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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월간중앙 게재
월간중앙 창간25주년 기념 1천만원 논픽션 공모 우수작
‘라이 따이한의 눈물’
朴聖器
이끼 낀 베트남과의 관계
1975년 4월30일, 베트남전쟁의 포연은 멎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세계 초강대국을 상대로 한 수십 년 간의 길고 지루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세계만방에 자주독립국가의 긍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자유주의 국가들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베트남은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외세의 개입 없는 완전한 민족통일」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 베트남은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에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자유주의 국가들에는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다른 냉전체제를 염려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수많은 목숨을 뺏고 빼앗던 전장은 이제 조용하다. 언제 그 지겨운 전쟁을 치렀느냐는듯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도시는 활기에 넘쳐 있다. 녹슨 탱크와 전장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어느 용사의 힘겨운 발걸음만이 베트남전쟁의 상흔(傷痕)을 말해주고 있다.
베트남전쟁은 진정 끝났는가.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지금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공산화통일 20년도 채 안된 오늘, 그들은 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경제전쟁, 자본주의 시장경제개념을 차용하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새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취지하에 지난 8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도이모이정책(쇄신정책)은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베트남에 하나 둘 발을 들여놓으면서 버려진 땅, 베트남은 이제 새로운 교역국이자 경제동반자로서 세계 역사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특히 무역채널을 다변화하려는 우리나라는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무진장 갖고 있는 베트남에 대기업들이 속속 입국, 많은 투자를 해나가고 있다.
3~4년 전부터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은 한국기업은 현재 총 1백20개에 이르고 있으며 베트남경제 재건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베트남의 제2의 도시, 호지민(옛날 사이공)시에 우뚝 선 8층의 초현대식 빌딩은 한국 기업이 시공, 건축한 것으로 오늘 한국 기업들의 눈부신 진출 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투명하지가 않다. 유리처럼 맑은 것이 아니라 먼지가 묻고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 앞을 잘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다. 92년 12월 22일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정식 수교를 맺음으로써 외교관계를 갖고는 있지만 아직은 양국 사이에 가로막힌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헐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18년 전에 역사적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을 오늘에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민족, 한국인에게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역사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미완(未完)의 전쟁으로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골 간이역 같은 탄손누트 공항
그 벽은 바로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한국군 및 근로자들이 저지른 죄에서 시작된다. 월남에서 돌아온 쌔까만 김상사의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베트남전쟁에 관한 얘기는 온통 따이한(한국군)들이 베트콩의 귀를 칼로 베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는 치기어린 무용담에서부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미제 텔레비전, 일제 라디오 등 가전제품을 불법으로 수없이 빼왔다는 치부를 아무 부끄럼없이 토해냈다.
하지만 용산역에서 부산 부두에서 환송 꽃다발에 「세계평화」라는 그럴싸한 장식을 달아 「자유국가수호」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국가에「기꺼이」바쳐달라는 부탁을 했던 정부입장에서 보면 김상사 같은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술자리 무용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증언」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 중진국대열에 설 수 있는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며 5천여 명에 달하는 이 땅 젊은이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명분 없는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5·16군사 쿠데타 이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눈총을 받아왔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보상받게 되는 계기도 됐다. 결국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여는 박 정권에 있어서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시켜주는 전환점이자 구세주였다.
흔히들 우리나라 군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을 놓고 견해가 둘로 나뉘었다.「미국대리전에 끼어든 용병(傭兵)」이라고 혹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부국강병의 기초」가 된 좋은 계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울러 이해 당사자들에 따라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보는 시각의 편차도 크다. 참전용사들과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전쟁은 자유주의국가를 지키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역사학자나 젊은이들은 박정희 정권이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 명분 없는 「전쟁 놀음」이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규명을 논하기 전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그 어떤 성격의 분석 작업이나 역사적 조명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동안 역대 정권들이 베트남전쟁을 역사의 전면에 내놓고 분석, 조명할 수 있을 만큼 떳떳치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일제시대 때 정신대로 끌려가 수많은 고초를 당한 우리 선배들의 물질적 보상 및 역사적 규명을 철저히 해달라는 진정을 각계각층에서 하고 있다.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전락한 정신대 할머니들의 처절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민족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일제의 만행에 다시 한 번 치를 떨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일제만행을 욕하고, 적절한 정신적·육체적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역사적 규명을 주장하기에는 결코 떳떳치 못하다. 베트남전쟁에서 저지른 우리 선배들의 비도덕적인 일들이 일제의 만행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다 돼가는 오늘날까지 앙금처럼 남아 있는 그 원죄를 추적하기 위해 베트남현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93년 4월 20일.
타이 방콕을 오후 2시 30분에 떠난 베트남 에어라인은 정확히 90분 만에 베트남 호지민 탄손누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승객 1백여 명의 대부분은 외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사람이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가전제품 등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줄 선물이 쥐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미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입국심사를 위해 이미 기내에서 두 장의 서류를 썼건만 공항경찰은 한 장을 더 쓰라며 툭 던져준다. 50년대 우리나라 국민학교 학생들이 사용했을 형편없는 공책 지질만큼이나 초라한 입국용지였다. 그 용지에는 여권 번호, 생년월일, 체재예정일수 등 입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 외에 소지하고 있는 달러 총액· 신용카드 기타 녹음기 ·카메라 등 값어치가 나갈 만한 것은 모두 신고하라고 적혀 있었다.
최근 들어 외국관광객에 대한 입국심사가 간소화됐다고는 하지만 아무 표정 없는 공항 경찰들의 얼굴을 보고 처음 베트남을 방문하는 나의 입장에서 대충 입국심사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어쩐지 모험(?)처럼 느껴져 꼼꼼하게 신고서의 빈 칸을 다 채우고 통과했다.
우리나라 시골 간이역의 한가한 풍경처럼 조용한 탄손누트 공항 건물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바깥에 나오자 언제 마중 나왔는지 방금 도착한 베트남 승객들의 가족과 친척들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베트남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다소 불안했다. 베트남이 우리와 체제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저지른 죄의 분풀이를 나에게 하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도 적지 않게 일었다. 외국을 여행하는 일본인들이 깊은 오지나 한적한 길거리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혹시나 자신들의 조상이 지은 전과 때문에 화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가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였다.
당당한 베트남 사람들의 표정
시내숙소로 들어가는 도로는 자전거와 시클로(삼륜인력거)로 가득 차 있었다. 승용차는 드문드문 볼 수 있었지만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도로는 차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와 시클로를 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트남경제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베트남사람들의 표정은 활기에 차 있었다. 굳어 있지도 않았으며 비굴하게 보이거나 추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몸에 걸친 옷이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 찬 모습은 미국 등 세계 초강대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긍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비록 다 해진 옷에 한 끼에 백 원 하는 국수로 점심을 때운다 해도 그들에게는 자신의 민족이 일구어 낸 자주독립과 앞으로 그들이 펼쳐나갈 희망찬 새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이 현재 안고 있는 고민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서로 다른 이념을 어떻게 한군데로 결집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 통일이 되기는 했지만 진정한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 이유는 17도를 경계로 남북이 갈렸던 베트남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심어져 수 십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반면 미국 등 자본주의국가들이 앞 다투어 밀려들었던 당시 베트남의 수도, 남부 호지민시에는 서구 여느 도시 못지않은 자본주의 색채가 짙게 물들어 있다. 카바레 등 위락시설은 물론 자본주의의 악이라는 매춘까지 버젓이 등장, 과연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게 만든다.
따라서 한 손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움켜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이론을 막 들려고 하는 베트남정부에 있어서는 이런 이질적인 이념들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참다운 사회주의를 건설하느냐 하는 숙제가 남겨져 있다.
베트남의 하루는 새벽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다.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4시만 되면 사람들은 하나 둘 자전거를 몰고 일터로 갈 채비를 한다. 시클로 운전자들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시클로가 고장이나 안 났는지 이리저리 점검하는가 하면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페달을 굴린다.
시클로 운전사들은 10대 후반에서부터 50,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학교 교사가 부업으로 운전을 하는가 하면 결혼 비용을 위해 일과 후 거리에서 페달을 굴리는 젊은 공무원도 있다. 즉 시클로는 부업으로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본업만 가지고는 외식 한 번 할 수 없는 그들의 경제사정이 자본주의만의 독특한 맛(?)인 돈의 위력을 절실히 맛보면서 오늘도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땀을 쏟고 있다.
베트남사람들을 만나보면 한국 사람들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올림픽을 치른 나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치켜세우며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한때는 적군이었던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은, 이제 지나간 것은 과감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다.
저마다 돈벌이에 몰두
그러나 화해는 피해자가 먼저 요청하는 것보다는 가해자가 진정 참회하는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보기도 좋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거꾸로 된 상태다. 가해자인 한국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보다는 피해자인 베트남이 먼저 저자세로 화해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화해의 얼굴 이면에는 경제적 도움을 달라는 어느 정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대국적인 차원에서 베트남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면 더욱 뜻 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트남에는 한국인 2세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 흔히들 「라이 따이한」(한인 2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적게는 3천명에서부터 많게는 3만 명에 이르기까지, 그 통계가 들쭉 날쭉인 상태로 20여 년간 역사 저편에서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우리와 같은 핏줄이면서도 아버지의 조국,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몇 년 전부터다. 신문·방송·잡지 등 매스컴을 통해 베트남에 한인2세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또한 그들의 자립을 위해서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기술학교를 세워 자립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그러니까 까마득히 잊혀졌던 슬픈, 기억하기 싫은 역사가 무대 전면에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것이다. 베트남 특수를 노리고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 발을 내디딘 우리 근로자들과 자유 수호를 위한다는 기치 아래 남의 땅 전쟁터에 휩싸인 일부 장병들이 타국의 외로움과 정욕을 참지 못하고 현지 베트남 여인과 결혼 또는 동거, 그 씨앗을 뿌린 것이 바로 라이 따이한의 비극을 잉태했다.
라이 따이한의 비극적 운명
한인 2세들이 겪은 그간의 고초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적군의 혈육, 적군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가 선명히 새겨진 그들이 얼굴을 제대로 들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 사회주의통일 이후 베트남의 현실이었다. 베트남정부는 한인 2세 및 그들의 어머니를 적색분자로 따로 분류, 외진 곳에 격리수용하는가 하면 그 어떤 사회적 혜택도 주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 2세들이 걸어온 역정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중학교만 졸업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며 고등학교·대학교를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경제력이 없는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양실조에 걸려 이빨이 부실한 한인 2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에 직장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그렇다고 사업을 하자니 모아놓은 돈도 없어 그저 하루하루 세끼를 먹으면서 연명해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우리나라 군인 숫자는 연인원 32만 명에 이르고 민간근로자는 20만 명에 달한다. 64년 10월 비전투부대인 의료지원단을 시작으로 73년 완전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베트남인에게 귀신도 잡는 용감한 군인으로 각인됐으며 근로자는 어느 누구보다 성실한 일꾼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베트남사람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승전의 여신이 베트남에 기울자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 전쟁터에서 꼬리를 뺐고 베트남 특수를 노리고 호지민(옛날 사이공) · 퀴논· 캄란 · 다낭 등에서 일을 하던 한국근로자들도 자리를 떠야만 했다.
베트남에서 한몫 잡겠다고 달려든 한국 근로자들이 적지 않은 달러를 손에 쥔 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베트남에 자신들의 씨앗과 처(첩)을 방치한 채 도덕적 죄의식을 안고 귀국선에 몸을 싣기도 했다.
이렇게 버려진 한인 2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과연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은 이들을 돌보고 있는 몇몇 한국인들의 얘기를 듣고 풀 수 있었다.
정주섭(58)씨, 베트남에서 호텔업을 경영하다가 포성이 멈추면서 그곳에서 탈출했다. 지난 89년 베트남이 개방되면서 다시 사업차 들어간 정씨는 베트남사회에서는 「한인 2세 대부」로 불려지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한인 2세의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를 도와주면서 한인 2세 자립 지원 사업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정씨는 현재「뱃코기술학원」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한인 2세 대부」 정주섭씨
『어떻게 알고 왔는지 빛바랜 옛날 사진을 들고, 제발 아버지를 좀 찾아달라는 한인2세들이 제 집에 줄을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동정심 반으로 일을 하던 것이 나중에는 이 일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지요. 사실 한국 경제 부흥의 시작은 베트남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베트남 특수가 없었다면 한국경제의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씨는 한인2세 자립사업을 시작할 때만해도 이들 한인2세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무책임하게 한국으로 떠난 아버지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어떻게든 아버지와 자식을 만나게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미 한국에 또 하나의 가정을 꾸리고 단란하게 사는 아버지를 굳이 괴롭게 할 필요도 없거니와 유교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가족제도 속에서 한 집에 두 가정이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섰기 때문이다.
정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현지에 같이 있었던 근로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외로움과 성적 욕구를 제대로 풀 공간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그때 한창 혈기가 왕성한 그들이 고국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여건을 참작, 이제는 과거일로 눈감아주는 대신 정부차원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호지민시 외곽에 뱃코기술학원을 설립, 백 명의 고아(한국인 2세 50%, 베트남 고아 50%)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정씨는 학원 내에 재봉틀·타자기 등 교육시설을 구비, 자립기반을 열어주고 있으며 아울러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시간도 마련하여 한민족의 혼을 심어주기도 한다.
정씨는 또 최근 들어 한국기업들이 많이 진출하면서 한인 2세들이 아버지 나라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이 제2의 베트남 특수를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이들에게 작은 애정이라도 보여준다면 한인 2세들이 삶의 용기를 얻어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 교통수단, 시클로
덧붙여 정주섭씨는 『이제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정식수교는 됐는데 정부차원의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고 언급, 슬픈 과거는 잊어버리되 오늘 남아 있는 우리들의 혈육, 베트남 한인 2세는 우리가 어떻게든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트남의 서민 교통수단, 시클로를 탔다. 시클로 운전사는 나이 스물이 갓 넘었을 성싶은 남자였다. 시클로 운전사에게 외국인 손님은 봉이다. 베트남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요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1km에 2천동(1백 60원)하는 요금이 외국인만 타면 두 세 배로 껑충 뛰어오른다. 젊은 시클로 운전사는 만만한(?) 외국인이라도 만난 듯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그 젊은 운전사는 기본적인 영어 회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젊은 운전사는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남쭈틴(남조선)에서 왔다』고 하자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고 한국이 최고라며 치켜세웠다. 내가 웃음을 띠우고 몇 마디 말을 건네자 그는 짧은 영어로 시내 곳곳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만 5천동(1천 2백 원)에 베트남 항공사까지 왕복하기로 하고 탔는데도 그는 자기가 호지민시 관광지를 안내할 테니 하루 종일 이용하라고 졸라댔다ㅣ
4월 중순의 날씨치고는 호지민의 한낮은 무더웠다. 차양으로 태양을 가리기는 했지만 작열하는 태양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연신 땀을 닦아내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그는 시클로 밑에 숨겨 논 부채를 꺼내들어 나에게 건네줬다. 20~30년 전 우리나라 구두닦이 소년들이 썼던 챙 달린 모자를 눌러쓴 그는 시클로를 운전한 지 3년이 다 돼간다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시클로만큼 자본이나 특별한 기술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도 그리 많지 않다고 그는 덧붙였다.
점심을 먹고 들른 곳은 호지민 시내 중심가에 있는 전쟁박물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버려두고 간 헬리콥터·탱크와 각종 소총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서 그런지 녹슨 탱크는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몇몇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탱크와 헬리콥터 등을 만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 중에 더러는 프랑스 ·미국 사람들일 것으로 믿어졌다. 자신들의 선배들이 이국땅을 점령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들이 이제는 피비린내 나는 베트남전쟁의 상징이 되어 흉물스럽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본 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전쟁박물관 안에 있는 전시관에는 베트남전쟁 관련 사진과 M16 소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허름한 건물에 낡은 대형 선풍기(팬)가 더운 바람을 불어대는 전시관 한쪽에는 파란 아오자이(베트남여인의 전통 의상)를 걸쳐 입은 관리인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20여 년 전에 끝난 전쟁이 오늘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듯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전쟁박물관의 충격
벽에 걸린 사진은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었다. 베트콩의 목을 자른 미군병사가 그 옆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는 사진, 늙은 노파가 어린 자식의 처절한 주검을 바라보는 애절한 모습이 담긴 사진, 집단학살 당해 구덩이에 파묻힌 시체 사진, 미군의 총부리를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는 베트남 처녀의 사진 등등.
그러나 그 많은 사진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것은 베트남전쟁 때 미국이 무차별 투하한 고엽제로 인해 기형아가 된 모습을 찍은 장면들이었다. 「에이전트 오렌지 디옥신」이라고 불리는 이 고엽제는 오렌지주스 깡통 하나로 미국의 시카고 시민 전체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한 것이었다. 이런 화학 물질을 베트남전쟁 기간에 총 1천 8백만 갤런이나 뿌려댔으니 인체는 물론 베트남 국토가 얼마나 황폐화되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고엽제 문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파월 장병들의 상당수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몸에 이상한 질병이 생겨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까지 고엽제 환자들을 위한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 그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정부에도 버려진 채 또 한 번의 지루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가 있는 기형아가 있는가 하면 눈이 짓눌려 죽어간 갓난아이도 있었다. 원시 파충류처럼 끔찍스런 모양의 얼굴을 한, 마치 괴물 같은 아이의 사진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고엽제로 인해 피해를 당한 베트남 사람들의 어린 자식이라는 사실이다.
「북부 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돌려놓겠다」고 공언하며 전쟁에 가담했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자유국가의 대명사인 미국이 저질러 놓은 천인공노할 범죄행위였다. 이 비극적인 현장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한쪽에는 베트남전쟁을 전후해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닉슨·포드 등 5명의 사진이 들어왔다. 각기 다른 표정의 얼굴 모습을 담고 있는 그 사진 속 인물들은 베트남 민족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역사의 제물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을 찾은 주 목적은 한인 2세들의 실상을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신문·방송 등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그들의 삶의 모습이 과연 어떤 왜곡이나 과장 없이 솔직하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해서 나 자신이 직접 검증해보고 싶었다.
호지민시 보 방 땅 408.
「휴맨직업기술학교」라는 한글 간판이 벽 정면에 걸려 있는 이곳이 바로 라이 따이한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한국 개신교 선교단체가 설립,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이다. 기술학교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1층 좁은 계단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비좁은 복도에는 일제 혼다 오토바이가 10여대 늘어서 있었다. 우리나라가 소형 문방구점에서 복사를 해주는 것처럼 이 오토바이 수리가게도 복사기 하나를 구비, 「포토카피」(복사)를 해주고 있었다.
기술학교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많은 학생들이었다. 카메라를 들쳐 맨 나를 발견한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서투른 한국말로 「어서 오세요」 「안녕 하세요」하며 미소 띤 얼굴로 반겨주었다. 순간 섬광처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바로 죄의식이었다. 그들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았지만 나는 죄의식으로 그들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 자신이 바로 죄인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2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의 동족은, 그들 아버지의 나라는 무엇을 도와주었으며 어떤 관심을 보였는지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나 자신조차 그들에게는 죄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서 오세요』 한국말 인사
휴맨직업기술학교 교장 누엥 딩 리씨는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비록 한국 개신교 선교단체가 설립, 운영하고는 있지만 학교 실무는 베트남사람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교무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베트남인이었으며 선생도 베트남 현지인이었다.
그러니까 자본은 한국 사람이 대지만 학교 운영은 베트남 현지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에서 나온 젊은 사람이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을 일일이 점검, 당에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휴맨직업기술학교는 베트남정부 산하에 있는 교육기관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때맞춰 수업시간에 들어가니 공부를 하고 있던 학생들이 다소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훔쳐봤다.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약 30명의 학생들이 여자 선생의 강의에 따라 큰소리로 문장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건물 꼭대기 옥상에 자리 잡은 교실에는 선풍기 하나 없었지만 학생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따라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짜 맞춘 책상 위에서 변변한 교재나 필기도구도 없이 그들은 영문법, 「과거 시제」를 배우는 중이었다.
Yesterday I went to church.
Last night We drank a lot.
칠판에 쓰여진 영어를 옮겨 쓰는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만큼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호지민 시내를 둘러보면서 다른 아시아국가에 비해 영어를 별로 쓰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거리의 홍보물은 물론 식당·여행사·상품점 등에서도 영어로 된 간판을 찾기 힘들었다. 프랑스어를 쓰면 썼지 영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의 개방정책과 함께 영어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옛날 베트남전쟁 때 미군 군속으로 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는 점을 활용, 부업에 나서는가 하면 호지민 시내 곳곳에 사설 영어학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영어의 필요성을 그만큼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휴맨직업기술학교 교장 누엥 딩 리씨도 일과 후에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 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베트남 정부에서도 더 이상 그 지적 욕구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영어공부에 열심
기술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과목은 총 8개다. 영어·한국어 ·전기·재봉틀 수리·컴퓨터 등이다. 전기반과 재봉틀 수리반에 들어서자 기계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고 씽긋 웃었다. 낡은 모터를 수리하고 있던 또 다른 학생들과 발로 굴리는 구식 재봉틀 위에서 열심히 옷을 꿰매고 있던 남녀 학생들이 낯선 이방인의 침입이 거북한지 하던 동작들을 멈추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은 북한 사투리가 심한, 나이 50줄에 들어섰을 듯한 작달막한 남자였다. 아마 북한사람에게 한국어를 배웠는지 거센 억양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그는 학생들을 모두 일어서게 한 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하는 인사말을 학생들에게 시켰다. 학생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어 선생의 지시를 따라 서툴게 인사말을 했다.
칠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4과 직업
장선생(A): 직업이 무엇입니까?
판디(B): 신문기자입니다.
A: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십니까?
B: 인디아 타임즈에서 일합니다.
A: 언제 한국에 오셨습니까?
B: 지난 3월에 왔습니다.
A: 지금 어디에 가십니까?
B: 중앙청에 갑니다.
또박또박 쓴 정자체(正字體)였다. 학생들은 선생이 칠판에 쓴 글씨를 읽으면 큰소리로 따라하고 공책에 적었다. 그러나 공책에 적혀진 한글은 우리나라 국민학생이 한글 쓰기를 연습하듯 지렁이체의 글이 굴러가고 있었다.
작년 9월부터 휴맨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다우 티투 밍(18) 양은 아버지의 나라말인 한국어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고 말했다. 가능하면 정부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희망을 얘기했다. 다우 티투 밍 양은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아직 없다』고 말했다.
한인 2세들의 직업학교
현재 휴맨직업기술학교에는 3백30명의 학생들이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데 이중 10%는 베트남 학생이고 나머지 90%는 한인2세로 구성되어 있다. 전액 무료로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들이 교육과정을 마쳐도 직장을 잡는다는 보장은 별로 없다. 베트남 경제가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20%가 넘는 실업률에다 일할 직장도 아직 많지 않은 실정이고 보면 그들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학생들 대다수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어렵게 이어나가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찾기 위해 바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특히 한인 2세의 경우, 변변한 학력이나 기술이 없기는 하지만 베트남 기업으로부터 「적국의 자식」이라는 오명이 찍혀 직업을 얻기가 더욱 더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휴맨직업기술학교 교장 누엥 딩 리씨는 학교에 등록된 학생들은 총 4백 52명이라고 밝히고 이들을 받을 때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증빙서류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인 2세 학생들 아버지의 대다수는 근로자였다는 것을 서류를 통해 알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제 다시 아버지를 찾아주거나 버려둔 자식을 찾는다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을 야기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전쟁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났고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좋아지고 있으니 한번쯤은 자신의 혈육을 찾아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학교에 보관되어 잇는 학생들 입학서류에는 아버지 신상 명세는 물론 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등이 함께 철해져 있었다. 그들의 현재 비극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더 가슴 아팠던 것은 한국 남자와 베트남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도 아닌, 정상적인 한국인 부부관계에서 출생한 자식을 베트남 현지인에게 맡기고 귀국선에 몸을 실은 한국 부부가, 오늘까지 한 줄의 편지도 없이 혈육을 방치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는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실정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보통의 가정집을 방문, 집 식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직접 준비한 전통 음식도 먹어 보고 사는 모습도 둘러보면 그 나라의 실정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트남 한인 2세의 집을 직접 방문해 보았다. 그것은 베트남과 라이 따이한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했다.
한인 2세 집 방문
휴맨직업기술학교 교장 누엥 딩 리씨는 우엥 양의 집에 가볼 것을 권했다. 사전 연락도 없이 우엥(21) 양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날도 역시 무더웠다. 전체적으로 도시가 더럽다보니, 무더운 날씨에 더러운 것이 더 피부로 느껴져 짜증이 났다. 우엥 양의 집은 호지민 시내에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중산층이 주로 산다는 그 지역은 비교적 다른 곳에 비해 깨끗했다.
느닷없이 들어선 이방인을 맞는 우엥 양의 표정은 난감한 모습이었다. 그녀 곁에 있던 엄마 룽 티 마이(54)씨와 배 다른 여동생이 손님을 어떻게 접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금방 얼굴이 밝은 빛으로 바뀌며 베트남차(홍차)를 내왔다.
마이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다고 한다. 그는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을 장롱 속에서 꺼내왔다. 그 사진 속에는 선글라스를 쓴 멋진 남녀가 들어 있었다. ‘아시아의 진주’라는 베트남 해안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 남녀의 주인공은 마이씨와 밤무대에서 밴드를 맡았다는 한국인이었다.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하던 마이씨의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기 시작했다. 아마 이제는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분명히 다른 한국여인과 아들, 딸들의 한 지아비, 한 아버지가 됐을 한국 남편을 머릿속에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숙연해진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혹시 한국노래 생각나는 것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흘러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리랑」은 조금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며 노래 한 소절을 구슬프게 불렀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 한많은 노래를 그녀는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는지 마지막 소절은 애써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
마이씨는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남편도 떠나 의지할 곳 하나 없었지만 한국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이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에서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철수에 나선 한국군과 함께 남편은 그녀 곁을 떠났지만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마이씨는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장사를 하며 살아왔고, 아이들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학교를 다니며 다른 베트남 아이처럼 지내왔다.
그녀의 딸 우엥 양은 대학1학년생으로 꿈이 있는 명랑한 학생처럼 보였다. 하이힐에다 손톱에는 짙은 매니큐어를 칠했으며 값싸게 보였지만 팔찌까지 하고 있었다. 서울 종로나 대학로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기발랄한 우리나라 젊은 여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얼굴도 엄마를 닮아 무척 예뻐 보였다.
그녀가 휴맨직업기술학교에 다닌 지는 한 달 정도 됐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기술학교에서 그녀는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말은 전혀 할 줄 몰랐으며 영어로 의사소통하기도 힘들었다. 우엥 양은 자신의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땅도 한 번 밟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부쩍 들었다는 것이었다.
3~4년 전부터 한국인들이 사업차 한 두명씩 베트남에 드나들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차츰 알려지자 우엥 양은 자신이 한국계 혼혈아라는 사실이 별로 부끄럽거나 욕되게 느껴지지도 않게 됐다. 어차피 자신의 핏줄이 바뀌지 않을 텐데, 굳이 자신의 출생신분을 숨기면서까지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각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이 정말 보고 싶어진 것이다.
외교관 꿈꾸는 우엥
우엥 양의 전공은 경제학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학교에서 무용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고등학교 무용팀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으며 오는 6월에는 일본으로 또 한 차례 공연을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엥 양에게 『앞으로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외교관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용은 취미에 불과하다는 그녀는 곧 무용을 그만둘 것이며 경제학 공부에 전념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베트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백 달러에 불과하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만큼은 후진국치고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내를 걷다보면 노상에서 국수를 파는 아줌마나 시클로 운전사가 시원한 그늘에서 신문이나 잡지 등을 보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만큼 독서나 공부에 관심이 많다는 반증인데, 실제로 베트남의 문맹률은 10%도 안 될 정도로 교육에 있어서는 후진국의 오명을 벗어나고 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 무용을 공부한다는 것은 별로 인정도 받을 수 없거니와 사회에서 「딴따라」처럼 취급,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를 할 수도 없다고 한다. 우엥 양은 『한 학기에 1백만 동 (1백 달러)이나 하는 학비를 걱정하지 않고 경제학 공부에만 전념, 세계 곳곳을 다니며 외교활동을 펴는 여자 외교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엥 양과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의 오빠, 로비 투엥(25)씨가 점심시간에 맞춰 밥을 먹으려고 집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사는 것이 힘에 벅찬 베트남 사회 젊은이들의 한 초상이었다. 때에 전 옷에, 팔뚝에서 튀어나온 힘줄, 그리고 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을 가득 짊어진 그의 얼굴은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어렵게 세상을 살아왔을까를 충분히 추측하게 만들어 줬다.
1백 60cm도 채 안 되는 신장에 50kg이 될까 말까한 체중의 육체를 지닌 그의 4반세기 삶은 말 그대로 고통의 연속이었다.「애비 없은 자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사춘기 시절 남들 다 다니는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 속에서 보내고 있는 요즘 그는 집안의 기둥이자 없어서는 안될 정신적 지주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시클로 운전사, 하지만 사람을 태우는 시클로가 아니라 과일·채소·곡물·고기 등 각종 크고 작은 짐을 실어 나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용달차 운전사 격이었다. 그의 하루 수입은 약 2만동,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천 6백 원에 불과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한 달 내내 일해도 그의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5만원에도 못 미친다. 그 수입을 가지고 쌀을 사고, 학비를 대고,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인간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생각 안 난다』
요즘은 비가 오지 않는 계절이라 시클로를 운전하지만 우기 철이 되면 목수도 되고 전기 기술자도 되고, 하여튼 돈을 버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것이 투엥씨의 현실이다. 불안정한 시클로 운전사보다는 좀 더 보수도 좋고 안정적인 직업인 냉장고 수리기술자로 일하고 싶지만 어디에서 오라는 곳이 없어 그저 시클로 일이 끊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다.
투엥씨에게 『아버지 생각이 나느냐』고 묻자 그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아버지를 증오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4반세기의 지긋지긋한 삶이 다시 떠오른 것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자기 가족들이 앞으로 생을 이어나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을까.
투엥씨의 집은 다른 한국계 혼혈아의 경우보다 나은 편이다. 어머니가 장사를 해서 어느 정도 돈도 벌어놨고 작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면서 가진 재산도 서서히 떨어져 가고 있고 이제는 집을 팔아야만 우엥 양을 계속 공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우엥 양의 집을 나서기 전에 마이씨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아직도 옛날 남편을 사랑하는가』하는 전혀 예기치 않은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허탈한 미소로 자신의 심정을 표시했다. 과연 그 허탈한 표정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골목을 벗어나려는 순간 마이씨는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지만 앞길이 창창한 자식만큼은 한번쯤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녀가 오랜 세월동안 가슴속에 묻어왔을 듯한 말 한마디를 비수처럼 내 심장에 꽂았다.
「베트남 정신」 교육장 구치터널
버려진 자식, 그리고 잊혀진 여인. 우엥 양의 집을 떠나 숙소로 돌아온 나는 마이씨의 슬픈 눈동자와 같은 젊은 가장 투엥씨의 얼굴에서 흐르는 굵은 땀방울, 그리고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서 본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젊고 잘생긴 한국 남자의 당당한 미소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구치터널을 찾아가기 위해 차 한 대를 빌렸다. 호지민시에서 약 70km 떨어진 지역에 있는 구치터널은 외국 사람들의 주요 관광코스 중 하나로, 베트남전쟁에서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잇던 미국을 이기고 통일을 쟁취한 베트남 사람들의 투철한 정신무장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호지민시를 벗어나자 우리나라 시골과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논에 모를 심는 아낙네, 소달구지에 실려 한가롭게 잠자는 꼬마 아이,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 몇 개와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바나나 몇 무더기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구멍가게 아저씨, 그들의 한가한 모습에서 베트남의 가난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두 시간 정도 달리자 갑자기 아스팔트길이 사라지고 거친 황토 흙이 차바퀴를 감쌌다. 차는 숲속을 이리저리 한참 헤치더니 널찍한 공간에 나를 던져놓았다. 베트남 사람에게는 「호아저씨」로 불리는 호지명의 사진이 보였다. 호지민시 곳곳에서 본 호지명 사진이, 베트남 사람들의 긍지가 가득 담긴 구치터널 입구에 장승처럼 떡 버티고 나를 맞았다.
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던 48년부터 구치터널을 파기 시작,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연장 3백 50km에 달하는 지하 요새를 구축했다. 터널에 들어가 보면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극한 조건 속에서도 민족 독립을 위해 숱한 고생을 감수했을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은 진정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귀중한 교훈도 얻게 되었다.
2만동을 주고 입장권을 끊자마자 옆에서 기다리던 안내원이 나를 숲 속으로 데리고 갔다. 안내원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장교인지 사병인지 구분이 안 됐지만 나이는 40세 안팎,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며 말투는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이었다. 능숙한 영어로 나를 구치터널의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던 그 안내원은, 베트남 정부가 구치터널의 홍보를 위해 특별히 편성한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터널에 들어갔다. 터널의 내부는 넓이와 폭이 60cm가 될까말까한, 별로 체격이 크지도 않은 나는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가며 거의 걷다시피 해서 통과했다. 그러나 그는 능숙한 발걸음으로 터널을 제비처럼 날아다녔다. 약 30m를 걷자 넓게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전쟁 당시 작전 회의실로 썼다는 그 곳은 그때 사용했던 모든 집기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사령관 자리 옆에는 베트남 국기와 작전 지도가 걸려 있었으며 회의 책상에는 부사령관 및 주요 참모들의 명패가 놓여있었다. 안내원은 나에게 사령관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했다. 그에게 카메라를 내밀고 몇 장의 사진을, 「지하요새의 사령관」이 되어 찍혔다. 안내원에게 『당신도 그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으라』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유는 자신은 사령관이 아니며, 따라서 사령관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느닷없이 불경죄를 저지른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군인정신이 투철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상관에 대한 예의가 깍듯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그의 몸과 마음은 통일을 위해 싸우던 그때 그 정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구치터널 내에는 각종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회의실·식당·무기고·화장실은 물론 간이 수술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술실에는 약상자와 메스·침대 등이 아직까지 원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굴속에서 밥은 어떻게 해먹었느냐』고 묻자 그는 『밥 짓는 문제가 제일 곤혹스러웠다』고 말하고, 『되도록이면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3단계의 굴뚝을 만들어, 실제로 밖으로 연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구치터널이 베트남 군인에게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면 반대로 미국에는 골치 아픈 방해물이자 반드시 제거해야 할 두통거리였다. 때문에 미국은 수많은 양의 폭탄을 구치지역에 집중 투하하고 군견을 풀어 터널찾기 작전에 나섰지만 큰 실효는 거둘 수 없었다.
민족통일의 의지 확인
워낙 찾기가 힘들었을 뿐 아니라 설령 찾는다 해도 덩치 큰 미군이 터널 내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터널 곳곳에는 죽창으로 만든 함정과 지뢰가 설치되어 있어서 터널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가는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시체로 변해버리기도 했다.
지하터널이라고 하기보다는 「지하도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치터널은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국민학교 어린 학생에서부터 동네 아줌마·할머니 등 구치현 주민들이 대거 동원, 단지 호미와 포대기만을 이용하여 대역사를 일구어낸 그야말로 베트남 정신의 뿌리가 들어 있는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자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으로 땀으로 닦고 있는데 숲 속에서 느닷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불안한 심정으로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사격장에서 나는 총소리』라고 말하고 『관심 있으면 한 번 쏴보라』고 했다. 나는 『군대에서 총을 많이 쏴 봐서 별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현장을 벗어났다.
총 쏘는 것을 오락처럼 생각하는 그가 좀 이상스럽기도 했지만 단순히 「총 쏘는 것」, 그 이면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자신감과 세계 최강 미국도 자기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싶은 「시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터널 내부를 다 둘러본 나는 안내원의 뒤를 따라 구치터널을 팔 때 그 당시 찍었던 사진들과 비디오를 봤다. 대여섯 살 먹은 꼬마 아이가 엄마와 함께 포대기에 흙을 싸서 나르는 사진도 있었다. 학생들이 줄을 지어 터널 공사 현장으로 가는 장면 및 좁은 터널 한 쪽에서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한 병사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았다.
베트남 정부가 자존심의 보루처럼 생각하는 구치터널.
3백 50km 지하요새의 일부분을 직접 둘러본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베트남민족의 불타는 저항의식과 뜨거운 민족통일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베트남의 통일, 그리고 세계 최강의 전력을 지니고 있었던 미국의 항복, 구치터널을 떠나면서 나는 이 사실(史實)은 역사적 귀결이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호지민시로 돌아오는 도중 베트남전쟁 기간 중 사망한 군인들의 시체가 안장되어 있는 묘지를 들렀다. 밝은 햇살을 받은 묘지에는 수백 명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었다. 조국독립을 위해 죽어간 그들 묘지 위에는 더러 꽃 몇 송이가 꽂혀 있기도 했으나 대부부의 묘지 곁에는 색 바랜 낙엽들만이 뒹굴고 있었다.
『레 반 항
1932년생.
1968년 12월 사망』
3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의 일생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사랑하는 애인은 있었는지, 꿈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의 삶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몇 줄의 글이 그의 이력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저60년 전에 태어나 40년도 채 못 살아보고 죽음의 행렬에 끼인, 그가 6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확실한 그의 이력이었다.
그의 묘 위에는 잡초가 몇 포기 자라고 있었으며 색칠이 벗겨진 페인트가 그의 험난했던 삶을 대신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의 동료들도 마치 사열을 받듯 일렬로 줄지어, 오늘의 통일된 베트남을 무언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묘지를 지키는 관리인이 내게 다가왔다. 웃통을 벗어제낀 그의 손에는 장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그는 나를 지켜봤다. 그의 곁에 있던 동네 꼬마 몇 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30세 정도나 됐을까. 햇볕에 그을린 그의 상체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수백기의 묘를 지키는 관리인치고는 너무 위엄이 없어 보였다.
찾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미 전쟁은 잊혀져버린 것인가. 묘지를 관리하는 그의 표정이나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은 베트남전쟁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넋들을 위로하기에는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낮잠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하루 종일 어디를 돌아다니거나 일을 한다는 것은 베트남에서는 사실상 무리다. 길을 걷다 보면 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어 놓고 낮잠(시에스타)를 즐기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대대적인 폭탄 투하 속에서 폭탄이 땅에 떨어지는 리듬을 타면서 여유롭게 낮잠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도 오랫동안 내려온 점심식사 후 달콤한 낮잠을 베트남 사람들은 한 두 시간씩 만끽하고 있다.
낮잠 속에 빠져 피곤을 풀고 있는데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전화 교환원이 누가 나를 찾아 왔다고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단잠을 깨운 그 전화기가 밉기는 했지만 과연 누가 나를 찾아왔을까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심정 속에서 이불을 걷었다.
베트남에서 생활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내 뒤를 계속 미행하는 공안원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을 쉬 지울 수는 없었다. 호지민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 말에 따르면 관광객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오래 체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안원이 딸려 있어 그들의 불순한(?) 행동을 체크, 보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실제로 몇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계 혼혈아를 돕고 있는 한국인들이 혹시 다른 목적이 있어 그들을 돕지 않을까 하여 수차례 공안원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개방물결에 따라 공안원이나 경찰들의 감시가 완화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 탓인지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감시의 눈초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휴맨직업기술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는 박남규라는 한인 2세였다. 그는 내가 휴맨직업기술학교를 방문했을 때 여동생과 함께 나를 찾아와 아버지 사진을 내보이며, 아버지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던 눈이 큰 청년이었다.
남규, 남숙 남매의 「아버지 찾기」
남규씨와 그의 여동생, 남숙은 베트남 남부 캄란에서 휴맨직업기술학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내려온 오누이였다. 오빠 남규씨의 나이는 25세, 그리고 남숙은 꽃다운 23세의 예쁜 처녀였다. 그들을 기술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울이나 부산 또는 시골 농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나라 처녀 총각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짙게 받았다. 그만큼 생긴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과 똑같았다.
나이 20세가 넘도록 아버지 사진을 가슴 속에 꼬옥 품고 다녔던 그들이 낯선 한국인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혹시나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나는 도저히 채워줄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들 오누이의 어머니는 현재 캄란에 살고 있으며 그들은 직업을 찾아 호지민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남규씨의 말에 따르면 3년 전인 90년에 아버지가 베트남을 방문, 자기들과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한다. 자기네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간 아버지는 베트남을 떠나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오늘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남규씨의 얘기다.
눈이 빠지도록 아버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오누이는 이제 더 이상 연락이 없는 아버지가 무슨 변고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반드시 연락은 하시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나에게 그들은 아버지가 89년에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검정 볼펜으로 쓴 그 색이 바랜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규 보아라.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뜻밖에 너의 편지와 사진을 받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 고생을 한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가슴이 아프다. 너를 보고 온 윤 선생을 만나보았다. 그분 편에 자세한 말을 들었다. 고생 속에서 너를 훌륭히 키우신 어머님께 감사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나임을 엄마는 잘 알고 있을 거다. 건강이 나쁜 것 같으니 걱정이 많겠구나.
인편에 돈 2천(달러) 보내니 요긴하게 쓰기 바란다. 소식을 들었으니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 잘하고 영어를 배우도록 해라. 한국어도 배워라. 내가 만약 비자를 받으면 명년에 갈 예정이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애쓰기 바란다.모든 일은 윤 선생님께 부탁을 했다. 아버지는 89년 10월 16일 미국으로 간다. 서신은 미국에서 보내겠다.
그럼 만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다오. 할 말을 많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만 줄인다.
멀리서 아버지가
1989년 10.6. 박xx 』
남규씨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남규씨가 캄란에서 일을 하다가 편지에 나와 있는 윤 선생을 만났다. 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편지를 써서 사진과 함께 윤 선생에게 아버지의 주소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윤 선생은 한국에 돌아가 남규씨의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해주었고 아버지는 근 20년 만에 자기 자식에게 편지를 띄웠던 것이다.
『남규를 훌륭히 키운 어머니에게 감사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아버지는 인편을 통해 남규씨 가족에게 2천 달러를 전해주고는 비자를 받아 곧 베트남에 들어가겠다고 전했다.
한국 회사에 취직 원해
그는 편지를 보낸 뒤 10일 후에 미국으로 갔는데 사업차 잠시 들렀는지 아니면 이민을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었거니와 남규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남규씨의 아버지는 1년 후 베트남을 방문, 가족을 만나고는 곧 다시 연락할 테니 참고 기다리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 달라』고 친아버지로서 부탁의 말을 한 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남규씨의 아버지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한인 2세 아버지들이 한 줄 편지나 단돈 1백 달러의 경제적 지원도 하지 않는 것에 비한다면 남규씨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남규씨가 나를 찾아 온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생사가 궁금하니 옛날 부산 주소에라도 연락하여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커피숍에 마주 앉아 1시간을 함께 있었지만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남규씨와 동생 남숙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낡은 사진 몇 장과 편지 한 통이 전부였다. 그리고 영어 단어 몇 개를 이어 자신의 현 실정을 말했는데 직업 없이 놀고 있다는 것, 휴맨직업기술학교에 다닌 지 두 달이 됐다는 것, 앞으로의 꿈은 한국 회사에 취직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유난히 눈이 커 눈물이 많을 것 같던 남규씨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떤 슬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한국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고충과 가족의 비극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답답하다는 표정뿐이었다. 저녁 수업시간이 다 돼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남규씨는 자전거에 몸을 실은 뒤 인사도 없이 페달을 밟았다. 내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남규씨의 모습이 군중 속에 파묻혀버렸다.
사이공(현 호지민시)의 밤거리, 베트남전쟁 당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던 그 시절에도 사이공의 밤거리는 환락의 물결로 가득차 있었다. 전쟁 특수를 노린 기업인들이 대거 들어가 호텔, 무역업 등의 비즈니스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뚫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특수는 한국경제가 중진국으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베트남 특수는 70년대 중동 특수로 이어졌으며 오늘의 경제부흥을 이룩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지 18년, 다시 호지민의 밤거리는 환락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었다. 세계 제 3의 쌀 수출국에다 무궁무진한 천연 자원을 지니고 있는 나라. 베트남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밤거리도 서서히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5백만 명에 이르는 호지민 시민들이 밤만 되면 시내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일제 혼다 오토바이의 경적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거리 노천카페에는 젊은 남녀들이 다정하게 앉아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호지민 밤거리, 자본주의 냄새 물씬
호지민의 밤거리에서는 사회주의 색채를 느끼기 힘들다. 그만큼 개방화, 자유화됐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시민들의 의식 속은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아직까지는 사회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하기는 어렵지만 삶의 행태는 자본주의 국가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호지민시 한복판에는 호지명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인민위원회 건물 앞에 있는 이 동상은 미소 띤 얼굴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담고 있다. 동상 주위는 잔디와 꽃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동상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인민위원회 건물을 비롯 전쟁 당시 미군들이 주로 사용했던 렉스 호텔과 캬라벨 호텔 및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호지명 동상 밑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기도 하고 부모의 손을 잡고 소풍을 나온 어린 꼬마들이 풍선을 들고 뛰어 놀기도 했다. 오징어포 장사도 있고 복권 파는 아줌마도 있다. 담배 몇 개피를 내놓고 파는 젊은 처녀가 있는가 하면 다리를 잃은 불구자가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한 호지명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는 직업 카메라맨도 만났으며 외국관광객을 목표로 한 매춘부의 의미있는 미소도 느낄 수 있다. 호지민의 밤거리는 20-30년 전 사이공의 그 밤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호지민 시내 한 가운데 당시 미국의 철천지원수였던 호지명이 20년이 지난 오늘에는 「베트남 국부(國父)」가 되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택시를 탔다. 노란색 택시 위에는 8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호지민 택시 협회에서 정해준 숫자였다. 교통 사정이 나쁜 호지민시는 외국 관광객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20대의 택시를 구비, 외국 손님을 받고 있는데 내가 탄 택시는 바로 8번이었던 것이다.
택시요금은 기본료 2달러에 3백 m 주행마다 25센트가 늘어났다. 우리나라 중형 택시보다 비싼 요금이었다. 때문에 베트남 현지인들이 택시를 이용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한 달에 50달러도 못 버는 사람들이 태반인 나라에서 비싼 택시를 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 택시 외에 다른 택시가 있기는 하지만 차가 오래됐고 안전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비싼 택시를 이용하곤 한다.
택시 기사는 38세의 젊은 남자였다. 1남 1녀의 자식을 두고 있다는 그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하자 『현대를 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그는 『현대차가 베트남에도 들어왔다』고 얘기하고 한국 경제 성장에 대해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때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폐해를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잘 사는 (?)한국이란 나라가 부럽다는 말만을 계속 해댔다.
그는 또 자기 아들이 태권도를 배운다고 자랑하며 언제 한번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어떤 위선이나 부끄러움도 들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술도 아니었을 그의 이야기 속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부러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노점상 하루벌이 3달러
내가 『한 달에 얼마나 수입을 올리냐』고 물어보자 『2백 ~4백 달러는 번다』고 대답했다. 수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그는 베트남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에 들어간다. 따라서 자기 친구들도 택시기사를 하고 싶어 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을 상대로 한 택시를 운전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내도 돈벌이를 나간다고 했다. 무슨 직업이냐고 묻자 『노상에서 카페를 한다』고 했다. 「카페」라는 말에 근사한 시설이라도 갖추고 장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호기심 때문에 직접 찾아갔더니 오렌지 주스, 콜라 등 음료 몇 병을 내놓은 채 장사를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포장마차나 다를 바 없었다.
『하루에 얼마나 파느냐』고 물었다. 그의 부인 말에 따르면 아침 7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장사를 해야 약 5만동 (5달러)의 매상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그것도 자기 여동생과 함께 하는 사업이고 보면 그녀가 하루에 자기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돈이래야 기껏 3달러도 넘지 못하는 적은 돈이다.
호지민의 밤은 깊어갈수록 휘황찬란해졌다. 베트남의 통일이 이루어진 날(4월30일)이 가까워서인지 시내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특히 젊은 쌍쌍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탄 채 경적과 휘파람을 울려대며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에서 자유의 물결, 베트남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자정이 넘어 숙소로 돌아가는데 호텔 옆에서 우편엽서, 담배, 기념주화 등을 파는 젊은 여자가 내게 다가와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다』며 베트남 우표세트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10만동(10달러)를 주고 우표세트를 산 나는 호지민의 밤거리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푸녕기술학교의 한글교육
『1. 학교 사랑 나라 사랑.
2. 배우는 사람답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자.
3. 궂은 일은 내가 먼저, 좋은 일은 네가 먼저.
4. 우리의 힘으로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많은 사랑의 다리를 놓자.』
푸녕기술학교 교문 오른쪽에 한글로 쓰여 있는 교훈이다. 현재 베트남에 한인 2세들을 위한 기술학교로는 뱃코기술학원, 휴맨직업기술학교, 푸녕기술학교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개인적으로 몇 사람이 더 한인 2세들의 자립을 위해 힘이 돼 주고는 있지만 현재까지 체계있게 일을 하는 학교는 위의 세 기술학교다.
푸녕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은 베트남에 사업차 들어갔다가 한인 2세들의 고충을 직접 목격, 이 일에 뛰어든 이종오(52)씨다. 그는 뱃코기술학원을 맡고 있는 정주섭씨나 휴맨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 개신교 목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정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이라 한인 2세들의 비극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는 선교적 차원에서 기술학교를 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전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 일에 몸을 바친 이 씨의 경우는 순전히 인도적 차원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첫번째 사업에 실패한 뒤 귀국할 생각을 가졌으나 사업 현장에서 만난 한인 2세들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기술을 가르치고 한글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이 씨는 하게 됐다. 드디어 푸녕구 인민위원회와 협의, 교사봉급과 학교운영에 필요한 제반 경비로 달마다 1천 5백달러를 제공하기로 하고 학교 문을 열었다.
90년 7월 문을 연 푸녕기술학교를 통해 한인 2세는 물론 베트남 현지인들도 취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봉제반이나 전기반 과정을 끝마친 학생들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얻어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푸녕기술학교는 한인 2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베트남청년들을 위해서도 전액 무료로 학교를 개방,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학교방문이 취재 목적에 있다는 사실을 안 이 씨는 푸녕기술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했다. 한국에서 수많은 신문과 방송들이 이 씨의 학교를 방문, 보도를 하고 방송을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자신의 설명과는 다른 흥미 위주여서 아무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불똥이 나에게 튄 셈이다.
이 씨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매스컴들이 한인 2세들의 실상을 알려 한국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주기 보다는 베트남 전체를 소개하면서 단순한 맛뵈기 정도로만 취급, 동정을 유발하는 선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 씨는 아무 이익도 없는 기술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들기도 했고 부질없는 짓인 것만 같아 그만두려는 생각도 수차례 했다고 한다.
이종오씨는 또 한인 2세를 돕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 베트남과 한국이 수교가 된 만큼 지난 시대의 적대 감정은 잊어버리고 정부 차원의 적절한 대책 마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핏줄 보호에 철저한 미국
반면 베트남 사회에서 「아메라시안」으로 불리는 미국계 혼혈아는 지금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베트남에 대한 무역 엠바고를 풀어주지 않아 베트남경제에 큰 타격을 미치고 있는 미국은 자신들의 핏줄인 아메라시안 문제만큼은 인도적이고 대국적인 차원에서 풀어나갔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미국계 혼혈아와 그 가족은 대략 4만~5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패전국 미국은 종전 후 4년 만인 79년부터 「이산가족의 결합」이라는 인도적 명분 하에 이들을 미국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제네바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난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결정, 국제적 문제였던 「보트피플」과는 다른 차원의 합법이민프로그램(ODP)으로 명명, 미국 사람들의 피가 섞인 베트남 사람들을 본토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계 혼혈아는 물론 사이공 정부의 군인, 고위관리 등의 재교육캠프에 수용됐던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의 접촉으로 인해 베트남 통일 이후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적용됐다. 심지어는 보트를 타고 해외로 탈출한 가족들도 해당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정부도 비록 적국에 동조했던 불순세력이기는 했지만 이산가족의 결합이라는 인도적 차원에서 1만 8천여 명의 아메라시안 가족을 파악, 명단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지난 10여 년간 아메라시안 대부분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지금도 계속해서 떠나고 있다.
따라서 하얗고 까만 피부가 섞인 미국계 혼혈아를 베트남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자신들의 핏줄만은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정신이 실천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수많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도 자기 핏줄만은 지켰다는 도덕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남의 전쟁에 뚜렷한 명분 없이 끼어든 우리는 「미국의 용병」이라는 치욕적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유 수호」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젊은이들의 피를 수출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참전은 무리였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참전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국제 정세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극단적인 대립양상이었다. 아울러 한국 전쟁 때 유엔의 16개국이 피를 흘려가며 싸워준 보답을 해야 한다는 명분과 부담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전 후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남겨둔 핏줄, 한인 2세들을 위해 그 어떤 보상이나 조치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 정부의 비도덕성을 낱낱이 보여준 증거였다. 비록 양국의 외교적 관계가 단절이 되어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적십자나 유엔의 협조를 얻어 한인 2세의 실태를 파악,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시책을 마련했어야 하는 것이 도덕을 아는 민족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인 2세를 위한 조치 전무
몇년 전부터 양국간 경제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인 2세들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제 2의 월남 특수」니, 「가자, 우리가 땀과 피를 흘린 원남 정글로」라는 관광회사의 발 빠른 여행 선전문구들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반성이나 도덕적 수치심을 절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베트남에 혈육을 남기고도 돌보지 않는 그들 아버지의 심정과 현실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대부분 이미 한국에서 또 다른 가정을 꾸렸을 것이고 그 동안 양국 사이에 가로막힌 이념의 벽 때문에 상호 연락할 수 있는 계기나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자식을 버린 철면피라고 매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그러나 이제 50~60대 줄에 이르렀을 그들 아버지와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18~30세 나이에 도달한 자식 간의 혈육 상봉은 어떻게든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간다. 열대지방이라는 자연의 불리함 속에서도 그들은 쉴 틈이 없다. 잠시라도 쉬면 다른 나라를 결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바쁜 모습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새벽 러시아워 자전거 통근 길에서도, 노상에서 한 그릇의 국수를 먹는 시클로 운전사의 젓가락에서도, 차이나타운 촐롱시장의 과일가게 여주인의 빠른 손놀림에서도 그리고 석유 몇 통을 자전거에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 20대 청년의 다리 근육에서도, 바쁘게 돌아가는 베트남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바쁜 이유는 돈을 버는 데 있다. 돈을 벌어도 악착같이 벌어야만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다. 고급 공무원은 일과가 끝나자마자 영어 강사로, 일반 공장 젊은 직원은 시클로 운전사로, 가정주부는 집안을 정리해 놓고 시장 골목에서 복권 파는 장사꾼으로 변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직업만으로는 한끼 외식은커녕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는 것이 오늘의 베트남 현실이다. 학교 선생 월급이 20만동(20달러), 의사는 30만동(30달러), 공무원과 경찰들도 30만동을 받으며 생산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보다 조금 많은 35만동(35달러)를 번다고 한다.
때문에 부업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기가 있는 것은 시클로 운전이다. 한 달에 30~40달러를 벌 수 있는 시클로 운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클로 한 대 값이 2백 달러 정도인 데다가 구역도 제한이 되어 있고 시클로도 한정이 되어 있어 쉽게 얻을 수 없다.
베트남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은 외국인 회사다. 베트남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급을 많이 주고 일하기가 다소 편한 까닭이다. 휴맨직업기술학교 교장 누엥 딩 리씨의 부인도 현재 대만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 한 달에 받는 월급이 약 1백만 동(1백 달러)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보통 베트남 회사에서 받는 것보다 2~3배에 달한다. 그녀는 그러니까 베트남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 회사 최고 인기
그런데 그 적은 월급을 갖고 달마다 생활을 꾸려가는 베트남사람들이 신기해 보였다. 물론 쌀을 비롯한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싸다고는 하지만 그 돈으로 생활해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호지민 시내에 꽉 차 있는 혼다 오토바이(한국 돈으로 약 70 만원 가량)와 주말이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수많은 베트남 연인들이 맥주를 마시며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값싸지 않을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함께 한 잔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돈을 버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나중에 어느 베트남 사람에게 물으니 일제 오토바이의 80~90%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형제나 친척들이 사준 것이라고 말했다. 즉, 외국에 나가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잡은 그들의 친인척들이 선물로 사주고 가거나 살 수 있는 돈을 부쳐줬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의 경제전망은 밝다고 한다. 미국이 곧 경제금수조치를 풀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많은 외국 자본이 들어오고 경제는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무궁무진한 천연자원에다 근면하고 성실한 베트남 사람들의 인적 자원까지 합치면 동남 아시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나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세계 경제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베트남이 미국의 엠바고가 풀리면 앞으로 10년 내로 타이를 따라갈 수 있고 20년 안에는 한국, 싱가포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망 밝은 베트남 경제
하지만 이러한 예측을 실현 가능케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베트남 정부의 개방된 경제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폐쇄적인 경제 정책 가지고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다.
베트남 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 경제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에서 시장경제에 맡기는 경제 시책을 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고민인 것이다.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의 경제이념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전적으로 시장 경제를 따르는 것은 곧 사회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이 86년부터 펼치고 있는 도이모이 정책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경제 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전적으로 관리하던 토지나 기업 등을 어느 정도 개인에게 양도, 또는 위임했으며 그 반응은 현재까지 좋은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러시아를 비롯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몰락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도이모이 정책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성화시켜 국민들에게 일할 의욕을 심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봇물처럼 터진 개방의 물결을 베트남 정부 자신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베트남 경제의 암적인 요소인 밀수를 막아낼 수 있는 뚜렷한 대안도 없거니와 이제 와서 시장 경제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베트남이 고집스럽게 잡고 내놓지 않는 사회주의 이념 고수라는 마지막 남은 열쇠를 세계시장 앞에 내놓을 때 베트남 경제의 꽃은 활짝 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인 2세의 실태를 취재하고 기술학교 운영 관계자들을 만나는 동안 끊임없이 제기된 의문은 한인 2세의 문제 뿐 아니라 기술학교끼리의 어떤 경쟁적인 관계 때문에 야기되는 불협화음이 있을 것이라는 추축이었다. 단순히 한인 2세가 불쌍하기 때문에 도와줘야 한다는 동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한인 2세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만이 자립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보다 본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그러기 우해서는 한인 2세의 문제 및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몇 몇 기술학교의 문제 또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한인 2세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한국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한국에 대한 정(情)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핏줄을 나누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베트남 국적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한인 2세들의 나이는 18세서부터 30세까지 분포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던 무렵에 태어난 아이는 20세 청년으로 자랐고 1964년 베트남 전쟁에 처음으로 참전한 군인과 함께 들어간 근로자들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30세가 넘은 장년의 대열에 들어섰다.
한인 2세들에겐 지옥의 땅
종전 후 베트남의 상황은 한인 2세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땅이었다. 적국의 아내, 적국의 자식이라는 오명이 그들의 험난한 삶을 결정지었다. 학교는 물론 군대도 들어갈 수 없었으며 마땅한 직업도 구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든 실정이었다. 자신의 신분조차 숨겨가며 살아온 이들의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그렇게 배웠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인 2세에게도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쳤다.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개방의 물결을 타고 남지나해를 건너 베트남에 상륙한 것이다. 보따리 장사를 시작으로 중소기업, 대기업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베트남 경제 부흥의 일조를 해주면서 한국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교정하는 계기가 됐다.
이 와중에 한인 2세들이 아버지의 나라, 한국의 놀라운 경제 부흥과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레벨을 이용, 하나 둘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다낭, 나트랑, 칼란 등 곳곳에서 호지민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인 2세 문제가 국내 매스컴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전쟁 당시 통역 장교로 활동했던 김병하 씨에 의해서였다. 그는 베트남에 남아 있는 한국인 2세가 7천명이 넘는다고 3년 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양국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한인 2세의 문제도 같이 거론되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대책 마련을 현재 정부에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인 2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일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베트남 경제의 취약성 때문에 취업 기회가 별로 없기도 하지만 취업을 할 수 있는 기술이나 자격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기술학교를 통해 전기, 재봉, 컴퓨터 등의 기술을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졸업 후 취업을 한다는 보장도 별로 없다.
뿌리 없는 정신적 공백 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버지 부재(不在)」로 인한 정신적 공백이다. 즉,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그들의 삶과 사고방식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창 밝게 자라나야 할 그들이 단지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 때에 정신적 허탈을 느껴왔다는 사실이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마땅한 혼처도 없고 게다가 돈마저 없으니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의 고역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비난은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자기 뿌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들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한인 2세들을 위한 기술학교의 문제점은 시설의 영세성이나 미약한 재정보다는 사소한 이유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상대방 학교를 칭찬하거나 긍정적인 시각으로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기보다는 한인 2세들을 담보(?)로 한 이전투구의 양상까지도 엿볼 수 있었다.
결코 돈벌이도 되지 않는 일이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사업도 아니었다. 그 일은 봉사와 남모르는 헌신만이 필요로 한, 어둔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되는 숭고한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한인 2세 지원 사업이 일원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사업차 왔다는 한 사업가는 이 문제에 대해 『불우한 환경에 있는 한인 2세를 돕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전제, 『그러나 그들을 내세워 다른 목적의 일을 꿈꾸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씩 양보하여 사업을 일원화, 보다 체계 있는 지원이 펼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술학교를 위해 한국기업체에서 돈을 지원해 주기도 했으나 이제는 어떤 학교를 도와주어야 할지 몰라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또한 학교에서 서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매월 생활비를 지급하는 사례도 있으며 한인 2세들이 좀 더 좋은 조건과 시설을 찾아 철새처럼 집단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기술학교의 경쟁적인 관계로 인해, 직업 없이 떠도는 그들에게 의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인 2세를 고용해본 경험이 있다는 또 다른 사업가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 』는 말이 있듯이 한인 2세를 고용, 그에게 남보다 많은 월급을 주고 애정을 보여줬지만 결과는 베트남 현지인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고 경험담을 얘기했다.
즉, 주인이 한국인이니까 대충 넘어가 주겠지 하며 빈둥빈둥 놀거나 주인 눈치만 보고 일도 하려고 하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이 가급적이면 한인 2세들을 고용하려고 해도 너무 무책임하고 일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기피하고 있다고 한다.
숫자 파악부터 정확히 해야
그렇다면 한인 2세들을 계속 방치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의타심을 고쳐주지 않은 채 외면해야만 하는가. 이 문제는 뜻있는 개인이나 선교단체에서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한 개인이 이 일을 하기에는 경제적인 무리가 있고 선교단체에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종교적인 마찰 등이 야기될 위험 소지가 있으므로 정부 차원에서 대안을 모색, 풀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 차원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한인 2세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현재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숫자가 들쭉날쭉이다. 어떤 사람은 3천명 미만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적어도 3만 명은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을 추진하기 전에 정확한 실태를 파악, 지원 사업의 효율성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이미 작년 12월 베트남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바 있으므로 베트남 정부에 공식 요청, 한인 2세의 정확한 통계를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일을 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일을 위해 공무원을 파견할 수도 없는 일이고 기술학교를 따로 세워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적십자 같은 단체에 위탁, 한인 2세들의 자립교육을 위한 기술센터를 하루 빨리 짓는 일이 시급하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기술학교들은 시설과 재정이 열악,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한인 2세들이 아무 불편 없이 베트남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자립기반을 마련해주는 데 아낌없는 투자를 해줘야 한다.
현재 가톨릭 측과 적십자사가 이미 기초조사를 끝냈으며 곧 공사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시간을 여유 있게 두고 할 성격의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관계자들은 파악해야 한다. 이미 한인 2세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에 들어섰기 때문에 하루 빨리 이 일을 펼치지 않으면 그들에게 기술 교육을 가르칠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외 봉사단 같은 단체를 베트남에도 투입, 한인 2세들의 자립교육은 물론 빚진 베트남에 적은 보답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라이 따이한, 한인 2세.
마치 저 먼 나라 아이들의 얘기처럼 들렸던 라이 따이한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또 다른 핏줄이라는 혈연적 관계를 떠나,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베트남 전쟁의 비극적 유산인 그들을 위해 이제는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진지하게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베트남을 떠날 시간이 다 됐다. 일주일의 짧은 체재 속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치부와 라이 따이한의 눈물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만난 한인 2세는 한결같이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이제는 잊혀질 만도 한데 그들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를 그들은 오늘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박남규 씨나 우엥 양도 그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아버지의 옛날 주소를 적어주며 나에게 도움을 청하던 라이 따이한들의 슬픈 눈동자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더욱 비통하다.
끝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
라이 따이한의 25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베트남 땅에 떨어졌고 또 숱한 곡절 속에서 생을 이어온 그들은 아직도 정착하지 못한 채 베트남 한 귀퉁이에서 기생하고 있다. 사각의 링에 서 있는 것처럼 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는 그들의 운명을 누가 쥐고 있는 것일까.
호지민 탄손누트 공항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시클로 운전사도 열심히 페달을 굴리고 있었으며 가인(베트남식 지게)을 어깨에 지고 물건을 팔러 어디론가 떠나는 아낙네도 바쁜 걸음이었다.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외국에 사는 딸을 환송하기 위해 공항까지 나온 부녀는 계속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차마 딸을 보내기가 아쉬운 아버지와 늙은 아버지를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하는 젊은 처녀, 그들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공항 청사에서, 승객 대합실에서, 그리고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공항 옥상에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삼키던 그 아버지의 주름 잡힌 얼굴에서 나는 베트남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역사적으로 끝났는지는 몰라도 국민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라이 따이한에게는 끝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가 탄 비행기는 구름 속에 묻혀 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