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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6.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4984&path=202101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1.17 발행 [1597호] 하느님 모상인 인간은 서로에게 거울과 모범이 돼야 ▲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성인은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거울과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작은형제회 한 수도자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받은 노숙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CNS 자료 사진】 프란치스칸 영성가인 리처드 로어 신부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성’이라고 규정한다. 상식적인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질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본다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말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삼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의 본질은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 모든 존재는 그런 하느님의 본질이 각인된 채 창조되었는데, 특히 인간은 그런 사랑의 관계성이신 하느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이 지니는 품위는 ‘감히 하느님과 유사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빠진 자기기만(악마의 유혹)은 자신들의 근본적이고 고상한 품위의 본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미 하느님과 같은 품위를 지닌 자신들의 본질을 저버리고 하느님과 같아지게 해줄 것이라는 거짓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도 관계성, 즉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지만, 특히 인간은 서로의 약함을 끌어안고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며 삼위일체의 하느님처럼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들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피조물과 인간의 현격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20절)고 말한다. 일전에 넷지오-와일드(NetGeo-Wild)라는 채널에서 개미의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개미들의 군집 생활과 여왕개미와 일개미들의 관계, 개미 무리 간의 전쟁 등을 잘 조명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중간중간에 개미들의 생태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전쟁과 권력 다툼, 살인, 노략질, 인신매매 등의 모습을 중첩된 화면으로 보여 주면서 해설자가 “개미들이 꼭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라는 설명을 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은 ‘하느님이 왜 개미들을 저렇게 살도록 만드셨을까?’였다. 꽤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결론에는 이를 수 있었다. 그 해설자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이다. 즉 ‘개미들이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개미들처럼 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처럼 살도록 창조되고 불린 것이지 개미나 다른 동물들처럼 살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에페소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을 한번 잘 묵상해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4)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글을 보면 ‘양식(forma)’, ‘모범 혹은 모델(exemplum)’, ‘거울(speculum)’ 등과 같은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이 말들은 모두가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들이고, 서로 간에 사랑과 존중, 그리고 심지어는 생명(하느님의 생명)까지도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는 단어들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유언에서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던 프란치스코의 예언자적 행위를 상기하고 있다. “와서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짓는 데 나를 도와주십시오. 사실 이곳에서 여인들이 살게 될 것인데,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영예스럽고 거룩한 생활로써 당신의 거룩한 온 교회 안에서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클라라 유언」 4절) 클라라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자매들에게 모두 거울과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세속에 사는 이들에게 거울과 본보기가 되도록 우리 생활양식으로 불러주신 우리 자매들에게도 우리를 모형과 본보기와 거울로 삼으셨습니다.”(「클라라 유언」 5절) 우리는 하느님의 “동업자”요 그리스도의 지체의 약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로 불린 이들이다.(「아녜스에게 보낸 클라라의 세 번째 편지」 8절) 사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나는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양식(모델-forma)이 되어야 하는 이들이다. 빙겐의 힐데가르드 성녀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인간 역시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과 함께 창조사업에 협력하도록 불렸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7.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5465&path=202101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1.24 발행 [1598호] 관계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가장 선한 본질이며 사랑 ▲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눈과 믿음과 관상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말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감인 것이다. 그림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성인이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관계성 안에서의 인간 이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관계성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들은 서로 간의 관계성 안에서 삼위이시지만 사랑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감과 뜻을 발견하였던 이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클라라의 회칙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늘의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회개 생활을 하도록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황송하옵게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이 회개하시고 조금 지난 후 나는 나의 자매들과 함께 그분에게 자원하여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클라라의 수도 규칙」 6,1-2)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의해 인도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삶과 설교를 통해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도 클라라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매우 의미 있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그들은 상호 교환과 관계성의 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누가 여기에서 선생인가?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가? 둘 다이다. 둘 다 선생이고 배우는 이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뭔가를 배워갔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다. 그들은 관계성 안에서 살아갔고, 이 삶을 묵상하고 관상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어려움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을 보고는 필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여인들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감화(영감)를 받았고,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들의 삶을 보고 놀랐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성령의 활동을 그들 안에서 감지하였다. 나는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눈과 믿음과 관상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말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감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끌어 주셨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믿음과 관상의 자세 안에서 이를 감지한 것이다. 주님의 영과 거룩한 활동 마음에 간직해야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집중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 10,8)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 믿음과 관상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관계성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며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는, 이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관계성 안에서 얻게 된 상처나 고통마저도 하느님의 본질인 관계성 안에 내재하는 참된 질서, 즉 사랑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신뢰할 때 그런 어려움마저도 결국은 진정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가장 선한 본질이며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사랑의 힘이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과 영성에서 다 같이 말할 수 있는 ‘통일장’ 혹은 ‘사랑의 힘의 영역’이다. 언뜻 보게 되면 세상은 비극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이렇게 혼돈 안에서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깊은 곳에는 그 무엇도 멈추거나 막을 수 없는 내부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외부로는 하느님과 창조 사이에 사랑의 들고 나는 영원한 흐름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곳은 아마도 아무렇게나 풀과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나 나뭇가지들이 혹은 다른 자연의 부스러기들이 널브러져 있어 심지어는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돈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곳은 무질서한 곳일 수 있지만, 자연의 질서에서 본다면 그곳은 이미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죽음(부패와 소멸) 역시도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질서 속에 있을 뿐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8.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5847&path=202101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1.31 발행 [1599호]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자” ▲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사진은 아시시 성 다미아노 성당 올리브나무 숲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상. 우리 삶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과 부정적인 요소들은 다 하나의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러 영성의 스승들이 말하듯이 하느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이런 하느님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물리적인 세상에서 대상을 아는 방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하고 신성한 사랑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지극히 아름다운 춤에 참여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분이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도 하느님이 한 영혼 안에서 숨 쉬시는 것과 같이 영혼도 이 숨에 참여하여 하느님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지고한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하느님께 참여할 때 하느님께서 그 영혼 안에서 숨을 쉬시기에 이 영혼이 하느님처럼 숨을 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참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이 지극히 복된 삼위일체에 일치하는 은총을 주시기에 이 영혼은 신적인 모습을 지니고 하느님처럼 된다. 그러니 이 영혼이 자신 안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은총을 이해하고 알고 또 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런 참여를 통한 서로 간의 통교와 앎과 사랑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서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강력한 사랑과 역동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한 영혼이 하느님 안에 참여할 때 하느님께서 그 영혼에 이와 똑같은 은총을 주신다. 이것이 바로 참된 권위와 지혜 그리고 사랑 안에 계신 세 위격 안에서의 한 영혼의 변모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영혼은 이 변모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처럼 된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이 이 변모를 통한 닮음에 이르게 하도록 우리 영혼을 당신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②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형제적 관계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함’에 대해 말한 후, 바로 이어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또한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여기서 필자는 이와 맥을 같이 하는 토마스 머튼의 기도를 나누고 싶다. 이 글은 「고독 속에서의 명상」이라는 머튼의 책에서 나오는 것인데, 필자의 미국 유학 시절 고해 사제인 저베이스(Fr. Gervase White, OFM) 신부님이 이 글을 자필로 옮겨 써서 제 방 앞에 놓아 주신 것을 번역한 것이다. “저의 주 하느님, 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제 앞에 놓여 있는 길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지 못하며 저는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바람(소망)은 실제로 당신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그런 희망을 견지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희망을 저버리게 하는 어떤 것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이렇게 한다면 저에게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바른길로 이끄시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비록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항상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늘 저와 함께 계실 것이며, 제가 겪는 위험 속에 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9번에서도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런 글들은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며 끊임없이 서로를 보충해 주고 치유해주며 완성해주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진정한 신뢰와 받아들임이 드러난다. 이런 관계성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육화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성에서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공과 그 역사의 차원에서 볼 때 육화는 약 2000년 전에 한 번 이루어진 것이지만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피조물, 특히 하느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를 가능케 하고 창조를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관계성이 빚어내는 사랑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 인간은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6244&path=202102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2.07 발행 [1600호] “하느님 사랑의 힘은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나온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그림 출처 =Catholic Online 하느님 사랑의 힘이 성부나 성자, 성령 어떤 한 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 나온다는 확신을 프란치스코는 가졌음이 틀림없다. 이 믿음이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그 많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형제적 관계성만은 절대 버리지 말라고 부탁한 이유이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3번에서 이렇게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그러나 만약 장상이 아랫사람에게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하도록 명한다면, 그 장상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를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이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핍박을 견디는 이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기에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클라라 역시도 자매들에게 삼위일체적 일치를 무척이나 강조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클라라는 「수도 규칙」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자매들에게 권고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고하며 격려합니다. 자매들은 온갖 교만, 헛된 영광, 질투, 탐욕, 이 세상 근심과 걱정, 중상과 불평, 그리고 불화와 분열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오히려 ‘완덕의 끈’인 서로 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보존하도록 힘쓰십시오.” 최근 드러난 양자물리학에서도 이런 하느님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 준다고 한다. 즉, 핵이 힘을 내는 것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 이 셋의 관계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지 양성자나 중성자나 전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 셋의 융합이나 분열에 의해 가공할 만한 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태양이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태양의 수소-핵융합 작용을 통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도 하루에 6조 톤의 수소가 이 핵융합으로 인해 소모되면서 나오는 에너지가 이 지구에 공급되는 것이다. 현재 에너지 개발과 관련하여 인공태양을 만드는 데에도 적용되는 기술이 바로 이 핵융합이다. 말하자면 양성자나 중성자, 전자 하나만을 갖고는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핵분열을 통해 엄청나게 가공할 만한 살상 무기도 우리 인간은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느님의 존재성이 이런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과 사랑이라면 피조물인 우리 역시도 이런 관계성 속에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모두 뭔가가 필요한 이들이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하며, 공동체 내에서는 우리 서로에게, 그리고 공동체 밖으로는 우리에게 오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을 공급해 주도록 불린 이들이다. 우리가 서로서로 나눌 수 있는 치유하는 현존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현존하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삼위의 관계성을 통해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흐름 속에서 생명을 창조해내시고 통합과 치유와 구원과 완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권한이나 권력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관계성과 사랑과 이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런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강력한 사랑의 메시지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해 묵상할 때 우리가 시작해야 할 지점은 셋이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점도 참으로 중요시해야 하고 이를 확신 있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하느님의 본질과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점보다는 세 위가 더불어 관계성 안에서 사랑의 흘러나옴과 흘러들어옴의 움직임을 영원히 계속하신다는 점을 우선적 화두로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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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0.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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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1 발행 [1601호]
동정의 시선에서 일치와 형제적 관계성을 일깨우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서로를 향한 동정의 시선에서 일치와 형제적 관계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림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러시아의 이콘 작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에 묘사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미지를 보게 되면 이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 감지할 수 있다. 연약하고 겸허한 모습으로 묘사된 세 위의 모습과 서로를 향한 동정(compassion)의 시선, 세 위가 들고 있는 가냘픈 지팡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유학 시절에 소 논문을 지도해주었던 밥 스튜어트 신부(Fr. Robert Stewart, OFM)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당시 그 형제는 근육암 진단을 받고 두 번에 걸친 수술 후 항암 치료를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필자의 귀국 2년 후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 형제로부터 소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제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뜬금없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나도 너와 같이 아시아 사람 얼굴을 했다고 생각해!”라는 말이었다.
당시 필자는 그 형제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경험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냥 미소만 지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가 받고 있던 고통이 그로 하여금 그런 동정의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은 했었지만, 그가 필자에게 보내 준 투병 체험기 「생존을 넘어서-Beyond Surviving」; 「암이라 불리는 형제-A Brother called Cancer」를 읽고 번역하면서 그의 그 동정의 마음을 좀 더 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글의 일부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몹시 괴로워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어느 밤, 나는 부드러운 달빛이 그림자를 드리워 어슴푸레 보이는 십자가를 응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게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 친숙한 구절, 즉 칼 라너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상 위에 걸어 놓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의 죽음에 나 자신을 놓고는(그렇게 희망한다) 이렇게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축복이라는 신비의 여명이길 바란다.’
내 체험의 수준에선 처음으로, 천천히 나는 프란치스코가 사랑하는 분과의 친교를 나누었던 방법인 고통의 신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도를 바치면서 나는 주님을 알고, 그분의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이 아픔으로 느껴졌는데 동시에 뭔가가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내적 삶에 있어 뭔가가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모든 활동과 관심과 계획이 덜 긴급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암세포가 나의 영혼을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절대로 ‘생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체험은 살아남는다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체험을 더듬어 보면서, 나는 ‘그 단어는 아니야!’라고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최근 어느 날 아침, 하나의 표상이 떠올랐고, 나는 그것이 ‘암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체험을 명명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아마도 내가 프란치스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암이라는 이 형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부정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 그제야 나는 나의 암 진단에 대해 개방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면서도 침착할 수 있었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몸에 악성 종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도 했고, 또 그 진단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주 전에야 비로소 나는 이 암이 ‘형제’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나의 이 형제는 내게 올 때 내게 분노를 느끼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까지도 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내 혈육의 친동생과는 같지 않았다. 이 형제와 사랑의 관계는 고투와 고통을 함께 겪게 했기에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이 형제는 때로는 두려움과 의혹 때문에 나에게 배척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삶에 정확하게 들어와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기에 내 세상에 의미를 만들어 준 나의 ‘형제’가 된 것이다.
수술 한 달 후 나는 방사선 치료사를 만났다. 그 첫 번째 만남에서 그는 나에게 이 특별한 타입의 심각한 근육암은 대개는 재발하거나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몸 전체에 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처럼, 종양 주변의 살이 깨끗이 아물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재발과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단히 공격적인 방사선 치료를 계획하였다. 암 형제의 현존이란 초대하지도 않았지만 내 몸에 침투해 분노를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다음 몇 주 동안 이 형제는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으며 그는 프란치스코가 말하듯이 ‘내게 있어 아주 쓴’ 것을 볼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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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1. 삼위일체와 연약함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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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발행 [1602호]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
▲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장면을 묘사한 이콘.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아버지의 이토록 합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은 마리아의 태중으로부터 우리의 인간성과 연약성의 실제 육(肉)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시면서도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몸소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4-5).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모양으로 말한다. 곧 단순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말씀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분은 여성인 이 거룩한 사람 안에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여자의 몸이 악마라고 믿는 카타리파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이단 중 하나인 카타리파에 의하면 여성의 육체에 의해 아담이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여성의 몸이 모든 인간의 육신을 낳기에 육신 자체가 모두 악이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항상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대해서 말한다. 그 태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취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조건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죄인들, 성인들, 가톨릭 신자들, 이교인들, 모든 민족, 모든 남녀)이 지닌 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 조건을 취하신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어떻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취하신 그릇이다. 모든 민족과 문화, 심지어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민족도, 병자도, 무식한 사람도, 죄인도 같은 그릇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도 이런 우리의 약함을 취하셨다. 그분은 성장하셔야 했고, 음식을 받아드셔야 했으며, 말하고 걷는 법까지도 배우셔야 했다. 그분은 단 한 번에 이 모든 것을 습득하신 것이 아니라, 여느 인간들처럼 실패와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이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배우셔야 했다. 모든 것을 가지셨던 분이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십자가가 당신의 것인 양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 매달려 혹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모든 것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같이 살기를 택하신 것이다. 약하게 되어야 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각 위의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에게로 흘러들어가고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영원한 흐름을 통한 완전한 일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고, 이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지고의 완전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율권과 자기 충족을 원하며 자신이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이길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존재성은 세 위의 관계성 안에서 서로를 나누고 보충하는 가운데 드러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 충족을 지니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이 기인하는 것이 세 위의 상호 관계성이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암이라 불리는 형제’에 나오는 밥 스튜어트 신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어 보겠다. 암 형제는 동정심(compassion)을 배우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나는 번호가 적혀있는 병원 카드를 받았다. 나와 다른 환자들은 매일 아침 각기 자기들에게 맞는 과에 들어가기에 앞서 접수창구에 이 카드를 제시했다. 전에도 나는 자주 병원을 드나들었었다. 그러나 전에는 환자 방문을 위해, 사목적 봉사를 위해, 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들어갔었지만, 이제는 수백 명의 암 환자들 가운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들어갔다.
어쨌든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 치유가 필요해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암 환자이고 우리 육체를 강탈하는 질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놀랐다. 우리가 비록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우리는 우리의 암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암의 확산 정도, 치료법, 예후, 그리고 고통뿐만 아니라, 어려움, 두려움과 희망 등을 나누었다. 여기서 나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통과의 일치를 체험했다. 매일 아침 암연구소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나환우가 되었다. 치유자나 사목자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과거나 체험은 다양했지만 우리는 뭔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을 암 형제가 나에게 자매와 형제로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아마 난생처음으로, 나는 나환우로서 프란치스코가 그의 유언에서 회고하는 체험을 제대로 식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 데려가셨고 … 나에게 있어 쓰고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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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2.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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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발행 [1603호]
작음과 약함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 체험
▲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 살 때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림은 나환자를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연약함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깊숙이 이 관계성 안에서 사랑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밥 스튜어트 형제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영어에 ‘interfac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접점’이라는 말로 해석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본디 의미는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삼위일체의 진정한 사랑의 힘이 나오는 곳이고,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본질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모두 이것을 살아내야 할 소명을 부여받고 창조된 것이다.
밥 스튜어트 형제가 필자에게 말했던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라고 했을 때, 그는 암 투병 중 겪은 연약함의 체험 안에서 은연중에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을 직감하고 그것을 필자에게 말해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이 바로 이 ‘interface’였고,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영원한 관계성의 춤에서 나오는 온전한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감히 짐작해 본다.
이런 ‘interface’를 프란치스코 역시도 나환우와의 만남 체험에서, 그리고 그 이후 다른 모든 사람, 특히 병자들과 약한 이들, 걸인들,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과의 만남 체험에서 체험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프란치스코가 다음과 말할 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삼위일체적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그리고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1221년 「수도 규칙」 9,2)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삶으로 초대할 때 그는 은연중에 형제들이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은 억측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음’과 ‘약함’의 신비와 지혜는 프란치스코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서 체험한 것이고,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적 체험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첫 번째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서두에서 이 인격적 만남에 대해 상당한 강조점을 두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3항)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코의 삶과 영성에 있어 그 근본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유언에서 단순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절)
여기서 ‘복음의 양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면 어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마르코 복음의 첫 문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그 첫 문장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동격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 ‘기쁜 소식’, 혹은 ‘기쁜 말씀’ 자체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양식’이라고 말할 때, 의도했던 바는 어떤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여기서 ‘양식(forma)’이 뜻하는 것은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이 유언 내용을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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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3.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8165&path=202103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3.14 발행 [1604호] 나환우 통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닫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달았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스도로부터 오상을 받고 있는 장면. ‘인격(personhood)’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 ‘인격’은 ‘개인의 특질 혹은 특성, 개인의 인간성’이다. 하지만 본래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사용하던 말로, 가면을 쓴 배우들이 소리로써 통교하던 것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런 연유로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성삼위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데 실제로 오랫동안(적어도 18세기까지는) 사용됐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단어는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로 탈바꿈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이 관계성을 그 핵심 안에 내포하고 있는 단어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리처드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격체는 정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이다.(per sonare-가면을 쓰고 소리를 통해 정체성을 나누는 것) 이는 -이성과 창조의 선물에 의해- 신적 위격들과 모든 인간 인격들 사이에 서로 공유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눔은 나중에 포함되고 실현되는 것이거나 성사나 어떤 확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본래 정체성을 찾게끔 도와주는 것이기는 하다.” 로어 신부는 본래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되던 이 ‘인격’이라는 말이 전혀 엉뚱한, 아니 정반대의 의미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감을 표현한다. “우리를 현대의 개인주의로 내몰아온 많은 이론적 조합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 인격에 대해 ‘이교도적’ 이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삼위일체적으로 사용해온 이 인격-역동적인 인격체(sounding-through)-라는 단어를 결국에 가서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가깝지도 않은 ‘자율적 자기’라는 의미로 완전히 뒤집어 놓아버렸다.” 인간의 완전한 인격을 삼위일체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인격이 하느님에 의해 고유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그 이해의 시작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인격에다 하느님의 신적 모상을 심어주시어 관계성 안에서 당신과 통교를 하도록 해주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인격은 다른 피조물과도 그렇게 통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은 상호 통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다른 모든 존재와의 통교와 일치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토마스 머튼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 ‘홀로 있음(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존재와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 전체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가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생태적 회개’의 핵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창조적 관계성 안에 들어서는 것! 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모든 것의 근간이 들어 있다.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나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가 갑자기 내 가슴을 최상의 기쁨으로 채웠다. 그리고 나는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기쁨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위일체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시고 우리의 끝없는 기쁨과 환희이시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계시에서 나에게 보였는데, 그 후 다른 모든 계시에서 마찬가지였다. 계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거룩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노르위치의 율리안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4.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8560&path=202103 가톨릭평화신문 -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3.21 발행 [1605호]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삶과 현존의 의미 깨닫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림은 조토가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④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율리안나 성인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프란치스칸 영성가가 말하기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위해서나 세상을 향해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세상의 필요에 응하여 회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아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처럼 다른 이들과 같은 인격체로서 서로 간의 나눔의 춤을 춘 사람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화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결핍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오신 갑부 아버지의 아들로 보고자 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파견되어 육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풍요가 이미 세상 창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 특히 그 모든 피조물의 관계성 안에 들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 위해 온 밝은 빛이었던 것이다. 사실 세상은 이미 하느님 사랑과 그 배려로 풍요로운데도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을 깨닫지 못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서 잘 증언해준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요한 복음 서문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상 창조와 완성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한 진실이다.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에는 이미 삼위일체의 발자취가 각인되어 있을 만큼 풍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살아내는 데 필연적인 진리이고,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안에서 완성(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한다. 이 풍요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 자녀로서의 관계성 안에서의 품위를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으로 스스로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나-너(당신)’ 관계성의 단절이 빚어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오래전에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19-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군사주의 등이 관계성의 단절을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는 현시대의 상황을 내다보고 한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겪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듯 ‘생태적 회개’, 곧 우리 서로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적 회개’, 혹은 ‘회복’이라는 말을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대신하자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5.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8901&path=202103 가톨릭 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3.28 발행 [1606호]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프란치스코 성인은 형제들에게 일을 하는 데 있어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가르쳤다. 그림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인.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 ⑤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과 삼위일체적 삶 프란치스코는 「수도 규칙」 10장에서 ‘글 모르는 형제들’에게 글을 배우지 말라고 권고한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를 한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들이 공부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유혹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관계성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 자아와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이들(존재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권고를 한 프란치스코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안토니오 성인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기꺼이 허락해 주는 내용이 나온다. 단순하게 보면 ‘이거 모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에게 한 가지 매우 소중하고 의미심장한 조건을 내건다. 다음이 편지 내용이다. “나의 주교(주-안토니오는 주교가 아니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신학자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주교’라고 부르고 있다)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사실 글자 그대로 ‘기도의 마음과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만 한다면’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에서 ‘헌신’ 혹은 ‘신심’이라는 말의 라틴어는 ‘devotio’이다. 이 단어는 ‘우리의 마음과 혼과 얼을 온전히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인데, 수도승적 전통에서는 이것이 기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마음 자세였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는 이 말이 더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지된 상태의 기도 혹은 일반적 의미의 염경 기도나 전례 기도, 묵상 기도 등과 관련한 우리의 자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듯이(“「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라는 말을 자신의 「수도 규칙」 5장에서도 쓰고 있고, 클라라 역시도 자신의 「수도 규칙」 7장에서 같은 내용의 권고를 자매들에게 주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 5장과 클라라의 「수도 규칙」 7장의 주제는 ‘일하는 자세’라는 점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주님께서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쫓아내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과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는 것은 같은 마음의 상태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앞서 언급한 토마스 머튼의 말대로 하느님과 더불어 ‘홀로 있음(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우리가 하느님 관심의 대상인 세상 모든 존재와 더불어 연결된 상태에서 현존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를 이해야 한다는 말이다. 곧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을 지닌다는 말은 존재의 실질적 의미인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혹은 ‘나-너’의 관계성을 살아가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틱낫한 스님이나 가톨릭의 여러 영성가는 이제 존재에 대해서 말할 때 그저 존재(being)가 아닌, 연결된 존재(inter-being)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본질을 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핵심적 존재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이 본질적 핵심을 깨어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1499~1562)는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신심(헌신-devotio)은 성 토마스가 말하듯이, 덕을 행함에 있어 기민함이요 맞갖은 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덕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모든 어려움과 버거움을 날려 보내고 선한 모든 것을 재빠르게 실행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는 영적 자양분이고, 신선함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이요, 성령으로부터 우리 안에 훅 불어넣어진 숨결이며, 초자연적인 정감이다.”(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호명환 역, 「기도와 묵상 안내서」, 프란치스코출판사)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6.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9335&path=202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4.04 발행 [1607호] ▲ 프란치스코 성인은 “덕은 하느님의 속성이므로 완덕의 삶을 살아갈 것”을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동적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 ⑤‘기도와 헌신(신심)의 영’과 삼위일체적 삶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헌신의 영’이 악 혹은 죄의 보편적 원인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인용한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2-23)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도 이 ‘헌신(신심)의 영’을 덕을 행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덕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 사랑의 힘을 깨어 인식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덕’은 그 자체로 다 하느님 당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서도 이런 이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두 편의 그의 글에 나타난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고, 다른 하나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이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영예(덕)들이 거의 고스란히 덕들에 바치는 인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며 사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모든 존재와 연결된 우리 존재의 엄연한 현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이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통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만남, 혹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들어서는 것이고, 이러한 삶의 자리로의 초대가 매일 매 순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늘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약점과 결점, 이로 인한 서로 간 상처를 주고받음, 우리 정신 안에 뿌리 깊게 고정된 인과응보적 사고방식과 상거래식 계산적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개인들과 집단들, 국가들의 갈등과 전쟁 등등의 어둠이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하고 구원하며 역사를 완성해가는 ‘역동적 사랑의 흐름’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내 존재성’이 아니라 ‘하느님 존재성’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시시각각 의식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적 약함과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이런 하느님 섭리에 ‘내어 맡김’과 ‘확신’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집과 거처를 항상 마련해 드립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먹인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나도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역설이겠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약함과 한계적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덕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또 그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 전통의 증거다. 사제가 미사 집전 전에 드리는 기도 중에는 “하느님의 사제여, 지금 드리는 이 미사를 당신의 첫 번째 미사처럼, 당신의 마지막 미사처럼, 당신의 유일한 미사처럼 드리십시오!”라는 기도가 있다. 이 기도에 드러나는 염원에는 하느님 사랑과 그 섭리에 대한 확신과 내어 맡김의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지금 드리는 미사는 어떤 미사이건 사제 자신이 드리는 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리시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자와 사제는 미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7.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99820&path=202104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4.11 발행 [1608호] ▲ 프란치스코 성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김’과 ‘확신’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살아가라고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그림은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하느님 섭리에 온전하고 전적인 신뢰로 살아가라” 때로는 험난하기도 하고 기대치 않은 시련과 고통이 있게 마련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특별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세상의 운명을 주관해 가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하느님은 당신이 주관해가시는 세상 구원 경륜 역사의 과정 안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동업자로 초대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살아가는 자세는 책임자이신 그분 섭리에 온전하고 전적인 신뢰를 드리며 살아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을 내려놓고 긍정과 희망을 가슴 한가운데 견지한 채 지금 여기에서 그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느님과 손을 잡고 이 여정을 힘차게 걷고자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자세를 살고자 하는 결심과 청원이 들어 있는 기도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다음 기도는 필자가 가톨릭 웹사이트 (https://mycatholic.life/catholic-prayers/prayer-for-divine-mercy/)에서 찾아 바치고 있는 기도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미지를 훨씬 더 풍요롭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해준다.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는 기도(Trust in Divine Mercy)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저는 환란과 시련의 때에 당신께 달아 드나이다. 당신은 제가 완전한 신뢰를 드릴 만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모든 것에서 충실하신 분이시나이다. 제 삶이 온통 혼동으로 가득 찰 때 저에게 명료함과 믿음을 주소서. 제가 절망의 유혹을 당할 때 제 영혼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저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저는 당신의 제 삶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신뢰하나이다. 저는 제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때마저도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저는 모든 것이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예수님, 저는 저 자신보다 당신을 더 신뢰하나이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어느 것도 당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 않나이다. 당신은 온전한 사랑이시기에, 제 삶의 어느 것도 당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 않나이다.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어느 것도 당신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지 않나이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저는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저는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저는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제가 언제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제가 매일 당신의 자비에 저의 모든 것을 의탁하게 하소서.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비의 어머니! 저희가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당신께 달아 들 때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6) 삼위일체 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 존재의 개체성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성 보나벤투라는 창조된 모든 존재 안에는 삼위일체의 자취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연결된 고리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의 연기설(緣起說)과 특별한 관점에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진리는 어찌 보면 인간 스스로에게까지 크나큰 위협으로 우리 목전에 닥친 생태계 훼손의 위기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는 물론이고 인간 서로와 모든 피조물에 대해 참으로 커다란 존경심과 겸손을 살아가라고 촉구하는 중대하고 의미심장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보나벤투라는 심지어 존재의 완성과 구원도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존재들이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진리는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8장 말씀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19-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어찌 보면 모든 존재의 구원과 완성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더불어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여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대열에 들어서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 보나벤투라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과 완성이 하느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구원과 완성과 더불어 이루어진다고 단언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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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8. 삼위일체 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800258&path=202104 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4.18 발행 [1609호] “모든 존재는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의미 지닌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취를 지니고 있기에 형제적 관계성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예루살렘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를 가꾸고 있다. 【CNS 자료 사진】 6. 삼위일체 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존재의 개체성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개인 혹은 개별자는 모든 존재와의 연결 고리 안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존재와의 형제적 관계성은 이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대중이나 어떤 특정한 류(類) 혹은 무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특히 인간 피조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요한 둔스 스코투스의 ‘개별성의 원리’(haecceitas)가 말하는 바이다.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치유 장면들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상대하시면서도 인간 개개인 안에서 치유가 발생하게 한다는 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노자 「도덕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자취 그렇지만 이 개별자 혹은 개인의 중요성은 상호성 혹은 관계성 안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접한 이들은 한결같이 그분과의 관계성에 들어선 이들이거나 다른 이웃과의 관계성에 들어선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둔스 스코투스도 개별성의 원리를 말하면서 결국은 존재들의 상호성과 관계성에서 개별체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의 자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드러난다. 노자는 도덕경 4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어찌하여 노자가 ‘셋’까지 언급하고 그다음 만물 창조를 말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부여해주신 삼위일체의 자취, 즉 관계성과 함께함의 자취가 드러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억측 아닌 억측을 해본다. 인류 역사 안에서 대중 개개인에게 부여되어있는 이 영감을 일깨운 이들을 우리는 ‘중요한 무리(critical mass)’라고 부른다. 이들의 목적은 그들이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앞서거나 뛰어난 영웅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 자신과 더불어 다른 모든 존재가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살게끔 일깨우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클라라, 마하트마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마더 데레사 등과 같은 이들은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 은총에 의해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진정한 현실을 깨달아, 자신들의 사명인 다른 모든 이들을 이 존재의 고리 속으로 들어서도록 초대한 이들이다. 삼위일체의 패러다임 회복 절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OFM) 신부가 말하는 죄의 정의는 ‘삼위일체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향해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영원한 사랑의 역동적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으로부터의 본질인 관계성 안에서의 나눔과 ‘더불어 현존함’을 막는 것은 모두 죄라는 말이다. 리처드 로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하느님 존재의 본질이자 우리 존재의 본질인 삼위일체의 패러다임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우리 모두에게 호소한다. “우리의 옛 교리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대신덕(對神德)’이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하느님 생명 자체를 나누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중세 교회 역시도 이 대신덕이 먼저 개인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류에게 전체로서 주어진 것임을 주장하였다.” 희망의 덕, 개인에 앞서 전체에게 적용 이는 교회의 위대한 두 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에게서 예시된다. 이들은 희망의 덕이 개인에 앞서 먼저 전체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을 외떨어진 개인 안에서 생겨나게끔 하면서 그 개인은 절망과 벌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류 안에서 표류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먼저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유일하게 지속하는- 이 대신덕을 공동의 차원에서 누리지 못한다면 개인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누린다는 것, 혹은 심지어 이 대신덕을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1코린 13,13 참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주적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 종말과 아마겟돈이라는 위협적인 메시지만을 전해주었다.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은 사회 전체에 희망을 주신다. 왜냐하면, 이 희망은 항상 불안정한 개인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의 본질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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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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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생명에 기원 둔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
▲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통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생명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서로 연결돼 있다고 가르친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아이들에게 자연 생태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다. 【CNS】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⑦창조된 세상 안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생태 영성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생겨 나온다는 인식은 프란치스코를 지금까지보다 더 큰 애정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미한 피조물까지도 그들이 그와 똑같은 기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자매라고 불렀다.”(「보나벤투라에 의한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 6항)
앞서 말씀드렸던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매우 프란치스칸적 색채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인간의 영성과 지혜가 인식하고 있었던 바이다. 어쩌면 프란치스코는 이런 자연스러운 진리를 좀 더 강하게 느꼈던 사람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도 모든 존재, 특히 다른 인간들과의 이런 연결고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이것을 감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삼위일체적 본질을 당신 모상과 더불어 부여해주셨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피조물들은 이런 자연적 본질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을 뿐이고,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느님의 자유 의지와 같은 의지의 자유라는 엄청난 선물이 주어진 인간들은 이 선물이 매우 부정적인 측면에서 반대로 작용하여 존재의 연결고리가 아닌 ‘나’와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단절을 살아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 찬미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노래(혹은 태양의 찬가)’를 통해 노래하고자 했던 것은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그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었다. 실제로 다른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과 그 생명력에 기원을 두고 있는 다른 모든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인지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충만하게 찬미할 수 있다.
‘종달새’는 그가 ‘종달새’로 불리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에 전혀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생명)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이들은 우리 인간의 말로 그 찬미를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창조된 생태계 안에서의 자신들의 연결고리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 위대한 찬가요 시인 프란치스코의 ‘피조물의 노래’는 그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존재 자체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찬가가 위대한 이유는 그 모든 피조물이 연결된 고리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자각시키면서 우리를 그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주적 춤에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행복의 원천인 관계성 깨달아야
산업혁명 이후, 특히 20세기의 급격한 현대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는 생태계의 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우리 역사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겪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급박하고 심각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창조된 세계 일부라는 것이고, 피조물 중 하나요,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찬미받으소서」 제1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이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십니다.”
지금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 역시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엄연하고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분명히 우리에게 불편한 것들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 불편한 진리 안에 깊숙이 들어있는 궁극적 행복의 원천인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행운도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여러 프란치스칸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낸 결론에 의하면 프란치스칸 운동의 고귀성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한다. 이는 모든 인간 존재가 사회적 신분이나 피부색, 문화, 종교 등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됨 없이 모두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이 가치가 인간에게만 그치지 않고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도 포함하는 관계성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와 ‘우리’라는 집단을 넘어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 존재를 받아들이고, 선입견이 없이 살아가며, 사랑으로 인해 구원의 차원에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이 발자취는 우리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서기 위해 동정녀의 태중으로 내려오신 것이 바로 그분의 발자취이다. 그분은 바로 구유 속에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이시고 여행 중에 가난하셨던 예수님이시며, 사랑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이 세상의 조건 모두에 내맡기실 만큼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이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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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0.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801212&path=202104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5.02 발행 [1611호]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에 모든 존재의 현실도 하나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⑦창조된 세상 안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생태 영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삶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 실존이 지니는 모든 것을 초월하거나 벗어나기를 택하지 않으셨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피조물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치를 격하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품위를 하느님으로까지 들어 높여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런 관계성 안에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또 모든 존재가 그런 관계성 안에 존재할 때 피조물 하나하나가 부분적 전체(holon 혹은 fractal)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관계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존재의 본능에 박아주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인간이 생태계 위기를 겪기 이미 오래전에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런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외치는 ‘자연 보호’를 훌쩍 넘어서는, 인간과 창조계 전체의 그 위대한 가치를 재발견하게끔 초대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칸 삶과 운동의 기반이자 토대이다. 이것이 바로의 우리의 소명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프란치스칸 전통 안에서, 요한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는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을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물과 식물, 동물, 인간, 천사,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모두 통틀어서 하나의 목소리(univocity)로 말한다고 믿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에(신명 6,4), 모든 존재의 현실도 하나인 것이다.(에페 4,3-5)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이야기(Story of Being) 전체의 부분들이며 동시에 부분으로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부분적 전체’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들이며, 그래서 ‘나’는 ‘나’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에 의해 구성되고 존재하는 것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테두리가 없는 원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이는 논리적으로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가정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힘과 현존, 그 본질에 의해 하느님은 그 중심이 모든 곳에 있지만, 테두리는 어느 곳에도 없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제약을 전혀 받지 않으신 채 존재하신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과 더불어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므로 신성하다는 것이고, 하느님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가난 부인과의 교제’에서 프란치스코가 가난 부인에게 “이 세상이 바로 우리 수도원이오!”라고 말한 바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찾기 위해 우리가 특별한 장소로 가거나 특별한 시간을 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전적으로 포용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핵심적 본질이시다. 하느님은 지극히 완전하시고 드넓으시다. 모든 것 안에 계시지만 어디에도 갇히지 않으신다. 모든 것 밖에 계시지만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어느 것에도 요원하게 계시지 않으신다. 모든 것 밑에 계시지만 그 품위가 실추되지 않으신다.…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는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범신론(pantheism)과는 완연하게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이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 즉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진리(pan-en-theism)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위대하고 기쁨에 찬 메시지이다. 그래서 이것이 진리이기에는 너무도 믿기지 않고, 너무도 좋은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생태적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환경을 보전하고 자연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짐의 놀라운 아름다움이 우리 존재 안에서 실현되고 일깨워져,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우주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우주적 재건을 이루는 것이다. 테두리가 없는 원이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하느님과 창조된 세상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진리가 들어 있다. 테두리가 없는 원의 중심은 모든 곳이고, 모든 것이기에, 그 모든 곳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고,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의 노래(태양의 찬가)’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이 경이로운 세상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1.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801966&path=202105 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5.16 발행 [1613호] 세상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느님 반영하는 ‘거울’ ▲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 세상은 하느님의 선이다. 사진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십자가 행렬을 하고 있다. 【CNS】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⑦창조된 세상 안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생태 영성 성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우주(세상)를 교향곡에 비유한다. 모든 것이 부분을 이루고는 있지만, 우주의 중심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각자의 음을 내기에 온 우주의 존재 자체가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이 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보는 우리 마음의 눈이 이런 경외와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공동체와 우리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은 새로운 국면, 곧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태 영성’이고, 또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 그대로,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이고 포용하는 영성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주어진 본래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것이고 급기야는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마저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우주는 그야말로 하느님으로 꽉 차 있는 ‘의미의 알’이기에, 이 시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이 의미의 알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생명력을 계속해서 낳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체론적 세계관과 영성은 하느님의 육화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대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신 분”이시다.(콜로 1,15-20 참조) 그래서 그분은 ‘반대의 일치’이고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아이콘’이시다. 그렇기에 우리 피조물 하나하나는 전체, 곧 하느님을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해 주는 거울이고, 또 그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장소이기에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세상은 하느님의 선을 지닌 또 다른 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그 내면의 충만한 의미는 이런 관점에서 반드시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 마음과 그 마음의 눈이 이 통합된 세계관을 바라보고 품을 수 있다면 우리 영혼과 우리 사회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나누는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교향곡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전체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지 않고 가짜 자아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이 지구를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서로 대적하고 서로 위에 올라서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싸움터로 만들어버렸는지 모른다. 지금은 이 지구 상에서 아직 문명의 이기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일부 부족들에게만 남아 있는 ‘남성 입문’이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남성들의 ‘성인식’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남성 입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진정한 인격체로 살기 위해서 부족 전체, 곧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2005년도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세계 수련장(Novice Masters) 모임에 참석했을 때, 당시 아프리카 총평의원이었던 신부님이 남성 입문과 관련하여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준 기억이 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있어 수련기는 어찌 보면 입문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신부님의 남성 입문 체험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가 15살쯤 되었을 때 그 정도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모여 촌장 앞에서 간단한 예식을 한 다음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정글 속으로 내쳐져서 3개월여(기간이 6개월인지 3개월인지 정확하지 않음)를 지내다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 입문 예식의 첫 단계였다고 한다. 이 기간에 정글에서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글에서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으며 생존을 위한 각고의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고 한다. 이 기간에 그들은 부족 사람들 전체와 부족의 영과 하나 되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 살아남는 것은 부족 전체 사람들의 영과 하나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이때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입문 예식의 첫 단계요 주요 단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이때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체험하며, 이 위대한 존재의 사슬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단계를 마치고 마을에 돌아온 아이들은 몇 가지 예식을 거치면서 다 함께 그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공적으로 선언된 후 입문 예식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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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2.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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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5.23 발행 [1614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볼 수 있을 때 하나됨 체험
▲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다”고 설교하면서 “나의 하느님과 모든 것”이란 단순한 기도를 자주했다.
조토,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프레스코화,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아시시.
한 남성이 어린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되는 고대 남성 입문 예식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바로 부족 전체와 부족의 영은 물론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한 남자가 자신의 내외적 힘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모두 연결된 존재의 위대한 테두리 안에 포함되는 체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당부하신 것에는 이런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둘씩 짝지어 보내지만 결국은 모든 존재가 조화되고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 체득하고 선포하라는 것이 예수님 제자 파견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의 삶에 합류하는 형제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처럼 형제들을 둘씩 짝지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선포하라고 세상에 파견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개인주의적 가치 체계나 개인이나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지나친 경쟁 구도와 상거래식 이해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이 파고들어 사회 병리 현상을 더욱더 심각하게 부추기는 것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이 전체와 하나 되는 입문 예식과 통과 의례를 거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처드 로어는 저서 「Adam’s Return-The Five Promises of Male Initiation」(아담의 귀환- 남성 입문에 있어 다섯 가지 약속)에서 고대 남성 입문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①인생은 고되다. ②당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③당신의 인생은 당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④당신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 ⑤당신은 죽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진리를 경험한 자만이 진정으로 한 남성(어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며 그때 비로소 그는 이 삶 안에서 다음의 다섯 가지 약속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①삶이 고되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모든 것과 연결될 때 그 삶은 가볍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28)
②당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분적 전체로서 우주적 삶에 참여하게 될 때 당신은 전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까?”(루카 10,20)
③당신의 인생이 여러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모든 것이 연결된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당신의 인생이 우주 전체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④당신은 통제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신이 자신의 통제력을 놓을 때 온전히 책임을 져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통제력을 얻게 된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루카 12,25)
⑤여러분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존재의 원천에 연결되어 살아갈 때 이 세상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드렸던 매우 단순한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Deus Meus et Omnia!)는 이 가장 위대한 존재의 진리에 감탄하며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이다. 사실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가 아니라 ‘나의 하느님과 모든 것’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라고 한다면 ‘Deus et Omnia Meus’나 ‘Deus Meus et Omnia Meus’로 썼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번역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기도를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냥 ‘나의 하느님과 모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즉 하느님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계신 분이시기에 그 모든 것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기도를 바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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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3.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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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5.30 발행 [1615호]
가난과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동정(同情)을 배우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모든 약한 피조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시는 동정을 배울 수 있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상.
①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됨: 동정(同情-compassion)
삼위일체 하느님이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계신다는 진리는 하느님의 영, 혹은 마음까지도 모든 것과 연결되어 존재하신다는 것을 내포하는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물질 세상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물질 세상이 이미 하느님의 초월성이 부여되어 창조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이 세상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 피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는 다른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해서만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체를 지니신 인간 존재였듯이 우리도 그분의 영과 육으로 그분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모상을 타고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규칙」 2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땅의 임금이신 주님’(마태 11,25),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모든 영신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창조하셨으며, ‘당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비슷하게’ 만드신 저희를 ‘낙원에 두셨으니’(창세 1,26; 2,15), 바로 당신 자신 때문에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이 관점에서 하느님의 육화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칸 신학이 발전되었다. 이것을 보나벤투라는 명료하게 발전시켰으며 특히 요한 둔스 스코투스가 더욱 발전시켰다. 창조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에 앞서서 의도되었고 뜻하신 바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서 1,15-20에서 말하듯이, 그분은 모든 것의 본보기이시고 모델이시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분의 지혜와 힘과 선을 나누어 받았지만, 특히 인간이 더욱 많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은총의 선물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생명의 더욱 충만한 상태를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거처에서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것을 알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욱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더욱 하느님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더 많이 의식되도록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을 사시도록 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이 하느님의 내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로 인해 이 하느님의 내재를 보고 느끼며 표현하고자 하는 선택을 의지적으로 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하느님과 유사하게 창조되었기에 이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프란치스칸 사상을 주의주의(主意主義)라고 한다. 프란치스칸 사상은 하느님께서 영원성으로부터 순수한 당신 의지로써 ‘사랑’ 자체로 존재하시고 이 세상의 창조를 이루시며 완성해 가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 사상에서는 하느님의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인간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인간 피조물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생명을 나누도록 창조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궁극적 소명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혹은 하느님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촉구하시는 ‘성화(聖化)’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더러 이것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내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의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른 모든 존재와 통합할 수 있는 모범을 이미 보여 주셨고, 또 우리 삶 순간순간에 성화하는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계속해서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나환우들과 온갖 병자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약한 피조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시는 동정(同情-compassion)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극단적이고 영웅적인 ‘가난’이나 ‘인내’, ‘희생’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같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었고, 결국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지니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가난과 병고, 그리고 연약함을 통해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그와 연결된 존재, 즉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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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4.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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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6.06 발행 [1616호]
동정의 자비,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
▲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자비와 동정심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뉴욕의 빈민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CNS 자료 사진】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14번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일에 열중하면서 자기 몸에 많은 극기와 고행을 행하지만,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삶의 목적은 존재의 원천을 공유하는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겪는 아픔과 궁핍함을 통해 다른 이들의 아픔과 궁핍함에 같은 마음을 지니는 법을 배웠다.
클라라 역시도 자신의 약점과 질병 안에서, 그리고 아프고 병약한 자매들을 돌보면서 자비와 동정심을 배워야만 했다. 클라라는 인간이 되는 것, 즉 자신의 피조물인 현실을 배워야 했다. 지나친 가난과 극기(특히 단식)를 살면서 클라라는 인간성을 배웠고 그 인간성의 체험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이 무쇠로 되어 있지도 않고’, 우리 ‘힘이 바위 같지도 않기에’ 아니 오히려 우리는 연약하고 온갖 육신의 나약함으로 기울어지기에, 사랑하는 자매여, 나는 그대가 무분별하고 불가능하게 재를 지켜 왔다고 알고 있는데, 지혜롭고 분별 있게 지나친 엄격함을 피하라고 주님 안에서 그대에게 부탁하고 요청하는 바입니다.”(38-40)
클라라는 가난과 극기의 삶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통해 오직 하느님만을 찾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침실의 벽돌 바닥이나 나무 위에 눕는 것보다 오히려 건초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주교에게 순종하여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어느 누가 이렇게 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그렇게 하셨다! 클라라의 삶에 있어 자신의 수난은 예수님의 수난이었다. 그녀는 그분이 그녀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삶 자체가 그녀의 교육자였던 것이다.
2014년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가 혼란에 빠졌고 여전히 이 상황과 관련해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특별히 희생된 이들의 가족과 친지, 친구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해의 일이다. 당시 필자가 알고 지내던 지인의 아들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겪고 있었던 심리적 어려움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 지인에게 아들이 단원고에 다니는지를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 역시도 그즈음에 영적, 심리적 혼란을 겪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생명을 살아가고 있다는 단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일찍이 맹자는 「공손추(公孫丑)」 상편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실천 도덕의 근본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있어 단서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이라고 했다. ‘인(仁)’에서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특히 근본이 되는 것을 주자(朱子)는 측은지심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주신 마음이며, 이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이웃의 일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내 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의 연결된 존재성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우리 마음 깊은 구석에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이 측은지심을 우리가 다시 끄집어낼 때이다. 왜냐하면, 이 측은지심이 바로 병자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지극히 깊은 동정의 자비이고, 이 자비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런 자비의 힘이 이미 부여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측은지심과 자비의 힘이 이 세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하는 사랑과 자비는 바로 이것이다. 십자가 상의 희생 제사와 성체성사 안의 희생 제사에서 바로 이 희생하는 사랑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일랜드에서 특히 사제들의 성체 신심 증진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베네딕도회의 한 사제에게 하신 말씀에서 당신께서는 이런 희생하는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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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6.13 발행 [1617호]
“고통은 죄로 인한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
▲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면서 치유와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사진은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시면서 치유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아마도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우의 모습으로 나타나 프란치스코를 회개의 삶으로 이끄신 주님의 계획도 바로 이런 동정의 자비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왜 하느님은 그 순수한 사람들을 살려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참이나 했었다. 아마도 참사 이후 사람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안에는 이런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필자는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었을 때 문득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살았던 엘리 위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장본인이 엘리 위젤인지, 다른 어떤 사람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가 노역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다섯 명의 동료가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다. 그중 네 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한 사람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너무도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몸이 가벼운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공개 처형 상황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런데 그때 엘리 위젤 옆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저 아이가 저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데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그때 엘리 위젤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 하느님도 저 아이와 함께 저렇게 고통스럽게 목매달려 죽어가고 있소!”
세월호 참사 때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셨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도 먹먹해졌다. 그러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방식으로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셔야 하는가 하는 답답한 의문도 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분의 수난이 다가오자…’ 그분의 수난은 인간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은 겪어내야 할 수난이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든 저렇게든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분은 제자들과 파스카를 기념하시면서 빵(그것은 당신처럼 작은 것이다)을 들고 축복하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한 나의 피이다. 죄를 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다.’” 이 쪼개어진 그리스도, 즉 성자 하느님의 몸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
프란치스코는 카타리파의 잘못된 생각에 대응하여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러분의 고통은 죄로 인해 받는 벌이나 그 결과가 아니라, 여러분이 진정한 사랑을 살아갈 때 수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동정녀의 태중으로부터 태어나시는 연약함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탄생은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인해 연약한 인간 조건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리고 성모님 역시도 사랑으로 인해 세상의 구세주, 즉 사랑과 연약한 하느님, 한 아기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고통이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이다. 한 어머니가 생명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취해야 할 하나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죄 많고 연약한 교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벌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주셨다. 즉 공동체를, 형제애를, 자매애를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함께 삼위일체적 모델을 창출해 내라고 초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
②온몸으로 아는 앎- 존재적 앎(kinesthetic knowing)과 참여적 앎
앞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 물질 세계에서 어떤 대상을 알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참여적 앎이다.
리처드 로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그리고 고유하게는 삼위일체)은 우리가 다른 대상 ─예를 들어 기계나 객관적 개념, 혹은 나무들─ 을 아는 것처럼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객관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대상들을 보고 우리의 정상적 지성을 통해 그 대상의 여러 부분을 분석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멀리서도 그것들이 무언지를 판단한다. 이때 우리는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관련된 대상들은 절대 이런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오직 그것들과 하나 됨으로써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화’이다!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그저 단순한 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양쪽이 다 상호 존중의 ‘나-당신’의 관계에 편안히 있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앎에 이르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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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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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6.20 발행 [1618호]
이웃과 같은 마음 갖는 동정심이 성령의 마음
▲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웃과 같은 마음이 되어주는 ‘동정심’은 어떤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해주는 성령의 마음이라고 설교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하느님의 본질이 관계성이기에 우리 역시 이 관계성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된다. 관계성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당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당신의 모상을 심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 중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웃과 같은 마음이 되어 주는 ‘측은지심’ 혹은 ‘동정’(同情)이다. 이 마음은 어떤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해주는 성령의 마음이다.
결국, 수양 혹은 자신을 갈고닦아 나가는 것은 우리 존재에게서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선물을 존중의 마음으로 깨어 바라보며 은총에 힘입어 반복적으로 이를 키우고 촉진해가는 일이다. 이것 외에 하느님을 아는 방식은 없다. 이렇게 온 존재로 참여함으로써 알게 된 지식은 다른 말로 ‘존재적 앎’ 혹은 ‘운동감각적 앎(kinesthetic knowledge)’이라고 한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로 아는 것이다.
이 운동 감각적 앎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아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론으로 배우게 된다. 즉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원심력을 사용해야 하기에 넘어지는 쪽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리라는 이론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 원리를 머리로 알아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그것을 기억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또 한 번 몸으로 알게 된 이 앎은 우리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잊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덕에 참여하여 그 덕을 수양의 마음으로 꾸준히 실행해 가면서 그 덕으로 인해 갖게 되는 복됨의 의미를 몸에 익혀 살아갈 때 비로소 그 덕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온갖 덕이 다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달리 말해 덕을 몸에 익히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다 같은 이치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 6-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덕 목록에 ‘존중’ 혹은 ‘존경심’의 덕을 넣고 있지 않지만, ‘순종’의 덕에 사랑을 자매 덕으로 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으며, 또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들에게까지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 모두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사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모든 덕도 부여해주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저서 「Living Buddha, Living Christ(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그리스도)」에서 성령의 본질을 ‘한 대상에 온 마음을 기울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혹은 대하는 것(mindefulness)’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바라봄’에 강조점이 놓인다.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반복하여 실천하는 것이 바로 수양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말대로 우리가 모든 존재를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고 대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는 ‘나’를 의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중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바라보는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긍정이든 부정이든)과는 아무 상관 없이 존중심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처럼 자비로운 자 되라고 초대하시면서 여기에 참 행복이 있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마태 5,44-45; 루카 6,35-36 참조)
리처드 로어는 이것을 ‘관상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상의 차원에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앎은 대상들을 참으로 온전하고 전체적으로 관계와 의미의 모든 차원에서 직관하게 해준다. 아마도 이 앎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적 구도에서 그 대상들을 보게 해주는 앎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삶의 순간들에 대해 관상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늘 그 순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우리 내면의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것(re-spect: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상 대부분을 우리가 언뜻 부분적으로 관찰할 때 우리에게는 이런 존중심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직도 관상적 앎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다. 솔직히 여러분이 대상들을 관상적으로 볼 때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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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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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목영성 >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21.06.27 발행 [1619호]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
▲ 프란치스코 성인은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고 수도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사진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지역에서 한 작은형제회 수도자가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는
무슬림 팔레스타인들에게 음식 섭취가 허용된 밤 시간에 빵과 물을 나눠주고 있다. 【CNS】
프란치스코는 ‘주님’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종이쪽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소중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 안에 주님의 현존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그런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쓰인 글을 발견하면 길에서나 집에서나 땅바닥에서나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서, 거룩한 장소나 합당한 곳에 가져다 놓곤 하였다. 주님의 이름이나 성경 말씀과 관련된 글들이 그러한 곳에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그에게 질문하기를, 주님의 이름이 비치지도 않은 글이나 이단자들의 글까지도 그렇게 지성으로 줍느냐고 하였다. 그가 대답하였다. ‘아들이여, 주 하느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신 이름을 쓰는 데 사용되는 글자들이 그중에 같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이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방인들의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며, 오로지 모든 선이 깃들어 있는 오로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존경심의 자세는 본래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해주도록 창조된 존재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함께함보다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다른 모든 피조물)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해 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 곧 현재의 내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의식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는 이들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지니신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각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가? 내가 존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인격에 대한 존중은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누가 인격들인가? 내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데 누구도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인격들이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가서 그분의 사랑과 인내, 겸손, 존경심 등으로 치유하기 위해 우리 각자의 느낌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의 문고리는 문 안쪽에 달려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 그런 개방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며 기쁘게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는 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 곧 하느님의 속성이며,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마음의 자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과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호 교환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에게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이렇듯이 덕을 지닌다는 것은 그 덕의 원천이시며 그 덕을 당신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해 주신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 혹은 수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존재적인 앎, 혹은 온몸으로 아는 지식인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하지만 생각이나 사고만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긍정의 덕을 행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를 변화시켜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참여적 앎과 존재적 앎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양은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결국은 이런 수양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일이며, 결국 우리 삶과 존재가 성령의 일치하시는 힘으로 인해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변모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통 전체의 핵심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해주시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필자에게 이런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를 바라보아주시는 그 눈으로 저도 저를 바라보게 해주시고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이 기도의 주된 목적은 ‘의식’에 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할 때 의식함 없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마음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의식하며 바라본다면 그것은 정확히 ‘행하는 것’, ‘수양하는 것’이 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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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8.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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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2021.07.04 발행 [1620호]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하세요”
▲ 누군가에게 덕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 자명하다.
사진은 한 행인이 노숙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있다. 【CNS】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으로부터 들었던 “쓰러져가는 내 집을 고쳐다오”라는 주님의 초대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초대는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던 당시의 교회 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는 우리 내면의 집과 하느님 백성 서로 간의 관계성을 재건하거나 수리하라는 당부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의미는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이고, 또 교회의 재건은 교회, 즉 하느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재건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살라고 프란치스코를 초대하시면서, 당신 교회와 넓은 의미에서의 당신 교회인 온 세상 재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하느님 현존 의식’임을 당부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의 세상에서는 이 ‘하느님 현존 의식’의 필요성이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하다.
주님의 영을 간직하는 것과 ‘깨어 있는 의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 있는 정신 자세를 지니지 못한 채, 즉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시간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정보의 범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범람하는 정보와 소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관점에서 식별하지 않은 채 그것들이 주는 여파에 이리저리 떠밀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우리는 집단최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서로 갈라져 살아가면서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적대시하면서 분열과 불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이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념과 정보(그것도 때로는 잘못된 정보일 수 있음)로 인해 분열된 세상을 우리 스스로가 조장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의식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한 다음의 권고는 우리에게 이런 의식을 요청하는 권고이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깨어 있음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 ‘화두’를 조심스럽게 풀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나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부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과 악덕에 대한 가르침인 권고 말씀」 27번에서 이런 깨어 있음과 하느님 현존 의식에 대해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권고 말씀 27번은 다음과 같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카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식별)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덕들이 먼저 앞에 부분에 열거되고 그런 다음 반대되는 것들, 즉 악덕들이 나온다. 우선 첫 번째 부분, 즉 덕목들을 살펴보되, 특히 첫 번 네 가지 덕목들을 살펴보자.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고요와 묵상(관상)이 있는 곳에….”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같은 덕의 목록을 기술하면서 이 모든 덕이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한다. “당신은 거룩하시고, 주님이시며… 당신은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안식처이시고, 평화이시며 당신은 기쁨이시나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특성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겸손이시고, 안식처이시며, 평화와 기쁨이시다.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권고 말씀」 27번에서 사용하고 있는 덕목들과 거의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집, 즉 우리 존재를 차지하신다면, 거기에는 사랑과 지혜와 인내와 겸손과 가난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관상하는 휴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덕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자신 안에 거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깨어 알아보고 모셔 들여, 그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믿음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 깨어 있음, 혹은 하느님 현존 의식임을 우리는 늘 상기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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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9.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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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Home > 사목영성 > 2021.07.11 발행 [1621호]
하느님 현존 의식은 곧 참 자아를 찾는 것과 같아
▲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 현존 의식’은 ‘자아의식’과 다르지 않다.
사진은 영화 ‘나자렛 예수’의 한 장면으로 예수님의 치유로 말을 하게 된 벙어리가 기뻐하고 있다.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성 프란치스코가 「권고」 27번에서 말하고 있는 ‘하느님 현존 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하느님 현존 의식’이 결국은 ‘자아의식’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섯 번째 구절을 보자.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카 복음 11장 14-22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서 악마를 내쫓으시는데, 그 악마는 벙어리 악마였다. 악마에 대한 표현 중 하나는 바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악마의 표시는 말이 없고 통교가 없으며 선물 의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능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성령과 더불어 당신의 집,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차지하고 지키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 삼위의 내재하시는 현존이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 차지된 집에는 다른 주인을 위한 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집을 고쳐다오!”라는 프란치스코에게 한 예수님의 당부 말씀은 “나의 현존을 인식해다오!” 혹은 “내가 현존하는 그대의 참 자아를 인식해다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1,24-28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집을 청소하고 말끔히 정리해 놓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씀에서의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느님 은총에 의한 선물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것이라고 여겨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꾸미고 아름답게 정돈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기를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이 모든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 하는 우리 에고(ego)의 모습을 비유한 말씀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착각과 기만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다. 집을 잘 정돈해 놓는다는 것 자체는 언뜻 보기에 긍정적이고 괜찮아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은근하게 도사리고 있는 문제는 그 집에 집을 지켜줄 주인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그 더러운 악령이 가서 더 흉악한 악령들을 데리고 와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빈집이 있구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준비되어 있어! 자, 그러니 우리가 들어가 우리 맘대로 살아보자!” 우리가 만일 그 집의 주인이고 그 모든 것이 내 노력으로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일이란 집을 잘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여 완벽하게 만들고자 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 일만을 한다면 우리는 유혹과 악마를 위해 집을 준비하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유하려 하는 자만심’이다.
이 에고의 자만심은 하느님을 제쳐 놓고 우리 자신의 이상과 노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내 것으로 취하려 한다. 그러나 실상은 집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물론이고, 그분이 주신 순수한 선물들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참 자아의 의미’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영성가가 말하기를 “하느님을 찾는 것이 바로 자신, 즉 참 자아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나온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진리, 즉 하느님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가 찾고는 외친 유명한 말을 우리는 안다.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이 말은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토록 오랫동안 하느님을 추구하다 하느님을 발견하면서 자신 안에 이미 거하고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그 하느님이 자신과 일치하고자 하시는 관계성의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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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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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하느님과 분리할 때 ‘에고’의 감옥에 갇히게 돼
▲ 하느님의 육화 신비에 매료됐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과 하나됨을 희망했다.
엘 그레코, ‘오상을 받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유화, 1585~1590.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우리 ‘에고’는 우리 정신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그간 익혀온 사고방식이나 논리대로 움직여가길 바란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부화뇌동하거나 떠밀려오는 정보를 식별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것을 ‘집단 최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우리 세상을 하느님 안에서 통합과 화합으로 이끌어가기보다는 분리와 대결, 옳고 그름의 이원론적 구도로 만들어가는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에고’는 악마(diabolus)가 하는 것처럼 늘 분리와 구분을 하기를 원한다. 이 ‘diabolus’라는 라틴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symbolus’와 반대되는 말이다. 이 말은 ‘서로 한 방향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악마의 또 다른 말은 사탄인데, 본래 이 말은 ‘고발하는 자’를 의미한다. 상대를 고발해 자기를 옳은 자로 자처하며 다른 존재와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사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루카 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바리사이의 비유’(18,10-14)는 구분하고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가 바로 사탄이 역할을 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성전 뒤편에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자신을 죄인이요 불쌍하고 가련한 자로 인정하는 자가 하느님 눈에는 의인이라는 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우리가 흔히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이라고 하는 ‘성모님의 찬가’를 보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과 미천함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네.… ”
이러한 성모님의 자세는 예수님과 복음의 인격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가장 뛰어나고 특출난 모범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에고에 따라 살아갈 때, 즉 우리가 우리의 에고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며 살아가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바리사이요 사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한 구분이 필요하긴 하다. 특별히 인생의 전반기에는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앞서 강조한 대로,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존재하기에, 이 생명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존재를 고통으로 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에 의해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는 중국 송나라 때의 선종사를 정리한 책인 「오등회원」에 나와 있는 것이 원본인데, 당나라 때의 청원행사라는 스님도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 화두가 지닌 근본적 의미는 모든 것이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결국은 하나라는 진리, 즉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결국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축한 말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과정에는 정반합의 원리가 적용된다. 처음에는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구분해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것-정(正)’을 확신하게 되는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둘의 다름이 우리의 관념이나 생각으로 생성된 것임을 자각해 산과 물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는 것-반(反)’을 자각하게 되지만, 결국 이 자각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둘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는 세상, 즉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상-합(合)’에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 둘이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라는 우주의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의 집(나 자신의 존재)을 차지해야 하고, 또 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하느님과 ‘나’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너’와 ‘나’가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이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기에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존재가 하느님과 분리될 때, 즉 우리가 자만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하느님과 다른 모든 존재에서 분리하게 될 때 우리는 ‘에고(가짜 자아)’의 감옥에 갇혀 계속되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차지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에는 바로 이런 ‘하나됨’과 ‘구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느님 육화에 매료되었던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비천하고 미천한 형제-작은 형제’로 여기고자 했던 것도 이런 ‘의식’ 속에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 현존 의식과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차지하게끔 하느님을 모셔드리는 우리의 마음 자세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비결 아닌 비결이 아닐 수 없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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