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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문학 평론
여로를 비추는 노을 한 자락의 공명共鳴
-평정 김창배의 시세계
신익선/문학평론가⸳문학박사
여로의 표정들
“노을진 삽교역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 시편 3연에 기술된 이말은 심상心象의 언어다. 평정平庭 김창배金昌培 시인이 뱉어내는 중저음의 여로旅路가 터트리는 소리다. 여로에서 듣는 다양한 표정들이 그곳에 산다. 먼저 소리가 산다. ‘터벅터벅’ 구둣발 소리가 덕산 시량리 덕산천과 삽교 목리 목리천 냇둑 걸어 삽교역을 향하여 걸었다. 새벽의 노을인가. 냇둑 길은, 천변川邊은, 제 몸을 밟고 먼길 떠나가는 청년을 받아주었다. 경남선 삽교역사揷矯驛舍는 그 청년의 마지막 눈빛을 역사驛舍의 가슴에 새겼다. 삽교역 역사驛舍는 다시 그를 사람들의 역사歷史에 썼다.
그 역사를 기억하는 후세의 평정 김창배 시인은 그 서사를 자신의 첫 시집에 가져와 썼다. 담담히 썼으나 응어리진 어혈이 읽힌다. 청년은 스물셋의 앳된 젊은이였다. 청년에겐 앳된 아내가 있었다. 게다가 어린 자식들도 있었다. 창창한 미래가 있었으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여로의 마지막 발걸음 소리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하다. 어린 아내와 어린아이들과 담보할 수 없는 미래를 두고 ‘터벅터벅’ 먼길 떠나가는 청년의 심사는 어떠하였을까. 청년의 아픈 걸음걸음을 숙주로 타오르는 웅지의 발걸음 소리 들린다. 그런 정황이 훤히 드러나는 시편을 보기로 하자.
자식 같은 씨알 가슴에 품고
끈을 모지락스럽게 잡고는
윤봉길 어릴 적 살았던 초가집
은행알 나무에 얼어붙어 달마중
냉이 무릇 돋아날 때
파평윤씨 청년이 중국 향하여 가던 날
은행알을 품고 있다 땅에 내려놓는다
사랑하는 아내
어린 자식 등지고
큰 뜻을 품고선
노을진 삽교역 터벅터벅 걸어갔다
총과 칼 들고 있던 가로수
오체투지, 하들하들 떨고 있다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 전문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목숨을 달고 목숨을 건사하며 목숨을 살아가는 생生은 또 무엇인가. 그 목숨의 일대기가 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는 윤봉길 의사의 고향이다. 그곳엔 시편의 제목처럼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가 고향 집 뜰 안팎에서 살아갔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다. 그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 품속에는 “자식 같은 씨알 가슴에 품고/끈을 모지락스럽게 잡고는/윤봉길 어릴 적 살았던 초가집”이 살아간다. 또 있다. “은행알 나무에 얼어붙어 달마중”하는 ‘은행알’이 살아간다. 한겨울 은행알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 표정처럼 파리한 얼굴이다. 혹독한 엄동 추위를 견뎠는가. 얼어붙은 은행알들이 ‘나무에 얼어붙어’ 떠오르는 ‘달마중’하곤 했다. 달마중이라니 얼마나 정겨운 표정인가. 그 ‘은행알’은 은행나무의 ‘자식 같은’ 존재다. ‘초가집’은 주인 같은 물상이다. 살뜰한 표상들이다.
그들을 두고 이웃 나라 중국中國으로 덕산 고을 청년이 떠나가는 중이다. 양력으로 경오년(1930년) 삼월 초엿새날이었으니, 음력으론 이월 초이레, 김장독을 깨는 늦추위가 물러서지 않았을 계절이었다. 김창배는 이를 “냉이 무릇 돋아날 때”라고 쓴다. 냉이와 무릇이 돋아날 때니 초봄이다. 설렘의 계절이다. 설렘을 남겨두고, 설렘이 ‘노을진 삽교역 터벅터벅 걸어’ 갔다. ‘터벅터벅’이다. 초봄이었으므로 가로수는 “총과 칼을 들고 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총과 칼’은 가로수 잎새를 뽑아 올린 나무의 꽃눈이다. 한겨울을 견뎌내느라 꽃눈은 모두 날카로워 보인다. 그런데, 그런데, 그 ‘가로수’들이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들하들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마무리 종행은 이 시편의 반전이다.
주지하다시피 오체투지는 양 무릎, 양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여 명명된 이름이다. 인간이 가진 교만과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올리는 큰절이다.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는 ‘가로수’들과 함께 오체투지를 하느라 제 몸을 ‘하들하들’ 떨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로써 ‘시량리 은행나무’가 단순한 은행나무가 아니라, 시량리 청년의 미래를 예언하고 투시하는 예지적 존재로 현현하는 물상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더구나 의태어, ‘하들하들’의 울림은 신선하다. ‘살금살금’, ‘번쩍번쩍’, ‘폴짝폴짝’처럼 생생한 표현이다. 동시에 매헌 윤봉길 의사의 고혼을 위무慰撫하려는 것인가. 오체투지 나무들이 신비롭다. 김창배 시인의 이 시편은 이 시집 전편을 울리는 공명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김창배 시인이 터 잡아 살아가는 동네를 쓴 시편이 있다. 시골 동네의 터전은 그리 크지 않다. 작다. 사람이 일생을 기대어 살아가는 공간 역시 실상 그리 넓거나 광활하지 않다. 작은 집, 작은 골방, 작은 뒷동산, 작은 개울가 등등, 작고 소박하며 좁은 공간이다. 사람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공간도 크지 않다. 소꼽동무, 소꿉놀이, 뒤뜰, 장독대, 다락방, 등등, 오붓하고 유정한 공간들은 모두 작은 곳이다. 그런 유년의 고향 같은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 공간이 삽교 읍내 앞쪽의 작은 야산인 ‘꽃산’이다. 삽교읍 소재지 낮은 야산인 「삽교 꽃산」시편에서는 오랫동안 삽교에서 살아가는 평정 김창배의 생활상이 편안하게 전개되고 있다. 꾸밈없이 살아가는 김창배 시인의 고요한 일상소묘가 소박하게 그려진 하기 시편들을 보도록 하자.
①늦은 아침 까치운다
좋은 소식 오려나
등산화 끈 동여메고
꽃산계단 오른다
계단에 떨어진
솔잎파리 나뭇잎
자리 탓 불만 없이
부모 옆 늘 지킨다
꽃산공원
터벅터벅 오르니
새와 꽃봉우리
반기우며 지저귄다
-「삽교 꽃산」 전문
②내가 어릴 적 자랐던 마을에 공동 우물 고무 두레박 퍼서 양동이로 길어가는 아주머니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아낙네 모습 정다웠다. 어느 해 그 우물 메워져 우물 볼 수 없었다. 동네 사람의 모임 터 길어도 마르지 않고 솟아오르던 그 샘물 그립다. 기후변화 심하여 큰 피해가 자주 발생한다. 농작물 예외 아니다. 기후변화 예방대책 미흡하여 많은 인명피해 난개발 멈추고 중단해야 한다. 우물 효용 가치가 크다. 토양 오염 없는 시골 우물 수리 준설을 생각한다. 우물은 고향이다. 어릴 적 공동 우물의 맑은 물 마시며 시원함 다시 만나는 그런 날이 그립다.
-「소중한 우물」 전문
①의 시편, 「삽교 꽃산」은 고향 시편이다. 충남 예산군삽교에 꽃산이다. 고향이 삽교인 필자도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어온 이름이다. 평정 김창배 시인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이 또한 삽교 시내다. 꽃산 뒷동네다. 귀따갑게 들어온 삽교 꽃산은 등고登高가 없을 정도로 평평한 야산이다. 그러나 막상 그를 형상화하기란 쉽지 않다. 하도 익숙해져서 단순하게 그냥 지나친다. 김창배의 시안詩眼은 그런 꽃산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시로 표현하였다. “등산화 끈 동여메고/꽃산계단 오른다” 로 1연이 시작되고, “계단에 떨어진/솔잎파리 나뭇잎”으로 2연이 시작된다. 이 시편의 대미는 ‘솔잎파리 나뭇잎’이다. 이 ‘나뭇잎’이란 쉽게 솔걸이다. 솔잎 무더기다. 침엽수인 소나무가 매달은 나뭇잎은 떨어져 마르면 불쏘시개로 최고다. 머슴이 갈퀴로 긁어가지 않는 한 솔걸은 그 어미인 소나무 아래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떨어진 나뭇잎조차 가족 공동체를 인식하고 있다는 은유다.
이는 김창배 시인의 삶을 웅변하는 표현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평정은 현재,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의 고택, 고덕 용리에 살다시피 하며 농사일을 거들며 부모님 시하侍下에 머문다. 그러면서 “꽃산공원/터벅터벅 오르니/새와 꽃봉우리/반기우며 지저귄다”라며 등정하여 새소리와 꽃봉우리 모습을 쓴다. 이 ‘터벅터벅’은 이미 「덕산 시량리 은행나무」에서 본 의성어 아닌가. 영웅 윤봉길의 발걸음 소리인 ‘터벅터벅’은 살아있는 것 아닌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서 그 옛날 외로이 떠나갔던 고향 땅을 다시금 찾아와 후학에 빙의된 채 꽃산에 오르고 계신 게 아닌가. ‘새와 꽃봉우리/반기우며 지저귀는’ 모습의 의미는 자유의 외침 아닌가. 자유다. 새봄의 자유다. 무한한 약동이다. 전율이다. 그런 절규 아닌가. 단순해 보이지만 「삽교 꽃산」 시편은 내면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②의 시편은 유년 시절 기억의 소환이다. 평정은 지금의 예당호가 자리한 대흥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고향이 예당저수지로 수몰되자 대흥 서당 훈장을 하시던 부친의 이주 결정으로 넓은 뜰을 가진 고덕에 이주했다. 농사일은 대흥에서와 진배없이 지속 되었다. 부친은 들일을 하시고 모친은 길쌈을 일삼으셨다. 그 보살핌의 시원은 고향마을 공동 두레박 샘물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어릴 적 자랐던 마을에 공동 우물 고무 두레박 퍼서 양동이로 길어가는 아주머니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아낙네 모습 정다웠다. 어느 해 그 우물 메워져 우물 볼 수 없었다. 동네 사람의 모임 터 길어도 마르지 않고 솟아오르던 그 샘물 그립다.”는 산문시의 제1연에 해당한다. 상실된 공동 우물에의 동경이 표현된다. “기후변화 심하여 큰 피해가 자주 발생한다. 농작물 예외 아니다. 기후변화 예방대책 미흡하여 많은 인명피해 난개발 멈추고 중단해야 한다. 우물 효용 가치가 크다. 토양 오염 없는 시골 우물 수리 준설을 생각한다. 우물은 고향이다. 어릴 적 공동 우물의 맑은 물 마시며 시원함 다시 만나는 그런 날이 그립다.”는 제2연에 속한다. 공동 우물의 두레박 샘물은 기억의 여로를 걸어간다. 유년 시절은 거의 모두 다 공동 우물을 썼다. 공동 우물터는 이웃 간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였다. 수질 오염이 없던 청정무구한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정다운 공간, 김창배가 꺼내 놓는 공동 우물에서는 얼굴을 만난다. 여로의 얼굴들이다. 이 얼굴들은 이처럼 애잔하면서도 따스한 회상의 표정을 짓고 있다.
2. 귀향의 술잔
사람은 누구나 걸어가야 할 좌표가 있다. 시인은 누구나 가슴에 응어리진 사연이 살아간다. 좌표와 사연이 일생이라는 시간을 공들여 그 주인공인 사람을 포로로 얽어맨다. 김창배도 예외가 아니다. 걸어가야 할 좌표가 있었다. 풋풋한 청년 시절,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공직사회에 입문하여 공무원이 되자 당장 공직사회의 일거리가 눈앞에 쌓여 있었다.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뒤로 갑년에 이르도록 줄곧 외길, 평생을 공직생활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수필로 등단하여 서너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으나 글쓰기의 집념, 시 창작의 오기는 버리지 않았다. 더구나 직장에서의 승진 상황도 녹록하지 않아 고심이 깊었다.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몇몇 시편을 살펴보자.
①금오산 거먹구름
휴식하고 있다
해안가엔 해파리가
무더기로 출몰하고
들고양이 설처댄다
길목마다 수시로
암운 드리우다
-「거먹구름」 전문
②사랑
가시고기 인생아닌가
찌르고 찌른다
인생
안전지대 없다
침입자 막아야 한다
명예
별똥별
가시고기 길 아닌가
떨어지고 떨어지며
한번
바다로 내려간 가시고기
귀향하기란
어렵고 어렵다
-「가시고기 인생」 전문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펼쳐왔는가에 있다. 그 지향점을 향하여 걷는 여정이 간단하지 않다. 무수한 구름과 무수한 파도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구름에 가려 앞이 보이질 않는다. 파도가 길을 막아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그때 좌절하고 절망하여 죽음이라는 터널에 자원하여 진입하기도 한다. 위 시편들은 그런 상징의 시편들이다. 비교적 단문이지만 이의 함의는 크다. 먼저, ①의 시편은 예산군청과 맞닿은 금오산 등정의 풍경이다. 금오산은 통상 예산의 주산으로 일컫는다. ‘금오산’에서의 ‘금오金烏’는 ‘태양’을 뜻하는 명사다. 찬란하다. 마치 깎아지른 절벽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서 태양이 뜨면 산 전체가 태양이 되는 산이다.
태양의 산, 금오산도 구름에 가려 안보일 때가 있다. 그 상황을 김창배는 “금오산 거먹구름/휴식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물고기로 풍요로워야 할 해안가는 해파리가 난리라고 한다. “해안가엔 해파리가/무더기로 출몰하고”라 썼다. 거기에 멋대로 날뛰는 “들고양이 설쳐댄다”한다. 이래저래 부아통 터진다는 것이다.가슴이 답답하고 부아통 터지는데 “길목마다 수시로/암운 드리우다” 앞뒤 좌우로 모든 골목을 주시해봐도 암운이 드리워져 있는 상황은 암담한 표출이다. 한마디로 미치고 환장하는 지경인 것이다. 사람이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이르면 할복해도 분이 안 풀리는 법이다. 어떠한 위로도 통하지 않고 어떠한 위안도 먹혀들지 않는다. 이때가 마약과 숙취와 자살과 살인의 음습한 광기가 침입하기 좋은 고위험군에 노출당하는 순간이다.
②의 시편은 자기가 자기를 어르고 설득시키는 서사이다. “사랑!/가시고기 인생 아닌가/찌르고 찌른다” 정의한다. 죽음에 필적하는 혹독한 ‘사랑’을 암시하는 시행이다. “명예!/별똥별/가시고기 길 아닌가” 단언한다. 아마 번번이 승진에 탈락, 분기탱천하였을 때 표정들일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르게 홀로 시를 써 온 김창배를 구원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편들이었다. 이 시편들이 평정平庭 김창배를 스스로 평정케 하는 평정平定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떨어지고/떨어지며//한번/바다로 내려간 가시고기/귀향하기란//어렵고 어렵다”를 깨달은 것은, 김창배가 아니다. 시적 화자를 빌려 서술하는 김창배의 위 시편이었다.“떨어지고/떨어지며”라 하였으니 한두 번 떨어진 게 아니란 얘기다. 숱하게 떨어졌으니 숱한 좌절을 겪었다는 암시다. 좌절에서 일어선 것은 김창배의 시였다. 시편들이 김창배를 일으켜 세웠다. 김창배 시인에게 죽음의 나락에 함몰당하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다시 꼿꼿이 서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결국, 김창배의 시 쓰기는, 시는, 삶을 버텨내게 하는 원초적 힘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시는, 시 쓰기는, 결국 김창배에게 있어 구원의 방주였다. 왜 그러한가. 다음 시편을 보기로 하자.
뜻한 것이 서투름이었다면
나의 이름은 헛되고 헛되었다
기껏 일 년 걱정했던 내가
이리 지켜가고 있는 앞날을 생각하지 않았다
도전하지말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서투른 제스처
변명할 수 있는 도피처를 만듦으로서
폐부 깊숙이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이루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나의 모습조차
아는 이에게 부질없는 일이다
내 자존심이라는 것도
부질없음인지 모르는 일
공무원 합격증서 앞세우고
조상에게 드리는 감사의 술잔
얄팍한 종이 한 장으로
이 자리를 내보이는 것은 욕심이 아니거늘
그래도 아버님의 눈에는 대견했을까?
선이 부드러운 조부모 무덤이
풀줄기 위에서 새처럼 흔들리고
이제 한 가지 더 무엇인가를 성취해야지 하면서
미묘한 망설임 속에 서성인다.
-「갈등」 전문
한 편의 시를 한 편의 소설이라 말한 이는 시인들이다. 위 시편을 읽으면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뜻한 것이 서투름이었다면/나의 이름은 헛되고 헛되었다/기껏 일 년 걱정했던 내가/이리 지켜가고 있는 앞날을 생각하지 않았다”라면서 시작되는 이 시편은 일종의 회고록의 서두이다. 선친으로부터 받은 ‘내 이름’이란 기실 뭇 조상들께서 내려주신 호명 아니겠는가. 그 ‘내 이름’을 허투루 존재케 하는 일은, 성경의 전도자가 탄식한 ‘헛되고 헛된’ 것의 표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일견 단순하다. 어리석다. 나약함은 또 어떠한가. 위 시편에서 시적 화자는 ‘기껏 일 년 걱정’이라 말하나, ‘일 년 걱정’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앞날’의 안부는 묻기 어렵다.
어느 해 봄날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앞날’들의 집합체인 ‘앞날’이 현실로 뭉쳤다. 어떤 모습인가. 부친을 모신 모습이었다. 장소는 선영先塋이다. 그를, “그래도 아버님의 눈에는 대견했을까?/선이 부드러운 조부모 무덤이/풀줄기 위에서 새처럼 흔들리고/이제 한 가지 더 무엇인가를 성취해야지 하면서/미묘한 망설임 속에 서성”인다고 썼다. 조부모님이 영면하신 선영은 일가의 성지聖地다. 그 장소에 부친을 모시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편을 보면, “공무원 합격증서 앞세우고/조상에게 드리는 감사의 술잔”을 올리는 중이다. 그 표정들을 썼다. 처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합격증서를 조상께 올린 현장이다. 조상들께서는 그럼 어찌 은혜를 베푸셨을까.
평정 김창배 시인은 마침내, 마침내, 자신이 투신한 공직의 길에서 소망하는 바를 이루었다. 사무관으로 승진한 것이다. 맨 처음 공무원 합격증서를 앞세워 성묘하듯, 다시 아들을 불러 성묘하여 조상께 고하였다. 그런 일들은 부친이 보시기에 흐뭇하고 보람되었을 것이다. 시편 제목이 ‘갈등’이라 붙였지만, 이 시편들이 알려주는 의미는 갈등 극복 구조가 기술된 소설의 서사구조를 띠고 있다. 이 시편에 기술된 ‘선이 부드러운 조부모 무덤이/풀줄기 위에서 새처럼 흔들리고’ 등의 표현은 명징하고 수려한 문장이다. 화자는 지금 감사의 표식으로 부친과 더불어 ‘귀향하여 술잔’을 조부모께 올리고 있다. 다양한 여로의 표정 중에서 안도감이 느껴지고 웃음이 묻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 손의 생명성
사람은 손을 가지고 태어난다. 1개도 아니고 2개이다. 사람의 팔목에 달린 손은 무엇을 잡거나 만지는 데 유용하다. 사람은 두 발로 걷기 때문에 동물보다 손이 자유로워 물체 다루는 일을 한다.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만물 중 가장 뛰어나 영묘한 능력의 뇌를 가지고 있다. 뇌보다는 밖에 있는 손을 잘 활용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사람에게 어려움은 예고 없이 닥쳐온다. 그러할 경우 사람이 손 내밀면 상대방이 도와주어 소생할 기회 준다.
힘든 상황에서 손 내밀었을 때 도와준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손을 잘 사용하면 아름다운 손이다. 사람의 손을 잘못 사용하면 범죄 저지르거나 남을 해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전직 대통령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 아름다운 손으로 보듬어 주었다. 그분은 청와대로 보낸 온 편지를 읽고는 손으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진정으로 우리 국민은 대통령의 여성스러운 손보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손을 원한다.
-「손」 전문
볍씨종자소독약제도 살충제도 제초제도
병충해도 태풍도 땀방울로 이겨 낸 나락
콤바인도 뜨거운 햇볕도 도정공장도 다 이겨내고
정제되어 나온 신미新米
쌀 한 톨 귀해 벼 모가지 모으려고 들판 나다니던
어린 시절 슬픈 역사
어스름밤 아버지가 준 쌀자루 메고 돌아오는 삽다리길
아버지의 인중人中이 푹 들어간 모습 눈에 어른거리고
쌀자루 무겁게 내 어깨 짓누른다
-「아버지의 인중」 전문
어머닌 수십 년간 농사 일 합니다
무릎 90년 살고 있습니다
20여 년 삼 4,000자 삼었습니다
두 무릎 엉금엉금!
나이 들어 퇴행성관절염 걸렸습니다
인공관절 수술받았습니다.
어머닌 달나라 세계여행 혼자 걸어갈 수 있는
우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우주선」 전문
허름한 초가집 이웃집 아주머니의 동의하에 어머니는 고두밥을 만들어 세무서직원의 눈 피하려고 옆집에다 술독을 담가 놓았다. 어머니는 술독에서 술이 익으면 야밤에 주전자 들고는 옆집에 가서 술 가득 퍼서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어머니는 술 담글 때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담근 밀주 마시는 사람은 모두 술맛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 맛에 어머니는 술 자주 담갔다. 술 담그는 날, 어머니는 목욕하였다. 술 담그는데 소주 한 방울도 사용하지 않았다. 예산세무서 직원 몰래 어머니가 담가놓은 술독에 나는 원숭이처럼 숨어서 다가가곤 했다. 내가 가지고 간 긴 빨대로 술독에 들어있는 풋술을 *은빛실 속에서 빨아먹던 그 시절이 그립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 「술 조사」 전문
위 네 편의 시편들은 모두 ‘손’의 서사다. 맨 먼저 김창배는 그냥 「손」을 제목으로 썼다. 배경으론 원시인이 부싯돌을 사용하여 맨 처음 ‘불’을 발견한 걸 인류 역사의 전환점을 이뤘던 역사적 사실이 감춰져 있다. 이 시편에서 제1연은 손의 효율성을 썼다.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만물 중 가장 뛰어나 영묘한 능력의 뇌를 가지고 있다. 뇌보다는 밖에 있는 손을 잘 활용하여 만물의 영장이라,’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에게 어려움은 예고 없이 닥쳐온다. 그러할 경우 사람이 손 내밀면 상대방이 도와주어 소생할 기회 준다.’ 손이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제2연은 그 실체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주인공은 ‘전직 대통령 어머니’다. ‘전직 대통령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 아름다운 손으로 보듬어 주었다. 그분은 청와대로 온 편지를 읽고는 손으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라면서 전직 대통령 어머니가 행한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낸다. 전직 대통령의 어머니는 ‘어려운 이들을 보듬어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또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온 이들에게 일일이 손편지로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손‘이 실행하는 아름다운 삶의 문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 손의 참 아름다움은 ‘진정한 사랑이 담긴 손’이라는 것이다. 정녕 내가 어려움으로 천지간 막막하였을 때, 내 손을 잡아 준 이는 누구인가. 반대로 내가 손 내밀어 이끌어 준 이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인중」은 부친에 관한 서사이다. 생존해 계신 부친과의 옛일을 꺼내 놓고 있다. 여기서 ‘쌀자루’는 유년 시절 뛰어놀던 장독대와 같다. 그리운 매개체다. 아버지는 일년내 농사지으셔서 쌀자루를 건네주셨다. 아들은 받았다. 아아, 그런데 어쩌다 아버지의 인중을 보았다. 인중이란 코와 입술 사이의 공간, 그 공간을 어쩌다 보게 되었다. “어스름 밤 아버지가 준 쌀자루 메고 돌아오는 삽다리길/아버지의 인중人中이 푹 들어간 모습 눈에 어른거리고”의 표정을 쓴다. 인중이 푹 들어간 아버지 모습은 노쇠와 애모의 복합 감성적 표현이다. 그렇길래 “쌀자루 무겁게 내 어깨 짓누르는” 것이다. 자식은 우렁이처럼 부모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꼭 무얼 받아서가 아니다. 부모님 자체로 힘을 얻는다. 한편, 부모는 자녀에게 베풀면서도 행복하다. 자식과 부모와 공간에도 늘 ‘손’의 서사가 숨 쉰다. 시인의 예리한 시각은 그 찰나의 공간에서 유영하는 인간사 애틋함을 놓치지 않고 적어 놓는다. 바로 이 점이 김창배 시안詩眼의 내밀한 빛이다.
부친을 주인공으로 한 시편에 연이어, 「어머니의 우주선」과 「술 조사」 시편은 생존해 계시는 모친의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우주선」은 특히 이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편이다.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어머닌 수십 년간 농사 일합니다/무릎 90년 살고 있습니다/20여 년 삼 4,000자” 삼았다고 전언한다. 담담하다. 시적 수사는 묘사가 전부다. 꾸밈이 없으나 공명은 크다. 모친에의 회고담이기도 한 이 시편의 서사 역시 ‘손’이다. ‘20여 년 동안 4천 자의 삼베’를 짠 손을 가진, 올해로 구십에 이른 어머니다. 그 ‘손’이다. 4천 자의 길이는 1 키로미터를 지나 200미터를 더 간다. 삼베 삼는 일은 어머니 평생에 걸친 대역사였다. 어머니의 삼베는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성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짠 게 아니라 무릎을 내놓고 무릎에 말아서 옷감을 짜셨다. 그것도 한낮엔 들일을 하시고 밤새워 길쌈을 맨 것이니 그 고생을 어찌 다 표현하랴. 그마저도 이제는 “나이 들어 퇴행성관절염 걸렸습니다/인공관절 수술받았습니다.//어머닌 달나라 세계여행 혼자 걸어갈 수 있는/우주인이 되었다”고 자조에 근접한 탄식을 한다.
「술 조사」 시편은 몰래 술 담그는 이야기다. 이 역시 어머니의 손이 주요 숙주이다. 길쌈하시던 어머니의 손이다. ‘손’은 때로 세무서에서 나오는 술 조사 직원 눈을 피해 술을 담갔다. 밀주였다. 천연발효 식품으로 누구나 밀주를 애음하였다. 양육하고, 농사짓고, 길쌈 매고, 밀주 담그는 어머니의 손은 예사로운 손이 아니라 신비한 보물을 만드는 손이다. 술 담글 때의 정성을 살펴보면 놀랍다. “어머니는 술 담글 때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담근 밀주 마시는 사람은 모두 술맛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 맛에 어머니는 술 자주 담갔다. 술 담그는 날, 어머니는 목욕하였다.”이다. 어머니 목욕을 쓴다. 술 담그는데 목욕을 하시고 술 담근 것이다. 그러니 양육을 포함한 살림살이 일이야 더 말할 게 없다. 한마디로 정성이다. 그것도 어머니의 지극정성이다. 곧 진하디진한 어머니의 애정이 읽히는 대목인 것이다. 그래서 아내와 더불어 김창배 시인은 틈틈이 예산에 산재한 정려문旌閭門 등의 예산 문화재 탐방을 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손’의 연대기와 같은 부모 존중의 하기와 같은 시편들을 쓰기도 한다.
정려문 탐방길
아내가 익모초 뜯는다.
삼복더위 지친 아버지를 위한
어머니 지극정성
쓰디쓴 익모초益母草 달인 즙
장독 위에 밤새워 이슬 맞추고
새벽 잠결에 아버지 한 모금
어머니도 한 모금
한여름 아내가 익모초 안고 온다.
영약이 따로 있나 탈 없으면 보약이지.
탐방길, 돌아오는 발걸음
참 가볍다.
-「익모초」 전문
첫 1연은 상황 제시이다. “정려문 탐방길/아내가 익모초 뜯는다.” 예산의 문화재에 대한 집필을 위하여 정려문 탐방 중에 돌연 아내가 ‘익모초’를 뜯는 상황이다. 다음에 전개되는 2,3,4연은 회고담이다. 아내가 뜯는 익모초를 보면서 그 옛날의 일들, 곧 자당께서 부친을 위하여 산야의 익모초를 뜯어 즙을 음용하던 걸 떠올린다. 아내가 뜯은 ‘익모초’를 즙 내어 부모님 드릴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한여름 아내가 익모초 안고 온다./영약이 따로 있나 탈 없으면 보약이지.//탐방길, 돌아오는 발걸음/참 가볍다.” 결구가 생성된다. 손의 대명사는 생명을 기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들을 돌보던 전직 대통령 어머니의 손, 쌀자루 건네시던 아버지의 손, 삼베 매던 어머니의 손, 익모초 뜯는 아내의 손은 이처럼 일국의, 그리고 일문의 대를 이어오는 주요 물상이자 정신 속에 재생시키는 주요 심상으로 생명을 은유하는 시어이다. 이들의 궁극은 생명인 것이다. 삶이란 생명으로서 부지런히 자신의 인격을 가꾸고 성정을 다스리며 생명을 길러가는 양생養生의 가치를 실천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또한 수양을 통한 ‘생명’의 무궁한 가치를 상징한다. ‘생명’은 동서양을 통하여 유구한 역사의 침전물로 면면이 내려와 ‘생명’을 기르는 ‘양생’에 이르고 이 양생養生이야말로 존양存養을 이뤄가는 생명이라 여긴 것이다. 근사록은 이를 한층 구체화하여 기술하였는바 김창배의 ‘손’ 시편들은 바로 그 ‘생명’을 중시하는, ‘손’의 ‘생명성’ 묘사라 하여 과언이 아니다.
4. 결어
“노을진 삽교역을 터벅터벅 걸어갔다.”(「덕산 시량리 은행나무」 일부)나, “꽃산공원/터벅터벅 오르니”(「삽교 꽃산」 일부)나, “오늘 굳은 마음 먹고/예산 금오산 터벅터벅 오른다.”(「산행」 일부) 등의 시편은 모두 ‘터벅터벅’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들 방점은 이 시집 전체의 각운과 같은 방점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살아가는 한, 사람은 누구나 ‘터벅터벅’의 자기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산으로, 들로, 걸어, 걸어가다가 마침내 그 걸음 소리가 안 들리게 되면 생애를 접고 광활한 우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인간의 삶이란 어느 일정한 지점에서 한 지점까지의 거리를 걸어간 발자취 아닌가. 마감 시한이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갑년甲年이 지난 김창배 시인이 계묘년(2023년), 올해 구십 세 생일을 맞이하는 노모께 헌정해 드리는 시집이다. 시인은 바람과 구름, 상처와 기쁨을 노래하면서 그들이 내는 내면의 발걸음 소리와 머지않아 마감되실 어머니의 숨소리를 듣는다. 시를 잘 쓰고 못 쓰고의 논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눈물의 가치다. 울음의 무게다. 시인은 그를 인지하는 일이 더 긴요하다. 눈물과 울음은 세속의 잣대로 측량할 수 있는 물상이 아니다. 화폐가치로 통용할 수 없는 의미가 내포된 경이롭고 존귀한 세계의 새로운 시원에의 개원이다. 그러므로 평정 김창배 시인의 첫 시집, 「어머니의 우주선」의 진정한 변별력은 숨어 있는 생을 깨웠다는 데 있다. 이것은 김창배의 창조다.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 하였지만, 김창배는 부단히 스스로 시 쓰기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이 시 쓰기는 숨어 있는 생을 깨우는 집요하고 신명 나는 김창배의 존귀한 일상이었다. 사람이 일평생 살아가는, 덧없는 여로를 비추는 노을 한 자락의 공명共鳴을 울려, 오로지 단 한 분께만 목욕재계하고 찬사를 드리기로 한다면, 바로 김창배의 「술 조사」 시편에 등장하는 시행인 시어詩語가 분명할 터이다. “어머니가 담가놓은 술독에 나는 원숭이처럼 숨어서 다가가곤 했다. 내가 가지고 간 긴 빨대로 술독에 들어있는 풋술을 은빛실 속에서 빨아먹던 그 시절이 그립다.//어머니 사랑합니다!”라는 결구다.
그렇다. 김창배 시인의 어릴 적, 아기의 그 가녀린 발걸음을 잡아주셨던 어머니는 이제 구십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셔서, 특히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므로 김창배는 시방 우렁차게 외친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회갑을 넘긴 아들, 김창배 시인이 어머니의 위태로운 발걸음을 잡아주며 살아간다. 묻노니, 이승에서 이 일보다 더 신성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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