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스토리텔링
만강홍(滿江紅)에 실린 사랑 이야기
윤 샘
개녕동 처녀와 양생이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곳은 만복사였다. 때는 배꽃이 달빛 아래 은하수를 이루고 새들이 제 짝을 찾아 흥에 겨워하는 봄밤이었다. 개녕동 처녀와 양생은 고은 등불을 곁에 두고 마주 보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가 오늘에 이르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었는데 한 밤중이 되자 남원 교룡산 위에 달이 떠오르며 창으로 그림자가 들이쳤다. 홀연 발소리가 들렸다.
개녕동 처녀가 양생에게 말했다 “ 제 하녀 아향이 오는가 봅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때 창 밖에서 아향이 물었다. “아씨, 지금껏 아씨께서는 중문 밖을 나가신 적이 없으셨는데, 어제 저녁에는 느닷없이 외출을 하여 이 누추한 곳에 머물고 계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개녕동 처녀가 대답했다. “그래 네가 걱정하는 바는 알겠다마는 오늘은 참으로 귀한 날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늘 하늘이 돕고 부처님이 보살펴 주신 은덕에 훌륭한 낭군을 만나 백년해로하기로 하였다. 비록 부모님께 알려서 예법에 맞게 혼례를 치른 것은 아니나 잔치를 치른 것과 다름없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 또한 살아가며 만나는 기이한 인연일 것이다. 알겠느냐?”
시녀 아향은 대답이 없었다. 개녕동 처녀가 다시 물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아향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씨, 하오나 어찌 옛 법도를 어기시려하시나이까? 시녀인 저도 지켜야할 부녀자의 법도를 알고 있거늘 아씨께서 어찌 그것을 어기시려하나요?”
개녕동 처녀가 더욱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부터 전해오는 법도도 중요한 것인 줄 내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법도란 사람이 천지간에 순리에 따라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순리가 무어냐? 사물의 본성과 사람의 천성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내 비록 예법에 따라 혼례를 치른 것은 아니나 하늘과 부처님이 정해 주신 낭군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면 그 뿐 그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 본디 그렇게 맺어진 부부의 연에 순서와 장식을 한 것이 예법이 아니겠느냐? 인연이 먼저지 예법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살이가 먼저요 법은 나중이니 내말 뜻을 알겠느냐?”
그때서야 아향은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예 아씨 잘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제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에 개녕동 처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오늘 참으로 소중한 낭군을 모시고 인륜지대사의 깊은 뜻을 되새기고, 또 음양이 화합하는 천지간의 즐거움을 누리려하니 너는 집에 가서 자리와 주과 상을 보아 오거라.”
이에 아향이 그렇게 했다.
흰 배꽃이 만발한 만복사 뜰에다 술상을 차려놓고 마주 앉았다. 참으로 정겨운 이야기가 오갔다. 밤은 깊어 어느덧 사경에 접어들었다. 여러 가지 귀한 약재와 잘 익은 곡식으로 정성껏 빚은 술에서는 정녕 인간세계에서는 다시 맛볼 수 없는 천상의 맛 그대로였다. 술잔을 기울여 마신 양생은 이토록 좋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이에 술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르는 남녀가 서로 하나 되는 그 원천을 생각하고, 사랑주라 명명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양생은 개녕동 처녀에게 사랑주를 권했다. 몇 순배의 사랑주가 오가며 나누는 말소리는 천상의 가락과 같았다. 사랑주의 향기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랑하는 마음은 만강홍의 가락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개녕동 처녀가 부른 만강홍 노래는 이랬다.
“아까운 세월은 활시위 떠난 화살처럼 휘익 지나가고, 가슴속엔 번민만 가득하였는데, 이제 부질없는 눈물일랑 닦아내리. 지금 누구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있느냐, 오호 덩실 내 낭군 아니더냐. 기쁜 오늘밤, 추연이 부는 천상의 피리소리에 봄날이 돌아와 내 천년 한이 풀어지니, 만강홍 가락에 은주발 기울여 청춘의 사랑주를 마시리. 사랑주를 마시리.”
- 개녕동 처녀가 천상의 사랑주 향취 가득 안고 평생배필 양생을 위해서 불렀던 만강홍 가락은 지금도 남원 만복사에 전해진다. 천상의 인연이 그리우시거든 남원 만복사지를 찾아 만강홍 가락에 취해 보시라.
20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