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 단상
젊음을 벗어나 노년을 맞이하며 건강은 신체적 노쇠라는 새롭고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체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과도기적인 이상증상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신체 스스로가 새로운 노년이라는 생명현상을 받아들이는 행사입니다. 가을날 단풍이 들 듯 거부할 수 없는 시간에 적응하는 노력입니다. 젊어서 저축했던 적금을 써먹고 가라는 자연의 말없는 계시입니다. 삶은 과정이듯이 노년의 과정에 어울리는 몸의 상태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애씀의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신체로서의 몸의 인과응보 과정입니다. 젊어서 흥청망청 환락의 삶을 살았다면 그 보상으로 고단한 삶이 나타날 것이며 적금을 여러 군데 들어가며 고투(苦鬪)하는 삶을 살았다면 화려하게 물드는 단풍처럼 세상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소비의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도기적 이상(異常)증상들은 일시적으로 겪어내야 하는 극복과 단련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까지도 제공해주는 예시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점점 커지는 불안감을 몸 안으로 받아들여 조절할 기회를 주는 면역훈련의 과정입니다. 이처럼 삶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신체적 변화에 따른 극복의 단계별 과정은 그때까지 살아온 삶의 심판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통과의례이며 거기에서 합격한다면 성숙한 삶을 인도해주는 고난의 극복과정입니다.
스스로가 극복하고 넘어섬으로서 새롭게 다가오는 세계와 마주하며 나타나는 자신감에 찬 에너지는 삶의 면역력을 강화시켜줍니다. 그처럼 삶의 선순환적 체계는 세상의 밝음을 향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원인적 시각으로 의식의 변화도 가져다줍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성숙한 삶의 세계가 펼쳐져있습니다. 자본과 민주의 소음이 사라진 낙원을 목격하게 됩니다. 종교적 시각을 가지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정과의 대응에 결과론적 시각에만 매몰되어 불안감에 휩싸인다면 그때의 삶의 질은 급격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혹은 하느님은 인간에게 여러 번의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단련된 인간이 될 것을 구속합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몸은 그처럼 사전에 미세한 준비과정을 예비하고 있으나 단지 예민함의 부족으로 인해 무감각하게 지나치며 피할 수 있는 병을 키우고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은 어쩌면 그런 미세하고 예민함을 키우고 강화하는 원인적 시각능력에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신만의 그런 예민함의 능력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자산이자 능력이며 보람으로 노년을 채울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됩니다.
그런 과도기적 이상증상에 불안감을 보이는 것 또한 삶의 주기에서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자 증상입니다. 물론 단기간의 치료로 그런 증상들이 회복된다면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증상은 일시적으로 표출되지만 인간의 알량한 처치는 장기간입니다. 그런 치료들의 대부분은 장기간의 복용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시적 고혈압이나 허리 디스크증상 갱년기 우울증 증상 등에 평생에 걸친 약복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특히 고혈압 약은 진시황의 불로초라고 서슴없이 권하기까지 합니다. 불안감에 굴복하는 노년은 그처럼 약의 포로가 되어 제약사를 살찌웁니다. 그것은 건강의 회복이라기보다는 건강에 부작용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무차별적 폭력에 가깝습니다. 과도기적인 증상인지 장기적인 증상인지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 해도 국내의 혈압환자들 중 95% 정도는 불안감에 휩싸여 장복한다고 언론에서조차 말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노년의 애박적(愛縛的) 불안감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제적 사건이나 모두는 그 편리성에 침묵하며 안도하는 삶만을 고집합니다. 성능 좋고 무차별적인 약을 하루에 한 움큼씩 복용하며 건강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의 몸에 인공의 무차별적 공격은 이익보다 해가 건강증진보다는 부작용이 어디로 어떻게 나타날지를 현대의 의료체계는 감지할 수 없습니다. 오직 보편적 처치만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건강한 삶은 추위를 이겨내는 삶이며 극복의 의지에서 신체는 무수한 면역적인 활력들이 생성된다 하겠습니다. 세상은 누가 시키거나 제도에 순종적으로 따름에 의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활기찬 고투(苦鬪)에 의해 얻어지는 면역력으로 자신을 세울 때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시작된다 하겠습니다.
그런 신체적 변화는 대부분 고통을 수반함에 의해 손쉽게 알아챌 수 있는 변화들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자신이 지각할 수 있음에 의해 예방을 위한 자발적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큽니다. 그러나 정신의 노쇠에 대한 처치는 지난한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본능적 습관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젊어서는 열정의 지향과 목표가 있음에 의해 잠재된 상태로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마치 대상포진처럼 신체가 힘이 있을 때는 바이러스가 몸 안에 잠복해 노출되지 않습니다. 젊음의 열정으로 잠재되고 억눌려왔던 마음속 본능들이 노년으로 갈수록 통제장치의 망각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 나오며 자신의 정신세계를 덮치고 육체를 경직된 근육들로 만들어갑니다. 아쉽게도 본인만이 그것을 모를 뿐 아니라 더욱더 괴로운 것은 그런 증상들을 본인은 나이들은 어른의 당연한 경륜 내지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우월한 능력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어쭙잖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진리를 전도하고 전파하는 계시적 능력자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자신의 시각과 차이가 나면 화가 생겨나고 남한테 호통을 치려하고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그것도 안 되면 자기혼자 독백처럼 손가락질하며 저런 머저리 같은 인간 때문에 나라가 안 된다는 둥 세상이 말세라는 둥 수많은 독백으로 자신의 화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우월성에 보답하려 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인해 자연으로부터 상실된 인간의 소외된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현실적으로 억압되고 경직되며 어디다 하소연하지도 못하는 심정은 그처럼 노년에 자신과의 소외까지도 올바른 어른의 길로 여길 정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성취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개인의 억압된 감정은 분노와 화로 쌓여 노년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합니다. 자본주의 세계는 돈을 향한 무차별적이고 무한한 24시의 욕망으로 인해 그런 억눌림에서 삐져나오는 폭력성(그림자)은 개인의 사회활동은 물론이고 원만한 가정생활까지 힘들게 합니다. 자본의 욕망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 반대로서 커져가는 그림자의 어둠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왕따의 냉혹한 현실은 민주사회라는 이념을 도입해 그런 사회적 쓰나미(Tsunami)를 감추어왔을 뿐입니다. 민주의 이념은 자연스러운 생각과 사고의 자유에 의한 평등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욕망에 의해 성취되는 자본의 차별을 감추기 위한 강압적 억지평등을 민주의 평등으로 선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욕망에의 중독은 모두를 시지각적 장애우로 만들어갈 뿐입니다. 사회적 욕망이 극대화되면 될수록 그 반대급부로서의 소외되는 인간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욕망의 성취는 결국 어느 누군가의 고통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구조입니다. 민주주의는 자본의 무차별적 욕망으로 인해 형성되는 사회의 유기적 상반관계를 알량한 이념으로 차단시킬 수 있다는 거짓 평등만을 사회에 강압적으로 주입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신체는 수많은 세포가 매일매일 사라지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게 태어나면서 창조적 변화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반년이면 몸 전체의 세포가 뼈를 제외하고 모두 바뀐다고도 합니다. 그처럼 생성의 시기에 몸은 유기적인 관계망을 흐트러트리지 않게 하기위해 수많은 대응관계로서의 이상증상이 몸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변곡점에서 우리의 몸에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증상들이 보여 질수 있습니다. 더욱이 노년으로 다가갈수록 그런 주기의 변화가 더 확장되고 뚜렷해지며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현실화되어 갈수 있습니다. 대부분 정신적인 노화도 함께함에 따라 불안감 또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퇴직 후 노년의 삶에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런 답답하고 어디에 호소할 길 없어 보이는 신체적 변화에 대응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의 자신의 삶의 탄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입니다. 즉 젊어서의 삶의 방식이 노년의 삶의 방식으로 재도입될 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진할 기력은 없다는 것이 바로 운명을 논하는 주요 요인일 것입니다. 젊어서의 치열한 노력이 노년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건강도 그 시작은 젊어서이지 노년은 어렵습니다. 젊어서의 습관은 노년에도 그 탄력을 유지함으로서 삶의 질을 건강하게 유지할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젊어서의 허송세월은 돈에의 허송세월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신체건강에의 허송세월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삶은 똑똑한 인내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결국 노년의 건강은 젊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얼마나 잘 살았는가가 운명을 가름합니다. 얼마나 ‘자기답게’ 살았는가가 노년의 잣대입니다. 내 자신의 예를 들어 보면 젊어서 운동을 좋아하는 체질이라 운동으로 보낸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갑자기 60이 넘으며 혈압이 160에 이르렀고 뒷골이 묵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불안감도 커지며 동네 잘 아는 내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혈압 약을 먹으면 되니 별 걱정 안하셔도 된다는 즉각적인 처방이었습니다. 현대의 혈압 약은 부작용이 전혀 없으며 고대 진시황의 불로초와 마찬가지라는 덧붙임도 있었습니다. 혹 하는 마음에 바로 처방받아 약을 집으로 가져와 한 알을 먹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혹시 계속 먹어야 한다면 과연 부작용이 없다고 말할 근거를 못 찾았으니까요. 결국 약을 버리고 젊어서 해오던 운동을 지속하며 저절로 치유되었습니다. 그처럼 한번 지나가는 신체변화의 변곡점에서 그것에 원만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의사의 권고를 듣고 선택은 스스로가 해야 합니다. 의사는 자본에 가깝지 손님 개개인에게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실천적 의지력이 중요해지는 시절이며 노년의 삶에 운명을 결정합니다.
내 자신이 자기답게 살아가는 과정이 삶의 중요한 요소라 생각됩니다. 이때의 자기답게는 지금 여기 주어진 일에 몰두함에 의해 주변의 유혹들이 눈에 차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많은 경험을 겪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내 앞으로 돌리는 책임감과 주변에 민폐를 끼침이 없는 원만함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면역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 냉철한 시각을 가지고 주변에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나약한 마음은 다가오는 삶의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기 보다는 의타심에의 의지로 몸을 힘들게 하고 결국 병인을 몰고 올수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허리가 아프면 병원가고 더 아프면 수술하려 합니다. 그러나 수술을 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제발 수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악화되고 후유증은 삶의 질을 더욱더 확실하게 떨어트려 준다고 말합니다. 돈들이고 몸 망가지고 하지만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그처럼 곤란에 처할 경우 회복이 불가능하며 그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내 의지로 결단해 치료를 했다면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발휘할 내면의 판단력도 부족하겠지만 더욱이 대부분의 병원에서 수술을 권하기에 못난 인정은 순박하게 따라가기 마련이겠지요.
자신의 전공이고 돈벌이가 되는데 권유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더 좋은 방식도 분명히 있다고 보여 집니다. 나 또한 허리를 다쳐 힘들었으나 아침마다 출근 전 수영을 10년 이상 계속해 개선시켰으며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완치는 아닙니다만 삶에 영향은 거의 미소하다고 하겠습니다. 집사람도 허리가 통증이 심하고 통증이 다리까지 내려와 힘들어했습니다. 무수히 병원에 가 한번 촬영에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결국 허리 디스크 판정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너무 힘들어하기에 걷기가 좋을 것 같아 오전에 두 시간씩 함께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일주일 지나며 문득 깨달았습니다. 집사람의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뒤에서 보였던 것입니다. 즉 중심이 오른발에 있었으며 내딛는 오른발은 팔자걸음이었고 왼발은 오른발에 걸쳐있는 느낌으로 걷는 걸음걸이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허리에 서서히 오는 통증들은 대부분이 습관의 병이란 깨달음이었습니다. 나약함으로 다가오는 습관의 병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얽어맬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처방과 방식을 말해주어도 자신의 운명에 포로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외부의 친절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해버림으로써 더욱더 병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걸을 때에 흔드는 팔도 앞뒤로 똑바로 흔드는 것보다는 Goose Step에서처럼 양팔을 앞뒤가 아니라 옆으로 내뻗는 방식의 걷기로 허리근육을 강화시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완치는 없습니다. 병의 원인을 제공한 내 습관을 다양하게 바꾸어보며 내게 맞는 방식을 새롭게 찾아내 그것을 지속함으로서 해결에 실마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습관의 병을 병원에서 의사가 관찰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된 시각은 자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험이 있는 주변인의 친밀한 관심에 의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종합병원의 문제점은 오직 통증의 부위를 찾아 자신들의 알량한 기술로 수술해주겠다는 결과론적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자본의 의도에 맞는 맞춤서비스로 눈에 보이는 결과에 대한 해결책에만 매달립니다. 수많은 신경이 통과하는 부위를 신이 아닌 이상 어찌 아무런 후유증 없이 수술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리적 잘못된 습관으로 나타난 허리디스크는 분명히 좋은 자세의 걷기나 수영 등으로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물론 부상으로 온 허리디스크도 꾸준한 수영을 특히 자유형을 통해 개선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몸의 신비는 그처럼 지속적인 노력으로 회복이 가능한 자율신경들의 신통함을 통해 스스로 치유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노년의 병들은 병원에서의 치료에 앞서 자신의 습관을 냉철하게 판별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 우선된다 하겠습니다.
특히 임플란트의 경우에는 허리 디스크 치료보다도 더 무서운 증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허리는 한 사람에게 하나만이 있다면 치아는 한 사람에게 28-32개라고 하면 그 얼마나 많은 숫자적 교류가 넘쳐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돈으로 연결되며 먼저 선취하는 자에게 돌아갈 금덩이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취해야만 하는 목표물이자 대상물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식, 땅 투기 아파트투기에 이어 인간투기의 투전판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자본주의 나라의 적나라한 의료계의 현실임을 아직도 온정적이고 근대적인 시각으로 괜찮다고 쓰다듬고 있는 시절을 마주할 뿐입니다. 삼박자들의 손길은 당연히 순리에서 벗어난 이단이지만 아직도 정통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지성의 우월을 자랑하는 인간들은 모두다 거기에 빨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빨리빨리 수술해버려야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고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취할 지름길인 것입니다. 노년에 잇몸을 뚫기 위해 마취를 하는 과정에서 무서운 충격과 공포심을 환자가 갖게 되며 본인도 모르게 뇌와 연결된 신경들에게 무수한 충격과 고통을 줌으로써 뇌세포 자체가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괴이한 현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은 몇 년이 지나서 진행되는 지속적인 기억력 감퇴를 그냥 노년의 현상으로 치부해버림으로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망각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분명 인간은 그처럼 자연을 벗어난 행위에 의해서는 자연으로부터 그 만큼의 보복을 받아야 함이 정확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우리의 몸은 자연의 세계이며 인공이 가미될 수 없는 순수 유기체입니다. 우리사회의 물리적 사건사고로 고통 받는 분들의 대다수가 삼박자들의 우월경쟁의 대가로 그 애박적((愛縛的)) 희생을 가져왔겠으나 아무도 그 깊은 내막을 파헤치려하지 않습니다.
불가피하게 몸에 가해지는 충격들은 어쩔 수 없겠으나 허리나 치아와 같이 여러 다른 치료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술만이 최선인양 나대는 삼박자들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들은 근거도 못 찾고 구천을 떠돌고 있으나 삼박자들은 그 보상으로 무수한 황금을 집안에 쌓아가며 배를 불리고 있는 시절이 현대입니다. 그들의 영악함은 더욱더 큰일인 것이 치아치료가 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금덩이로 인식함에 의해 인터넷상에 떠다니는 배너광고를 보고 있자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임플란트 시술 지원자 모집중 바로 지금 특별혜택을 받아보세요.” 희대의 악마가 나타난 것입니다. 짝잔발에서 구름발로 나아가는 삼박자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냉철하지 못한 수많은 애박적((愛縛的)) 근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줄을 서서 자신의 파괴를 복권당첨처럼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평화로운 지구상에 이 이상의 파괴가 없어 보입니다. 자본이 몰고 온 평화로운 전쟁입니다.
삼박자들의 파괴는 그처럼 도를 넘어 영악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나 자본주의의 신(神)인 돈의 위용 앞에 모두가 굴복하고 노예의 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시절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애박적((愛縛的)) 근대인들은 그들 삼박자의 천박함은 애써 외면하고 오직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궁금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수한 소문을 진실로 여기기도 하고 최고의 대학을 나오면 마치 신의 손인 미다스의 손인 양 인정해버리는 근대인의 순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사면허와 졸업장은 최상의 장식품이자 고귀함이며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성체입니다. 신주(神主)단지에 봉헌되는 황금만을 손아귀에 악귀처럼 쥐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과거 교권계급의 권위를 현대에 들어서는 이들 삼박자들이 고루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의 비판과 도전은 삼박자의 권능에 믿음으로 화답하는 근대인들로부터 모멸에 찬 냉대를 받을 뿐입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치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하려고 난리를 치며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하다못해 시내버스의 옆면에 대형광고를 달고 도시민들을 유혹하며 빚쟁이 수금하듯이 쓸어 담아 가지려합니다. 그것은 바로 치질수술의 유행입니다. 나 또한 조금만 피곤하면 엄청나게 그곳이 고통스럽습니다. 젊어서부터 그것은 내 고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거북함과 아픔은 쉽게 해결날 수 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둔하다고 해야 할까 눈치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내 자신 스스로 자기답게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부의 신속한 해결의 유혹에서 조금 멀리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조금 참으면서 어떤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을 보고 비데를 사용하던 것을 벗어나 조금 원시적으로 샤워꼭지로 그곳을 더운물로 마사지 비슷하게 해주면서 깨끗이 물로 씻어내 보았습니다. 더운물로 하고 끝에 차가운 물로 마무리하자 신기하게도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즉 병과 더불어 아픔과 더불어서 함께 자기의 몸도 쓰다듬어 가며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족저근막염도 있었습니다.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흔한 그것은 발바닥의 표피 안쪽에서 디딜 때마다 찌르는 듯 고통을 주는 염증증세입니다. 저는 그것도 제 나름의 무식한 방식을 도입해 지금은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완치는 아닙니다만 통증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발의 안쪽에 있는 insole(인솔, 깔창)을 꺼내 발바닥에 대고 통증을 일으키는 곳에 딱 맞추어 동그랗게 오려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인솔을 하나 더 사서 원 인솔의 원형보다 조금 더 크게 원형으로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개의 인솔을 넣어서 신고 운동을 하면 통증이 없습니다. 구두를 신어야 할 경우에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처럼 해서 완치는 아니지만 통증은 가셔집니다. 물론 설악산 지리산도 등산화안쪽에 그것을 넣고 거뜬하게 다녔습니다. 지금은 거의 못 느껴 양말도 없이 샌들을 신고 두 시간을 걸어보았으나 통증이 없어졌습니다. 몸의 신비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눈에 갑작스런 섬광을 맞았을 때나 여름날 등산 중에 차가운 바위에 시원하게 드러누워 있을 때 그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에 따른 신체의 이상반응은 바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기에 물리면 바로 따갑고 가렵고 합니다. 그러나 무지근하게 다가온 고통에 대해서는 몸도 무지근하게 대응합니다. 정확하게 12시간이 지나서야 몸에서 그런 불협화음에 대응하는 이상증상을 외부로 표출하는 대응반응을 나타내줍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앞가슴의 뼈가 쪼개지는 통증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난 그런 가벼운 충격에도 몸 안에서 극복하려는 내성이 서서히 준비하고 작용해 마지막으로 신체 외부로 분출해 내기까지 12시간이나 걸립니다. 신체의 자율신경 체계가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해소시키는 노력의 애씀에 12시간이나 소요되며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애씀이 있기에 몸의 조화로움은 들어온 외부 충격을 뱉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고통으로 병원을 찾았다면 무수한 촬영과 지난한 기다림으로 이상 없음의 통보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림자 증상일 뿐이며 그런 증상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몸이 건강하다는 증상임에도 그것에 무지한 병원은 자신의 건강함을 보장해준 것으로 오인하며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신비이며 과학이 밝혀낼 수 없는 유기체의 움직임입니다. 실제적 대상과의 대응력은 우수하겠으나 그림자 증상에 대한 대응력에서는 언어적 의미 그대로 돈이 될 수 없음에 의해 소멸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자연세계에는 소멸과 탄생만이 있지 그 어디에도 과정의 변형은 없습니다. 우리 몸의 그 어디에 허술한 곳이 있어 아무리 수술해대도, 과정의 변형에도 끄떡없는 신경조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는 모두에 연결됨에 의해 자연이며 인간은 인간에 연결됨에 의해 사람인 것입니다.
그 연결고리를 삼박자들은 자신들의 같잖은 지성적 취향으로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들의 어리석은 지성은 지금 우리 현대인들의 고통을 양산하고 있으나 정작 삼박자들은 스스로 지성의 우월성에 취해 세상의 날이 밝았으며 현대로 바뀐 것도 모르면서 장막 안에서 뽐내고 있는 시절입니다. 새 우리에 갇힌 인간은 욕망만을 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애박적((愛縛的)) 본능의 시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겨우 책임감을 무겁게 절감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종료합니다. 그 어디에서고 어느 부서든지 그런 현상을 없애버리겠다는 자본에 역행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 치열한 세계에 다가가보지 못한 연약한 인간들이 바로 삼박자 춤을 추는 지성의 꼭두각시들이 벌이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창백한 지성의 우월성만을 지상최대의 무기로 내세우며 현대의 자본주의와 결탁함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허구적 이념으로부터 그 안정성까지 보장받고 있는 시절입니다. 공산주의가 허구이듯이 민주주의도 허구입니다. 이즘은 말 그대로 강자의 논리입니다. 지성의 세계에 맞서보려는 하찮은 인간들에게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함으로서 그들 삼박자의 조화로운 마술의 공연장이 된 현장이 자본주의적 삶의 터전입니다.
세상은 삼박자들의 독무대인양 날뛰고 있으니 그것은 근대의 꼭두각시놀이가 현대인의 삶을 옥죄고 있는 꼴입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강아지를 흔드는 시절입니다. 아무 근거 없이 오직 지성의 우월만으로 삼박자 춤을 추어대는 그들의 꼭두각시놀이에 초대된 시민들의 고통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알량한 지성에 의지해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해냈겠으나 세상은 우연에 의한 시스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을 벗어나 직업 외적 자부심만을 키워왔고 누리려합니다. 있지도 않은 진리를 찾아 순박한 서민들의 약점을 휘어잡고 예언자처럼 행세하기를 즐깁니다. 모든 학문은 그들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의 근거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어둠속에서 지성이라는 인간이 설정한 지식체계에 덮어 있습니다. 지성이 거짓임이 낱낱이 밝혀진 현대에 아직도 어둠의 지성을 세상의 진리요 선구자로 인식하는 사태가 지속되며 촛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하고 투명한 세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치열한 고투(苦鬪)를 거치지 못하였으면서도 오직 이념으로서의 휴머니즘이니 인본주의니 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근대적 신념으로 세상을 재단해가며 세계에 궁극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는 이상 그런 애박적((愛縛的)) 놀이는 계속될 뿐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자기답게 잘 진행시키는 소박하지만 치열한 고박적(苦縛的) 삶을 살아가는 길만이 복음의 길입니다. 그 어디 외부세계의 진리가 있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의타적 생각은 너무나도 구태의연하며 이미 세월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옛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며 그 그림자입니다. 현대인의 병인은 여기서 출발하여야 하겠으나 삼박자들은 자신만의 욕망에 취해 그 모든 병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황금에 눈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시각은 지성적 배움으로 이룩할 수 없으며 오직 치열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며 고투하는 삶속에서 생성됩니다. 그처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고뇌의 극복을 위한 땀방울에서 인생은 시작되며 몸은 자연으로 회복되며 삶의 도전 또한 새롭게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