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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文明의 어머니 江
黃河流域 사람, 사람들!
黃河(Huanghe황허)를 따라 내려오면서 ④간쑤(甘肅 감숙), 산시(陝西 섬서)
厚堂 고 광 창
지금까지는 黃河를 거슬러 올라 왔으나 이제부터는 黃河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8. 간쑤(甘肅 Gansu 감숙)
간쑤(甘肅 감숙)에서 ‘甘’자는 ‘달다, 맛있다, 상쾌하다, 즐기며 지칠 줄 모르다’는 뜻이 있고, ‘肅’자는 ‘엄숙하다, 공경하다, 정중하다‘는 뜻이 있다. 여기가 예로부터 실크로드 길목인 것을 감안하면 상인들이 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즐기며 지칠 줄 모르고 정중하게 가야한다‘는 정도로 地名 풀이를 해야 할 것 같다.
※ 실크로드(비단 길) -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을 서방의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수출하던 교역로인데 주요 코스는 장안(시안)-돈황-파미르고원-바그다드-지중해연안-로마 이며 중국 唐나라 때가 전성기였다.
칭하이(靑海)省 시닝(西寧)에서 치처(汽車 버스)로 4시간 남짓 가니 바로 란저우(蘭州)였다. 치처(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안(西安)가는 표 예약을 하려고 여행사에 가보니 내일 모레까지는 기차나 버스 직행 표는 모두 예약이 다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여행사에 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사 측 이야기는 여름철은 여행의 盛需期라 票구하기가 어렵단다. 중국에서 자유 여행 중 가장 어려움은 훠처(기차)나 치처(버스) 표 예매하는 것이다. 회원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낮에는 물빛깔이 황색으로 변하는 지점을 보고 오늘 저녁에 일반버스를 타고라도 시안(西安)으로 가자는 것이다. 저녁 버스 시간(5시)까지 여유가 있어서 黃河가 황색으로 변한 지점에 가보고 싶어서 여행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곳이 劉家峽(유가협)인데 가는 길이 요즘 도로 공사 중이어서 갈수 없다고 한다. 여행사 직원 이야기는 劉家峽(유가협)을 가면 ‘소적석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은 황토빛 나는 돌기둥이 많은 산인데 강물이 그곳을 지나오면서 점차 황토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일이 자꾸 꼬인다. 물빛이 황토색으로 변하는 지점을 보러 왔는데 그것도 볼수 없고 차표 예약도 못했으니 -- 하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리는 날도 있지 않던가? 황토색으로 변하는 지점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디서부터 그리고, 왜 그렇게 변하는지는 알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
저녁 치처(버스) 시간까지 무료하게 보낼 수 없어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란저우(蘭州) 시내를 黃河가 흘러가는데 물 색깔이 황색이다 못해 붉은 색이다. 靑海省에서 보았던 조그만 실개천이 그 동안 몇 개나 합쳐졌는지 물의 양이 제법 많아져 홍수가 났을 때 광주천에 흙탕물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江변에는 黃河母親像이 있었다. 중국문명의 젖줄인 黃河를 상징하는 ‘어머니가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조각상인데 몸이 온통 황토색이다. 약 5분 정도 걸으니 ‘水車園’이 있다. 500년 역사를 지닌 큰 수레(바퀴폭 16.5m) 두 대가 돌고 있는데 黃河의 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물레인데 물레가 무척 큰 것이 눈에 띈다. 또 5분 정도 걸으니 ‘中山橋’가 나온다. 이쪽에서 황하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는 다리인데 이 다리의 또 다른 이름이 ‘黃河天下第一橋‘라고 한다. 다리가 길거나 높은 것도 아닌데 天下第一이라니? 아마 황하가 흐르는 지역의 다리 중 가장 크고 긴 다리라는 뜻인 것 같다. 그러면 天下란 말은 빼고 黃河 第一橋’라 해야 옳지 않을까? 바이타쓰(白塔寺)‘는 산위에 있는 하얀 색깔의 사찰인데 란저우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런데 雲霧가 훼방을 놓아 시내가 뽀얗게 보인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步行者‘ 거리다. 이곳은 란저우에서 가장 보행자가 많은 곳으로 옛날 광주 충장로와 비슷한 곳이다. 백화점, 골통품점 등이 즐비한데 그곳 지하상가 입구에 ’둥리한궈청‘(東麗韓國城 동쪽의 아름다운 나라 한국)이라 쓰여 있다. 둥리(東麗)라 써 놓은 걸 보면 우리나라가 錦繡江山인 줄은 아는 가 보다. 지하로 내려가 보니 벽에 K-Pop Town, ‘韓國明星周邊店’이라 씌여 있고 한국 상품을 팔고 있고 스피커에서는 K-Pop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곳에도 K-Pop의 인기가 대단한 걸 보니 우리나라 수출 상품 중에 공장 굴뚝 없이 만든 상품인 文化 商品이 한 몫 하는 것 같았다.
점심은 중국 10대 麵料理인 ‘蘭州牛肉麵’을 먹었다.
황하 물색깔이 변하는 지점을 보러 왔다가 보지 못해 아쉬워서 꿩대신 닭이라도 보고자 황하천변에 나가서 黃河母親像, 水車園, 中山橋, 白塔寺, 步行者 거리등을 보았는데 참 좋았다. 어쩌면 꿩보다는 닭을 본 것이 더 좋았는지 모르겠다. 轉禍爲福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 온 보람을 한 것 같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치처짠(汽車站 - 버스터미널)으로 갔는데 버스 아래쪽 荷物 칸에 짐을 싣고 있다. 羊이나 야크 고기라고 하는데 짐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출발시간이 되었는데 계속 하물만 싣고 있자 승객들이 항의가 있었고 경찰까지 왔지만 하물주의 뜻대로 계속 실었다. 하물주가 이곳에서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甘肅은 靑海, 新疆, 內蒙古, 寧夏, 陝西 등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蘭州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여행객들도 많지만 이 지역 産物의 集散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물 운송차량이 많다고 한다. 우리가 탈 차는 客車와 荷物車를 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중국 각처에서 소비하고 있는 양고기나 야크 고기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공급해 준다고 하니 이곳이 肉類를 공급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곳인 것 같았다.
뒤늦게 출발한 버스는 짐까지 많이 실어 속도마저 느리게 움직였다. 옆에 앉은 손님에게 여기서 시안(西安)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니 까오수파스(高速巴士 고속버스)가 8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 차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다. 파스(巴士 버스) 속에서 하루 밤을 지세고 그 다음 날 점심때 쯤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그 동안 버스 속에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 어려움이 훗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추스렸다.
9. 산시(陝西 Shanxi 섬서)
산시(陝西)省은 중국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그 역사는 先史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商왕조를 멸하고 周나라를 세웠던 곳이고 秦나라가 처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시(陝西)는 隋나라와 唐나라가 창안(長安 현재의 西安)을 수도로 삼으면서 이때부터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 다.
이곳 산시(陝西)는 석탄과 석유가 많이 나고 黃河의 지류인 웨이강(渭江)이 省중앙부를 관통하며 흐르는데 이 비옥한 허리 부분이 문명의 중심지였다. 중국 文明의 황금 시기가 唐나라 때라고 하는데 백거이, 두보, 이백 등이 이때 활동한 詩聖들이다.
① 중국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섞여 이채로운 도시 시안(西安, 창안 長安)
② 중국 최대 관광명소인 빙마용(兵馬俑 병마용)
③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있는 곳 화칭츠(華淸池 화청지)
④ 빼어난 절경으로 소문 난 5岳 중 하나인 화산(華山)
⑤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 같은 후커우(壺口 호구)폭포
(1) 시안(西安 Xian 서안 - 한때는 長安이라 했음)
우리는 어렷을 때부터 ‘장안’(長安)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어떤 일이 생기면 ‘장안의 話題다.’ ‘온 장안이 시끌벅적하다’. 등등 우리에게는 장안이란 말이 익숙해졌다.
이때는 어린 마음에 ‘장안’을 ‘시장 안’으로 생각했으나 시골 5일장날도 아닌데 장안이라 말을 자주 쓰는 걸 보고 장안이란 동네가 어딘가에 있는 가 보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장안’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긴 곳일까 궁금하기는 했었다. 중국의 수도가 長安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만약 外界人이 서울에 나타나면 서울이 시끌벅적해야하고 광주에 나타나면 광주의 話題가 되어야지 外界人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왜 중국의 장안이 시끌벅적해야 할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西安은 先史시대부터 정치적 중심지였고 唐나라 때는 문화의 전성기를 꽃 피웠던 곳이다. 한때 로마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고의 도시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래서 西安은 중국 5대 古代도시에 속한다. 시내에 있는 기념비들과 유적지들은 과거 시안이 중국 역사의 중심부에 자리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시안(西安) 도로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중심부는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그 중심부에는 거대한 중루(仲樓)가 있고 여기서부터 시안의 주요 4대 도로인 北大街, 南大街, 東大街, 西大街가 시작되고 있었다.
성벽은 총 길이 14㎞, 높이 12m로 큰 사각형의 형태로 도시 주위를 감싸고 있는데 한 때 크게 훼손 되었던 것이 지금은 대부분 보수되었지만 몇몇 부분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아 성벽 위로 한 바퀴 도는 일은 불가능했다. 북문 위에 있는 성벽을 올라 가보니 성벽 위 노폭이 14m로 말 6필이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우리나라 옛날 전쟁 영화에 나오는 武器(창, 칼, 방패, 전차나 대포, 투구, 갑옷 등)들이 모두 거기에 다 있었다. 옛날 우리나라 전쟁 무기들은 모두 중국 무기를 모방한 것이 아닐는지?
산시(陝西) 歷史 박물관은 1층에는 중국 선사시대와 초기 왕조 시대의 유물, 2층 제2 전시실은 한, 서위, 북주 시대의 유물, 제3 전시실은 수, 당, 원, 명, 청시대 유물이다. 이 전시관은 종전에 省단위에서 보관하던 유물을 모두 여기에 가져다 年代順으로 진열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중국의 역사를 한 눈에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南門 가까이 있는 고루(鼓樓) 뒤쪽은 이슬람거주지역이다. 이 지역은 수세기 동안 후이족(回族)의 본거지였던 곳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이슬람교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回族 반란’을 겪은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이슬람시장에 가면 옷이나 장신구, 골통품이나 기념품을 살 수 있었다.
우리 숙소가 기차역 부근 ‘런민다샤’(人民大厦)인데 방도 깨끗하지만 浴湯에 溫泉水가 나오는데 유황 냄새가 은은하게 나면서 따뜻한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부근에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있고 거기서 받아다 쓰는 것 같았다.
(2) 빙마용(兵馬俑 병마용)
기차역 부근 여행사에 1일 투어를 부탁하면 兵馬俑, 秦始皇陵. 華淸池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여행사에 부탁하지 않고 단독으로 다녀오려면 기차역 동쪽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306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3군데를 보아야 하고 교통편 연결이 어찌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사에 부탁해서 다녀왔다.
2,000년 역사의 빙마용(兵馬俑 병마용)은 1974년에 처음 발견된 坑(갱)에서는 황제의 陵(릉) 주위를 둘러싸고 영원히 보초를 서고 있는 6,000개의 전투병들과 말들의 용(俑 허수아비)이 동쪽을 향해 사각편대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빙마용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야! 대단하다!가 입 밖으로 뛰어 나왔다. 또 兵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얼굴모습을 모두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놓아서 다시 한 번 놀랐다. 1976년에 발견된 두 번째 갱에서는 1,000개의 兵馬俑이 발견되었고 세 번째 갱에서는 전투용 전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황제가 자기 死後 世界를 위하여 자기 무덤을 지키는 兵馬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비밀 보장을 위해서 갱을 만든 사람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난 오늘에야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다. 現世에서 잘 못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死後 자기 시신 안전을 위하여 병마용을 만들어 놓았을까?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또 병마용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지금도 어디에 더 많은 유물이 있는지는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다고 한다. 자기 死後 世界를 만들어 놓고 비밀보장을 위해 갱 만든 사람들을 죽이다니 --
秦始皇 陵은 兵馬俑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는데 陵이 아니라 작은 산처럼 보였다. 이 陵은 불가사의한 무덤이다. 발굴하지 않아서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이 무덤을 짓기 위해 작업을 했던 예술가들을 무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 채로 파묻혔다는 設이 있을 정도다. 무덤의 크기로 보아 무덤 속에는 값진 물건을 많이 쌓아 놓은 궁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은 BC 246년에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첫 번째 황제라는 뜻으로 ‘始皇帝’로 칭했다. 진시황은 중국의 6國을 통일하고 화폐와 문자를 통일 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반면 그는 분서갱유, 반대파의 숙청, 농민들을 동원한 대형 건축 사업 (長城 등)강행 등 폭군 정치로 악명이 높았다. 不死永生을 위해 不老草를 구하러 사람을 우리나라에 까지 보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51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비밀 보장이라는 미명으로 병마용 갱을 만든 사람과 자기 왕릉을 축조한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 시킨 폭군이다. 그가 ‘暴君’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갔지만 지금은 兵馬俑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이 많아 오늘날은 그가 西安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진시황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이 代를 이었으나 4년 만에 폭도들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물러났고 이 때 폭도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다음 漢나라다.
시안(西安)은 隋, 唐, 秦, 漢의 수도였기 때문에 부근에는 秦始皇 陵외에도 다른 王陵이 많다. 시안(西安) 주변을 ‘皇帝陵村’이라 해도 될 것 같다. 昭陵(소릉 -당 태종), 乾陵(건릉- 당 고종과 측천무후), 茂陵(무릉 -한 무제)등이 잘 꾸며져 있다.
※ 당 태종 - 당 태종 이름은 ‘이세민’인데 당 태조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太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變을 일으켜 태자인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지만 정치를 잘 해서 名君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 태종의 治積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治積으로 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치적은 ‘위징’이라고 하는 곧은 신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이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太子가 아닌데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라 비난을 받았지만 정치를 잘 해서 名君이 되었다. 史家들이 조선 이방원이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비슷하다 해서 왕명을 태종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3) 화칭츠(華淸池 화청지)
화칭츠(華淸池 화청지)는 병마용 가는 길목에 있는 온천 목욕탕인데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있는 곳이다. 이 목욕탕은 당나라 때 황제와 후궁들이 즐겨 찾은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목욕탕 안을 들여다보니 현종이 사용했던 ‘연화탕’ 양귀비가 사용했던 ‘해당탕’ 평민들이 사용했던 ‘상식탕’ 들이 구분되어 있었고 화청지 앞 연못에는 양귀비의 조각상이 있었다. 양귀비는 중국 4대 미인 중의 한사람으로 당나라 태종의 사랑을 받았던 미인이다. 뜰에는 당시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써 놓은 ‘長恨歌’(끝없는 그리움)라는 詩가 돌에 새겨져 커다란 돌판 위에 놓여져 있었다. 마치 책을 한 권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양구이페이(楊貴妃) 이름은 楊옥환인데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하여 17세 때 입궁하여 22세 때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와 혼인하여 현종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인 ‘무혜비’가 사망하자 신하들이 왕의 슬픈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양옥환을 현종의 침실로 자주 보내서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도록 해 주었다. 아들 수왕 이모는 아버지가 자기 처인 양옥환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자 양옥환과 헤어지고 왕실을 나와 다른 여자와 재혼하고 道敎사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후 현종은 양옥환을 왕비로 맞이하고 양옥환과 사랑 놀음에 푹 빠져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모든 왕권을 양옥환에게 일임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양옥환이 자기 사촌 오빠 양국충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었는데 양국충은 40여개의 관직을 독점하게 되자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국민들 삶을 돌보지 않아 국민들 원성이 높아져 갔다. 이때 현종의 신임을 받은 지방절도사(지방의 행정을 도맡아보는 장군) 안록산이 양국충의 잘못을 현종에게 알려주었으나 현종은 이를 묵살해 버렸고, 양국충은 왕에게 자기 비행을 고해 바쳤다고 안록산을 미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변 위험을 느낀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양국충과 楊씨 일족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 한편 황제 근위병들도 황제에게 양옥환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고 현종도 양옥환의 처형을 근위병들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근위병들은 양옥환을 목졸라 죽였다. 이 때 양옥환의 나이는 38세였다.
楊옥환이 중국 4대 미녀일 정도로 미모가 출중해서 貴하디 貴한 王妃(貴妃)란 뜻으로 양구이페이(楊貴妃)라 한다지만 한편으로는 양옥환이 현종의 마음을 미혹(迷惑)하고 중독(中毒)시키는 두려운 왕비란 뜻도 있다고 한다. 사람의 눈을 迷惑하고 마음을 中毒시키는 식물을 ‘楊貴妃’라 한다.
백거이가 쓴 詩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고 한다.
‘후궁에 3천 궁녀가 있었지만, 3천명 분 총애가 한 사람에게 내리네,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
우리나라에도 ‘잘 낳은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양귀비가 오빠를 요직에 앉히고 양귀비 친정 가족도 부귀를 누리며 잘 사는 것이 부러워서 한 말인 것 같았다.
밤에는 ‘長恨歌’ 歌舞쇼가 있는데 이 쇼는 중국 5대 쇼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고 출연 배우만 350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밤에 시안 시내에서 여기까지 오고가야하는 어려움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을 접어야 했다.
안록산은 양국충과는 권력의 암투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양옥환과는 좋은 사이였던 것 같다. 안록산이 양옥환을 어떻게나 힘차게 가슴에 품었던지 양옥환 가슴에 상처가 생겨 가슴을 잠시 수건으로 감싸고 다녔다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것이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단다. ㅎㅎㅎ
또 이곳에 장제스(장개석)가 오래 머물렀는데 이때 장제스의 부하인 장학량이 옌안(延安)에 있는 모택동과 國•共합작을 하자고 꼬이는 바람에 속아 장학량 군대에 잡혀 있다가 뒷산인 여산으로 피신했고 결국 타이완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를 ‘西安事變’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장제스가 그때 머물렀던 방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이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西安事變’의 현장이었다.
(4) 화산(華山)
오늘은 華山가는 날이다. 친구 부인은 등산하기 어려우므로 호텔에 남아 있다가 시내 가서 쇼핑이나 하겠다고 해서 우리 셋이서 출발했다. 華山은 ‘화강암으로 피운 꽃’, ‘화려한 산’이라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하며 중국 10대 명산에 들어간다. 華山은 허난(河南)성과 경계지역에 있었다. 차를 타고 동쪽으로 52㎞ 떨어진 화산역까지 간 후 거기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택시로 갔다. 華山(2,160m)은 중국 5岳 중 하나인 西岳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중 ‘쇠’에 해당한다고 한다. 華山은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화강암과 깎아지른 능선과 기암괴석 그리고 웅장한 봉우리들이 빼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역시 바위가 아름다워야 名山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무릎 관절 때문에 정상까지 올라가기가 부담스러워 케이블카를 타고 바로 北峰으로 오르기로 하고 친구와 친구 동생은 등산하겠다고 하여 나와는 헤어졌다. 나는 케이블카로 10분 만에 北峰(1,615m)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1시간을 기다려도 친구가 올라오지 않는다. 너무 무료해서 北峰보다 500m 더 높고 화산에서 최고봉인 南峰(2,160m)을 향해 조금씩 발을 옮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높이는 北峰에 비해 500m정도 더 높지만 급경사인데다 화강암에 발디딜 만큼의 층계만 만들어 놓아서 천천히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는 ‘華山極岾(2,160m)’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올라오느라 다리는 아팠지만 화강암의 빼어난 절경과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분만은 상쾌했다.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등산 하는 것 같았다. 옆 등산객에게 부탁해서 標識石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휴대폰에 담은 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사진만 보면 내가 2,160m를 모두 등산한 것처럼 오해 받기 쉽다. 내가 천천히 北峰까지 내려 왔는데도 그때까지 친구 모습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건장한 동생과 함께 갔으니 괜찮겠지 하고 걱정하는 내 마음을 다스렸다. 잠시 후 친구와 동생이 나타났는데 얼굴은 웃는 표정이지만 옷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내가 南峰을 올라갔다 왔다고 하니까 동생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그래서 휴대폰에 있는 증명사진(남봉 표지석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니 “형님! 대단하십니다! 우리 금방 다녀 올 테니 잠간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달리기 하는 것처럼 산을 뛰어 오른다. 40여 분 기다리니까 또 산을 뛰어 내려온다. 지금도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내가 '형제는 용감하다'고 말해 주니 고마워했다. 이렇게 해서 꿈에 그리던 五大 名山 華山 등반을 마무리 하고 시안(西安)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면서 들으니까 화산 등반이 매우 어렵더라고 한다. 등산로는 깎아지른듯하게 경사가 나 있는데 의지할 데라곤 쇠줄 하나와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바위벽에 50㎝ 정도 파여진 홈이 전부라는 것이다. 한 번 등산 대열에 들어서면 물러설 수도 없고 추월할 수도 없어서 앞 사람 가는대로 천천히 따라 갈 수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華山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단다.
(5) 후커우(壺口 호구)폭포
후커우(壺口 호구)폭포는 산시성(陝西省 섬서성)과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두 省의 경계를 흐르는 黃河에 있다. 위쪽에서는 강폭이 300m 정도 되었지만 폭포 부근에서는 강의 양쪽 石壁이 우뚝 솟아있고 강의 폭이 술병 입구처럼 좁아져 그 사이를 쏟아지는 물의 모습이 마치 주전자의 물 주둥이에서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후커우(壺口 호구)폭포라고 했다고 한다. 폭포의 낙차가 큰 곳은 9m라고 한다. 폭포의 물 색깔이 황색인 것도 특이했지만 폭포소리도 요란했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폭포이고 세계 제 1의 황색폭포다. 地名이 섬서(陝西)인데 발음이 Shanxi로 산서(山西)와 같아 혼동하기 쉽다. 중국 사람들은 세차게 용솟음치는 물살이 중국 민족정신을 상징한다고 해서 좋아 한단다. 洪水가 난 이후 폭포의 모습은 더 장관이라고 한다.
(6) 옌안(延安 연안)
옌안(延安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江西에서 출발하여 연안까지 1만 2,500㎞를 도보로 걸어온 大長征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의 슬픈 역사다. 1947년 국민당 공격을 받아 피난가기 전까지 공산당 군대는 이곳에서 국민당 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펼친 곳이다.
1920년 대 후반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 당시 이곳 농민들이 공산당 정권을 적극 지원한 곳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국민당 장제스군에 쫒겨 오면서 피난처로 정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은 공산당 정권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다시 칭다오(靑島)로
시안(西安)에서 선예 친타이처(深夜 寢臺車 심야 침대차)를 타고 칭다오(靑島)로 향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장거리 이동시 심야 침대차를 많이 이용한다.
침대차에서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눈감고 상념에 젖었다. 잔잔한 추억이 오버랩 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번 黃河유역 한 달 여행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버렸다. 흔히 대충대충 보는 것을 ‘走馬看山’이라 하는데 이번 여행은 快자를 앞에 붙여 ‘快走馬看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왕복 1만km가 넘는 거리를 한 달 동안에 다녀왔다면 완전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으로 차만 타고 돌아다녔지 이건 여행이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黃河유역을 한 달 간 여행하는 동안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생활방식이 우리와 비슷한데다가 먹거리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黃河유역은 우리나라와 氣候帶가 비슷해서 기온차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여기가 고대 중국 歷史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 대해서 사전 지식을 얻고자 나름대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애로점이 있었다. 덕분에 중국 역사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
그런데 관광 도중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名山이 있고 큰 도시가 있는데 왜 ‘티끌모아 泰山이다’. ‘長安이 시끌벅적하다’라는 말을 썼을까? 확실한 답은 몰라도 아마 우리나라는 대대로 중국에 억눌려 兄弟의 관계는 물론 심할 경우에는 君臣의 관계를 맺어 고개 숙여 살아 왔기 때문에 兄이나 君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弱小국가의 悲哀라고나 할까? 그 당시에는 중국이 기침하면 우리는 금방 감기에 걸리는 신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리는 弱小國의 탈을 벗고 이제 强大國이 되었다.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 중국, EU와 FDA를 체결한 우리나라는 세계경제영토의 74.5%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고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는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새로이 역사를 써나가야 할 것 같다.
泰山 대신에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인 한라산을 넣는다거나 국립공원 제 1호인 지리산을 넣는다거나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을 넣는다면 어떨까? 그리고 長安 대신 서울이나 광주를 넣으면 어떨까?
‘티끌모아 무등(산)이다.’ ‘걱정이 한라(산) 같다.’ ‘BTS가 오니 광주가 온통 시끌벅적하다‘ 등등 이런 말투를 나부터 우리 가정부터 먼저 실천하려고 한다.
‘역사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후손들이 보게 될 역사라는 거울에 좋은 모습을 많이 비추어 주어야 하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깜박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보니 어느새 칭다오다. 한 달 동안의 黃河유역 여행을 모두 마치고 출발지인 칭다오(靑島)에 다시 돌아왔다.
아침을 먹으면서 해단식(?)을 했다. 먼저 물 샐 틈 없는 치밀한 계획으로 한 달 동안 무탈하게 잘 다녀 온 건 모두 우리 리더의 덕택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리더의 노고에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모두 한 마음으로 함께 행동 해준 회원들 덕분이라고 서로를 칭찬해 주었다.
오전 10시 30분 칭다오를 떠난 페이지(飛機 비행기)는 1시간 정도 비행 끝에 무사히 인천으로 돌아왔다. 무탈하게 여행을 마쳤으니 그동안 무사 귀국을 두 손 모아 기다렸을 가족은 물론 모든 분들께 정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아마 ‘자유여행 중독증’에 걸린 것 같다. 기회가 있다면 또 가고 싶으니 ---
그리고 이번 여행도 ‘중국지도’와 ‘중국’ Guide book이 네비게이션 역할을 톡톡히 해 주어서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고맙고 또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행 다닐 때 느꼈던 벅찬 興奮과 所懷를 표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지나 失機하는 경우가 茶飯事인지라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중국 黃河유역을 다녀온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펜을 들었으나 만감이 교체했던 순간들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지만 그 때의 감회를 말이나 글로 표현해 보려고 하나 표현력이 부족한지라 그때그때 떠올랐던 생각들을 넋두리처럼 써 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기업인으로서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내가 여행하는 입장에서 중국에 와보고 느낀 점은 ‘중국은 넓고 볼거리도 많다’이다. 세계자연유산, 세계문화유산, 세계지질공원도 많지만 특히 長城(만리 장성), 靑海湖, 兵馬俑 등은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나이 들어 늙는 게 아니라 꿈이 없어 늙는 거다.”그러니 꿈을 가지고 세계 이곳저곳을 자유 여행하면서 인생의 석양을 멋지게 수놓아 보고 싶은 욕심은 없지 않지만 ‘세상사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내 발목을 잡는다.
중국을 여행을 좋아하는 어떤 분이 말하기를 ‘중국을 10번 와보니 이제 중국을 좀 알 것 같다’고 했다는데 나는 이제 겨우 3번 왔으니 중국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 역시 매력이 많은 곳이다. 중국,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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