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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땅이 없는 자들
(민16:1-50)
우리가 함께 읽은 민수기 16장 말씀 중심으로 해서 <설 땅이 없는 자들>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설 땅이 없는 자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반복해서 서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두 번 언급되고 있는 『분수』라는 겁니다.
3절에 보면 고라가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또 반면에 7절에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 말하기를 특히 고라를 특정하게 지정해서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니라」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분수에 지나친 삶, 분수에 지나친 생각.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수라고 하는 것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자기에게 할당되어진 한도를 분수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알맞게 주어져 있는 한도, 자기의 격을 말하지요.
그 분수를 넘게 되면 딛고 설 수 있는 땅이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분수라고 하는 것은 내게 할당되어진 경계를 말합니다. 내게 할당되어진 구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그 분수를 넘어가면 내 구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게 할당된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설 땅이 없어집니다.
오늘 고라가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르우벤 자손들을 부추기고 그리고 250명 지도자들을 부추겨서 모세에게 반기를 듭니다.
모세와 아론 너희만 지도자적 위치에 서있고 아론 너희만 제사장 일을 해먹느냐? 그럴 이유가 도대체 뭐가 있냐?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반기를 들게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 물어 기도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고라와 고라 자손 그리고 다단과 아비람 모든 자손들까지 다 모아서 장막 옆에 서 있는데 그들이 서 있는 땅 밑이 갈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산 채로 스올에 빠졌다. 정말 지옥에 떨어져 버린 거예요. 깊은 음부에 떨어져 버리고 그 땅이 다시 닫혀져 버렸습니다.
아! 무성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이 우리도 삼킬까 하여 도망가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는 겁니다.
땅이 삼켜버립니다. 분수를 넘는 자들은 땅이 설 곳이 없는 거예요. 내 구역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늘그막에까지도 삶의 흔적이 아무 것도 안 남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죠? 내가 도대체 뭘 하며 살았는지 그 삶에 보람이 하나도 없고 삶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왜 그러냐? 분수를 넘어서 살았기 때문에 그래요.
땅이 내 구역을 삼켜버렸어요. 분수를 넘자마자 내 구역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거 아주 보통 중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 문제를 좀 영적으로 생각을 하면, 내가 분수를 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설 땅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사건과 똑같아요. 분수를 넘어서 인간 됨에 경계를 지나쳐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지 않ㅅ브니까? 그럴 때 기쁨의 땅에서 내 구역이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지금 기쁨이 없다. 내 삶에 기쁨이 없다. 이거는 에덴을 상실하게 되는 거예요.
그 에덴을 왜 상실하냐?
분수를 넘었기 때문에 그래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인간 됨에 분수를 넘자마자 그 기쁨의 땅에서의 내 영역이 없어집니다.
지금 내가 삶에서 기쁘지 않다는 이야기는 기쁨의 땅인 에덴에서 내 영역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기쁨의 땅 에덴에서 내 설 구역이 사라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쁘지가 않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분수를 넘었기 때문에.
내게 할당된 구역을 넘을 때 내가 설 땅이 없어지고 그걸 좀더 영적으로 얘기하면 에덴에서 기쁨의 동산에서 내가 설 땅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 마음이 기쁨이 없는 겁니다. 분수를 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이 문제를 좀더 더 한번 자세하게 봅니다.
그러면 이 고라 자손의 사건을 우리가 중심으로 볼 때 구체적으로 내 분수는 여러분 뭐겠습니까? 내게 허락하신 내 분수가 뭐겠어요?
지금 내 현실이에요. 지금 현재 주어지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내 분수라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천지를 지으시고 삼라만상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만사를 뜻대로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이 세상 속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이 현실은 이게 바로 내 분수라는 겁니다.
아무리 내 속으로는 내가 잘난 것 같아 보이고, 내 속으로 내 자식은 남의 자식과 달라 보이고, 그래서 정말 더 좋은 환경과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삶을 누려야 될 것 같이 여겨져도 아무리 내가 뭐라 그래도 지금 주어져 있는 이 나의 현실, 내 배우자의 현실, 내 자식의 현실, 내 사업의 현실, 직장의 현실 이게 지금 내 분수입니다.
잘못된 사람을 만나도 그게 내 분수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현재가 바로 내 분수라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이 이 분수 안에 머물지를 못합니다. 다 그 분수를 넘어가요.
내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지금의 이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영영히 못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분수를 넘어가는 것 이게 사실은 가나안 땅을 들어가야 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가나안 땅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본질은 에덴에서 에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 됨의 본질을 넘어서지 말았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이 가나안 땅이 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내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분수를 지키지 못할까요?
왜 지금의 현실에서 이 현실이 내 분수, 내게 적당하고 내게 알맞은 환경이라고 하는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이걸 받아들여지는 사람의 마음은 뭔지 아십니까?
언제나 감지덕지한 마음이에요.
왜 이게 안 받아들여질까요?
여기서 문제가 있어요.
모세의 태도를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드러납니다. 고라의 문제가...
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250명의 지도자를 끌고 모세에게 왔습니다. 사실 지금 모세 입장에서는 아주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에요. 자기 지도력에 자기 위치에 대해서 자기 삶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근데 이제까지 모세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행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줬던 그런 기적과 능력과 권위를 생각하면 이 250명과 고라 전체를 다 잡아다가 당장 쓸어 목을 쳐도 이 세상적인 기준과 입장에서 보자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권위가 있는데. 권위가 있지 않습니까?
이 분위가 있는데 250만 명이 보는 가운데 모세의 권위가 어디까지 올라갔었습니까?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에 목을 쳐도 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모세가 이렇게 반기를 든 사람들 앞에서 한 행동이 뭐냐 하면 4절에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이렇게 얘기합니다. 4절은 짧기도 짧아요.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아마 성경전체 중에 제일 짧은 구절 중에 몇 구절이 아닌가 생각해요.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이게 이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러면 이 모세가 무엇 때문에 엎드린 것입니까?
만약에 이제까지 자기가 행했던 그 기적과 권세 있는 행동들을 눈으로 봤다면 당장 처단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본 것은 뭐냐?
저렇게 나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고라를 살려두고 계시는 그의 생명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래서 엎드리는 이유는 고라 앞에서 엎드리는 게 아니라 내게 반기를 들고 있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250명의 지휘자들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엎드려지는 것이에요. 엎드렸다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저들의 반기가 하나님 뜻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이게 분수를 넘지 않는 사람의 태도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
언제나 지금 주어지는 환경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분수를 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야, 고라도 보면 다단도 아비람도 모세에게 와서 말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시거늘. 그러니까 우리와도 함께 하시거늘 따라서 이 사람도 여호와를 보고 있는 사람 아니냐? ” 아니에요.
여호와를 봤다면 이렇게 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모세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아론의 제사장직을 본 거예요. 모세의 지도적인 위치를 본 거예요.
모세와 아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게 아니라 이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는 모세는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그 고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엎드립니다. 반기를 든 자들에게.
왜?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반기를 든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엎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안 넘어요.
근데 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뭘 봅니까?
모세의 직분을 보고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분수를 넘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오늘 11절에 보면 이런 말을 해요. 모세가 고라에게.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너희가 아론이 제사장직을 혼자 도맡아서 한다고 원망하지? 근데 아론이 뭔데 아론이 제사장직을 자기가 맡겠다고 해서 맡은거냐? 하나님이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수행하라고 했기 때문에 맡은거지. 너희는 왜 아론을 보냐 말이야... 아론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제사징직을 수행하라고 주신 것이지 너희는 하나님을 못 보고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게 비결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는 자꾸 이 현실을 맞이하는 태도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한국말에 그런 말이 있다면서요? 요새 들은 건데 한국 사람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거예요.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 무슨 얘기입니까?
내가 못한 것은 내가 부족한 것은 참아내는데 남이 넘치고 남이 잘 되는 것은 절대로 못 참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뭘 보느냐 하면 만약에 노무현 대통령을 본다고 하면 “야! 노무현 저따위 인격을 갖고 있는 사람도 대통령을 하는데 체...” 이렇게 본다는 겁니다.
어떤 인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올려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할 때 기쁨이 없는 겁니다. 마음에 믿음이 없고 꼭 노무현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절대로 이 세상 위에 계신 하나님을 놓치고 이 세상의 직분을 보고 누가 벤츠를 타고 다니면 벤츠 자동차를 봅니다. 그 벤츠 자동차를 타게 하신 하나님 내게는 그 보다 못한 차를 타게 하신 그 하나님을 보면 그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힐 일이 아니에요.
근데 하나님을 못 보고 이 세상의 현상들을 자꾸 바라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내게 주어지는 현실들에 분수를 넘어서서 나의 설 땅을 잃어버려요.
그러면 그 마음이 어떠냐?
기쁨의 땅이 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어떡하든지 이 삶은 말입니다. 기쁨이 특징이에요.
기쁨이 없다는 것은 산 채로 땅에 삼켜버린 거예요. 더 이상 가나안 땅의 복지에 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나안 땅이 벌려져서 그들을 산 채로 삼켜버린 겁니다.
살아있는데 기쁨이 하나도 없는 거 왜 그래요?
설 땅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삼켜버려졌기 때문에 그래요. 삼키운 바 되었기 때문에 마으에 기쁨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왜요? 분수를 넘었어요.
왜 분수를 넘게 됩니까?
지금 주어진 현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못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그 분수를 넘는, 왜 지금의 현실을 주신 하나님을 못 보고 지금의 현실을 자꾸 보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보이질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사건이 뭐냐?
보이는 사건을 만드신 것이에요.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신 사건...
이게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우리 보고 보라고 만드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백날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고 불러도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자라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하나님을 못 봅니다. 하나님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진짜 마음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 자리가 영적으로 볼 때 본래 나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이고 내게 합당한 자리였어요.
그 십자가 자리를 보게될 때 지금의 현실이 어떻게 보이느냐?
감지덕지로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이 바로 기쁨의 땅이 되는 거예요.
근데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서 놓치고 뭘 자꾸 보느냐?
사람들을 보고 내게 주어진 환경을 보고 남의 처지를 보고 옆집 아이는 공부가 어떻게 됐다는데 옆집 아저씨는 사업을 잘 해서 어떻게 됐다는데 자꾸 이것만 보게 되면 마음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걸 중단하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내 분수를 넘게 되고 내 분수, 지금에 주어진 이 현실을 넘어서서 다른 것들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기쁨의 땅에서 내가 설 땅이 없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마음이 언제나 걱정이 근심이 불평이 원망이 그게 뭡니까?
산 채로 스올에 빠져버린 거예요. 산 채로 지옥에 들어간 거라구. 통째로 지옥에 들어간다니까요.
하여간 마음이 분수를 넘어가면 통째로 지옥에 빠지는데 그 지옥에 빠진 증상이 뭐로 나타나느냐?
부부가 물고 뜯고 싸우고 자식과 부모가 매일 서로 원망 불평에 근심에 뭐 암울하고 대항하고 옆집 아주머니 또 교인들 간에 늘 그저 원망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돼, 이 사람은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못 마땅하고 맨 지옥만 일어나는 거예요. 다 분수를 넘어요.
왜 분수를 넘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못 보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일 앞에서든 모세가 먼저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뜻을 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들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내게 대항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내가 물러나야죠.” 그리곤 일어나서 「고라와 네 모든 무리는 향로를 가져다가」(6절)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이대로 하라. 250명 보고 향로를 들고 서 있으라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땅에 꺼져서 땅에 삼키운 바 되어 자손까지 다 죽어버렸는데 그러니까 가장이 분수를 넘어갈 때 자손들까지 다 망해버리는 거예요.
근데 250명 보고 향로를 들고 있으라고 그랬어요.
향로가 뭐예요?
하나님께 향기를 드리는 성소 안에 있는 향불입니다. 향불을 붙이는 게 제사장이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희가 너희 분수를 넘어서 제사장 직분을 탐을 냈어. 그러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때 가장 중요한 향로를 들고 있어라.
들고 있는데 그 향불이 다 태워 죽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봐야지 하나님을 만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내 죄가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만나지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데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놓쳐버리고 다른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옆집 아저씨의 형편을 그리워하고 탐내다가 분수를 넘어버리고 이웃집 아줌마의 형편을 보다가 그냥 분수를 넘어버리고 이웃집 자식들의 형편을 보다가 분수를 넘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처럼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요? 옆집이 좋은 차를 타니까 나도 좋은 차를 타겠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차가 아니라 좋은 차를 보고 그것을 내가 사지요? 그 차 때문에 망할 거예요.
제사장직을 탐내다가 제사장직이 수행될 때 필요한 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그 향불에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옆집 사람들을 보고 이웃들을 보고 탐내다가 분수를 넘어가고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것을 얻지요? 그 얻은 것 때문에 망합니다.
여러분, 제가 요번에 좋은 경험했어요.
작년 9월에 한국에 나와서 친구 목사님이 선물로 핸드폰을 사주셨어요. 근데 목사님이 돈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11만원짜리 핸드폰을 사주셨어요. 너무너무 난 그 핸드폰이 좋은 거예요. 나 한테는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핸드폰이 없는 거예요. 조그맣고 새까맣게 생겨가지고 저처럼 짧고 뚱뚱하게 생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100만원 넘는 것도 있고 별게 다 있더만요. 그래도 저는 이 핸드폰이 세상에 없는 핸드폰인 줄 알고 너무너무 만질 때마다 좋았어요.
근데 요번에 여러분, 제가 알고 있는 관계하고 있는 어느 회사에서 핸드폰을 공짜로 하나 줬어요. 4-50만원 짜리 핸드폰이래요. 모바일 화상이 나오는 핸드폰인데 그래서 내가 핸드폰 가게에 가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무리 싸게 사도 4-50만원은 줘야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공짜로 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깨닫는 게 있어요.
제가 머리털 하나 만큼이라도 내가 갖고 있던 까만 핸드폰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핸드폰을 보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면 제가 개예요. 저는 이 까맣고 똥똥하고 짜리몽땅한 그 핸드폰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핸드폰인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세상에 그거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핸드폰을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집사람한테 그럽니다. 하나님이 주신 공짜로 준 그 핸드폰이 너무 좋아가지고 집사람한테 “공복에 이 핸드폰 한번 만져봐. 내가 봐줄게.” 이렇게 자랑했어요.
여러분!
우리는 내가 핸듷폰에 대해 마음을 두고 핸드폰을 새로 사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하면 안 주어질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차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좋은 차를 탈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너, 차 바꿔!” 하는 날이 있다니까요.
내 분수를 지키면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주신 핸드폰, 이렇게 해서 주신 자동차, 이렇게 해서 주시는 자녀들의 학교는 행복의 근원이 되지만, 내 분수를 넘어서 내가 쟁취한 그것들 향로, 제사장직을 탐내서 향불을 붙들고 있었어요. 나도 할 수 있다... 하나님 보는 대신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그 제사장직을 보면서...
그랬다가 그 부러워하던 제사장 직분의 향롤 때문에 그들이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에요.
쉬워요. 여러분!
인생 너무나 쉬워요. 기쁘게 살 수 있는 게.
어떻게 하냐?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고 있으면 돼요. 그럼 내 분수를 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돼요. 지금의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내 분수에 가장 맞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기꺼운 마음이 생기고 거기에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에요.
설 땅이 없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7.08.15)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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