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성균관(成均館)
가. 成均館의 沿革과 機能 儒敎에서는 敎育이 차지하는 비중과 役割이 매우 컸던 만큼 이를 위한 敎育制度 역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기원 전 5세기 무렵에 중국 곡부(曲阜 : 공자의 탄생지)에서 세계 최초의 私立學校가 바로 孔子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를 거쳐나간 제자가 무려 삼천 명에 달했다는 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公式的인 敎育機關 372년에 세워진 高句麗의 太學이다. 이곳에서는 經典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六禮(禮, 樂, 射, 御, 書, 數)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高句麗뿐만 아니라 百濟에서도 五經博士의 제도가 있어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新羅에서도 역시 682년에 國學을 세워 論語와 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 무렵을 前後해서는 백제의 유학자들이 日本에까지 건너가 유교를 전파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 교육이 이미 체제가 잘 갖춰지고 매우 盛行하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時代에 들어와서는 992년에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國子監이 설립되어 더욱 세분화되고 발달한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곳에서는 유교의 주요 경전들을 단계별로 나누어 배우고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論語와 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하여 총 8년 반에 걸쳐 교육과정을 마치도록 하였다. 또한 예종 14년(1119년)에는 국자감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奬學機構라 할 수 있는 養賢庫를 설치하여 人材養成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다. 國子監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高麗初期부터 公子廟가 세워져 儒敎의 創始者인 孔子를 追慕하고 그 위대한 業績을 기리기 위한 여러 가지 儀式이 행하여졌다. 이 같은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두 차례씩 성균관을 비롯하여 全國 鄕校에서 일제히 공자에 대한 제사의식인 釋奠大祭를 지내고 있다. 국자감은 유학을 가르치고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으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국자감은 그 후 국학 또는 成均監등으로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어 오다가 恭愍王 11년(1356년)에 이르러 成均館으로 정해진 이후 오늘날까지 변함 없이 이어지고 있다.
高麗때까지 성균관은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朝鮮이 건국된 후 太祖가 수도를 漢陽으로 옮김에 따라 1398년에 지금의 서울 明倫洞으로 옮겨 세워졌다. 태조 당시 성균관은 明倫堂과 大成殿 그리고 東齋와 西齋 및 성균관 관리를 맡아보던 오늘날 학교 서무실 기능을 지닌 正錄廳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明倫堂은 학생들에게 유학을 강의하던 講堂으로서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곳에서는 약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였으며, 국가에서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後代의 유학자 21인과 우리나라 대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文廟이다. 또 한 동재 및 서재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며 寄居하던 寄宿舍로서 모두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의 규모는 날로 확장되어 成宗때에 享官廳과 尊經閣이 세워진 것을 비롯, 丕闡堂(비천당)과 六一閣 등이 차례로 설치됨으로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교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향관청은 대성전에서 석전대제를 지낼 때 쓰이는 갖가지 도구와 의복등을 보관하던 장소였으며, 존경각은 경전을 비롯한 많은 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으로서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천당은 명륜당과 더불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장소로 설치되었으며, 육일각은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육예 가운데 국방의 중요성을 잊지 않게 하는 동시에 몸과 마음을 수양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뜻에서 설치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儒生으로 불렸으며, 이들의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도 질서 있는 것이었다.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倫理道德을 철저히 지키며 敎授에게는 깎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나갈 人材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이 수업을 받았던 주요 과목은 大學, 中庸, 論語, 孟子의 四書와 詩經, 書經, 春秋, 周易, 禮記의 五經이었다. 처음 입학한 학생에 대해서는 大學부터 배워 단계적으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아홉 과목을 모두 마치는데 필요한 기본 독서 기간은 약 3년 반이었다. 유생들에게는 매월 말에 그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성과를 시험을 보아 확인하였으며, 그 결과는 국가에까지 보고되는 등 매우 엄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서 유교교육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日帝의 침략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게되었다. 1910년 武力으로 한국을 合倂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합방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성균관을 폐지한 일제는 민족교육이 아닌 식민지교육을 위하여 京城帝國大學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였다. 이 같은 강압정책에 따라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그 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전국 儒林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이 지니고 있었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하여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비록 국립대학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지는 못하였으나 儒敎理念에 의한 대학이 다시 우리나라에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균관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성균관 안에 유림조직으로서 儒道會總本部가 설치되고, 각 지방에도 儒道會支部가 결성되어 향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던 民族理念으로서의 유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상처를 빠른 시간 안에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국 유림들의 유교진흥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꾸준한 노력 속에 靑年儒道會와 女性儒道會가 잇따라 결성되고 자체 언론기구로서 儒敎新報社가 설립되는 등 체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또한 최근 들어 성균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이 예절학교]를 비롯,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충효교실]등을 개설하는 등 社會敎化 및 敎育機關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매우 높아져 많은 관심과 참여가 뒤따르고 있음은 유교의 부흥과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 성균관 임원 1) 관장...관무를 통할하며 본관 대표 2) 부관장...관장보좌 3) 典儀...석전 및 기타 일반 의례 관장 4) 典學...교육, 교화, 학리 및 학술연구에관한 사무 관장 5) 司儀...서무, 회계, 조직 및 기타의 주관에 속하지 않는 사무 관장. |
Ⅱ. 鄕校
가. 鄕校의 沿革과 機能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다. 鄕校는 오늘날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鄕學, 學官, 齋官 또는 校官으로도 불렀다. 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방교육이 최초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고 난 이후의 일이며, 구체적으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각 지역에 설립한 [경당]에서 비롯된다. 경당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함께 弓術도 가르쳐 文武를 겸한 교육을 하였다. 백제와 신라에도 유학이 흥성하여 백제에서는 오경박사 제도를 두었고, 신라는 태학을 설치하였지만 지방에 학교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가 좁고 인구가 많지 않았던 당시 백제와 신라의 여건상 중앙 이외의 지방에 별도로 교육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데에 기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지방교육은 이전에 비하여 더욱 확대된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체계적이고 완비된 단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향교의 설치는 고려 태조 13년(930년) 평양에 학교를 설치하여 6부생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를 배치하였으며, 州郡에 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 5년(1127년)에 각 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 6년(1314년)에는 李穀(이곡)을 모든 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鄕校의 本格的인 發達과 體制의 完備는 朝鮮時代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 말에 수입되어 朝鮮王朝의 創業理念으로 자리잡게 된 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보다 뒤늦게 전래된 불교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는 통치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양상이 상당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고려 말 安珦 등의 학자에 의해 수입 된 성리학은 유교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교 부흥을 위한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하나는 불교에 대한 배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교의 대중화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의 [抑佛崇儒]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朝鮮 太祖는 즉위 원년(1392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學校의 興廢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太祖7년(1399년)에는 성균관의 준공과 더불어 성균관과 병행할 지방교육기구로서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州縣의 실정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太宗은 鄕校의 修學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고 13년(1413년)에 각 향교에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360개로 늘어나 명실공히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체제와 규모 및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兩亂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이 극히 피폐해 졌으며, 여기에 정치적인 실정이 거듭됨으로써 국가 교육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향교 역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후반기로 접어들며 기능이 약화된 향교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립교육기관인 書院이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전국에 걸쳐 378개소에 달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설립된 서원은 부분적으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 鄕村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등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과 연결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말기인 大院君때에 이르러 마침내 서원 철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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