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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내용이 짤막짤막하고요. 이 책은 이후부터는 좀 짤막짤막하고 앞에서 나왔던 부분이 중복되는 게 많습니다. 빨리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조금씩 빨리 넘어가면서,
342쪽이고요.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p342, p343)
내가, 야∼나 깨달았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자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어, 부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나 깨달았어, 할 만한 내가 없어지는 것이 깨달음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까처럼 그 아무 일이 없어지는 게 깨달음인데 깨달음을 획득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잘못된 착각이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깨달음은 놀라운 뭔가 일거라고 여기고, 그러다보니까 뭔가 깨달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내가 얻어야 할 거라는 착각을 가져요. 그러다보니까 깨달음이 우리와 너무 멀리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실제 그런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주 큰 허물이 있는 사람,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어, 저 사람 도인인 거 같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뭐 이렇게 좀 나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든가, 능력을 발휘하는 척을 한다든가, 뭐 아는 척을 한다든지 뭐, 뭐 미래를 맞추는 척을 한다든지 뭐 내지는 뭔가 막 신비감이 있고 온갖 뭐 이런 어떤 그 뭔가 오신통, 육신통이라고 하듯이 그런 신통자재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깨달음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여러분들은 만나기 힘들 겁니다. 만나기 힘들든지 만난다면 100% 이제 사기에 걸려들게 되겠지요. 사기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사람은 다 사기일수밖에 없으니까. 불법은 아까 말했듯이 가장 평범해지는 것이지, 아무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놀라운 뭐, 뭐 신비적인 뭔가를 얻은, 얻고 획득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신비체험이나 뭐 삼매체험 같은 놀라운 기쁜 어떤 체험이 있는 게 다 사기꾼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깨달음과 동시에 일어난다. 아까 말했던 거처럼 병원에 한 10년, 1년 고생했다가 병원을 막 퇴원하는 순간 막, 너무 기쁜 마음이 드는 것처럼, 군대 제대할 때 막 제대하는 날 너무 기쁜 마음이 드는 것처럼, 감옥에서 출소하는 날 막, 엄청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일시적인 해방감, 일시적인 감정적인 어떤, 막 정말 기쁜 이런 어떤 유의 것이지, 그런 감정자체가 깨달음은 아니잖아요? 그 감정은 왔다가는 거지요. 그 감정은 왔다가는 겁니다. 진짜 깨달음은 병원을 나서면서 막 기쁜 그 마음이 진짜 건강이 아니잖아요. 그냥 건강하게 아무 일없이 사는 게 그게 진짜 건강이지.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그 견성의 순간, 어떤 막 너무나도 가볍고 기쁨을 체험하다보니까 그∼놀라운 기쁨?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깨달음이 분명히 여기로 왔는데 그냥 잊어버렸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이 왔는데 어느 순간 놓쳤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경우가 어록 같은데도 되게 많습니다. 깨달음은 분명히 온 거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게 아니었던 가봐.
그때 그게 아니었나? 이제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체험? 체험에서 오는 어떤 황홀감? 이런 것들을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했었다보니까. 그래서 어, 이렇게 깨달음이라는 것은 가장 평범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주장하고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나중에는 깨달음을 너무 환상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 스님들의 어록에 보면 그런 얘기 많이 나와요.
와∼이거 내가 완전 속았구나. 부처한테 속았구나.
내지는 왜 속았다고 생각 하냐면,
깨달음은 너무 위대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할 거라는 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막상 딱 자기 성품을 보니까 그게 아닌,
에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냥 너무나도 평범하고 항상 가지고 있던, 이제 너무나도 그런 것이다 보니까, 이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열반이야 해탈이야 뭐, 뭐, 대자연이 되는 거야. 뭐 우주를 한 입에 삼킬 수가 있고 뭐, 어쩌고 이런 것들은 다 표현일 뿐입니다. 그런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런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는 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아까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냥 건강한것이지. 그냥 평범하게 아무 일없이 사는 것이지. 일없이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지요.
일없이 사는 것이지.
좋게 살거나 나쁘게 사는 거, 전부다 장애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또 이렇게 얘기하면 야, 불교 이거 뭐 아무것도 아닌 건가? 그러면 별거 아닌 건가? 또 이렇게 생각하면 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뭐 굳이 뭐 ‘진공모유’라는 표현도 쓰고 있는데,
본래 공한 거 맞아?
그러나 묘하게 어떤 그∼깨달음이라는 또 뭔가가 또 완전 없다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또 없어, 이러면 또 없다, 라는 데 생각해가지고 불교공부도 안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미끼를 딱,
떡밥을 던지는 거지요. 뭔가 모유가 있기는 있어.
일단 깨달아 봐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머릿속으로 아∼이런 건가?
아, 내가 기존에 생각하든 이런 게 깨달음이 아니면,
이런 거겠구나, 하고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계세요, 지금.
그건 사그리(모두의, 전라도 사투리) 아닙니다.(웃음)
내가, 내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깨달음에 대한 뭔가는, 전혀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머리로 그림 그리면 무조건 어긋나는 거지요.
아까 헤아리면 어긋난다고 했듯이.
헤아리면 그림을 그리면, 그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실답다고 할 것도 없고 헛되다고 할 것도 없고 아무 이름 붙일 게 없고,
그냥 아무 일 없는 건데 거기에 뭐, 이런저런 뭐 붙일 필요가 없지요.
다만, 고통에 허덕였던 사람에게는 정말 실다운 것처럼 느껴지지요, 건강이.
그러나 본래 건강한 사람에게는 뭐 그렇게 느끼건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바다, 전 우주 이 모든 것이, 이 우주 그대로가 부처라는 거지요. 지금 이대로가 이 모든 부처 그냥 이자체가, 일체 모든 것이 그대로 부처다. 일체 모든 것이 그대로 법이다.
‘마음이 뭐가 마음이냐?’
그냥 하나로 그 마음이 아닌 것이 없으니까,
마음 아닌 것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불법은 일체법이 불법이라고 애기하는 게, 일체 모든 존재, 일체법이라는 건 일체법이라는 뭔가 진리가 있나? 이게 아니라 일체법,
법이라는 게 존재라는 뜻이야, 삼라만상.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전부다 법이다.
법에서 어긋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부다 법이다.
어, 생각, 분별심 때문에 부처가 드러나지 않으니까, 분별심은 타파해야 된다, 라고 했잖아요. 분별심은 법이 아니잖아요.
분별심도 법이지요, 분별심도.
분별심은 파도잖아요. 그 파도가 어디서, 바다에서 나왔잖습니까.
분별심 그 자체가 ‘번뇌 즉 보리’ 번뇌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말이지요. 그 생각, 생각의 당처를 본다면, 그 생각의 당처에 법이 있고 진리가 있다.
그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이 말은 불법 아닌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라는 것이지요. 불법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스님들의 일화와 같은 것들을 보면, 정말 그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할까요? 맥락이 없어요, 우리가 느끼기에.
그러니까 이 논리,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깨닫는 거지? 이∼스님은 보니까 뭐 법문 듣다 깨닫고, 저 스님은 보니까 뭐 길을 걷다가 깨닫고, 또 어떤 분은 무슨 얘기 듣고 깨닫고, 또 다른 분은 다른 얘기 듣고 깨닫고, 보다가 깨닫고 듣다가 깨닫고 움직이다가 깨닫고 심지어는 냄새 맡다가 깨닫고 맛보다가도 깨달을 수 있고 뭐 만지다가도 깨달을 수 있고.
언제나~ 왜? 일체법이 다 불법이니까. 일체 모든 순간,
일체 시, 일체 처에 이 부처 아닌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일체 시, 일체 처에 언제나 모든 순간 언제나 부처 아닌 것을 만나볼래야, 만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매순간이 완벽한 부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100%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해오던 습(習)대로, 습(習)대로 분별해서 보는 습관이 있다 보니까 그 분별의 습관을 조복 받는 공부,
공부가 이 법을 공부하는 것이거든요.
분별을 조복받기 위해서 애쓴다고 분별이 조복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은 조복받기 위해서 애쓰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애써서 막, 그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막, 갈고닦고 막 애써가지고 노력해서 관해서 뭐 없애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이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면, 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법이 저절로 드러난단 말이지요. 분별을 다 없애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이 법이 드러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출세간에서 마음을 기울이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보면, 이제 점점 이 세간의 습관에서는 조금, 조금씩 멀어지고 이 출세간의 법에 조금, 조금씩 가까이 오기 시작한단 말이지요.
자꾸 이렇게 꺼달려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스승의 역할이 그거지요.
그냥 자꾸 이쪽으로 오도록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자꾸자꾸 오고오고 오다 점점 더 가까이 오고 가까이 오게 되는, 나도 가까이 오는 줄도 모르고 가까이 온다, 라는 뭔가 좀 이렇게 느낌이 온다고 굳이 표현을 한다면, 어떤 게 가까이 오고 있는 거냐 하면 ‘모르겠구나.’ 할 때.
야, 불법이거 내가 좀 알겠다, 알겠다할 때는 이제 전혀 아직은 아직 이제 걸음마도 안 된 것이고, 아∼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겠구나.
이 바다가 뭐, 뭐 이 온통 일체법이다 불법이라 하고, 바다가 있다고 하고, 이대로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참, 난 죽어도 죽었다 깨어나도 난 모르겠구나.
야~이 내가 갈 길이 아닌 거 같다. 나는 요만큼이라도 기미가 보여야 내가 이 길을 갈 텐데, 나는 요만큼도 모르겠다하면 이제 야, 내가 이제 조금씩 법에 가까이 가고 있구나, 라는 기미가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분별이 죽는 거니까. 내가 안다, 라는 생각이 죽는 거니까.
내가 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거는 중생심이거든요.
알 식자(識), 알 식자(識)가 바로 분별심이예요. ‘아는 마음이 분별심이예요.’ 아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여러분들이 진실이라고 알 수 있는 게 있냐 말이지요. 진실이라고 알 수 있는 게 있느냐. 내가 지금 이것은 진실이라고 느끼고 그걸 위해서 열심히 집착하면서 달려가고 있는데 그게 진짜 진실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게 진짜 나에게 도움을 줄지 알 수 있습니까?
진짜 지금 아픈데 어디가 아픈데 이걸 빨리 낫는 게 진실이야, 라고 진리라고 믿고 이걸 낫는 거에만 온 힘을 기울여서 낫기 위한 애를 쓰는 거,
그게 진리일까요?
어쩌면 이게 낫지 말아야 될 수도 있어요.
한 동안 아파야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동안 아픔을 통해서 앞에서 말했듯이,
한 동안 이 아픈 것을 온전히 흡수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아파주는 삶을 삶으로써,
내가 업장소멸이 탁 되어서 더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더 건강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이 아픔이 있는 것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아픔을 없애야 될게 아니라,
함께 있어야 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픔을 안 좋다, 라는 생각,
분별심이 있으니까 아픔과 자꾸 싸우지요, 건강을 찾기 위해서.
그런데 아픔이 나에게 도움을 줄지 도움을 주지 않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근원에서 지금 벌어지는 게 100% 진리이기 때문에 지금 벌어지는 일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100% 나를 돕기 위해서만 모든 일들이 찾아옵니다.
제법실상으로써.
촉목보리로써.
돈을 벌어야 되는 게 진실이냐? 돈을 벌어야 되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지금 내가 있는 거 있잖아요, 이게 진실입니다, 이게.
내가 지금 얼마를 가지고 있든 이게 진실입니다. 아무리해도 안 벌린다. 이게 진실이라니까요. 더 벌어야지만 정상적으로 행복해지겠지?
이거 허망한 분별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니까 요렇게 해야 돼. 너 내 아들이잖아. 엄마 말대로 해야 돼.
너는 이 대학보다 이 대학 가는 게 좋아.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야, 이거 이 대학이 아니라 저 대학을 가야 이 아이에게 정말 귀인들도 만나고 정말 좋은 사람들 만나서 이 아이가 잘될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남편이 돈을 좀 못 벌어오는 것이 정말 필요한, 나를 일깨우는데 있어서 나의 행복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이었을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고 그걸 향해 나아가지요, 추구하지요. 무언가를 향해서 추구하면서, 그것을 목표로 잡아서 나아가는 모든 일들은, 허망한 착각입니다.
물론 그걸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만이 전부라고 집착하면서 그걸 향해 가지 마시고 다만, 난 그것을 하면 좋으니까, 난 그것이 내 일이니까, 내가 그걸 즐거워하고 재밌어하니까, 난 그걸 하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것보다 이게 나은 거 같으니까, 그걸 위해 열심히는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집착 없이.
저절로 행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머릿속에 저리로 가는 것만이 최선이야 라고 생각을 하면 지금은,
언제나 차선이 되고 지금은,
언제나 버리는 시간이 되고 지금은,
언제나 소중하지 못하게 되어서 가장 중요한 엑기스 중에 엑기스,
부처가 온전히 드러나 있는 이 순간을,
항상 버려지고 다른 순간,
다른 추구하는 순간 미래의 어느 순간,
그 미래의 어느 순간이라는 거자체가 분별이잖아요.
허망한 분별심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미래의 어느 순간을 추구함으로써 분별심에 힘을 주고,
부처를 버려버리는 겁니다.
부처는 언제 드러날까요?
지금 있는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지금 있는 이것이 바로 부처인데,
우리는 이것이 부처라고 생각 안하고 이것보다 더 나아진 어떤 모습, 남들이 나한테 욕 좀 안했으면 좋겠다, 남들이 나 좀 시비 걸지 안했으면 좋겠다, 남들이 나를 좀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내 자식이 좀 더 좋은 대학 갔으면 좋겠다. 이런 온갖 바라고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
그 추구가 사라져야 되는 것이지요. 추구가 사라지지만,
여기서 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고 해서 없애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없애라는 얘기가 아니라 추구하되 추구하는 바가 없는 거예요. 과도한 집착 없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도 좋습니다. 과도한 집착 없이 그것을 하고 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눈부시고 빛나는 순간인지 문제 있는 채로.
이게 핵심입니다.
문제가 없어져야 내가 행복해지는 게 아니고 문제 있는 채로 진리인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문제는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가상의 문제거든요, 진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문제’ 이렇게 낙인찍은 겁니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완벽한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실상인 부처인데.
그러니까 언제나 부처는 망각되는 거예요. 부처는 버려지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버려져요. 다음 순간을 위해서.
내가 추구하는 뭔가가 얻고 획득된 그 순간을 추구하느라 쫒아가느라 바빠서, 지금 여기에 있는 완벽한 부처를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완벽한 행복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허망한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가짜 환상의 즐거움을 쫒느라고 진짜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진짜 중요한 것을 완전히 버리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여래가 얻은바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했다고 했지요. 그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고 지금 이대로 주어져있는,
지금 이 일체 모든 것, 지금 이대로, 이대로의 모든 것, 이것이 다 법입니다. 하∼나 버릴 게 없다. 일체법이 다 법이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병이 왔다? 그것도 불법입니다. 버릴 게 없습니다. 버리려고 애쓰면 진리와 싸우는 거예요. 부처와 싸우는 겁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이잖아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잖아요. 부처님은 뭐가 부처님이냐? 일체법이 불법입니다. 병이 왔다고 해서 그 병과 싸워요. 부처님으로써 온 건데. 바로 그대로 허용해주는 겁니다. 병과 함께 살지 뭐? 같이 삽시다, 하고 아픈 채로 그냥 같이 사는 겁니다. 그랬을 때 더 빨리 나아져요, 이 병도.
왜냐하면 병에 나아야 된다는 에너지를 마∼악 투여하고 나아야 돼, 나아야 돼, 나아야 돼 하고 병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병은 더 오래 지속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먹고 자란단 말이에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 병을 끌어당겨주는 에너지로 작용해요. 마음 내는 대로 이루어지잖아요. 두려워하는 마음대로 이루어진다니까, 두려워한 현실이 벌어진다니까요.
그래서 가장 그 그러니까 불교처럼 간단하고 행복한,
간단하고 공부하기 쉬운 게 없어요. 그 일체법이 다 불법이니까. 지금 이대로가 그대로 일체법이 드러난 순간이잖아요. 나는 내 인생에서 이건 좋고 이건 싫고, 요고, 요고 좋고 요고 싫어 요고 추구하는 바고, 요고는 버리고 싶은 거야. 그것만 없으면 된다는 거야. 좋은 거 좋은 거대로 나쁜 거 나쁜 거대로, 전부다 일체법이니까. 모조리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아∼지금 요 점만 뺐으면 좋겠는데 그 점 있는 대로 불법이다.(웃음) 그 있는 대로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지요. 그것이 나의 매력 포인트일 수도 있고 그게 좀 별로라 할지라도, 피부가 좀 안 좋다 할지라도,
저도 이 피부도 이게 사실은 불치병이거든요, 저도.
버짐이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버짐이 있었다고 그래요. 저의 어머님이 제 얼굴만 보면 항상, 항상 미안하단 말만 맨 날 하시는데, 태어날 때부터 버짐을 타고나서 단 한 번도 버짐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릴 때는 버짐이 너무 심해서 심각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님 맨 날 저만 막∼이 미안해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이러면서 어머님이 저를 뱃속에 가졌을 때 그렇게 못 먹어서 어머님이 그렇게 버짐도 많고 이랬다 그러면서 내가 그때 그∼너무 미안하다, 이러면서 맨 날 그러세요. 그래서 어릴 때나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요, 크림을 덕지덕지 이렇게 막∼아주 세팅을 해야 됐었습니다. 버짐이 너무 많으니까 너무 흉하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인가 야, 이 버짐 있는 채로 그냥 같이 살아야 되겠다. 버짐과 함께 살자.(웃음) 그리고 그냥 안 발라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그처럼 얼굴에, 물론 이제 제가 이 입술은,
이건 같이 살려니까 얘는 너무 아파가지고 안 되겠다.
그래서 제가 입술 바르는 거는 바릅니다, 겨울에.
그런데 뭐 얼굴에, 지금은 뭐 비누칠이며 샴푸며, 뭐 아무것도 안 한지가 꽤 오래됐지요. 그러니 일체 아무것도 안 바르고, 물외에는 제 피부에 아무것도 그냥 대지 않고 사는데 오히려 그 뭐, 그 엄청나던 버짐은 뭐, 물론 자세히 보면 버짐이 있기는 있습니다.(웃음)
그러나 그 정도 버짐은 우리같이 사는 것이고 그 버짐 뭐∼남들을 위해서 이거 좀 발라주는 게 좋지 않겠나, 생각도 있지만 뭐∼그렇게까지 흉하지 않으면 뭐 그냥 살자하는 마음으로 사니까, 오히려 뭐 큰 문제가 없어지고 오히려 이걸 마∼악 어떻게, 어떻게든 없애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좀 힘들었던 거 같은 데, 그냥 내버려두고 같이 사니까 오히려 뭐 상관없어지더라고요, 나름대로.
그래서 하여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취사선택하는 마음, 이게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거, 취사선택하는 마음이 없어야 된다. ‘취하거나 버린다’ 요건 취하고 요건 버리는 것, 이거가 없어야 된다. 분별심이 없으면 취사 간택하는 마음이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간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그게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대로 주어진 ‘내가’ 답입니다. 내가 이 중생을 버리고 저 부처로 가야지 하고 부처를 추구해서 부처로 쫓아가잖아요. 그게 답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이 답이다, 라는 말이에요, 이것이.
지금 이대로가 답이라는 말이지요, 이대로. 어디도 갈 곳이 없다. 지금 이대로가 답인데 이대로 있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래서 이 불교의 공부는 어디로 옮겨가게 해주는 공부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멈춰 서게 하는 공부이지요. 그러나 일체법이라고 하니까 또 일체법에도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이지요. 그게 일체법은 곧 일체법이 아니라 이름이 일체법일 뿐이다, 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몸집이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이 큰 몸일 뿐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법신의 몸은 무량무변한 광대무변한 큰 몸이라고 했잖아요. 법신 부처님, 법신의 몸 즉, 이 우주 삼라만상 이 모든 존재를 그냥 법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법신의 몸, 여러분도 법의 몸이고, 저도 법의 몸이고.
먼지 티끌 하나조차 컵 하나조차 법의 몸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크다고 할 수 있느냐. 크다 작다, 라는 데 가둘 수가 없지요. 모든 것이 이것인데 100%가 이것이면 뭐 1% 2%가 이것 아닌 게 있어야만 이거는 일 프로인 저거에 비해서 이건 크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모두가 이것이니까, 모두가 일체법이니까 그걸 크다 작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법신의 몸이 그와 같다. 진리가 바로 그와 같다. 그래서 큰 몸이라는 비유를 경전에 들었던 것이고요.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347)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구나, 하면 보살이 아니지요. 내가 있고 중생이 있어서 내가 중생들을 멸도에 들게 했다. 벌써 몇 가지 분별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보살이라 할 수 없고요.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해도 한 바가 없는,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요.
해도 한 바가 없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 한다.
왜 해도 한 바가 없을까요?
존재든 존재가 일으키는 행위든 전부다 그냥 일체법, 전부다 하나의 법일 뿐이니까. 하나의 법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것이 뭐 잘했다 못했다 할 것도 없고 부처다 중생이다 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이 진리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집착할 게 없지요. 내가 있고 집착할 대상이 있어야 그걸 집착하잖아요. 그래서 가지려고 하잖아요. 이미 다 구족되어 있는데 뭐 가질 게 뭐가 있어요. 네 거 내거가 따로 없는데 내가 네 거를 내거로 편입시키겠다, 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집착을 없애려고 애써서 애쓰고 애써서 집착을 없애는데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법에만 관심을 두면 돼요.
법을 깨닫고 나면 그냥 저절로 집착이 없어지고 모든 공덕이 한꺼번에 일시에 그냥 저절로 생겨버리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처럼 이렇게 쉽고 간단한 공부가 어디 있습니까?
갈고닦을 필요가 없으니까. 열심히 애쓸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근기 낮은 사람들이 가장 하기 쉬운 공부이지요, 불교는. 거꾸로 우리가 잘못 생각했지요. 불교는 너무 어려워서 근기 높은 사람만 하는 거야. 그거는 수행하는 수행불교에 한정되는 말이에요. 수행불교에서는 수행을 엄청 잘하는 사람이 찬사를 받아요. 그런데 큰스님들 법문 들어보세요. 정말 제대로 깨달은 분들의 법문에서는 수행하는 사람을 정말 미련한 사람이라고 얘기를 해요. 아, 그렇다고 해서 또 수행, 무조건 또 그렇게 한다고 또 말하면 그렇지만.(웃음)
수행에만 과도하게 집착해서 매진하는 거자체가 허울이(실속이 없는 겉모양)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하는 바가 없이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수행을 한다는 게, 방편의 효과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길이 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끊임없이 오로지 그 법에 마음을 두는 것 그래서 대심신, 법에 대한 굳은 믿음 큰의심, 이게 무엇일까요?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요? 이 ‘법’이 무엇일까? 하는 이 궁금함. 그 대분심 이거 난 안되지. 나는 모르겠지. 나는 정말 간절히 알고 싶다, 하는 이 분심.
이게 다 마음이잖아요, 마음.
깨달음은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이지, 뭐 몸으로 갈고닦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하고 일체법에는 뭐 당연히 일체법에는 아, 인, 중생, 수자가 없지요. 일체법, 일체 모든 것이 전부다 법이고 진리이니까 거기 나다 너다 이런 분별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마땅히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보살이 아니지요. 보살이 장엄할 불국토가 있겠습니까? 보살이 되자마자 곧장 온 우주가 그대로 완벽하게 장엄이 된 불국토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데 더 이상 불국토로 만들게 없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데, 하나도 손댈 게 없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니까. 그래서 장엄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349)
무아의 법에 통달하는 사람이 진정한 보살이다.
무아, 내가 없는 법. 내가 없다. ‘나’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내세우면 상대가 생기게 되고 분별이 생기게 되고 만 가지 분별에,
처음에 ‘나다’라는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다’라는 분별. 무아법에 통달하는 것이 바로 불법의 핵심이다, 라고 얘기하는 게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초기불교의 핵심을 무아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나’라는 것이 놓여 지면 ‘나’라는 가장 근본적인 분별이 놓여 지면, 일체의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은 18분 일체동관분이고요. 일체를 하나로 관한다, 라는 어∼둘로 나누지 않고 일체 모든 것을 오로지 하나라고 관한다는 겁니다.
하나로 관한다. 일체동관분,
일체 모든 삼라만상이 낱낱이 떨어진 것이라고 분별해서 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로 본다는 얘기지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p354)
여래에게는 물론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안이 그대로 활동을 해요.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안목, 혜안과 법안과 불안이 있으니까. 아, 육안은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육안이 할 도리는 하는 것이지요.
사법계, 현실세계는 현실세계만의 법칙, 그대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슬픈걸 보면 그 자리에서 펑펑 울 수 있지요, 같이.
그런다고 해서 또 부처님이 됐을 때 이 세상에 가난하게 힘들게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계속 울고만 있지는 않는 것이지요.
눈앞에 즉한 한 순간에, 그 앞에 눈물 흘릴만한 슬픈 일이 있으면 펑펑 울겠지만 착 돌아서면 이미 그것은 또 전생의 일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냥 그것은 또 사라져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육체의 눈이나 혹은 이 육체의 몸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막 신통자재하게 여기서 몸을 짠하면 바로 저 부산으로 가 있고, 이렇게 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뭐 길을 가다가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그러면 코가 깨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도, 부처님도 썩은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날 수가 있는 것이고요.
생노병사,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거 똑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도 한 바가 없다. 늙어도 늙는 바가 없고 죽어도 죽는 바가 없다, 라는 사실에 눈 뜨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래에게도 육안이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그런데,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p354)
천상세계의 눈을 얘기해요. 천상세계 신들의 눈, 시간과 공간적으로 좀 걸림 없는 눈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 천안통이 열렸다, 이러면 뭐 어디든 다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어, 이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외도의 천안통입니다.
여러분, 깨달음을 얻은 분이 여기 딱 앉아가지고 이벽 뒤를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보지요. 벽 때문에 어떻게 봐요. 벽대서 여러분이 보자기를 내는지 가위를 내는지 알아맞힐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딱 왔는데 여러분 마음을, 여러분이 고민 있는 걸 가지고 부처님을 상담하러 왔어요. 부처님이 부처님이니까, 내가 얘기 안 해도 입 벌려 얘기 안 해도, 내 고민을 알고 알아서 답을 줄까요? 안 그렇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지요. 전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런 신통 자재한 걸 행하는 분이 아니고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일 없는 사람.
마음속에 번뇌 망상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입니다. 번뇌 망상이 완전히 사라져서 자내증의 경지. 자내증,
자기 내면에서, 자기 내면에서 완전히 문제가 사라진 거지, 겉으로 보았을 때,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그대로 있어요. 우리랑 똑같아요. 밥 안 먹으면 배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똑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들이 보기에는 모른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가장 평범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동안,
불교계에서 너무 환상적으로 막 묘사를 해놓다 보니까, 불교는 우리와 너무 거리가 멀고 깨달음은 우리와 너무 거리가 멀다, 라고 우리가 벽을 치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벽을 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천안, 천안은 뭐 이 천상세계 신들의 눈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뭐 천안이 있습니까? 뭐 부처님이 여래에게도 천안이 있다. 뭐 이 모든, 그 모든 존재들의 가진 눈은 뭐 다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뭐랄까.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어떤 신통 자재한 어떤 이런 것들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세계 신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안목은 뭘까요? 천상세계 신들도 아직 어리석은 중생이거든요. 이 불교에서 이제 경전에 보면 어∼어? 스님 그런데 경전에 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다양한 신통을 행하던데요? 그 모든 경전에서 나오는 신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통하고 조금 다릅니다. 언뜻 보면 비슷한 거 같은데, 다른 게 뭐가 다르냐면 온 우주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차원에서 신통을 얘기를 해요.
그 큰스님들이 그러거든요. 저 깨달음이 무엇인지. 도가 뭡니까? 물어보면 저 한강의 물을 한 모금에 다 먹고 오면 알려주겠다. 실제 한 모금에 한번 먹고 오라는 얘기가 아니고 한강에 있는 모든 물과 내가 둘이 아니잖아요. 그냥 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거 내가 다르지 않다, 라는 얘기예요.
유마거사의 방, 조그만 방, 요~ 얼마 안 되는 방 안에 천상세계의 신들이 수백 수천만 명이 모여가지고 그것도 막 환한 의자에 넉넉하게 앉아가지고도 텅, 자리가 남아요. 그 조그만 한 자 밖에 안 되는 방안에, 그 얘기가 진짜 유마의 방은, 유마가 신통력을 부려가지고 요만한 방을 막 이렇게 만든다, 라는 그런 얘기가 아니고, 아니고 우주 전부와 요 티끌과 다르지 않다, 라는 소리입니다. 일즉일체다즉일, 이라는 소리를 그런 식으로 표현, 방편을 써서 표현을 한 거예요. 진짜 여기 안에다가 막 그걸 다 집어넣겠다, 라는 얘기가 아니고, 이것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신통은요, 이 자리에 온 우주 전체 다. 간단히 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법을. 진리를 드러내는, 법을 드러내는 얘기를 그러한 신통인 것처럼 방편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지. 문자 그대로 그게 진실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존재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소리에요. 천상세계 신들과 부처가 둘이 아닌 하나고 중생과 둘이 아닌 하나고 부처는 지옥에도 간다, 그러고.
유마경 같은 데는요, 심지어 무슨 얘기까지 있냐면 온갖 악행에 대한 악행이라고는 다 얘기 해놓으면서 그걸 하지 않으면 부처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지옥에 가서 지옥 사람들같이 똑같이 그렇게 지옥행, 악행을 하지 않으면 부처가 아니다. 심지어는요, 그 뭐라 그러지요. 그 창녀촌에 가서 뭐, 뭐, 그 뭐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부처가 아니다. 심지어 이런 표현도 있어요. 그 얘기가 뭐냐 하면 그 얘기를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이 유마경이라는 경전은요, 대승경전 중에도 상당히 뭐랄까 이게, 차원이 높은 법을 설하고 있다 보니까, 아무나 그걸 보면 좀 이해를 못해요.
그 얘기가 진짜 그렇단 얘기가 아니라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악이랄 게 없다는 소리예요. 부처는 최악의 악행을 하는 순간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라는 소리예요. 악행과 선행이 차별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지옥과 이 자리가 하나기 때문에 지옥 속에 있어도 지옥 속이나 지옥 사람들과 함께 지옥의 악행을 하고 있더라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둘이 아닌, 그 어떤 일체 차별도 없다는 소리이지, 그게 진짜 악행을 해라. 악행을 해야지만 부처다. 이게 아닙니다. 악행을 하나, 선행을 하나,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 분별을 완전히 여의였다는 소리이지요. 그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세계나 부처나 다르지 않고 천상세계나 부처가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천상세계 신들이나 부처가 다르지 않으니까 천안이, 천안을, 천안은 천상세계 신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부처에게도 있다. 이렇게 표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혜안과 법안에 대해서 똑같은 질문이 나오는데요. 이건 혜안은, 그 우리 불교에서는, 이 부파불교 소승불교라고 폄하를 하지만 그 성문승과 연각승, 보살승이라고 이렇게 대승불교에서 나눕니다. 그래서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이고, 보살승은 대승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성문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승에서 소승을 폄하하느라고 하는 얘기이지, 그 잘못됐다, 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일 뿐이지.
성문승은 성문, 법문을 듣는다는 소리에요. 법문을 듣고 곧장 깨닫는다. 이게 초기불교 부처님당시에는 다 법문 듣고 깨달았거든요. 그 다 법문 듣고 깨닫는다, 라는 표현을 쓴 거예요, 성문승이.
그리고 법문 듣고 깨달으면 바로, 이 고해바다를 건너서 승(乘) 탈 승자, 타고 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소리에요. 그리고 연각승은 스스로, 홀로 깨닫는 독각이라고도 불러요. 부처님을 의지해야만 깨닫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간절하게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 있다든지 아니면 깨달음에 대한 얘기가 없어도요,
상해, 유명한 지금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이 많은 이유가 깨달음은 우리가 쓰는 용어잖아요.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는 발심이 없어도 깨달을 수 있어요. 왜 가능할까요?
깨달음은 이름이 깨달음이지 진짜 깨달음이 아니에요.
깨달음의 실체는 뭡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게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사성제잖아요. 사성제가 불교잖아요.
사성제는 뭐냐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불교도 모르는데 어떻게 깨달았지? 그 말이 됩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요. 당연히 가능하지요. 왜? 그 서양에서 깨달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고통의 끝까지 갔던 거예요. 고통의 최악 극단까지 갔던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고통의 최악까지 갔다가 완전히 놔버린 거예요. 나를 완전히 놔버렸습니다. 그 순간 탁, 깨달음이 온 겁니다. 고통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막 간절히 하고, 하고 하다가 내가 고통을,
도저히 이것도 안 되는구나, 하고 탁 놔버렸을 때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것이지요. 그게 사성제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사성제통이 깨달은 거예요.
불교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 혼자 깨달을 수도 있어요, 독각처럼.
이렇게 성문승과 연각승을 어, 불교에서는 어~ 성문승과 연각승의 견해, 눈, 그것을 혜안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비해서 대승의 보살들은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타적인 대중을 일체 대중을 깨닫게 만드는 것을 통해 나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드는 것을 통해서 내가 깨달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대승이라고 하고 모두가 함께 가는 공부의 길이다, 라고 얘기를 하지요. 그래서 대승의 길에 한 보살 대승보살의, 수행자가 가진 안목을 법안이라고 부릅니다, 법안.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의 안목을 불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게 이렇게 차별적으로 얘기는 했지만 혜안, 법안, 불안은 어~ 엄밀히 따지면 뭐 분별되는 세계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중생들이 성문, 연각, 보살에만 분별을 하니까 그러한 것에 응해서 이렇게 설명을 해준 것에 불과하지요,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말씀 마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박수)
(제 17,18분 일체동관분, 일체를 하나로 관하라, 1시간42분까지 녹취)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읽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오잉?
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하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