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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亭十二景韻
선조의 정자 열두 경치 시운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 1659-1702)
秋水澄淸秋月輝 가을물 맑디맑고 가을 달은 휘황한데,
神龜宛枉舊苔磯 신령한 거북 노닐던 이끼 바위는 오래됐네.
恭惟千載攀遺韻 삼가 천 년을 생각해보니 남긴 시가 있고,
玉潔氷壺識者稀 옥 같이 깨끗하고 얼음 항아리 같은 달을 아는 이 드무네.
右 虎溪秋月 호계의 가을달
*신귀(神龜), 예미(曳尾): 세속적인 출세나 명예에 구속됨이 없이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에서 죽은 지 3천 년 되는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뼈를 묘당(廟堂)에 모셔 놓았는데, 장자(莊子)가 이를 빗대어 “죽어서 뼈다귀로 남아 귀하게 되려 하겠는가. 아니면 살아서 흙탕물 속에 꼬리를 끌고 싶어 하겠는가.[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라고 한 내용이 추수편(秋水篇)에 실려 있다.
*공유천재: 주희(朱熹)의 〈재거감흥(齋居感興)〉 20수 중 제17수에 “삼가 천 년의 마음을 살피건대,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추는 듯하네. 노나라의 공자가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었으랴. 산정하고 조술한 것에 성현의 법도가 남아 있는 걸.〔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魯叟何常師 刪述存聖軌〕”이라는 구절이 있다.
巖屛占取武夷奇 바위 병풍이 무이 구곡의 기이함을 가졌고,
九曲縈廻一水湄 구곡을 굽어 도니 한 물가이네.
滿地風煙廻櫂晩 땅엔 바람 안개 가득하고 저녁에 노를 돌리고,
眞源不息逝如斯 진리의 근원은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이 흐르네.
右九曲層巖 아홉 굽이 층층 바위
*무이구곡: 주희(朱熹)가 살던 무이산(武夷山)의 시내가 아홉 굽이였는데, 주희가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沃我丹田挹彼波 비옥한 나의 단전(丹田)에 저 물결을 띄우고,
滄浪却笑濯纓歌 창랑에 웃으며 탁영가(濯纓歌)를 부르네.
至今猶有方塘鑑 지금에도 방당(方塘)의 거울이 있으니,
涵照凝川飮量河 응천(凝川)을 비추어 마실 강물을 헤아리네.
右洗心臺 세심대
*탁영가: ≪楚辭(초사)≫ 漁父辭(어부사)에 나온다. 초나라 忠臣(충신) 屈原(굴원)이 간신의 모함을 입고 벼슬에서 쫓겨나와 강가를 거닐며 憔悴(초췌)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있는데 고기잡이 영감이 배를 저어 지나다가 그가 굴원인 것을 알고,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느냐면서 안타까워 까닭을 물었다. 굴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온 세상이 흐려 있는데 나만이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이 홀로 깨어 있다. 그래서 쫓겨난 것이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濁 我獨醒 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탁 아독성).” 어부는 굴원의 처신에 대해 오히려 꾸중을 했다. 굴원은 또,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면서 차라리 강에 빠져 물고기 배 속에 장사를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깨끗한 몸으로 세상의 먼지를 쓸 수 있느냐고 했다. 어부가 노래를 불러 화답했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가이탁오족)” 세상이 맑으면 맑게 맞춰 살고 세상이 흐리면 흐리게 살라는 말이었다. 淸濁自適(청탁자적)의 생활을 권한 것이다. ‘淸斯濯纓濁斯濯足(청사탁영탁사탁족)’이라고도 한다.
*방당의 거울: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온다. 半畝方塘一鑑開 반묘의 연못이 거울처럼 맑아,/天光雲影共徘徊 하늘의 구름이 떠돈다./問渠那得淸如許 묻나니 어찌하여 그렇게 맑단 말인가?/爲有源頭活水來 위에서 활수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네.
鳶魚一理本天淵 연비어약(鳶飛魚躍) 본래 하늘과 못이 한 이치이니,
軆驗須知活潑然 체험하여 생명력이 넘침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네.
奚取濠翁身外樂 호옹(濠翁)은 어찌하여 몸 밖의 즐거움을 취하였고,
水雲深處任鷗眠 물과 구름 깊은 곳에 갈매기 잠에 빠졌네.
右觀魚磯 관어기
*연비어약(鳶飛魚躍): 《중용장구》 제12장의 “시(詩)에서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니, 이는 천지의 도가 상하로 밝게 드러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理)의 체(體)는 은미하여〔隱〕 보고 들을 수 없으나 이의 용(用)은 상하 사방으로 널리 드러나 있음〔費〕을 말하는 것이다.
*활발(活潑): 정자가 《중용장구》 제12장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을 풀이하면서 “이 1절은 자사께서 긴요하게 사람들을 배려한 곳으로, 생기가 충만한 곳이다.〔此一節 子思喫緊爲人處 活潑潑地〕”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천리(天理)가 한곳에 응체되어 있지 않고 활발하게 운행하고 있는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호옹(濠翁): 호수(濠叟) 장자(莊子). 장자가 그의 벗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 가에서 놀면서 “피라미가 나와서 노는 것이 여유로우니 이는 고기의 즐거움이다.〔鯈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라고 하자, 혜자가 “그대는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子非魚, 安知魚之樂?〕”라고 하였다. 이에 장자는 다시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지 아는가?〔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라고 하였다. 《莊子 秋水》
開豁胸懷遡晩風 가슴 속이 시원하여 저녁 바람을 쐬고,
古今天地俛昻中 고금천지 속에서 굽어보고 우러르네.
朗吟長嘯充如得 낭랑히 읊조리고 길게 휘파람불며 채우니,
化囿生生物我同 화육(化育)이 생기고 생기니 자연과 내가 같아지네.
右嘯詠塢 휘파람불고 시 읊는 둑
*광풍제월: 황정견(黃庭堅)이 《산곡집(山谷集)》에서 주돈이(周敦頤)를 두고 “주무숙은 속이 시원스러워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인품이 매우 훌륭하고 속이 시원스레 트인 것을 말한다.
孤松勁節歲寒知 외로운 솔의 굳셈과 절개는 날이 차가운 뒤에 알고,
念昔先生手護玆 선생이 옛날에 손수 이 솔을 보호한 것을 생각하네.
落落盤根終得地 가지는 드리우고 뿌리는 서려 마침내 땅을 얻었지만,
靑蛇往刱鶴棲遲 청사(靑蛇)로 옛날에 학 둥지 짓는 것이 더디었네.
右澗畔蒼松 시냇가 푸른 솔
*청사(靑蛇): 당나라 말기 도사(道士) 여암(呂巖, 796~?)의 자는 동빈(洞賓), 호는 순양자純陽子)이다. 종리권(鍾離權)을 따라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도교 팔선(八仙) 중의 한 사람으로 칭해진다. 청사(靑蛇)는 여암이 가지고 있던 보검(寶劍)의 이름이다. 여암이 악양루(岳陽樓)에 제(題)한 시에 “아침에 악악을 노닐다가 저녁엔 창오(蒼梧)에 있는데, 소매 속 청사(靑蛇)는 담기(膽氣)가 드높아라. 세 번이나 악양(岳陽)에 들어가도 아무도 몰라보니, 낭랑히 시 읊으며 동정호를 날아가네.[朝遊岳鄂暮蒼梧 袖有靑蛇膽氣麤 三入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裊裊垂條廕晩莎 하늘거리며 늘어진 가지 저물녘에 사초에 그늘지고,
煙堤十里不爲多 연기에 묻힌 둑 십리는 많다고 하지 않네.
人知所止當如彼 사람이 그칠 줄 아는 것이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하고,
春畵黃鸝盡日歌 봄 풍경 그림 속에서 꾀꼬리 종일토록 노래하네.
右明沙綠柳 밝은 모래 푸른 버들
漁村暮篴出雲邊 어촌의 저물녘 피리소리 구름 밖으로 나가고,
七里灘名賴有傳 칠리탄 이름이 전해오네.
想像羊裘垂釣老 양가죽옷 입고 낚시 드리웠던 노인을 떠올리는데,
高長山水自千年 산은 높고 물은 길어 천년이 지났네.
右桐江漁篴 동강 어부의 피리소리
*칠리탄(七里灘) : 동한(東漢)의 은사(隱士) 엄광(嚴光)이 은거하며 낚시질하던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남쪽의 여울로, 보통 은사의 거처를 뜻한다. 칠리뢰(七里瀨) 혹은 엄릉뢰(嚴陵瀨)라고도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양구노인(羊裘老人): 엄광(嚴光)의 자는 자릉(子陵), 후한 광무제(光武帝)와 친구였는데, 광무제가 황제가 된 뒤에 자릉을 불러들였으나 끝내 벼슬하지 않았음. 늘 염소가죽옷을 입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했다 하여 그의 낚시터는 조대(釣臺), 그의 별명은 양구노인이라 하였음.
夕氣微零樹影籠 저녘 기운에 가랑비가 나무 그림자를 두르고,
長時煙雨掩蒼空 긴 시간 안개비는 창공을 가리네.
輕舟處士歸來晩 처사는 가벼운 배로 저물녘에 돌아오고,
指點紫桑一路通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상(紫桑)과 한 길로 통하네.
又栗林夕煙 밤나무 숲의 저녁연기
*자상(紫桑): 도연명(陶淵明, 352,365年—427)의 고향. 도연명은 자가 원량(元亮),이름은 잠(潜),사시(私諡)는 정절(靖節), 심양자상현(潯陽柴桑縣, 현재 江西省 九江市) 율리(栗里) 사람. 동진 말기에서 남조 송 초기의 시인, 팽택(彭澤) 현령에서 80여일 만에 사직하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전원으로 돌아옴. 은일(隱逸) 시인.
孤壇屹立兩溪中 두 시내 가운데에 외로운 제단이 솟아 있고,
春服成時可浴風 때는 봄옷을 입고 목욕하고 바람을 쐴 수 있네.
舍琴函筵言志孰 거문고를 놓고 스승(공자)께 뜻을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斯文不晦在吾東 우리 동방에도 사문(斯文, 공자의 가르침, 유학)이 어둡지 않네.
右舞雩高壇 무우(舞雩) 기우제 높은 제단
*논어 선진편 제25장:
子路 曾晳 冉有 公西華侍坐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자리에서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 보다 하루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서 대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말라.
居則曰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너희들이 평소에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만일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무엇으로 세상에 쓰임이 되겠는가?”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면 比及三年 可使有勇且知方也夫子哂之
자로가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천승의 나라가 대국 사이에 끼어있어서 군사로써 침략을 당하며, 잇따라 기근이 들었을 때에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에 이르러서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가 있으면서도 의를 지향하는 방도를 알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求 爾 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구야 너는 어떠하냐?” 염구가 대답하기를 “사방 60~70리가 되는 나라나 혹은 50~60리가 되는 나라를 제가 그곳을 다스린다면 3년에 이르러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 수 있거니와 만약 그 예악에 있어서는 예악을 아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赤 爾 何如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적아 너는 어떠하냐?” 공서적이 대답하기를 “잘한다고 여겨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묘에서 제사를 봉행(奉行) 하는 일과 혹은 제후들이 회동을 할 때에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서 소상(小相)이 되고자 합니다.”
點 爾 何如 鼓瑟希 鏗爾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라 曰 莫(暮)春者에 春服 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점아 너는 어떠하냐?” 증점이 거문고를 연주하기를 드문드문하더니 덩그렁 하며 거문고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갖추어 말씀드린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무슨 해가 되겠느냐 또한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한 것이다.” 증점이 말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고 나면 어른 대여섯 사람과 어린이 예닐곱 사람과 더불어서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단(舞雩壇)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크게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증점(曾點)을 허여(許與) 하겠다.”
三子者出 曾晳 後 曾晳曰 夫 三子者之言 何如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曰 夫子何哂由也。
세 사람이 나가고 증석이 뒤에 남아있었는데 증석이 말하기를 “세 사람의 말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또한 가각 자신들의 뜻을 말한 것뿐이다” 증석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유(자로)의 말에 웃으셨습니까?”
曰 爲國以禮 其言 不讓 是故 哂之。
말씀하시기를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그의(자로) 말은 겸양(謙讓)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웃은 것이다.”
唯求則 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而非邦也者。
“구(염구)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사방 육칠십 리 되는 나라와 혹은 오륙십 리 되는 나라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서 보았느냐?”
唯赤則 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적(공소적)이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종묘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후들이 회동하는 것이 제후의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적이 소상(小相)이 된다면 거기에서 누가 대상(大相)이 될 수 있겠는가?”
竹院疎鐘得曉明 대숲의 절 성근 종소리에 새벽이 밝아오고,
靑山靜闃罷深更 청산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깊음을 그치네.
閒來豈欲叢林入 어찌 한가로이 와서 총림(절)에 들어가랴만,
警覺書牕一種誠 서창(書窓)에 한 가지 정성을 일깨우네.
右竹寺曉鍾 죽방사(竹防寺, 竹林寺) 새벽 종소리
*죽방사: 영천시 금호읍 죽방길 죽림사. 고려 전기에 조성된 아미타여래 철조불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편 불우조(佛宇條)에 “죽방사(竹防寺) 죽방산에 있다.”고 하였다.
嗈嗈于彼峀之陽 저 산 기슭에서 기러기 짝지어 우니,
合有吾林士濟蹌 우리 사림의 선비들도 출입에 엄숙하고 공손해야 합당하리.
龜祖曾明嘉遯義 일찍이 완귀 할아버지는 은둔의 뜻에 밝으셨고,
後人祇誦鳳吟章 뒷사람들은 지금도 봉황음(남명 조식의 시) 시를 읊네.
右鳳山瑞色 봉산의 상서로운 빛
*제창(濟蹌): 제제창창(濟濟蹌蹌). 출입함에 있어서 엄숙하고 공손한 것.
(백호전서(白湖全書) 제28권 공고직장도설(公孤職掌圖說) 상(上) 위의지수(威儀之數))
*가둔(嘉遯): 은둔.
六代孫后靜敬述
6대손 후정 삼가 지음.
안후정(安后靜)의 본관은 광주. 자는 군경(君敬), 호는 성재(省齋)이며, 1659년(효종 10) 도동리(道東里)[현 영천시 도남리]에서 태어나 1702년(숙종 28) 10월 18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안광소(安光韶)이며, 증조는 감찰(監察) 안전(安琠), 조부는 증(贈) 판결사(判決事) 안명한(安鳴漢)이다. 아버지는 안세영(安世英)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로 성길(成 日+吉)의 딸이다.
부인은 의인(宜人) 오천 정씨(烏川鄭氏)로 진사(進士) 정사현(鄭思賢)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니 안여택(安汝宅)·안여이(安汝履)·안여행(安汝行)·안여인(安汝仁)·안여기(安汝器)·안여국(安汝國)이다.
안후정은 몸소 밭을 갈고 가꾸며 힘써 배워 1691년(숙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700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전보되었다.
1702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가을에 학정(學正)으로 승급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했다.
목판본인 4권 2책의 『성재일고(省齋逸稿)』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후정 [安后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