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 주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집에서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얻는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불확실한 시간일 뿐이지만, 지금 경험하는 이 시간은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과거에 만난 사람은 이미 떠나갔고, 미래에 만날 사람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지금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묵시 문학적 방법으로 ‘세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묵시(黙示)문학은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퍼져있던 사고방식 또는 표현방식을 총괄하여 가리키는 개념입니다(대표적인 성경 작품으로는 구약성경에서는 다니엘서, 신약성경에서는 요한묵시록, 그리고 외경에는 에녹서). 많은 사람들은 묵시 또는 계시(apocalypsis)라는 단어를 들으면 즉시 세상 종말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무시무시한 재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묵시문학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어둠 속에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구약성경의 이사 13,10; 34,4; 다니 7,13-14의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라는 말은, 세상 마지막 날이 오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주 전체가 새롭게 변화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3)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6)
세상 종말의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현시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천상적이고 신적인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ㄱ)
지중해성 기후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여겨졌습니다(포도와 올리브도). 이러한 의미에서 에덴 동산과 430년 동안 이집트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 사건,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40년 동안의 광야 여정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의 정복 시기, 솔로몬 임금의 통치 시기, 시몬 마카베오의 성전 재탈환과 다가올 메시아 시대 등 이스라엘의 영광이 빛나던 시대는 모두 무화과나무가 번성했거나 번성할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1열왕 5,5; 미카 4,4; 즈카 3,10).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고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축복해주는 모습으로(요엘 2,22; 하까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여겨졌습니다(예레 5,7; 8,13; 호세 2,14; 아모 4,9; 요엘 1,7.12).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28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모스서 7장에서 9장에 언급된 아모스 예언자가 본 다섯 가지 환시 가운데 네 번째 환시인 여름 과일 한 바구니와 연결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여름 과일 한 바구니였다. 그분께서 ‘아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여름 과일 한 바구니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종말이 다가왔다.”(아모 8,1-2)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여름’이라는 말 ‘카이츠’는 ‘끝’, ‘최후’, ‘종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케츠’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이를 통해 아모스 예언자는 ‘여름’을 ‘최후의 심판’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르 13,33.35-36 참조).
요즘은 많은 이들이 ‘잘 사는 것’, 곧 ‘well-being’보다도 ‘잘 죽음을 맞이하는 것, 곧 선종’(善終), ‘well-dying’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종의 의미를 ‘9988234’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4일만에 생을 마감’함으로써 자신도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고 자녀들에게도 아무런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선종(善終)은 ‘착하게 살고 복되게 생을 마친다.’는 뜻을 지닌 ‘선생복종’(善生福終)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임종(臨終) 때에 병자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상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룸으로써 복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선종(善終)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