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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18:1-32) 해피엔딩, 새드엔딩, 앵그리엔딩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참 좋은 아침입니다.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에스겔 18장 말씀으로 함께 합니다. 우리는 1-4절, 21-24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오늘 말씀중심으로 <해피엔딩, 새드엔딩, 앵그리엔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이라는 말은 여러분께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에 그 영화 속에 드라마 속에 주인공들의 결말이 잘 되고 아주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해피엔딩이고, 그 주인공들의 결말이 원치 않게 불행하게 슬프게 절망적으로 끝나는 것이 새드엔딩입니다. 아직까지도 인터넷을 보면 곳곳에 회자되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가 17회 때에 여주인공이 스턴트맨인데 드라마 속에서 영화를 찍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20회까지 방영이 되는 드라마인데 17회 때에 여주인공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닥치자, 그 드라마를 방송하는 방송국의 드라마 홈페이지가 다운이 돼버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의 절대로 이대로 새드엔딩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요청으로, 그 기사의 표현을 보면 거의 인터넷 온라인상에서의 테러수준이라고 나왔습니다. 심지어는 18회, 19회가 진행되기 전에 영화 사이트인 맥스 무비라는 사이트에서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결말은 무엇이냐?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조사를 해봤는데 87.5%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야만 한다는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빌리면, 자기 남편이 ‘당신이 만일 이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를 새드엔딩으로 끝낼 경우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라고 했답니다.(하하하) 참, 해피엔딩에 대한 시청자들의 집착은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이, 모든 여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여자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 서는 겁니다. 자기가 동경하던 인생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니까 자기가 죽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앵그리엔딩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앵그리엔딩은 제가 만든 말이에요. 그럴 것 같아요. 제가 다 조사는 안 해봤으니까 그런 엔딩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우리는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말할 때 주로 주인공을 중심으로 말을 합니다. 주인공이 잘될 때, 주인공이 잘 안될 때. 그런데 앵그리엔딩은 주인공이 잘 되려면 반드시 드라마 속에 같이 등장하는 악역이 있어요. 악역이 잘못되거나 악역이 망하거나 악역이 적어도 죽거나 망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그 세력이 누그러지거나 쇠약해져야 해피엔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악역이 잘 되고 끝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다? 사실 없어요. 찾아보기 힘들어요. 주인공이 잘못 될 수는 있지만, 악역이 잘 된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는 드라마는 없어요. 주인공이 잘못 되면 악역이 잘 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드라마의 포인트는 주인공이 잘못 된다는 것에 맞춰지는 겁니다.
그런데 악역이 잘 된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는 그런 드라마와 영화가 있다면, 이것은 앵그리엔딩입니다. 보는 모든 시청자들의 마음이 분노 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정도로 분노가 되느냐를 알려면, 어느 정도로 해피엔딩을 원하는 가를 알면 되잖아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은행 강도로 나오지 않습니까? 은행 강도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면 주인공인 은행 강도가 은행을 털 때에 그 은행 강도인 주인공을 막는 경비원 아저씨도 미워요. 경비원 아저씨가 총을 쏴서 다치기라도 하면 그 경비원 아저씨가 밉다니까요. 그리고 막 끝까지 쫓아오는 경찰, 끊임없는 추적을 벌이는 경찰들, 손에 땀을 쥐는 이유가 못 잡을까봐 손에 땀을 쥐는 게 아니라 잡힐까봐 손에 땀을 쥐는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해서 해피엔딩을 원합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은행 강도가 무조건 잘 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그걸 어떡하든지 기술적으로 잘 도덕적인 부담감을 무마시켜서 하여간 은행 강도짓을 했어도 주인공이면 잘 돼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정도로 해피엔딩을 원하는데 악역이 잘 된다? 아, 이건 진짜 앵그리엔딩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앵그리엔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1절부터 24절 우리가 읽은 부분을 잘 보면 23절을 보세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경제, 교육, 문화, 체육 모든 방면에서 무조건 대한민국을 이길 때, 무조건 잘 될 때에 앵그리엔딩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 선수에게 경기마다 무조건 다 지고, 축구도 일본한테 다 지고, 핸드볼도 지고, 스키도 지고, 경제도 지고 다 집니다. 앵그리가 안 될 수가 없지요. 마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앗수르를 위해서 앗수르의 생명을 건져내기 위하여 회개를 선포하고 멸망을 선언하라고 할 때 요나가 싫어합니다. 그 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삼 일 만에 나와서, 겨우겨우 죽어도 하기 싫은 심판의 경고를 하기 위해, 니느웨 성에 가서 조금 시내를 걷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회개하라 회개 안하면 너희가 망한다.”라고 작게 들릴락 말락하게. 그저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선지자로서의 책임만 다하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제 망할 것을 기대하면서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니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다 금식을 하면서 회개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멸망이 그쳤습니다. 그걸 보고 앵그리하는 거예요. 앵그리엔딩이에요.
하나님이 써 가시는 인생의 드라마는 악인이 살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하시는가하면, 24절에 기가 막히게 “만일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혹시 공의로운 일을 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동안 허물과 지은 죄로 죽으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어떤 배경이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국운이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이런 속담을 자꾸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리다.”라는 속담을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 된 것은 바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 지경을 당하는 것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 이가 시린 것이.' 한 마디로 조상 탓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처지, 환란, 고난, 역경의 환경이 바로 아버지 탓이고 조상들 탓이라고 하는 마음자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니다. 지금 너희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는 것은 지금 너희가 악하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지금 너희가 악하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너는 너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네가 악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지금의 불행한 일들을 조상의 탓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은, 네가 스스로 의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네 깊은 마음속에는 네가 의인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악인과 의인이 나오지만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우상숭배가 편만하던 그 때에 도대체 의인이 누굽니까? 그런데 겉으로 자기가 자기 입으로 오늘의 교회 현실 안에서도 자기를 향하여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속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일이 잘못되거나 그릇되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거나 마음에 안 맞는 일이거나 불만이 생기면 무조건 그 탓을 남을 향하여 돌리는 그 사람이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본문에서 보면 “악인이 살 것을 여호와께서 원하십니다. 의인은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게 바로 앵그리엔딩이에요.
쉽게 말해서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상대편의 우두머리가 있어요. 분쟁을 이끄는 리더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개 장로님이든지 그쪽에서 이쪽을 보면 아무개 목사님이든지. 그러면 속마음으로 그 분쟁이 오래 지속되고 너무 격하게 감정이 발동되다 보면, 속마음으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콱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쪽 사람은 너무나, 너무나 잘 살고 있거든요. 참 질기게도 목도 쉬질 않아요. 소리소리 질러도. 나는 꽥 소리 한 번 하면 목이 콱 쉬어버리는데 이게 앵그리엔딩이에요. 이상하게 악인이 잘 된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악인이 다 잘되게 하십니다. 돈도 잘 벌고 건강하고 오래 살게 돼요. 날마다 앵그리엔딩이 되는 이유는, 내가 바로 모든 잘못과 불행과 불만인 일들이 생길 때, 남의 탓을 돌리면서 내가 의인이요,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인생은 앵그리엔딩이 됩니다. 왜?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그 탓의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멀쩡하게 다 잘살고 있으니까.
그러면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는 길이 어디 있을까요? 우선 내가 바로 누구 탓을 할 게 아니라, 부부간의 문제가 있건, 자식 간의 문제가 있건, 가정에 문제가 있건, 직장에 문제가 있건, 나라에 문제가 있건, 대통령이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더라도 심지어 그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내가 악역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제 해피엔딩을 향한 길이 시작됩니다.
내가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인생의 열쇠가 열린다는 거예요. 지금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다면 그걸 조상 탓으로 돌리면서 왜 나는 의인의 자리에 서고 주인공의 자리에 서냐는 겁니다. 내가 바로 악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속해 있는 인생의 드라마가 해피엔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역인 내가 죽어야 해피엔딩이 된다는 거예요. 내 죄를 봐야 한다는 거예요. 내 죄를 보고 내가 악역인 것을 알고, 자식이 잘못 되는 게 내 탓 인줄 알고. 내가 악역인 것을 알아야 해요. 자꾸 자식한테 ‘너, 왜 공부를 안 하느냐? 내 때는 형광등도 없어서 촛불 켜놓고 공부했는데 너는 이 좋은 환경에서 왜 공부를 안 하느냐?’ 그러지 말고 내가 악역이라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자식과 나 사이가 행복해지려면 악역이 죽어야 됩니다.
여러분! 본문에 21절에 보면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23절에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이 나와요.
여러분! 내가 진짜 내 속에 어쩔 수 없는 죄악이 들어있는 악역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악인인데 악인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드라마나 극중에서 저지른 모든 죄악을 담당하는 악인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길은, 오직 그 죄 값으로 죽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야 깨끗이 끝나요. 그래야 주인공이 잘될 수 있는 것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인생의 드라마 속에서 내가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는 악인입니다. 이 인생 속에서 나는 악인이라고요. 그러므로 내 인생의 드라마가 행복해지려면, 모두가 다 행복해지려면 내가 죽으면 되는 거예요. 딴 게 아니에요. 키가 거기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2차 침입 뒤에, 3차 침입 일어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모두가 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의 결정적인 이유가, '나의 악역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다 내가 죽어 마땅하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라고 했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3차 침입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 가정이 불행하냐? 지금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부부관계가 나빠졌느냐? 아내 탓하고 남편 탓할 필요 없이, 지금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회사가 망하느냐?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는 수위밖에 안되는데? 그래도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행복해 지려면 내가 죽는 것이고, 악역이 행할 수 있는 공의와 정의는 죽는 길 밖에 없어요. 그 죽는 길을 주님의 십자가가 열어 놓으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인입니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악인이에요.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악인이 행하는 행위들의 예가 몇 가지 나옵니다. 그건 몇 가지 예를 드는 것뿐이에요.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모셔 들이지 않고, 자식이고 뭐고 마음에서 사랑하는 것 모든 것이 다 죄인이고 악인이고 더러운 것이고 간음입니다. 그런 악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이 이렇게 안 되고 있으니까, 이런 악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악인으로서 행할 수 있는 공의와 정의는 십계명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계명을 행합니까?
하나님이 구약에서 제시한 율법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제시한 새로운 법들이 아니에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켜요. 그러니까 악인이죠. 산상수훈은 너희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라는 뜻이에요. 악인이라는 걸 알고 나면, 악인이 행할 수 있는 공의와 정의는 십자가 붙잡고 매사에 죽는 겁니다.
자식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그 자식보다 더 악한 게 나라는 걸 알고 자식과의 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원하시면, 내가 십자가 붙잡고 내 마음이 자식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야, 내 죄를 보면 내가 자식에 대해서 무슨 탓을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주님 십자가 붙잡고 내가 죽을 때에, 내 마음이 주님 품 안에서 천국에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공 되시는 주님께서 드디어 몸을 성전 삼아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 실 때에, 주님도 해피하시고 나는 나대로 십자가 붙잡고 죽음을 통하여, 하늘나라 천국 보좌에 계신 아버지 품에 내 마음이 안기게 됩니다. 하늘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하여 하늘을 느끼고 하늘을 실감하게 되지요. 이렇게 될 때에 나도 내 마음에 하늘의 해피함이 느껴지고, 내가 악역인 것을 알고 율례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에서 죽을 때,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공이 되셔서 당신의 뜻을 왕성하게 펼쳐나가실 수가 있는 것이에요.
모든 인생의 불행은, 드라마의 불행이 왜 생깁니까? 악역이 왕성하게 되고, 주인공이 쪼그라들 때에. 마찬가지예요. 내 인생의 불행함은 내가 악역인 줄 모르고 내가 왕성하게 될 때에, 주인공 되시고 모든 일에 범사에 나타나셔야 될 하나님의 뜻이 쪼그라들고, 주님의 역사가 쪼그라들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새드엔딩이 되는 것이고, 내가 왕성해질 때에 하늘에서는 앵그리엔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천사들이 볼 때에, 하나님이 보실 때, 주님이 보실 때 정말 진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악인이 왕성해지니까. 자기가 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난리를 치면서 내가 왕성하게 살아갈 때에, 내 인생은 앵그리엔딩이 되기 때문에, 그 앵그리를 하나님께서 표현하시는 것이 분노 아닙니까? 우리가 드라마를 봐도 악인이 잘 되고 주인공이 쪼그라들면 앵그리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내가 악인입니다. 그리고 내 몸을 성전 삼아서 이 땅에서 활동하셔야 될 성령께서 주인공이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주인공이신데, 내가 왕성해짐에 따라 악인이 왕성해짐에 따라, 그 주인공들이 쪼그라들 때에 하늘에서 앵그리가 시작돼요. 분노와 진노와 심판이 주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이 안 좋게 될 때에 남을 탓하면서 내가 주인공 되지 마시고, 내가 바로 악역인 것을 내가 왕성했기 때문에 내 생각과 계획이 왕성하고 내 소원이 왕성했기 때문인 것을 알고, 계획과 소원과 판단과 모든 걸 다 끌어안은 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악역으로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공의와 정의를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보좌가 있는 하늘나라 천국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고, 하늘의 행복함을 느끼는 동안에 이 땅은 주님이 주인공이 되셔서 해피엔딩을 날마다, 날마다 이루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가 주인공으로 착각하여 내가 생각하는 악인들과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형통을 보며 앵그리하지 않게 하여주시고, 내가 악역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악역인 줄 모르고 내가 왕성해지기를 바라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앵그리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하셔서 악인으로서 가야할 유일한 길인 십자가로 가게 하시고 죽게 하시므로, 나도 하나님도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환경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악인이 의인인체 하고 살았습니다.
죽고 또 죽고 온전히 죽어 그리스도만 왕성하게 사시므로 해피엔딩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