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단편집 ＜그리움을 위하여＞

작년 이맘때던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문학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설의 '소'자도 모르고, 습작 한번 해본 적 없지만 잠시나마 그런 욕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박완서 작가도 늦깍이 소설가라는 위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시작한다고 모두 차고 넘치는 글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잠깐의 휴가를 이용해 노트북에 몇 장 끄적여보는 것으로 나의 불장난같은 욕망은 그렇게 쉽게 치유(?)되었다.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몇 장 글을 쓰면서 욕망의 욕망을 불사른 것이다.  역시 안 쓰길 잘했다. 박완서의 소설집을 읽는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선생의 글에는 막힘이 없다. 그럴듯한 미사여구가 동원되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사유가 깔려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 부모님세대가 살았던 이야기다. 운율도 막힘도 없이 그냥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이 솟는듯 그저 '자연'스럽다. 흐름의 높고 낮음도 없다. 아줌마의, 엄마의, 언니의, 어른의 어른스러운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제 아직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아줌마가 되고, 언니가 되고, 엄마가 되어버린 내게는 세수한 후 바르는 로션처럼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첫사랑과의 헤어짐을 덤덤히 털어놓는 <그 남자네 집>에서 작가는 '졸업식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서 우는건 아니다'라며 첫사랑과의 헤어짐에서 울었던 것은 이별이 슬퍼서였지만, 그렇다고 돌이킬 마음도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첫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 가슴 한켠의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 사실인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임도 아쉬움도 없이 그냥 흘러간 시간으로 못박아버리는 현재의 삶은, 멋지지 않은가.  <거저나 마찬가지>는 거저나 마찬가지인 선배의 시골집에 들어가 살면서 거저나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게 되는 후배의 이야기다.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특히 물질적인 것을 주고 받으면 거기에는 자의적인 많은 의미들이 실린다. 하지만 저마다 얼마나 자유분방한 방향으로 관계의 의미가 흘러가는지, 그 분분함은 서로에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다른 해석과 상처를 남긴다. 가해자(?)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불편하고 오묘한 관계인 것이다.   여러 단편 중에서 자기고백적 성격이 유난히 짙은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에서 작가는 성당에서 유럽으로 문화탐방을 떠난다. 빡빡한 일정을 충분히 예견하고 긴장했음에도 고열을 동반한 감기몸살이 났다. 작가는 타국만리에서 묘한 공포에 휩싸인다. 아픈 자기만 호텔방에 놓아두고 다른 사람들끼리 나가지 않을까, 아프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혹시 로마의 어떤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몸이 아픈 이상으로 걱정이 무겁기만 하다. 서양의 의사에게 '몸이 오슬오슬 춥다가 오싹오싹 떨린다'고 말하고 싶지만 영어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감기'라고 말하고 싶지않고 오슬오슬 춥다고 얘기해야 더 적확하다는 생각, 느낌에 대한 느낌은 다른 언어로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삭신이 쑤신다, 입맛이 소태같다고 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말이다. 이 말들이 이해가 간다면 얼굴에 주름이 지고 머리에 서리가 앉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나이일 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박완서 작가말고 누가 또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표현의 탁월함이 아니라 솔직함이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은 단편들도 어느것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눈 보다는 몸에 촥~ 감기는 소설들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최그에 발간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의 문학은 장악(掌握)의 문학이다.... 선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게 다 문학이 되었다. 그 손으로 선생은 지난 40년간 역사와 풍속과 인간을 장악해왔다. 그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살아 온 날들을 부끄러워했고 살아갈 날들 앞에 겸허해졌다.     검허한 마음으로 나의 나이듦을 가다듬을 수 있는 소설, 중년들에게 강추다. 다음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 <플래너리 오코너>/현대문학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