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은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마 27:1-10, 행2:18
이번 노희찬의원의 자살은 드루킹에 대한 특검을 하던중 ‘드루킹’ 측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앞으로 검찰수사를 예상하고 있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2018. 7. 23일 서울 남산의 한 아파트에서 추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드루킹은 특정 개인의 아이디가 드루킹이며 경공모는 드르킹이란 아이디로 들어가는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네이버 카페로 그저 인터넷 사이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점은 바로 드루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지기 김동원(49)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론조작을 하면서 정치권으로의 확장 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네이버 댓글을 조작한 혐의로 기소된 ‘드루킹’김동원 씨가 구속되면서 허익범 특별검사팀이 7월 20일 김씨 일당의 댓글조작 의심 행위 1000만건 상당을 새롭게 확인해 재판에 넘기면서 드루킹 도 모 변호사가 바로 노희찬 원내대표의 경기고 동문인데다 경공모의 핵심 멤버인 도변호사가 긴급체포된 이후 도변호사는 노희찬 원내대표와 ‘드루킹’ 김씨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특히 경공모가 모은 정치자금 5000만원을 노희찬 원내대표 측에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므로 노희찬 원내대표에 대해 반드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오다 일어난 사건이다. 노 원내대표는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은 받았지만 부정한 청탁은 아니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정치자금법을 어긴 정치인이 수사로 인하여 사건이 확대된다면 자신이 평생 몸 바쳐 온 진보정당에 피해가 가면 당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수사받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고 노회찬의원을 추모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은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도 이틀 동안 8000명(24일 밤 10시 기준)의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정치적인 범법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게되면 그의 정치적 범죄는 종결되고 일반 사람들은 그를 더욱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일 뿐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불법정치자금 수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정치인들의 이런 자살행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자살로 끝나면 진실은 미궁으로 빠졌고, 오랜시간 정치권을 뒤흔들었다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불행인데 이번 드루킹관련 특검도 자살로 인해 이사건을 제대로 밝혀낼지 걱정스럽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5~2014년까지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한 피의자는 108명에 이른다.
놀랄만한 것은 노무현정부시절 2004년 2월에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수감 중이던 안상영 부산시장이 부산구치소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 시 인사 및 납품 비리로 검찰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한강에 투신해 자살했고, 6월에는 전문대 설립과 관련한 뇌물 혐의로 검찰 내사를 받던 이준원 파주시장 역시 한강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한국정치사에서 잊을수 없는 사건은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을 충격으로 빠뜨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대검 중수부에서 소환조사를 받은 직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있는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수사핵심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640만불 뇌물수수에 관한 것인데 노 전 대통령 재임시 가족들이 박연차 전 회장에게서 640만 달러를 뇌물로 받았는지 여부인데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2011년 인터뷰에서 "박 전 회장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달라고 해서 줬다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검찰은 서둘러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고, 640만 달러는 조용히 묻혔다.
이번 노희찬의원 자살도 불법 정치적 자금문제가 터질적마다 나타난 것으로 앞으로도 제2 제3의 노무현 노희찬같은 자살사건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15년째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자살률이 연속으로 증가했는데 2014년 전체 사망자 수 26만7692명 중에 자살 사망자 수는 1만3836명이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률은 27.3명으로 10년 전과 비교하면 3.6명(15%) 늘어났다. 2015년 한해 자살사망자만도 13513명으로 하루에 44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자살을 하는가?
특히 같은 기간 가장 높은 노인 자살률은 54.8명으로 OECD 평균 18.4명의 무려 세 배에 달했는데 노인층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공적연금 같은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데다 핵가족화로 인한 고립감, 질병 부담 등이 심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습니다.
그런데 자살은 감염성이 높아 국가 차원의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한국인의 자살은 전 연령대 전 직업에서 고르게 증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 청소년들 자살
교육과학기술부가 조사한 지난 5년간 학생 자살자 조사에 따르면, 2005년 136명에서 4년만에 2009년에는 202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을 생각한 이유로는 '성적, 진학문제'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5-19세 청소년들의 자살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 대학생 자살 수
2009년 통계청 제공 연령별 3대 사망 원인 구성비 및 사망률 중 20 - 29세의 사망원인으로 자살이 44.6%로 암(9.3%)을 제치고 1위로 나타났는데, 교육과학기술부의 학생 자살자 수에 대한 자료를 보면 초중고생 자살자 수를 합친 수 보다 대학생 자살자 수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충동 원인으로는 ‘경제문제(등록금 포함)’가 57%로 1위를 차지하였고, ‘취업문제’가 30%로 그 뒤를 이어간다.
* 군인의 자살
군대 내에서는 매년 70-80명(평균 5일에 1명의 군인이 자살을 택하고 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은 15일 지난 2006년부터 올해 6월 말까지 집계된 각 군별 사망자 총 552명 가운데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348명에 달해 63.0%에 이른다고 밝혔다. 자살사고 사망자를 신분별로 살펴보면, 장교 32명(9.2%), 준·부사관 72명(20.7%), 병 235명(67.5%), 군무원 9명(2.6%) 등이다.
* 직장인들 자살
2009년 잡코리아는 직장인 62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74.4%(466명)가 회사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응답했다.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하는 등 이러한 요인이 직장인들의 자살의 원인이 되고 있다.
* 무직자의 자살
대한민국의 백수는 지속적인 취업난으로 인한 계속되는 취업 실패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취업정보 커뮤니티 취업뽀개기가 2011년 4월 4일부터 13일까지 구직자 5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4.2%가 `취업스트레스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 동반 자살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대한민국은 인터넷 카페를 비롯한 웹사이트를 비밀리에 만들어 만나 처음 만나 동반자살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찰청은 2009년부터 매년 보건복지부(산하 중앙자살예방센터)와 공동으로 '인터넷상 자살유해정보 신고대회'를 개최하여 왔으며, 이 신고대회에는 사이버 명예경찰인 누리캅스와 중앙자살예방센터 모니터링단이 참여 하고 있다. 특히, 2016년에는 누리캅스 818명과 중앙자살예방센터 모니터링단 100명이 참여하여 총 9000여건의 자살유해정보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포털사 등에 삭제를 요청하여 그 중 5400여건을 삭제하였다.
자살원인은 심각한 인격 장애이다
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들은 대한민국 인구의 10-20%가 인격 장애의 경향이 있다고 보며, 이 가운데 1%를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또 대한민국 내에서만 5만에서 10만에 달하는 인격 장애자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인격장애가 있는 곳에는 정신을 혼미게 하는 신들이 있는데 모두 사탄마귀라고 한다.
이제 결론을 말하려고 한다. 자살하면 그 영혼은 지옥이다. 신약성서에서 자살한 사람은 대표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아먹은 가룟유다이다. 물론 지옥을 바로 갔는지 아닌지는 신이 아니기에 모른다지만, 여러 성서 내용을 토대로 분석해 봤을 때는 자살은 곧 지옥이다라고 결론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자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1. 예수님의 12제자
성경 기자들은 가룟 유다를 가리킬 때마다 그의 이름 앞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는 코멘트를 다는데 이는 아주 질이 다른 한 사람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한 멤버로 가담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요 12:4-6, 13:29) 세리 공무원 출신인 마태가 회계에 적합한 인물일 것 같은데 가룟 유다를 내세운 것으로 보아 초기의 신실성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금을 관리한다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잘 발달된 요즘도 보통 관공서나 은행의 공금을 관리하는 자리에 사람을 임용할 때는 그의 재산 상태, 금전거래 상황, 청렴 여부, 인성까지 조사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돈을 만지다보면 주머닛돈이든 쌈짓돈이든 사적인 일에 유용하거나 횡령하여 범죄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공통점은 둘 다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둘은 많이 다르다. 성경에 기록된 서열을 볼 때 복음서 전체에서 언제나 베드로는 1순위이고 가룟유다는 제자들의 나열에서 제일 끝에 기록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12제자의 이름들이 그냥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나열한 네 사람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두 번째 나열한 네 사람은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입니다.
세 번째 네 사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곧 예수를 판 가룟유다입니다(마 10:2~4), (막6:7~13), (눅9:1~6).
세 복음서에서 언제나 베드로는 선두이고 가장 마지막에는 가룟유다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한결같이 가룟유다를 "예수를 판 자"라 하였습니다.
2. 베드로와 가룟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갈릴리 해변에서 부르셨습니다. 저녁에 고기를 잡으로 나가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침이 되어 돌아 올 적에는 빈배로 돌아왔습니다. 빈 배로 돌아온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지친 베드로에게 다가 온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니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쫓아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틀린 점은 어부 출신이 아닙니다. 대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 출신들인데 가룟유다는 가룟지방출신입니다. 가룟유다는 제자들 중에 머리회전이 빠른 자 였습니다. 계산이 빨라서 제자들의 회계를 맡았으나 양심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슬쩍 훔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한복음12:6)"이 기록을 보면 가룟유다는 돈 궤를 맡고 알게 모르게 훔쳤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요한은 가룟 유다의 부정직한 행동에 대해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간 도적이라(요 12:6)”고 노골적으로 꼬집는 것을 보면 그를 보는 제자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던 것 같다. 유다는 일련의 타락의 과정을 통해 초심을 잃었고 신실성과 정직성을 상실하는 자리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계직을 끝까지 유지한 것을 보면 아마 예수님의 사랑과 기다림 때문이었을 것이다.(요13: 1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저녁 식사가 끝난 무렵에 이제 마귀가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속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겨주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또 한 번은 부활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부었다. 노동자 1년 치에 상당하는 돈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저 큰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지 않고 허비하는가?(요 12:5)”라며 분노하였다. 가룟 유다 자신이야말로 가난한 자와 나그네의 하나님(레 23:22 너희가 너희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는 네 밭모퉁이를 수확하면서 깨끗이 거두지 말며 네 수확물의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하여 그것들을 남겨둘지니라.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니라)을 잘 섬기고 있었지만, 향유를 쏟아버린 마리아나 그 귀한 재화를 낭비하도록 방조한 예수님은 약자나 빈자에 대해 무관심하며 전혀 배려도 없다고 비난하는 듯하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헌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고귀한 희생을 바칠 수 있는 참사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바보들의 액세서리로만 비쳤을 것 같다.
3.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배신
(1) 가롯유다의 배신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다른 생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께서 때가 되면 예수께서 반역을 일으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가룟유다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을 선동하지도 충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힘있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민족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3년 반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본 것은 나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고난을 받아야 하겠고 십자가에 죽으리라"하는데 가룟유다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롯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니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넘겨주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은 30을 받았습니다.
(2) 베드로의 배신
가룟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은 똑같았다! 베드로의 성격은 다혈질이었습니다. 뜨거울 때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차가울 때는 예수님께 호되게 야단 맞기도 하였습니다. 흥분하면 참지 못하고 남의 귀까지 잘라버리는 성격이었습니다. 뜨거울 때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날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대답에 더러는 침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고 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배신을 하였습니다.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첫번째 서열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맹세한다고 맹세하는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한편 예수를 팔고 빌라도 법정의 사형 언도를 본 가룟 유다도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자학과 절망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일말의 기대를 걸고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갔지만 그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한 방울의 동정도 찾을 수 없었다. 무죄한 예수를 죽여 인간적인 기득권을 움켜쥐는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서 꺼져가는 한 생명을 돌봐줄 그 어떤 여력도 찾을 수 없었다. 생명없는 종교의 한 단면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의 수난으로 수라장이 되어버린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을 하는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다들 자기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졌다. 만약 제자들이라도 허우적거리는 가룟 유다를 보듬어줄 만한 좋은 멘토라도 있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넋두리를 해봅니다. 가장 옳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말씀을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을 적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무조건 성경의 기록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4. 가룟유다의 반성과 베드로의 회개
(1) 가룟유다의 반성
가룟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자유의지 때문인가?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고 나서 괴로워 하였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한 짓을 후회하는 뉘우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렸다는 괴로운 양심으로 가룟유다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반성은 하였지만 회개가 없었습니다. 회개없는 반성의 선택은 자살이었습니다. 자살은 지옥행입니다.
사람들이 반성으로 가룟유다처럼 자살을 선택하지만 회개 없는 반성의 자살은 곧 지옥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2) 베드로의 회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 한 자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와 다른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 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시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회개의 영이 그 안에 있어 회개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반성을 넘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27)"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구원할 기회를 얻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이나 베드로의 배신은 둘다 배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반성만 하고 회개 없는 자살로 지옥으로 떨어졌고 베드로는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반성을 넘어 회개하므로써 구원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을 하였으나 용서를 받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가룟유다는 여전히 배신자로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나 반성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통곡하는 회개로 구원받았습니다.
5. 배신자 가롯 유다의 선택은 지옥행
인간의 생애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 까지 선택하며 살아야 하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잠자리로 되돌아올 때 까지 하루의 일과도 선택의 연속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같은 장소에서 살았지만, 소유가 점점 많아지자 더 이상 그들이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매일 눈만 뜨면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도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짐승에게 먹일 물이나 꼴의 우선권 문제로 다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고 했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말자고 결심해도 한 번 일어난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과 롯이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요단들을 바라보고 그 곳을 택하여 동쪽으로 나아갔고, 아브라함은 그 반대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진 후에 마음에 상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 성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에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소돔 성을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그 성과 하나님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그 온 들과 거민들까지 다 멸하였고, 롯은 겨우 자신과 두 딸의 생명만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선택이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잘못된 선택이 가룟 유다를 통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마26:15절에 보면,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기기로 하고 이미 은 30냥을 그 대가로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 일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6:21)고 하셨고, 충격과 근심 중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고 하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아 은 30을 받았는데 예수님께서 인자를 판자에게는 화가 미치리라는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이 나야 회개를 하는데 이 기회를 그냥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그는 십자가 구원의 공로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언 뜻 들어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다 복음서 같은 것도 있으며, 허버트 크로스니(Herbert Krosney) 같은 사람은 The Lost Gospel(잃어버린 복음) 같은 저서를 통하여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비밀의 약속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인 추리나 뛰어난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제사장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과도 어떤 종류의 밀약이 있었다면 왜 그렇게 제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비참하게 마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비밀이나 사람들의 약속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의 도우시고 인도하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공로는 하나님의 예정과 의와 그 분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나타낼 수 없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정 앞에서 오직 순종만 있었을 뿐이며, 그래서 예수님은 한평생을 겸손함과 온유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그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셨는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가룟유다의 마지막은 너무 참담하게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18-19절에 보면,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고 하였고, 이 사건을 온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스가랴서 11:12-13절에서 가롯 유다가 은 30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유다가 스스로 뉘우친 것이나, 그래서 이 일을 되돌리려고 애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으니 우리의 모든 거래는 없는 것으로 하고 모든 것을 되돌리자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죄성을 주장했고, 그 대가로 자신이 받은 은 30냥을 그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거부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주장이 하나도 용납되지 못함을 보고는 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나중에는 그 돈을 성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고 목맨 줄이 끈어져서 곤두박질쳐서 배속에 있는 창자까지 나오는 비참한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 무죄한 피에 대한 죗값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으니 네가 당하라는 것이라도 증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놓고 후회를 한다고 해서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후회는 자신의 생각은 바꿀 수 있어도 자신이 지은 허물이나 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은 유다가 택한 선택의 한계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배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도록 괴로워하고 고통한 것은 사실입니다. 뒤늦게라도 후회한 것은 불행 중에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의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을 끊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유다만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전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한 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나 유다의 행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은 배신이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똑같은 배신의 길을 갔지만, 그들이 나중에 선택한 행동이 그들의 가는 길을 영원히 갈라놓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닭 울음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로 생각만 고친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을 돌이켰지만, 유다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 세상 사람들처럼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그 대가가 스스로의 목숨까지 끊어버려야 할 정도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이유는 인간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가치가 스스로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신 것입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약속해 주셨으며, 그는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허물과 질병과 가난과 모든 고통과 저주와 영원한 죽음의 문제까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해결해 주신 줄 믿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니며 제자의 길을 걸었던 가룟 유다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죄와 실패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의 행동은 세상적으로 보면 용기 있는 사람의 행동일 수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과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유다의 선택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런 신앙심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의 가책을 좋은 현상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며 더 좋은 방법과 길을 얻기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가 선택한 자살은 성경에서 분명한 언급은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생명은 사람이 주관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생명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좌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더 이상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요, 인생이 청지기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중대한 영적인 도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여 받은 것이요, 그러므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 줄 믿습니다.
가룟유다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대제사장으로부터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약속했을 때에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빵 그릇에 손을 넣는 순간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나중에 당할 이런 비참한 결과를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눈이 어두워지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더라면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번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유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쏟은 물도 다시 주워 담게 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받고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이외에 그 어떤 공로나 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는 이 선언이 오늘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은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 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6. 스스로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
만일 자살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했다면 지속적인 고통을 끝내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살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선택되는 순간 신앙과는 상관없는 영적 사망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두워지며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극단적으로는 자살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성경에 명시된대로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넘겨준 가룟유다의 갈등과 자살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무죄성 등을 다루면서 가룟유다는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마27:3-5). 마지막 자신의 인생에 주어졌던 구원의 기회를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이디어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 못할 독특한 것이었으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졌던 구원의 기회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그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책감뿐이었는데 그 죄책감은 죽음으로서 죄책감을 대신했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말입니다. 천국, 지옥을 가르는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자살은 씻을 수 없는 죄임에는 분명합니다. 죄값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간다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 라는 엄격하고도 절대적인 계명이 있습니다. 자살은 곧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죄이며(고전3:17),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입니다(출20:13).
또한 회개의 기회 조차도 박탈해 버리는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때문에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 라는 말이 나온 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절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라는 말에 대하여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을 알고 그분을 사랑할 줄 아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피는 생명의 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살해하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피값을 살인자에게서 취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살인은 심각한 죄지요. 타인의 생명을 죽이든 자신의 생명을 끊든 그것은 동일한 살인 행위일 뿐” 어쨌든 자살이든 우발적 살인이든 다 살인이죠. 어떤 경우에 어떤 특정한 죄는 믿음을 버린 결과일 수 있다”며 “자살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의 배교일 수 있다”고 했다. 즉, 경우에 따라 자살이라는 행위는 이미 믿음을 버린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거나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자살한 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엄청난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한 자들은 자신을 살인한 자들이며 이것은 6계명을 불순종한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과 관련해, 그 어떤 경우라도 자살이 미화되는 세상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고 밝힌 정치인도 있는데 옳은 말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졌으면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살을 택하는 건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는 가지만 자살은 생명에 대한 또 다른 범죄라며, 사회 지도자급 인사의 자살을 미화하다 보면 앞으로도 이러한 자살하는 풍조는 점점 득세할 것이며 마치 자살한 자가 국민의 동정이라도 받듯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며 이러한 자살모방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끔직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자살을 미화하거나 삐뚤어진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경계하여야 하며 본인 뿐아니라 후세를 위하여 선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살이라는 마지막 죽음앞에서는 회개할 기회조차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오직 죽음 뒤에 만유의 심판자 앞에서 공정한 심판을 받는 것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여야지 내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오늘 가룟유다의 결말로 알 수 있읍니다. 그리고 자살을 미화하는 세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자신을 살해한 것입니다. 결과는 너무 확실한 것입니다. 계명에 불순종한자는 천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우리 전체를 맡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