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 언니
이 규 석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 천경자의 그림, 장미꽃 화관을 쓴 ‘길례언니’를 만났다. 모습은 화려했지만 눈빛이 너무 애절해 보였다.
오월의 교회는 마냥 즐거웠다. 신도들은 여기가 곧 천국이라고 좋아했는데, 교회 담벼락을 따라 곱게 핀 장미 때문이었다. 목사관 앞 양지바른 곳에 핀 노란 장미는 유난히 곱고 향기로워서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미꽃만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시사철 사람들을 몰려들게 만드는 장미향이 나는 소녀도 있었다. 꽃보다 고운 피부에 크고 하얀 눈망울을 가진 그녀가 해맑게 웃으면 천사가 되었다. 신도들이 목사님은 혹 지옥에 떨어질지 몰라도 그녀는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성탄절 새벽에 구급차에 실려 가고 말았다.
그녀는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그해 성탄절은 특별히 신이 났었다. 학생회 간부만으로도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성탄 전야를 흥겨운 축제로 꾸며주었고, 자정을 넘겨서는 신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새벽송으로 예수 탄생의 기쁨을 거룩하게, 때로는 우렁차게 노래 불렀다.
집집마다 챙겨준 온갖 먹을거리들로 자루는 탱탱해졌고 여러 구역으로 파견된 팀들이 순례를 끝내고 모두 교회로 돌아왔다. 드디어 풍성한 잔치를 벌여야 할 순간, 교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쏜살같이 사무실로 달려갔지만 남학생은 들어가지 못한다며 막았다. 그녀가 실신했단다. 피곤해서 쉬어야겠다는 데도 기어이 새벽송을 돌게 했으니, 그 새벽 날씨만큼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젠 누가 화합의 종을 울려야 하나? 예배시간에 스님이 들아 와 목탁을 두드리는 난장판이 벌어졌어도 그녀는 그의 등을 토닥여 소리 없이 돌려보냈다.
교회운영을 둘러 싼 갑론을박을 ‘아이들 앞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면서 단숨에 잠재웠고, 신도들이 벌이는 대립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들을 그녀는 메아리 같은 화음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어린 나이에 어찌 그리 사람들을 시원시원하게 잘 다루는지, 모두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고 입을 모았다. 열다섯 명으로 출발한 학생회는 이태 만에 백 삼십 명이 넘는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비쩍 마른 남학생 회장은 장승처럼 서 있었을 뿐, 그녀의 향기로운 친화력이 학생회는 물론 온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었다. 그야말로 축복덩어리였다.
그렇다고 늘 거룩한 것만도 아니었다. 때로는 남학생들이 짓궂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치면 여름 첫물의 신 홍옥을 씹듯, 윙크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풋풋한 소녀이기도 했다. 싱그러운 그녀를 뉘 좋아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이른 장마에 크고 곱던 장미꽃잎이 뚝뚝 떨어지는 날에 그녀는 마치 즐거운 휴가라도 다녀 온 사람처럼 방실방실 웃으며 돌아왔다. 하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흰 피부는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심상찮은 그녀가 목사관 앞에서 두툼한 편지뭉치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송두리째 오려진 단편소설도 한편 들어있었다. 자신이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간질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머리는 벼락 맞은 듯 빙빙 돌았고, 심장은 고장 난 엔진처럼 쿵쾅거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손이 덜덜 떨렸다. 수술을 한다면 살아나올 확률이 반이요, 설사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후유증 없이 완쾌될 경우와 반신불수가 될 비율 또한 반반이라 했으니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반의반에 불과했다.
그녀는 수술을 받을지, 말지를 묻고 있었다. ‘오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죄인이 많기도 한데 하필 이 착한 천사에게 고약한 형벌을 내리십니까?’ 교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 지르고 온몸의 솜털까지 벌떡벌떡 일으켜 세워가며 앙탈을 부려도 응답은 없었다.
꽃잎 위에 이슬이 내리는 시간, 소녀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아니야,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넌 천사야,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이겠지.’ 얼뜨기 회장은 속으로 우물거리기만 했지, 어떤 선택의 말도 건네지 못 했다.
당장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까 두려워 그녀의 손도 잡아주지 못 했다. 그러고도, 난 곧 열리게 될 신기루 같은 천국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맹추는 비감에 젖어 돌만 걷어차다가 세월은 흘러 대학생이 되고, 군인도 되고 그렇게 영영 교회를 떠나왔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긴 세월이 흘렀건만, ‘길례언니’처럼 장미꽃 향기를 풍기던 소녀는 아직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첫댓글 아픈 추억을 소환해주셨군요.
'내 마음은 호수요'에서 처럼 덕수궁미술관에 걸려있던 그림 '길례언니'는 추억 속의 여학생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녀의 쾌유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