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심경, 경전 제목 이 몇 글자는 전체 대장경의 교법을 포괄할 수 있다. 만약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다.
般若波羅密多心經, 經題這幾個字, 可包括一大藏教. 若能明得, 即明得大教.
이 몇 마디 말씀은 중요합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경의 제목 몇 글자가(몇 글자 안 됩니다), 일대장교(一大藏教: 석가모니불이 설한 경률론 삼장의 교법, 즉 전체 불교의 교설―역주)를 포괄합니다. 반야부 경전 6백 권만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일대시교(一代時敎: 석가모니불이 성도에서부터 열반하기까지 일생에 걸쳐 설한 교법―역주) 전부를 포괄하여 넣습니다.
“약능명득(若能明得)”, 이 경의 제목을 깨달을 수 있다면 당신은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大敎]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투탈한[透脫] 사람이 아니고서는, 교법에 따라 실제 수행증득을 통해서 종지에 통달한[宗通]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해낼 수 없습니다. 당신이 문자로부터 연구하여 최후에 최고봉에 오른다면 한낱 불교학자 노릇을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수승한 말씀이기 때문에, 다음에서 하 선생님이 경의 제목은 중시하여 강의하지만, 경문은 별로 강의하지 않은 것도 큰 특징입니다.
이 특징은 저에게 옛날의 양무제(梁武帝)를 생각나게 합니다. 양무제는 당시 지공(誌公) 화상을 청하였는데, 지공 화상은 대신통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신통변화[神變]가 불가사의했습니다. 양무제는 그의 신통변화 때문에 말하기를 “그는 요사스러운 사람이다.” 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그대로 나왔고 여전히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공덕을 행하였습니다. 양무제가 그를 가두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를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나중에 양무제가 지공 화상에게 반야심경을 강의해 달라 청하자, 지공 화상은 말하기를 “나는 강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 안에 강의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누구입니까?부대사(傅大士)가 강의할 수 있습니다.부대사는 거사였습니다. 양무제가 부대사를 청해 왔습니다. 부대사는 법좌에 올라 자[尺]를 하나 들어서 한번 휘두르고는 법좌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공 화상이 말했습니다,대사강경경(大士講經竟)”, 대사가 경전 강의를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양무제는 달마대사를 만나 보기 전에 부대사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모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양무제는 그 자신이 경전 강의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정도로 잘했지만, 그는 이런 대덕(大德)들을 여전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 선생님도 요즘 선생님들이 국어를 한 구절 한 글자마다 일일이 강의하듯이 그렇게 강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되돌아보며, 사족(蛇足)을 달듯이 그분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다음에서 강술하기를 반야는 체(體)라고 말합니다. 반야바라밀경을 강의하기 때문에, 반야는 이 경의 본체입니다. 본체는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먼저 원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헷갈리게 됩니다.
반야는 체(體)이고 바라밀은 용(用)이다. 만약 바라밀이 아니면 반야를 어디에 쓰겠는가?
般若是體, 波羅密是用. 若非波羅密, 則般若何用.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반야’는 체입니다. 체(體)는 반드시 용을(用) 일으켜야 하고 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바라밀이 바로 ‘용’입니다. ‘바라밀’을 번역하면 ‘피안도(彼岸到)’입니다. 외국의 문법은 중국 문법과는 늘 거꾸로입니다. 우리는 ‘도피안’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피안도’로서, ‘저 언덕에 도달하다.’입니다. 만약 반야가 ‘바라밀’,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 언덕으로부터 번뇌를 건너 지나서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반야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다음에 해석이 있습니다. 하 선생님이 말합니다.
반야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문자반야⋅둘째 관조반야⋅셋째 실상반야이다. 바라밀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및 반야이다.
般若有三:一文字般若、二观照般若、三实相般若. ”所以有三般若, 波罗蜜有六, 曰:布施、持戒、忍辱、精进、禅定及般若.
반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문자반야(文字般若), 둘째는 관조반야(觀照般若), 셋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입니다. 그래서 3반야가 있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라밀에는 여섯 개가 있습니다. 만행(萬行)을 이 여섯으로 귀납하였지만, 실제로는 한량없는 행이며 수승한 수행입니다. 이 6개의 바라밀은 바로 보시(布施)⋅지계(持戒)⋅정진(精進)⋅인욕(忍辱)⋅선정(禪定)⋅반야(般若)입니다. 이어서 다시 원문을 읽겠습니다.
반야는 수승하고 미묘한 지혜라고 번역하고,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으며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을 자성⋅진여⋅보리⋅원각⋅방편이라 하여도 모두 좋다. 반야의 배를 타야 비로소 생사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般若譯爲勝妙智慧, 人人本有, 不從外來, 名爲自性、真如、菩提、圓覺、方便均可. 乘般若船才能度生死海.
이 단락에서는 3반야와 6바라밀을 말했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에서 머리 두 글자가 “반야”인데, 이에는 문자반야⋅관조반야⋅실상반야가 있습니다. “바라밀”에는 여섯 가지가 있어 저 언덕에 도달합니다. (계율을 지켜야 하는) 지계⋅(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보시⋅정진⋅인욕⋅선정 게다가 반야를 더한 것이 6도(六度)입니다.
반야는 무슨 뜻일까요? 과거에, 그 뜻이 매우 많아 중국의 언어는 이를 잘 표현할 수 없어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반야는 번역어가 없고 음만 있습니다. 음은 당시의 발음으로 읽어야 하지, ‘빤루어(班弱:bānruò)’으로 읽으면 틀립니다. 般若는 ‘뽀러(bōrě)’로 읽습니다. 예컨대 절을 일컫는 말인 蘭若(난야)도 이 若 자인데, 옛날에는 ‘러’로 읽었습니다. 반야를 번역하고자 하면 ‘승묘지혜(勝妙智慧)’로 번역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번역하기를, 흔히들 우리 자신이 체험한 지혜와 뒤섞어 동일시하는데, 그건 큰 잘못입니다. 또한 범부의 작은 총명으로 시비를 변론한다는 뜻인 세지변총(世智辯聰)을 반야와 동일시해버리면, 그건 더더욱 얼마나 틀린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런 세지변총은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입니다. 대단히 나쁜 일입니다. 세지변총을 가진 사람과 정신병자가 불법을 배우기 곤란함은 같은 정도입니다. 그래서 팔난(八難)이라고 일컫습니다.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시각장애인, 정신병, 게다가 세지변총, 이 모두는 팔난에 속합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불법을 말해도 들리지 않고, 언어장애인은 질문을 하거나 말을 할 수 없으며, 시각장애인은 경전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정신병은 정신 착란이 일어나는데, 이런 것들은 세지변총과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전혀 그러한 일이 아닙니다. 반야를 승묘반야(勝妙般若)라고 굳이 번역할 수 있으며, 수승하고 미묘한 지혜가 반야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내용입니다. 반야는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식과 견문이 매우 넓으면[博學多聞], 자신에게 반야가 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딱 완전히 틀렸습니다. 반야는 본래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들어오거나 얻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종에서 말하기를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 안의 보배가 아니다 [從門入者, 不是家珍].”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문일까요? 눈과 귀가 문인데, 여기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당신 집안의 보배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본래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반야인데, 이것은 어떠한 다른 종교에도 어떠한 학술계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반야는 그 이름을 자성이나, 진여나 보리라고 해도 되고, 원각이나 방편이라고 해도 모두 좋습니다. 당신이 반야의 배를 타야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갈 수 있습니다. 생사는 큰 바다와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해야 큰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수승한 반야가 있고 배를 타야 비로소 이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의 뜻은 바로 방금 말한 ‘도피안’입니다. 제가 하 선생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설명하고 구분하겠습니다. 이것은 원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