 준다. 그런데 나눠주고 보니 자기 게 없다. 또야는 울먹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무심코 밤을 먹던 친구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자기들도 따라서 함께 운다. 울음소리를 듣고 온 또야 엄마가 또야 몫의 밤을 하나 더 준다. 모두 울음을 그치고 함께 삶은 밤을 맛있게 먹는다. 이게 이야기의 전부다.
이 이야기가 왜 나에게 감동을 주었을까?
나는 우아한 자본주의를 꿈꾼다. 많이 가진 자가 가진 게 없는 자에게 자기 몫을 나눠주는 세상 말이다. 또야 엄마가 그렇다. 또야는 베풀고 나눌 줄 안다. 자기 몫 먼저 따로 챙겨두는 아이가 아니다. 나줘 준 밤을 먹은 아이들은 또 어떤가? 또야가 자기 몫도 없이 다 나눠줬다는 것을 알고 너는 집에 가서 또 먹으면 되잖아?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운다. 우리가 또야 밤을 다 먹어버렸어요! 하고 고백하면서.
아동문학의 계몽성, 교훈성을 비판하는 분들이 많다. 이 작품이 계몽적이고 교훈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계몽성은 아동문학에서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계몽성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 완성도다.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작가의 목소리만 생경하게 튀어나왔느냐? 그 부분을 검증하는 게 중요하다. 작품의 완성도는 계몽성과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일례로 엄마 까투리 (권정생 지음, 김세현 그림, 낮은산, 2008년) 라는 그림책을 보면 거대한 산불이 나자 새끼들을 품고 불에 타 죽은 엄마 까투리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은 ‘엄마는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키고 사랑한다,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뻔한 줄거리로 진행이 된다. 그래서 권정생 선생의 다른 작품들만큼 자연스럽게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힘이 약하다.
반면 밤 다섯 개는 계몽적이고 교훈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어떤 면에서는 소풍 나온 돼지 형제의 숫자 세기와 비슷하기도 한데 이는 자기를 빼고 세었다는 점에서만 그렇다. 이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단순히 숫자 세기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나눔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권정생 선생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좋아한다. 표제작인 아기 토끼와 채송화 꽃 같은 작품은 너무 소녀 감성적인 서정이어서 남자 작가인 내가 볼 때는 낯이 좀 간지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정생 선생께 존경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작품이 일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지 않는가!
이병승
작가 소개란에 등단년도 대표작 같은 걸 적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보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글쟁이. 대표작이 뭐냐고 묻지 말고 검색해 주세요. 시와 동시, 동화와 청소년소설 두루두루 다 씁니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