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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정강> 1.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3. 노동자 농민과 기타 일체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 4. 세계민주주의의 일원으로 상호제휴하며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
이렇게 우리 민중은 일제패망을 맞이하여 신속하고도 질서 정연하게 건국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과시하는 것으로, 건국사업을 이끌었던 정치지도자들은 항일투쟁을 했던 지도자들로 단련되고 준비되었던 것이다.
물론 건준을 인공으로 급하게 개편한 것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주었듯이, 미군도 남한에서 행정권을 넘겨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에 대비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북에서와는 달리 남에서는 인민위원회를 배제하고 군정을 통한 직접 통치가 강행된다. 8월21일 한반도 상공에는 미군용기가 떠 미군의 조선 상륙을 예고하는 삐라가 파란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한국인을 적(敵)3)으로 간주한 미군
2차 대전의 승리로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트루먼 선언’4)에서 드러나듯, 전후 정책의 기본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확립하는데 둔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정세가 미국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즉 소련에만 국한되었던 사회주의가 동유럽을 중심으로 13개국으로 확대되고 중국내전에서도 자신들이 지원했던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는 등 사회주의의 전 세계 확산이 가시화되었다. 이에 미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막아내고 자본주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했다.
9월8일 인천항에선 미군 상륙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으로 인해 작은 혼란이 발생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부둣가에 나와 있던 군중이 일본 경찰의 저지 명령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발포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발포로 인해 노조간부인 권병권과 평화운동가인 이석구 등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군은 나중에 오히려 일본 측을 두둔하였다.5)
한반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한국인 사망자부터 내놓은 미군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해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4시30분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6)가 내려지고 대신 그 자리엔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포고령 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중간생략)........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이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 하에서 시행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有給)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 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定意)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 하에서 발출(發出)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조선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포고령1호는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했으며, 포고령 2호는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7)
또한 포고령 제2조에 “총독부하에서 일하던 관리는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 한다”에 따라 일본 총독부의 경찰기구, 군대가 그대로 인수되었으며 해방과 동시에 산 속으로 도망갔던 친일파들이 재기용되었다. 어제는 ‘천황만세’, ‘귀축영미’(짐승 같은 영국, 미국 놈들)를 외치며 일제에 아부하던 친일파들이 오늘은 친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표> 1946년 군정경찰 간부 중 친일경찰의 비율
직위 |
경찰 총수 |
총독부 경찰 출신 |
비율(%) |
치안감 청 장 국 장 총 경 경 감 경 위 |
1 8 10 30 139 969 |
1 5 8 25 104 806 |
100 63 80 83 75 83 |
총계 |
1,157 |
949 |
82 |
출처: 역사문제연구소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사비평사,1996 10쇄)
이는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로 채워져 있던 경찰의 경우에서 극명히 드러났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지자 미군정 경찰 분견 대장이었던 윌리엄 매글린 대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전 일본인들에게 훈련을 받은 경찰관들을 미 군정청이 그대로 인계해서 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러한 한국인 경찰관들은 우리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우수한 인재들이다. 만일 그들이 일본을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면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겨 줄 것이 아니겠는가”8)
미군은 또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당시 남한 총자산의 80%)을 적산9), 즉 적의 재산이라 하여 미 군정의 소유로 선언하였는데, 이에 대해 민중은 거세게 반대했다. 민중은 일제의 재산이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착취한 것이므로 우리 민족의 재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포고령은 노동자의 자주관리운동10), 농민의 자발적인 토지 개혁을 불법화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자립 경제건설의 토대를 허무는 것이었다.
<적산 이전에 관한 건 (포고령 제2호)> 1945년 9월 9일 이후 38도 이남에 있어서 일본인에게 소속되어 있던 공․사 재산의 권리는 직접 또는 간접이거나 일부 또는 전부이거나 그 형태와 내용의 여하를 불문하고 1945년 9월 25일부로 미 군정청에서 소유권을 접수한다. |
그 뒤 미군은 1945년말 까지 거의 모든 도에 진주해 남한전역을 장악했다. 12월12일 하지는 공식적으로 인공을 불법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공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정부’가 아니며 어떠한 경우에서도 정부로 행동하는 것이 법으로 허락되지도 않았다. 남조선에서 실제적인 정부는 미군정뿐이다. ……정부 역할을 시도하는 어떠한 정치조직의 활동도 불법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때부터 인공은 미군정의 공적이 되었다.11)
이렇게 진주한 미군은 당연히 실제 통치를 맡고 있었던 지방 인민위원회와도 충돌했다. 인민위원회 해체는 지방에선 이미 11월중에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11월15일 남원에선 인민위원회 해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미군이 발포하여 사망자 3명, 부상자 50여명을 낳은 유혈사태까지 빚어진 바 있었다.12) 결국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쇠락해지거나 지하화 되었다. 제주도처럼 고립된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미군정 3년 동안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인민위원회 해체과정에서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희생이 뒤따랐는데, 이런 대립은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2. 반탁이냐? 찬탁이냐?
강대국에 의해 뿌려진 민족분열의 씨앗, 신탁통치
신탁통치안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루스벨트가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구상해둔 것이었다.13) 식민지 국민은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정해진 기간에 여러 국가의 신탁통치를 거친 뒤 독립하게 한다는 구상으로 과거 한 국가의 식민통치를 여러 국가가 하는 신탁통치로 대치하면서 미국의 지배력을 새롭게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은 1943년 3월 영국과 처음 논의한 뒤, 카이로, 테헤란, 얄타회담14)을 거치면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난다.
물론 미국은 자신을 포함한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 당시 중국과 영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며, 소련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수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주도권은 미국이 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미·영·소 연합국은 1945년 12월 16일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려고 모스크바에서 외상회담을 열었다. 미국은 한반도 전후 처리 방안으로 미·영·중·소 대표들이 사법, 입법, 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소련은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로 머물러야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12월 27일에 미, 소는 두 안을 절충, 수정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을 확정하였는데 미국의 바람과는 달리 회담의 결과는 소련이 낸 수정안을 미국이 약간 수정한 것으로 소련안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 주요내용> 1.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2.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그 적의한 방책을 연구 조정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4.남북의 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주일 내에 미소 양군사령부 대표회의를 소집한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안에는 한국인의 민족적 요구에 부합하도록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일본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탁통치(후견제)를 규정한 3항으로, 국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신탁통치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 떠오를 문제라는 것이다. 1항이 임시정부의 구성과 성격과 임무를 규정한 것이라면, 2항은 한국의 여러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와 반드시 협의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규정했다. 따라서 1946년 3월과 1947년 5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기본 임무는 임시정부 구성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삼상 결정이 채택되자 회담결과가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 보도가 이루어졌다.15)
특히, <동아일보>의 최악의 오보는 12월 27일에 나왔다. 12월27일자 머리기사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 게 삼국간에 어떠하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반묵 양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하리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1) |
이 기사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전에 나온 관측보도였다. 당시 미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 했을 뿐만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 보도여서 이로인해 ‘한국 현대사의 최대 왜곡 보도’ 라는 기록을 남겼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과 왜곡
국내의 한민당 계열인 <동아일보>, <한민 당보>등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찬탁 = 또 다른 식민지 예속 = 매국, 반탁 = 즉시 독립 = 애국’ 이라는 요지의 기사와 논설을 실었다. 또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들은 모스크바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연일 조직 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상을 잘 알지 못했던 조선 민중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또다시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며 이른바 ‘반탁 시위’에 휩쓸려 들어갔다. 모스크바 결정안은 미소가 합의한 구체적인 독립방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건 없이 곧바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대중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또 우리 민족이 자치 능력이 없어서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 전문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이미 반소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우익은 “3천만 살았느냐? 독립전선에 생혈을 뿌리자” 면서 대중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반탁투쟁을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반탁대열에 적극나선 친일파들은 민족감정에 편승하여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변신했다. 반탁운동은 그야말로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손오공의 여의봉 같은 괴력을 지닌 무기”16)로서의 괴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전모와 결정 내용이 알려지자 이른바 ‘반탁 운동’ 일색이던 대열이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대열로 급격히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23일 경에는 서울에서만도 200여 단체, 30만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모스크바 협정의 즉각적인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찬탁과 반탁의 이런 흐름은 좌우익 대립양상을 띄게 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미소 공위)가 두 차례(1946.3.20과 1947.5.21) 열렸다. 미소 공위는 어느 정당과 단체를 회의에 참여시킬것인가를 놓고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안에 반대하는 정당, 단체와는 협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구실로 소련측 주장에 반대했다. 협의대상 문제에서 비롯된 미,소의 의견 대립은 그 뒤 소련이 한발 양보하여 4월 18일 공동 성명 5호를 발표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과거에 반탁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탁치 조항을 포함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할 경우, 미소 공위의 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우익 세력은 이 선언서에 전부 서명했지만 참가단체 수를 과장했고 반탁철회를 둘러싸고 미소가 대립하게 되면서 5월 8일 미소 공위는 무기한 휴회를 하고 만다.
온 민족이 기대했던 미소 공위가 협의 대상을 둘러싼 문제로 결렬된 것은 모스크바 결정안이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미소는 모스크바 결정안을 통해 자기 나라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운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협상을 벌였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미국의 AP통신은 1차 미소공위가 끝나기도 전인 1946년 4월 6일 “미 군정 당국은 남조선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는 보도를 하였고, 미국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던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의 일부 |
미국이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추진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이 사실상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후 남한내 자주독립정부를 요구하던 기층 운동의 흐름은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와 남북 정치 협상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미국은 2차 미소공위가 종결되기도 전인, 1947년 9월 17일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국제조약이 존재하는 문제는 유엔에서 다룰 수 없다는 유엔헌장의 규정을 근거로, 국제 조약인 모스크바 협정이 존재하는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을 반대하고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여기에서 선출된 대표로써 통일 정부를 구성한다”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시켰다. 그리하여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구성되고 이들은 1948년 1월 6일 이 땅에 들어왔다.
유엔 위원단이 입국하던 날 서울 등 주요 도시의 노동자들은 일제히 파업을 단행하여 이들의 입국을 반대하였고, 소련과 북한은 이들이 38선 이북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유엔위원단17)이 친미 일변도로 구성되어 공정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를 통해 “유엔 위원단의 임무 수행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1948년 8월과 9월에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세워지면서 신탁통치 논쟁은 막을 내렸다. 분열과 배신으로 뒤섞였던 신탁통치 논쟁은 한 나라의 독립은 그 나라 민중의 자주적인 투쟁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강대국에 의해서도 선사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었다.
3. 반란인가? 항쟁인가?
9월 총파업
1945년 11월4~5일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결성해 전국 조직체계를 갖췄다.
전평의 산하에는 금속, 섬유, 토건 철도, 전기, 출판, 식료, 광산, 목재, 조선, 어업, 일반 봉급자, 교통, 운수노조 등 16개 산업별노조가 참여했고, 서울과 군산, 인천, 대전, 광주, 마산, 목포 등 전국 11개 도시에 지방평의회를 조직했다. 결성된 지 불과 3개월만인 46년 2월 말 현재 전평 산하 조합원의 총수는 57만 4천여 명에 이르렀르며, 235개의 지부와 1천676개의 분회를 두었다. 18)
전평은 결성 당시 ‘노동자 공장관리운동 노선’을 채택 했다. 이 노선은 일본인 자본가가 철수해 주인이 없어진 공장을 인민 정권이 들어서 국유화하기 전까지 노동자 스스로 맡아 관리한다는 것으로 인민정권의 물적 기반을 갖추는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제 때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유 재산까지 접수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선정한 관리인에게 공장을 맡겼다. 결국 전평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미군정의 공장 접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19)
미 군정 통치하의 남한에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식량문제였다. 반봉건 지주제도의 광범위한 온존과 비료 등 농업자재 공급의 절대적 부족과 가격의 폭등은 전반적인 농업생산을 감퇴시켜 급기야 사상 초유의 식량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물가가 일제시대 1936년에 비해 45년 20배, 46년에는 130배, 47년에는 400배가 올랐다.’
(자료 :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경제연보’ 148,119~121쪽)
‘1945년 이후의 실질임금은 1935년도 일제시대의 기아임금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하락해 있었다.’ (조이스 콜코, 가브리엘 콜코, <미국과 한국의 해방>, 『한국현대사의 재조명』, 돌베개)
‘쌀의 도매시세를 보면 1945년 11월에 석당(石當)650원 하던 것이 이듬해 1월에는 5천600원으로 폭등했다. 심지어 일부 경찰과 군정 관리들까지 투기에 손을 대 쌀을 일본으로 빼내 팔아넘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박영수,『운명의 순간들:다큐멘터리 한국근현대사』, 바다출판사, 1998)
1945년 11월에 쌀 한말 가격은 140원이었지만, 1946년 9월말에는 1천500원으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이나 올랐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굶주려야만 했다.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쌀 두세 말 값의 임금을 받기 위해 1주일에 100여 시간이나 되는 장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려야만 했다.
미 군정청 관리하의 어느 방적공장에는 1천3백여 명의 종업 원 중에 9백여 명이 나이 어린소녀였으며 이들은 모두가 영양부족 탓인지 9세도 채 안되어 보였다.20)
이러한 급박한 상황 하에서 미 군정은 토지개혁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뒤로 미룬 채 1946년 1월25일 ‘미곡 수집령’(법령 45호)을 발표, 시행에 옮김으로써 식량 위기에 강압적으로 대처했다.
미곡 수집령은 강제로 미곡의 수집, 즉 식량을 공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생산비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양곡을 강제로 공출21)한 뒤 그 쌀로 배급을 했는데, 배급량은 일제 치하 전시 중 총독부가 준 배급량의 절반인 1일 1홉이었다.22)
총파업은 철도국 경성공장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군정 운수부는 적자를 극복하고 노동자 관리를 합리화하겠다면 운수부 종업원 25퍼센트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전환하는 결정을 해 철도노동자들을 자극했다.
9월13일 서울 용산의 철도노동자 3천여 명은 미 군정당국에 일급제반대, 기본급인상, 가족수당인상, 해고 절대 반대, 식량은 본인에게 4홉, 가족에게 3홉씩 배급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아무런 답이 없자 9월23일 미 군정청 운수부장 코넬슨에게 요구 조건의 수락을 진정하였지만, “인도인들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농산부장 헐츠는 “시장에는 고기도 있고 다른 잡곡도 있지 않은가. 쌀이 없으면 다른 것이라도 사야지 쌀이 없다고 굶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만이 대답으로 되돌아왔다.23)
9월23일 부산에서도 약 8천여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서울과 똑같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9월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이날 서울의 철도노동자들도 즉시 동조파업에 들어갔으며, 다음날 이들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북한의 민주노동법과 같은 내용의 노동법을 즉각 제정”등을 요구하고 나섰다.24) 이렇게 해서 철도노동조합 18개지부 조합원 4만여명이 쌀배급, 임금인상, 해고반대, 노동운동 자유보장, 민주인사 석방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철도노조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출판, 체신, 섬유, 전기, 해원등 각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속속 참가하면서 빠르게 확대됐다. 서울에서만 철도 노동자들을 비롯해 295개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 노동자 3만여 명, 1만6천명의 학생이 가담하였다. 전체적으로 9월23일부터 10월초까지 남한 전역에서 진행된 9월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총수는 25만여명에 이르렀다.25)
9월30일 미군정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위치해있던 용산의 경성공장을 습격했는데 이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당시 미군정 운수국장의 증언이다. “우리는 전쟁하러 가는 태도로 파업장에 갔다. 우리는 그저 파업을 분쇄하러 갔지, 그 과정에서 혹시 죄 없는 사람 몇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시 외곽에 정치범 수용소를 세우고 감옥이 가득찰 때는 그곳에 파업노동자를 수용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전쟁하듯이 파업을 진행했다.”26)
9월 총파업의 결과 총 1만1천624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가운데 약150여명의 파업간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9월 총파업은 전평 간부들의 대량 검거로 일단락되었으나, 전국각지에서 잇따른 크고 작은 각종 파업은 그칠 줄을 몰랐다. 10월 대구 지역의 총파업은 일반 민중이 파업단에 대거 가세하면서 민중항쟁으로 번졌다.
10월 인민항쟁
1946년 10월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1천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 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500여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 10월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버렸다.
대구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27)
대구항쟁의 배경에 대해 김삼웅은 이렇게 말한다.
“10월 민중항쟁의 배경을 살펴보면 전평 등 좌익의 조종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이후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등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정의 하곡, 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28)
대구에서만 총파업이 인민항쟁으로 번진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다른 지역과 달리 별 다른 내분이 없던 대구 지역 좌익세력은 일제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더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29)
당시 대구 시민들은 대구항쟁에 동조하는 분위기였고 금융기관이나 회사 종업원들은 파업이나 휴업을 선언했고, 대구의사회는 시민에 발포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경찰 부상자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경고를 했으며, 심지어 도청 관리들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30)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6시쯤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미군정청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리 체포, 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로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대구 항쟁은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 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 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며,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에는 약300만 명이 참여 했는데,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 되었고,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수는 1천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31)
10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커밍스는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이 이익을 지켜주었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 좌파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고 말하였다. 32)
단선단정 반대 투쟁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다는 소식은 해방 뒤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어 왔던 민중에게 날벼락이었다.
1948년 1월 22일 소련은 한국인 대표가 참석하지 못하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활동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또 선거강행이 분단을 향한 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남로당은 본격적인 저지투쟁에 들어갔다. 투쟁은 먼저 총파업형태로 시작됐는데, 이것이 이른바 2.7구국투쟁이다.
<2.7구국투쟁 선언> 1.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1.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1.양군 동시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1.국제 제국주의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자. 1.노동자,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각 실시하라 1.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1.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1.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라 1.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김천영 편저, <연표 한국현대사> (한울림 1985) |
남로당과 민전의 지도아래 유엔 한위 반대 조선총파업위원회가 구성됐다.
민전과 조선총파업위원회는 “친애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애국적 열정에 불타는 동포들이여! 외래 제국주의의 주구 이외에는 우리 전국 동포들이 민전 주위에 일치단결해 전 인민적으로 한사코 단선을 거부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인 파업에 돌입했다.
2월 7일 새벽을 기하여 서울 영등포, 대전, 대구, 군산등지를 비롯한 남한 각지의 체신관서에서는 기계파괴, 전화 전신 절단 사건이 일제히 발생하여 남한 전역의 통신망은 순식간에 마비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부산, 대구, 안동등 주요 철도기관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인하여 기차의 운행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2.7구국투쟁은 2월초와 말 두 차례 일어났다. 투쟁은 2월7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각 단위 노동조합이 조직적으로 파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45년 이후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전평은 조직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한 최대의 노동자 조직이었다. 노동자뿐 아니라 많은 농민과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면서 파업과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2.7구국투쟁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되고 계획되었으며, 투쟁의 목표가 출발순간부터 분명하게 통일되어 있었고, 남한 전역이 일시에 투쟁에 돌입하였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에서 벌어진 시위는 마치 전투를 보는 듯했다.2월10일 지나면서 제 1차 2.7 구국투쟁은 일단 잦아들었지만, 2월25일부터 다시 파업과 시위가 시작돼 3월 초까지 이어졌다. 1차 투쟁만으로는 단선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7구국투쟁 기간 동안 사망한 사람은 민간인과 경찰을 합해 1백여 명에 이르렀다.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데도 미국은 총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지 사령관은 2월10일 성명을 발표해 2.7구국투쟁은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활동’이라면서 단선반대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제주 4.3항쟁
제주도는 남한에서 마지막까지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살아남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1947년 3월, 3․1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년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항의의 불길은 제주도민 전체의 파업으로 확산되어 도내 모든 업무가 마비되기에 이른다. 이에 놀란 미군정은 서북청년회 등의 민간준군사조직을 투입하여 탄압에 나섰다.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한라산 주위의 여러 봉우리에서 봉화가 올랐다. 봉화를 신호 삼아 산중에 모여 있던 제주도민 3천여 명이 도내 20여개 경찰지서 가운데 10여개를 일제히 공격했다. 제주 4.3민중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경찰지서를 공격한 제주도민 가운데 5백여 명은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이나 농기구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거의 비무장 상태였다. 민간인 무장대는 좌파 지도자들이 이끌었고, 대부분 농민, 부녀자, 노인, 어린이였다. 봉기한 도민들은 ‘미군철수, 단독선거 절대 반대,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 경찰과 테러집단 철수, 유엔 한국위원단 철수’를 외쳤다.
단독선거 전날, 5만 여명의 도민은 단독선거를 거부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선거 당일에는 이들 민중들에 의해 투표소가 습격당하고 투표 거부의 전단이 거리를 뒤덮었다. 노동자는 파업을 단행하였고, 군정청 직원은 태업을, 학생들은 동맹 휴교를, 상인은 철시를, 일반 민중은 수일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산으로 올라가 집회와 시위를 벌이면서 선거를 거부하였다.
제주도의 5.10 단독 선거는 결국 파탄되었다. 제주도 3개 선거구중 2개 선거구(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각각 43퍼센트와 46.5퍼센트의 투표율을 기록해 선거로 인정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군정장관 딘은 5월24일 제주도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상황은 6월에 들어서도 나아지지 않았고, 6월10일 딘은 행령명령 22호를 발표해 선거를 무기한 연기했다.
제주도의 선거 거부는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어 놓았으며 언제 남한 전역으로 번질지 모르는 무서운 불길로 타올랐다. 이에 이승만과 미군정은 제주항쟁의 불길을 끄기 위해 탄압을 적극화 했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께, 제주도 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한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이란 명목으로 행한 마을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1백여 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설촌 7백년의 유서 깊은 마을이 하룻밤 새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그날 양복천 할머니(81세)는 어린 딸과 함께 총상을 입었고 아홉 살 난 아들(김문용)을 잃었다. 양 할머니는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에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했습니다.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어요.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빌었어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며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 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에 총을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나는 우선 총맞은 아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마당으로 끌어낸 후 딸을 살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리려는데 담요가 너덜너덜해요.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무릎을 부숴놓은 겁니다. 두 번째 생일날 불구자가 된 딸이 벌써 쉰두살입니다.”33)
항쟁의 섬 제주도는 급속히 피바다 속으로 잠겼다. 한 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집단적으로 총살당하는 일이 제주 전역에서 일어났다. 항쟁 이후 섬에 남은 것은 미망인, 고아, 폐허가 된 부락과 불 태워진 논밭뿐이었다. 제주도민 30만 중 절대 다수인 20만 명이 참가하였고 제주도민의 9분의 1인 약 3만명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제주민중항쟁은 대규모의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 속에서 1년간의 피어린 투쟁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10월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에 제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압명령이 하달되었다. 동포의 가슴에 차마 총을 겨눌 수 없었던 군인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통일조국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였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고하기 위하여 총궐기 했다.” 34)
군인들의 애국적 투쟁에 고무되어 여수, 순천의 민중들이 합세하였으며 민중봉기는 마른 들판에 불이 번져나가듯 광양, 구례, 남원, 보성, 벌교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여순항쟁은 미군정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꺾일 수밖에 없었으나35) 이에 그치지 않고 남한 전역의 유격투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기군 장병들이 무기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2․7구국투쟁 이후 결성되었던 야산대와 결합하여 유격대를 만들었고 그 결과 남한 133개 군 중 118개 군에서 유격전구를 형성하며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다. 유격대의 투쟁은 대규모 토벌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됐다.
4. 남한 단독정부수립, 민주적 정부수립이냐? 분단의 시작이냐?
5.10 단독선거
1948년 2월26일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이 통과 되었고 선거날짜는 5월10일로 정해졌다.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다는 소식은 해방 뒤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어 왔던 민중에게 날벼락이었다. 남조선노동당, 근로인민당, 청우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김구의 한독당 등 거의 모든 정치세력은 단독선거를 완강히 반대했다.36) 오직 이승만과 한민만 등 극우세력만이 단독선거를 찬성하며 발 벗고 나섰다. 이미 1946년 6월3일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1947년 7월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운동을 벌여 왔었다. 이승만은 친일파 지주세력인 한민당과 손을 잡고 선거를 차근차근 준비해 갔다. 이들이 세우려는 정부는 지주, 자본가를 감싸는 반소, 친미정권을 뜻한다.
선거는 대다수의 애국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가운데 치러졌다. 경찰, 우익청년단과 공무원들은 선거를 성공시키려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쌀 배급표를 주지 않는다거나 ‘빨갱이’로 모는 등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써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다.37)
3월29일부터 4월9일까지 10일간의 유권자 등록 기간에 전체 유권자의 79.7%인 약780만 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했다. 미군정 당국은 “선거등록의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럽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높은 등록자 비율이 민심을 정확하게 반영한 건 아니었다.
4월말 신문들은 “약500명의 인터뷰 여론조사에서 91%가 선거등록을 강요당했다” (동아일보,1948년 4월16일)고 한 사실을 폭로하였다.38)
공정한 선거절차는 무시되었고 선거날 투표소 주변에는 국방경비대, 경찰, 우익청년단 등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한 외신 기자는 선거 당일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울에서는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국 군대 지원하에서 각 중요 도로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모든 조선 경찰은 미국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선거일은 휴일이나 분위기는 계엄하의 도시와 같았다. 조선 부인들은 보통 일요일 기타 유일에는 황색 녹색의 신선한 의복을 입는데 이날은 흐릿한 황백색 의복 또는 바지를 착용하고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 있었다.”39)
5.10 단독선거는 말 그대로 폭력 선거였다. 전국 곳곳에서 시위, 봉화투쟁, 동맹휴학, 습격,피살, 파업, 테러, 검거가 터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5월 8일부터 10일까지 57개 투표소가 공격을 받았고, 경찰관 7명과 민간인 72명이 사망했다. 또 선거사무소 134곳이 공격받았고, 파업과 동맹휴학도 63건에 이르렀다. 또 3월31일에서 5월17일까지 사망이 202명이었고, 선거사무소와 경찰지서 등에 대한 공격이 1047회, 파업, 태업 등이 1,385회나 됐다.40)
따라서 선거 직후 모든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가 “공포와 불안 속에서 강요당한 금번 선거는 무효화되어야 하며, 그러한 불법 선거에 의해 조작된 단독정부 역시 결코 승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단독정부 수립
단독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이른바 제헌의원은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민족청년단이 6석, 대한노동연맹이 2석을 차지했다.10석은 군소정당의 단일대표 였고, 나머지 85석은 무소속이었다. 무소속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각기 그럴듯한 간판만 내걸었다 뿐이지 모두가 이승만과 한민당에게 우호적인 극우세력이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려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뒤, 헌법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뽑아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12일 한국의 독립승인 안을 유엔 총회에 상정되어 48대 6(기권1)으로 가결되었다. 유엔은 대한민국정부가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 교화적인 지배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이며, 한국에서 ‘유엔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지역 선거인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에 의한 선거로 수립된 유일한 정부” 임을 인정하였다.41)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반쪽만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체 우익조차 포괄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통성을 갖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김구나 김규식 세력까지도 배제한 채 부일협력자를 척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을 감쌌고 농민들이 바라던 토지개혁을 추진하지 않았으며 지주의 이익만을 보장해주었기에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한 정부 였다.
미국의 군사원조와 파쇼악법
이승만 정권이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해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면 남한은 단 3개월 이내에 붕괴될 것”이라고 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한마디 말 속에 잘 집약되어 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있어 미국의 원조가 대부분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원조에 충당되고 있었다는 점은 이승만 정권이 의존하고 있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 경제의 실권을 장악하여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기관은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미합동위원회’로서 정부는 이 기관의 지시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속적 지배는 각종 조약과 협정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합법화되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1948년 8월 24일 남한 땅에서의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지배권을 보장하는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다.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1948.8.24)
제1조 주한미군 사령관은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또한 자기의 직권 내에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및 무장할 것을 동의한다. 제2조 ……주한 미군 사령관은 …… 대한민국 국군의 조직, 훈련, 및 장비를 용역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대한민국 국군(국방 경비대, 해안 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 경찰 파견대를 포함함)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하는 권한을 보유할 것으로 합의한다. 제3조 ..... 대한민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사령관의.......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중요지역과 시설(항구, 진지, 철도, 병참선, 비행장, 기타)에 대하여 통제권을 보유할 것을 동의한다. |
1948년 9월1일에는 미국의 경제적 특권을 인정 해주는 [한미 재정 및 재산이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인과 미국회사들이 지금까지 이 땅에서 누려오던 온갖 특권은 그대로 유지 되도록 보장되었고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 내의 재산을 점유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또한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은 미군정시절 자신들의 과도한 통치비용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부채를 이승만 정권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토지공여 및 시설유지 비용을 전부 한국정부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측 제안대로 전부 동의하라. 미국의 힘으로 정부가 세워졌고 앞으로도 미국의 힘에 의하여 유지될 우리 정부가 미국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려가면서 그들의 그만한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42)
이미 1948년 12월 말에 소련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해 버렸고, 미군의 주둔을 규탄하고 철수를 요구하는 한국 민중의 요구와 국제적 여론이 열화와 같이 들끓었으며, 또한 미국 근로대중의 평화에 대한 한결같은 요구가 군비축소압력으로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은 1949년 6월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겨 놓은 채 이 땅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500명의 군사고문단 요원은 남한에 남아 그 역할을 지속하였다.
분단국가의 수립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경제적 수탈구조를 철폐하려는 민중의 과제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여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운 뒤 “조선의 정치 및 경제생활에서 일본 제국주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일본인 소유 재산과 식민지 및 봉건적 법률을 제거하기 위해 20개 조항의 정강을 발표하였다. 이 정강에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근본적인 개혁을 통한 북조선사회의 재구조화를 추진하였다.43) 이 과정에서 친일파를 제거 하고 봉건적 관계를 철폐하여 차츰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려 했다. 남북한에서 성격을 달리하는 체제가 성립하면서 이미 한국전쟁의 불씨가 잉태 되었던 것이다.
5. 일제 잔존의 청산이냐? 계승이냐?
미군정의 친일파 우대정책
해방 직후 한국민족의 최대과업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민족국가를 건설하면서 민족국가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루는 데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단이었다. 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여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과제와 민족의 대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를 처리하는 과제, 이 두 과제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최대의 당면과업이었다.
그래서 해방된 그날부터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는 요구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송진우, 김성수계의 한민당44)을 제외하곤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친일청산을 정강 또는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민중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청산과 심판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던 1948년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흘러갔다. 이는 친일파들을 대거 고용해 한반도를 지배했던 미군정의 현상유지정책, 친일파 활용정책45)으로 친일청산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조선총독부 출신 관리채용은 행정, 사법, 경찰 등 사회 전부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친일파들이 자신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며 오히려 애국 애족인사들을 탄압하는데 권력을 키울 여력을 만들어 주는 꼴이 되었다.
심지어 국군의 모체가 되는 국방 경비대조차도 광복군 출신이 아닌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주축이 되어 편성되는 매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경찰의 경우 일제출신 경찰이 약 8000명인데 그 중 5000명이 군정경찰에 다시 복무하게 되었고 특히 경찰간부는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등용정책은 민중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고, 미군정이 만든 과도 입법 의원에서 여론의 반발에 밀려 <민족 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 법안>을 통과시켜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 역시 미군정에 의해 간단히 거부되고 법령으로 공포조차 되지 못했다.
친일청산 과제는 해방 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더욱 더 악화되어 민중의 분노가 앙금으로 켜켜이 쌓여만 갔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남한 정부가 들어섰을 때 남한정부의 최대 임무는 바로 이 친일파 처단 문제가 꼽혔다.
반민법 제정, 반민특위 활동
정부수립 전인 8월 5일 김웅진 의원에 의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안이 압도적 지지 속에 채택됐다. 정부수립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김인식 의원등 12명의 제안으로 <정부내 친일파 숙청에 대한 건의안>이 가결처리 되었다.
이러한 국회의 움직임은 미군정에 의해 억눌렸던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데 8월 7일 경향신문 논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땅이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왜정에 아부하여 조국을 팔아먹고 동포를 괴롭혔던 악질적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라는 국민의 부르짖음은 무시한 채, 관리로서 미 군정 아래 구석구석 파고들어 앉았으며, 중요한 사업부분에 뿌리박고 들어가 조금도 양심을 가책을 받음이 없이 뻔뻔스럽게 활개 치고 있지 않은가? 과번 입법 의원에서도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단법을 만들기는 하였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유감 천만 이었는데, 우리 손으로 뽑아 내세운 대변자 국회의원 들이 문제를 들고 나선 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문서상의 처단법에 그치지 말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국회에서 반민족 행위자 처벌 문제가 본격화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친일 세력들은 방해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친일 청산법을 국회에 제출한 국회의원들에게 공산당이라 몰아치며 협박장을 보내는가 하면 그들 계열의 언론매체를 이용해 극렬한 반대를 하게 된다.
관동군 밀정출신 이종형은 그가 경영하는 대한일보를 통해 반민법 제정은 민족 분열을 가져오는 공산당들의 짓과 다를 바 없다고 대서특필 하는가 하면 8월 27일에는 대한청년단원46) 2명이 국회 본회의장에 난입하여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며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이하 반민법)은 1948년 9월 7일 국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찬성 103, 반대 6의 표차로 통과하여 정부로 넘겨졌다. 이승만은 이 법안을 거부하기로 했다가, 만약 이를 거부할 경우 정부가 제안한 양곡 수매 관계 법안47)이 부결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단 공표하기로 결정, 9월 23일 법률 제3호로 이를 공포하게 된다.
이승만과 친일파의 방해책동
미군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승만은 친일세력들이 자신의 권력기반 그 자체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반민법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해방이후 식민지 예속과 민족의 분단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분노해 민중들이 주축이 되어 남한 전역에 일어났던 반정부 투쟁을 힘으로 제압시키려 했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 이다.
따라서 반민법이 실행될 경우 친일세력으로 구성된 경찰과 군이 무장해제 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승만으로서는 권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반대를 하였다.
1948년 9월 3일 이승만은 민심을 분열시킨다며 반민법을 비난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이종형같은 친일 분자들은 서울 운동장에 모여 ‘반민법을 만든 자들은 공산당 프락치’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궐기대회를 갖기도 했다. 또한 경찰간부 등 친일세력들이 주도하고 모의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으며, 그들은 반민특위에 상당한 폭력적 위협을 가했음에도 경찰은 이를 응징하기는커녕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친일청산에 대한 여론의 열화와 같은 지지는 일부 친일분자를 제외하고 전 국민의 일치된 주장이었기에 국회는 이승만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10월 23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미특위)를 구성하고 1949년 1월 5일 중앙청에 사무실을 차리고 반민족 행위자들의 친일행적 조사와 이들에 대한 검거작업에 착수하였다.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작업에 나선 반민특위는 제1호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48) 을 검거한 데 이어, 일본 헌병 앞잡이로 250여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친일파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33인중 한사람인 최린, 친일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사장 이성근,친일 경찰 노덕술,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을 검거하였다.
특히 노덕술은 이승만이 총애했던 인물로 그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 이승만이 직접 그를 이화장으로 불러 “자네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을 뻗고 잔다”고 격려했을 정도였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석방을 요구하던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이를 거부하자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는“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월 25일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가 서울지검을 찾아가 암살 음모사건을 고백했다. 자신이 노덕술을 비롯한 수도경찰청 간부들로부터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 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백민태는 이들로부터 받은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암살대상자 명단을 내놓았다. 결국 이 암살 음모는 미수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파의 공작은 계속되었다. 이로부터 4개월 후에 나타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 비판 의원은 공산당 프락치’
1949년 5월 14일부터 3차에 걸쳐 국회 부의장 김약수 등 소장파 의원 15명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지시를 받고 행동을 하였다는 것인데 그 근거자료가 실증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49) 그저 그들의 주장과 남로당 7원칙이 일치하여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소장파의원들이 주장하는 <외국군 철수>와 <평화 통일> 주장이 남로당 주장과 같다는 것이다. 국가 보안법을 악용해 정적을 제거한 것이며 이는 국보법의 폐해인 권력을 위한 악용사례 제1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미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압수수색 이유는 소장파의원들이 반민특위를 방문해 격려하고 지지하여 주었기에 반민특위 역시 빨갱이가 장악하였다는 것이 이유이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경찰의 반민특위 기습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반민특위를 지지해주던 소장파의원들의 계속되는 검거는 국회에서 반민족세력으로부터 반민특위를 보호해주던 거대한 힘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민특위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소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1949년 6월 26일 암살되면서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결국 반민특위를 법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소장파들의 구속으로 국회를 장악한 친 정부계 의원들에 의해 반민특위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이 통과하게 되었고, 특위의원들 전원이 사퇴함으로써 반민족 행위자 처단 사업은 아무 성과도 없이50) 끝나게 되었다.
반민특위가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와의 유착 때문이었지만,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것이 너무 늦게 시작됐다는 데에도 있을 것이다. 해방 후 3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이미 친일파가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