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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10강
말씀/ 잠언 20:1-30절
요절/ 잠언 20:1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화요일 밤 스텝수양회 참석 중 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계엄인데 잘 있어?’ 순간 ‘우리는 비상계엄이라는 영화 보고 있는데, 아빠는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임을 알고 너무 놀라 “이런 미친!!!”이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독재 시대를 겪었던 이들에게 계엄은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문민정부가 시작된 지 30여년도 더 지나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2024년에 다시 계엄선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계엄 선포는 대통령을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불과 6시간으로 끝난 해프닝같은 사건은 가장 높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가장 부끄러운 반란 수괴로 추락시켰습니다. ‘도대체 왜 했지?’ 수많은 분석이 쏟아집니다. ‘야당에 대한 경고였다. 특검 표결을 앞두고 아내를 지키려는 사랑의 몸부림이었다’는 해석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신 계엄 같은 영구집권 노림수였다’라는 분석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으로 해석하면, 권력에 미혹되어 지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포도주가 사람을 거만하게 만드는 것처럼, 권력 또한 사람을 거만하게 합니다. 독주에 취하면 말실수로 사고를 치는 것처럼, 권력에 취하여 내리지 말아야 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권력의 맛으로부터 오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대통령이 되지 않은 것이 차라리 좋았을 것입니다. 출신고등학교 교장은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을 자랑스런 동문이 아닌 부끄러운 동문으로 벌써 끌어내렸습니다. 그를 도왔던 주변 사람들까지 잠못 이루는 밤을 보내게 만들고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력을 마비시켜 잘못된 것을 좋게 보도록 미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포도주와 독주를 왜 마실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여행이 인기인데, 엔저 효과로 술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을 여러 이유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십만원하는 고급 위스키를 20%이상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에도 안 좋은 것을 왜 비싼 돈을 쓰면서 먹을까요? 사람을 거만하게 올려주고 떠들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힘든 세상이 하나도 안 무서워집니다. 소리 지르고 소란피울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착하고 소심하게 살았습니다. 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내적 고통을 떠안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술이 너무 좋았다고 했습니다. 술 마실 때만큼은 담대해져서 평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구마구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길가에 있는 간판도 발로 빵 걷어찰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술 취함이 늘어가다가 어느 날에는 쓰레기 더미에서 자다가 눈을 뜨기도 했습니다. 술이 몸과 마음을 그렇게 망가뜨려 가는데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미혹된 것입니다. ‘미혹?’하면 이단이 떠오릅니다. 미혹이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옳은 길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가 담대함과 자유를 주는 것 같으나 실은 정반대의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술을 의지하지 않으면 담대히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라는 누구의 소감 제목처럼 술이 안식과 도피처가 되고 지겨운 삶을 버티게 합니다.
포도주와 독주처럼 세상의 스트레스를 잊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임에 빠지고 도박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염려와 불안, 불확실한 미래와 무의미와 권태움, 그것들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잠시가 지나고 나면 더 큰 후폭풍이 몰려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는 모습, 그것이 미혹입니다. 병든 사회일수록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배고플 때 부르짖는데, 그런 사자를 만나는 것은 초식동물에게 재앙입니다. 왕의 진노가 그와 같이 무섭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로부터 힘을 얻어 거만하게 떠드는 자들은 왕의 진노와 같은 치명적인 위기를 불러옵니다. 말 실수로 치명적인 관계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술 김에 다투고 사고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고 인기의 정점을 찍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딸이라도, 고위 관료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음주운전이나 음주폭력으로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술을 마시면 자주 따라오는 것이 다툼입니다. ‘우리 솔직해지자’며 할 말 못할 말, 다 꺼내었다가 감정이 상하여 다툼으로 치닫습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수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련한 자입니다. 시작부터 물리쳐야 합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름은 술취한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옵니다. 어릴 적 시골마을에서 날마다 술 취하여 살아가는 동네 아저씨들이 흔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자식 먹이려고 품 팔아 돈을 벌어오면, 그것으로 취하도록 마시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이해 되지 않았습니다. ‘왜 저렇게 살지?’ 현실을 직시하고 밭 갈며 개척하는 것은 살 떨리는 두려운 일입니다. 반면 술에 취하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 정말 기분 좋은 시간입니다. 그렇게 현실과 술 취함을 오가면, 점점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게으름에 몰입합니다. 술 취함으로 십자가를 잊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니 쌓여가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고 또다시 술취함으로 이어지는 게으름의 반복입니다. 그렇게 게으른 자들은 추수기에 구걸할지라도 긍휼을 얻지 못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모략은 계획 혹은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가 충동적인 감정을 끌어 올리는 것이라면, 명철한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략을 끌어올립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절망하기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 혹은 섭리를 끌러올립니다. 그리하려면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깊은 묵상,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술을 마시면 나타나는 증상중 하나가 스스로를 인자한 사람처럼 과시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카드를 뽑아 ‘내가 쏠게!’ 외치는 모습, 드라마에서 가끔씩 나옵니다. 영업사원들이 바이어의 결재를 받기 위해 술 대접 하는 이유중 하나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함께 술 마시며 춤을 추며 놀았다고 해서 괜찮은 관계가 맺어졌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명철한 사람은 술이 아닌 충성스런 삶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7)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왕이 심판 자리에 앉았다는 말씀은 무서운 결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겁도 없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불법과 속임수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것을 이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왕의 눈에 발견되면 악으로 쌓은 모든 것들은 흩어지고 맙니다. 자기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추상같은 이중잣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난 깨끗한 사람이야, 나에게는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어!”, 말하는 것으로 자족할 것이 아닙니다.(9) 하나님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를 미워하십니다.(10)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행동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드러냅니다.(11) ‘몰라서 악을 행했을 것이다? 아이니까 순수하고 착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치명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말고, 말에 속지 말고 외모에 속지 말고 젠틀한 태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 자기발견이 있아야 합니다. 심리학 용어로 메타인지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많이 잡은 후에 예수님에게 드렸던 고백,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가 대표적인 메타인지입니다. 순종하여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기뻐하는 나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로지 고기에 온 마음이 팔려 물고기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을 외면하고 살아온 천박한 나를 보며 탄식하고 부끄러워하는 또다른 나가 있는 것입니다. 소감쓰기 훈련은 메타인지를 배우는 매우 좋은 훈련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으로 ‘잘하고 있다’, 자족할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 모습 자체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나도 중요하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나도 중요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귀를 닫지 말고 눈을 열어두면 하나님이 보게 하십니다. 지레 짐작으로 말씀에 귀를 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이다’, 절망에 갇혀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끝났다. 더 이상 비전이 없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외쳤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말고도 7천명의 남겨 놓았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같은 사람이 100명의 선지자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가 귀를 주신 것은 있는 그대로 듣도록 하심입니다. 눈을 주신 것 또한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심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잠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잠의 세계는 축복이면서도 십자가를 미루는 도피처가 될 수 있습니다. 웹툰이나 쇼츠에 시간을 들이붓는 것도 그러합니다. 눈을 뜨고 십자가를 직시해야 합니다.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14절을 보십시오 물건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얼마나 잘 샀는지를 자랑합니다. 경동시장에서 과일장사와 밀당할 때의 말과 과일을 사서 집에 갈 때의 모습입니다. 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지만, 그것보다 값진 보배는 지혜롭게 말할 수 있는 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지혜로운 입은 돈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서희 장군은 입으로 담판하여 강동 6주 성을 빼앗아 왔습니다. 금과 은의 위력, 세상 권력의 힘에 미혹되어 미리부터 자포자기할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며 심령을 새롭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을 지혜롭게 하는 사람으로 준비되고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들의 말을 분별하여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보증을 서 준자의 말만 믿고 아무 대책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옷이나몸을 볼모로 잡는 것 같은 실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말에 속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속이는 말로 쉽게 이득을 얻고 싶은 미혹을 물리쳐야 합니다.(17) 속여서 취한 이득은 당장에는 맛있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를 씹는 것처럼 씁쓸함으로 되돌아옵니다. 독불장군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경영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얻습니다.(18) 전쟁의 승리도 그러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입을 열어 의논하는 과정을 거쳐 좋은 지략을 얻습니다. 물론 의논한다고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모두에게 떠벌리며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9)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화를 부르는 어리석은 언어생활입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세상에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가 있을까요! 실제 상황을 다룬 다큐에서 가끔씩 볼 때가 있습니다. 주로 재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늙고 가진 것이 없는 부모를 학대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많은 유산을 물려준 부모를 학대받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유산을 물려주어 순식간에 재산 점프를 시키면 부모도 좋고 자식도 좋을 것 같은데, 대부분 복이 되지 않습니다. ‘낙하산에 태워 속히 사장님으로 세우는 것이 복을 주는 것이다?’,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속히 기업을 얻을수록 교만해집니다. 작은 것 하나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누군가로부터 악한 일을 당하면, 분노감정에 휘말려 ‘악을 갚겠다’ 소리쳐 다짐할 수 있습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복수를 다짐하기보다 여호와를 기다립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여호와의 공의가 드러날 것을 소망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는 것,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십니다.(23) ‘나에게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실은 나의 잘못에 대한 합당한 징벌은 아니었을까?’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악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어느 정도, 어떤 방법의 보복이 공정한 것인지도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분노에 휩싸인 상태로는 할 수 없습니다. 분노를 내려놓고 차분히 기도하면서 여호와의 분별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24)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습니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다 예측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범사에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주목하고 따라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여호와께 맡기는 믿음이 없다면, 무엇을 하든지 두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물건은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물건입니다’(25), 서원까지도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괜히 서원했나?’, 뒤돌아보고 염려에 빠지다가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기도 합니다.
주권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지만, 고대의 왕들은 얼마든지 임의로 주관했습니다. 입법권, 사법권, 한 손에 쥐었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권력으로 악인들을 키질합니다. 키질로 알곡과 쭉쟁이를 가려내듯이, 의인과 악인을 가려내고 심판하십니다. 타작하는 바퀴가 굴러가면 그 아래 있는 것들이 짓이겨지듯, 철저한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27) 양심의 등불, 믿음의 등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분이나 능력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28) 긍휼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 인자로 대하고 공의를 시행해야 할 자에게 진리로 대할 때, 왕위가 견고해집니다.
29절을 읽겠습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젊은 날의 매력은 아침에 조기 축구를 하고 오후에 3대3 농구를 하고 저녁에 헬스장에 가더라도 지치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젊은 자의 힘이야말로 강력한 매력임을 알게 됩니다. 민태원씨가 쓴 청춘예찬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있다...” 젊은이처럼 힘을 잃지 안고자 열심히 헬스를 하여 근육질의 몸매를 뽐내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가끔씩 그런 사진을 보여주며 ‘안일하게 살지 말고 도전해보라’며 도발해옵니다. 대단한 의지와 노력을 가진 분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젊은 날을 다 보내고 늙은 날을 맞이한 자에게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백발입니다. 고대세계에서 백발을 가졌다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상징합니다.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표시입니다. 늙은 자는 젊은 자의 힘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온 날들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면 상하게 때려서라도 훈계해야 할 이유입니다.(30) 좋은 말로 교육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때로는 고통이 있어야만 마음에 들어갑니다. 인권이라는 단어에 미혹되어 거만하게 떠들어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혹하는 많은 것들로부터 지켜주시고 믿음의 길, 지혜의 길을 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