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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빌립보서 4장 10-13절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의 자족 훈련
하나님께서 염려 대신 기도하라고 명하셨을 때 약속하신 바는 염려라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염려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지만 무엇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하셨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만큼은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까지 권면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이상 외적인 어떤 문제 때문에 주 안에서의 기쁨을 빼앗기는 일은 결코 없으며, 성도의 관용 역시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라면 마땅히 무엇에 힘써야 하는가? 염려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혹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자에게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실제적인 수고와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기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쓸 것을 보내줌으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얼핏 보면 바울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 그것도 물질로서 도움을 주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기 때문에 뉘앙스 자체가 오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빌립보서 3장의 내용이나 오늘 본문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그저 바울 자신에게 물질로 부족함을 채웠다는 것으로만 칭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만한 모든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11).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합니다(12). 그런 그가 단순히 물질로 도왔다, 그것으로 나를 생각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한다면 앞뒤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말씀을 보자면 15절과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의 사역에 함께 동참하는 자로 있었고, 그렇게 동참한다고 할 때 물질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얼마동안 중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어떤 주석에서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아예 마음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복음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할 수만 있다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그런 여건이 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일이 멈춰졌다가 다시금 바울의 쓸 것을 보내주고 있는 걸 이제 다시 싹이 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0절에서 바울 자신도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한 것에 대해 칭찬을 하고 있고, 그것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단순히 물질의 도움을 얻거나 혹은 어떤 필요가 채워짐으로 인해서만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방금 읽은 빌립보서 1장 5절의 내용 때문에 기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위한 일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물질로도 돕는 일이 있기 때문에 바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로 오시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얼핏 보면 “바울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 그것도 물질로서 도움을 주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곧바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나에게 보내준 물질이나 물품이 아니더라도 나는 인내하며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만 하더라도 뭐라고 말하는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이런 부분 외에도 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4-27) 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는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한 삶을 살 때 배고픔과 궁핍도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런 삶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부름도 있고, 풍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매여 있는 삶을 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배부름뿐만 아니라 배고픔도 견디며, 풍부뿐만 아니라 궁핍도 견뎠는가? 어떻게 해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수 있었는가?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일단 오늘 본문 13절과 관련해 한국교회의 일부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긍정적인 마인드입니다. 그러니까 강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가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영어로 하자면 “Yes, I can”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복음송이 있었는데, 가사를 불러 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노래를 통해 무엇이 강조되고 있느냐 하면 ‘믿음’ 자체가 강조 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게 뭐가 잘못이냐?” 물을 수 있겠지만, 믿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의미에서의 믿음이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복음송이 믿음을 강조한다고 할 때 그때 믿음은 ‘믿는 나 자신’이 강조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능력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소개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때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과는 분명 거리가 먼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구체적인 가사까지 말씀드리느냐 하면 실제로 한국교회가 믿음을 강조할 때 이런 차원에서 강조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것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다보니 선물로 주시는 믿음,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이 망각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최근에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의 ‘긍정의 힘’이란 책도 기독교 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소개 하지 않겠지만 마치 제목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마치 인간이 모든 일의 주체인 것처럼 풀고 있는 뉘앙스입니다. 심지어 그 다음에 나온 책 제목이 ‘잘 되는 나’입니다.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건 한국교회의 방향이 어떤 면에서 이런 방향과 맞물러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가 강조되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강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여기에 강조가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있기 위해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바울은 자기가 이러한 꿋꿋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요, 내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이는 그리스도가 내게 능력을 공급하여 주심이라.” 그러니까 그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게 있습니다.
나아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이 ‘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세상적인 기준을 넣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식의 그런 말씀의 적용을 위해 있는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문맥을 따라 생각해 보면 세상의 것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에 나를 훈련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훈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런 훈련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마음까지 주셨는가? 자족하는 마음까지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주체가 누구냐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앞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믿음을 예로 들자면 믿음의 주체는 ‘나’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믿어야 하는 것은 ‘나’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했을 때 성경은 결코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결코 ‘나’라는 존재가 믿음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베소서에 의하면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되는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누구로부터 나온 것이냐?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보다 앞서 은혜를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믿음보다 앞서는 게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믿음에 대해 어떤 고백이 있는가? 14장 1항 초반부에 보면 ‘믿음의 은혜, 즉 택자들이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는 믿음은(히10:39)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고후4:13, 엡1:17-19, 2:8)’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믿음을 무엇으로 수식하는가? 은혜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는데,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가 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심으로 생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격 때문에 루터는 초창기 갈라디아서를 강의할 때 믿음에 관하여 이런 내용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과 5절에 있는 말씀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주어진다고 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걸 어떻게 해석했느냐? “들어선 난 믿음이란 들을 만한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듣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지만, 이 때 듣는다는 것은 들을 만한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행위 자체도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지만, 듣는 행위 자체도 아니요, 들을 만한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라는 건 철저히 우리를 원인으로 하는 모든 걸 근절시키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결과요, 그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이 중요하게 드러난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관련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분명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롬10:17).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와 있어도 루터의 말에 의하면 들을 만한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듣는 행위도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혹 믿음이 생겼다면 그 믿음은 내가 듣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요, 들을만한 능력을 소유해서도 아닙니다. 아무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듣게 하시며, 들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체이신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자신이 특출 나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라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를 보자면 바울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육체를 신뢰할만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가 다 가져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 가져봤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바울을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것과 창조하지 않은 죄 조차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듯 바울 안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자가 되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시작할 때 어떤 말까지 했는가?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주체가 누구냐? 하나님이라는 걸 분명히 드러냈던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과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구원을 위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돌아보라고 명령하지만, 그 명령을 이루시는 이가 누구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명령하기 때문에 명령을 이루는 주체가 명령을 받은 자인 것 같지만, 여전히 명령 받은 자가 주체가 아니라 명령하신 이기 주체라고 말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대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강조가 되어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 대한 이해가 가려진다면 어떤 면에서 신인협력의 사고, 아니면 나 자신이 모든 것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서 봐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실제로 바울은 한 때 혈통에서부터 학식, 그리고 열심과 선함에 있어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으로 살았습니다(빌3:4-6). 그때는 그리스도가 없는 자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유익하다고 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3:7-8).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았고, 복음을 위한 삶을 살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만 해도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때로는 기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어려울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무엇으로 생각했느냐? 하나님의 훈련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일을 겪게 하실 때 결코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취했던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부름과 풍부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만 역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배부름만 있는 게 아니라, 배고픔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풍부만 있는 게 아니라, 궁핍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배부름과 풍부에만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배고픔과 궁핍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시며, 그렇게 역사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 우리를 훈련시키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신명기 8장으로 하자면 우리를 향한 훈련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사는 자로서의 훈련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 40년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가? 민수기의 말씀으로 하자면 분명 불순종으로 인한 40년입니다(민14:33). 벌로서의 광야 40년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벌로서만 광야 40년을 걷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뭐와 같은가? 교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너를 낮추시고자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과연 그 명령을 지키는지에 대해 알고자 40년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40년 동안 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둘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심지어 신명기 8장 4절에 보면 어떤 말씀도 있느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광야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셨습니다(출13:22).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광야를 지나게 하셨지만 모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뭘 가르치시느냐?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식주가 주어지지만, 그것이 채워질 때 깨달아야 하는 게 뭐냐? 그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걸 가르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에 집착을 합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신 아래 그것이 적어지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반응하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실제로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6) 여러분,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난 뒤 감사와 찬양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출애굽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원망과 불평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과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11장으로 오시면 이제 뭘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하느냐? 질적인 문제로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느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마치 무엇과 같았느냐 하면 종과도 같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노예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런지, 어떤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계속해서 들어주고 있지만 그들은 만족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없을 때 물을 주셨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으로 따지느냐? 고기가 없는 것 때문에 따집니다. 이걸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탐욕을 품으매’ 이렇게 말합니다. 탐욕이요, 탐심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탐욕이 강합니다. 특히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탐욕이 매우 강합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물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탐욕은 누구 할 것 없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으로 사는 자가 성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 없이도 사는 자, 그것 없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성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안 주시면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나를 주시면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여러분에게 건강을 주시면서, 여러분에게 물질을 주시면서 그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이 깨달으셔야 됩니다. “아! 성도는 이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구나!” 그리고 혹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배고픔을 겪게 하실 때, 혹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로 우리로 하여금 궁핍하게 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걸 깨달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배부름과 풍부 속에서도 이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이것이 없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할 것이 못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잃어버렸을 때 집착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이 되도록 잘 훈련하셔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인터넷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안타깝던지 모릅니다. 개척하고 형편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 터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자면 그것도 훈련인 것입니다. 혹 사기 당해도 신고도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섭리까지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빼앗아갈 수 있다. 빼앗아갈 때 어떻게 빼앗아 가기도 하시는가? 사기를 통해서도 빼앗아갈 수 있다. 욥기 내용이 정확하게 그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이라는 인물과 하박국의 말씀만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욥이라는 인물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에서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판에서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욥1:4). 물론 욥은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도 훌륭한 사람이고, 물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큰 부자였습니다. 특히 욥에게는 10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혹 그들이 잔치를 베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범죄 하지나 않을까 하여 반드시 잔치가 끝난 뒤에 그들의 명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아침에 자녀도, 그가 가지고 있던 물질도 다 잃어버리게 되었던 겁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그런 자로 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0절에서 22절을 읽어드리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 자리,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 물론 욥의 고백을 통해 보자면 욥의 이런 반응은 하나님 지식에 근거한 결과요, 좀 더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평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 하는 것도 우리로서는 주목해야 할 사실로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자신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걸 우리가 배우셔야 합니다. 매번, 매 순간 주 앞에 살도록, 조심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큰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 지식에 근거하여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하박국 3장에서는 어떤 말까지 하는가? 17절과 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자족하는 삶이란 여기까지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자족하는 자리인 겁니다. 때문에 배부름이 아닌 배고픔 속에서도, 풍부가 아닌 궁핍 속에서도 자족하는 훈련을 해 나가시길 바립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형편에 만족함이 있으셔야 합니다. 아니 성도는 물질의 풍성함을 만족으로 여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만족함으로 여기는 존재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풍부하게 하실 때 감사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궁핍하게 하실 때 그때도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 그가 성도다운 성도인 것입니다. 물론 궁핍하게 하실 때 인내해야 하는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자로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를 다시금 확인하셔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고, 또한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인생이 되셔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