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경남 김해에서 발간되는 경상신문 2007년 9월 17일자 <경상 칼럼>에 실린 박성환 회원의 글입니다.
♧♧♧
유아기의 언어와 사회적 소양의 기본
박성환 교수 (부산외대 명예교수. 영문학)
시민의식에 사회적 소양의 기본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기본소양은 유아기(幼兒期) 때부터 습득되기 시작하여 성장단계에 따라 성숙해 간다. 그러한 단계를 구별 지워 주는 것 중의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필수적으로 익히게 되는 언어에서부터 나타난다. 이를테면 유아기는 대소변과 밥을 ‘쉬’ ‘응가’ ‘맘마’라 하고, 좀 자라면 ‘오줌’ ‘똥’ ‘밥’이라는 말을 쓰다가, 더 성장하면 ‘소변’ ‘대변’ ‘식사’ 등의 말로 바뀐다.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는 성장의 단계에 따라 차츰 성인이 쓰는 언어로 바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는 어미의 젖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인지 이빨이 나지 않다가 음식을 씹을 때가 되면 젖니가 난다. 이윽고 여문 음식도 씹을 나이에 이르면 영구치가 난다.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언어도 성숙되고 삶에 대한 학습도 이루어진다. 사회생활에 요구되는 금기(禁忌)사항을 깨닫게 되고 자제력이 생기며, 차츰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사회생활의 기본소양과 덕목을 습득해간다. 다 커서도 유아어인 ‘쉬’나 ‘맘마’라는 말을 계속 쓴다면 나이 값을 못한다고 철부지 취급을 받을 것이다.
‘엄마’라는 말은 유아기 때 ‘짖지(젖)’나 ‘맘마(밥)’를 주며 늘 가슴에 품어주는 ‘어머니’가 유아의 방식으로 쉽게 발언되는 친근한 말이다. 유아기의 일상어 중에서 ‘엄마’라는 말은 유아와 어린이의 입에서 유난히 오래 성인언어로 바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엄마’란 말을 성인언어인 ‘어머니’란 말로 바꾸기가 만만하지가 않아 그냥 그대로 쉽게 ‘엄마’라 부르며 지내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엄마’라고 불렀다. 그런데 입학 날 모친께서 나를 불러 앉혀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오늘부터는 나를 더 이상 ‘엄마’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라”고 타이르셨다. 그러나 ‘어머니’란 말이 어찌 그리 입에 담아지지 않던지! ‘어머니’란 말의 발언이 영 어색하여, ‘어무이’란 경상도말로 얼버무리게 되던 것이었다. ‘엄마’ 대신에 ‘어머니’란 말을 쓰니까 자연스럽게 공대말이 나왔다. “엄마, 밥 도(다오).”라는 말 대신 “어머니, 밥 주세요.”란 바른 문장이 나왔다. 모친께서는 내 나이에 걸맞게 바른 언어를 쓰도록 가르치신 것이리라. TV 등 대중 앞의 공석상에서 하는 대화 중에 ‘어머니’란 말보다 ‘엄마’란 말을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광경을 많이 본다. “엄마께서....하셨다”란 말을 쓰는데, “어머니께서....하셨다”란 말이라야 어법에 맞는 세련된 표현일 게다. “엄마께서....하셨다”는 어딘가 어긋난 것 같지 않은가? 주어는 유아용 언어로 쓰고 조사와 술어는 성인용 공대말을 갖다 붙였으니, 마치 어른이 어린이용 세발자전거 탄 모습 같아 어색한 느낌이 든다.
심리학자 캠벨(Cambel)은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오래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면서 엄마의 품안에서 유아기를 보낸다. 엄마의 젖가슴은 필요한 영양분과 안온한 쾌락을 제공해주는 자궁과 같은 상태로 재현된 지상 낙원이다”라 하여 유아기는 쾌락원칙이 재배하는 시기라 하였다. 유아어인 ‘엄마’란 말은 무한한 친근감과 애정이 깃들어 있어서, ‘어머니’란 말 보다 쉽게 나온다. 유아기의 쾌락원칙에 매달리는 경향은 자칫 오래 간다. 그러나 타고 온 뗏목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마냥 뗏목에 주저앉아있다면 건너편에는 언제 내려 다음 길을 갈 것인가. ‘엄마’란 말에는 물정 모르고 응석부리는 모습이 비쳐, ‘어머니’란 말보다 존경심이나 경애심은 옅어 보인다. 성인이 다 된 사람이 대중 앞에서 유아의 언어를 그침 없이 쓴다는 것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경애심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사적인 자리와는 달리 공석상이나 대중 앞일 경우에는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인 애정보다는 성인으로서의 경애심에 더 비중을 두고 진술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대중음식점 등에 젊은 부부가 데리고 온 아이가 하나만 있어도 그 자리는 난장판이 된다. 아이의 부모는 녀석의 분탕질을 잡도리하지 않는다. 혹 누가 주의라도 줄라치면 험악한 눈길을 짓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남을 배려하거나 자제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씨 하나부터 바르게 교육시켜 유아기의 쾌락원칙에서 독립시키려는 앞 세대의 부모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분들은 교육받은 바가 없어도 자녀교육의 기본은 스스로 알고 계셨다. 지금세대는 중등이상의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사회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유아기증상(infantilism)으로 인한 유치함과 천박함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저질스러운 하위문화가 범람한다. 이는 유아기언어를 성인언어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에서 훈육을 제대로 못 받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제심부족으로 쾌락원칙에 지배받아 사회적소양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 대한 관계와 책임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다. 사회의 안전판은 타인을 배려(똘레랑스: tolerance)하는 자제심이 실린 의식과 도덕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성숙한 사회생활의 기본이 갖추어질 때 확보될 것이다. 둑이 높은 강이 범람하지 않듯이 기본이 되어있으면 자제력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는 안정이 도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