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줄 때는 확실히
KBC 아침 마을이 흥미롭게 계속 진행되었다. 오공남 할머니 속에 묻혀둔 말이 생수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김연희 아나운서는 할머니 눈을 맞췄다.
“할머니, 운전면허는 땄지만. 이제부턴 안전 운전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요. 나이 든 분 중 사고로 고생하는 경우를 봤거든요.”
“그거야 당연한것이지라우. 요런 걸 신경써준 분이 있아라. 지가 거기에 엄청 감동받았당개요. 그 분이 바로 기룡자동차 회장님 이셔라우.”
김연희 아나운서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룡자동차 회장님하고 언급하는 오공남 할머니를 제지하기도 그렇고. 다시 PD가 진행 사인을 보냈다.
“뭘 신경 써 주셨길래 그러시지요?”
“지가 사고 안 나도록, 운전학원에 부탁해서 도로 연수를 겁나게 받게 해줬당게요. 그러니 시상에 그 양반이 어찌 고맙지 않겠어라우. 잘 배웠지라.
눈썰미는 있어서 지도 한번 한다면 잘 해유. 그렇게까지 도와줬는데 사고라도 나면 무슨 낯짝으로 살겄소? 운전이 넘 재밌어서. 암튼 살맛 난당개요.
이젠 웬만한 곳은 다 다녀라우. 큰 사고는 없을 텅 개 걱정일랑 붙잡아 매두셔라. 여그 여의도 방송국도 지가 차 끌고 왔당개요. 옆에서 손자가 길 안내를 해주서 잘 왔지라.“
방청객들이 놀란 눈으로 빨간 머리 앤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할머니. 대단하셔요. 계속 안전 하시구요. 또 하나 질문 있어요. 듣자니 백오십삼 숫자에 사연이 있다고요?“
“사람이 살다봉개. 어떨 땐 가슴에 뭔가 팍 꽂히는 게 있어라. 백오십삼. 이 숫자가 그랬지라. 지가 쉰셋에 큰일을 당했어라. 남편이 병으로 가셨어요.
살 힘이 뚝 끊겼어라. 그때 누군가 찾아와 위로해주고 밥도 사주고. 바람도 쏘여주고. 좀 일어나게 됐지라우. 베드로 물고기이야기를 하는데.
지가 가슴이 뜨거웠지라. 예배당 같은 곳엔 지금도 안 나가는데. 백오십삼마리. 곰곰이 생각하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라. 그때 내 나이 쉰셋. 그 뒤로 백 살까진 살겠구나. 그 먼 세월 어떻게 산다냐.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살자.
합하면 백오십삼이 되겠구나. 베드로처럼 믿고 던지자. 내 마음을. 세상에. 백오십삼은 기적으로 온다. 그물엔 백오십삼마리 결과가 걸려 올려지겠구나.
이번 백오십삼번째 인지를 붙일 땐 뭔가 찡하게 전해 와서. 아. 이번에는 되겠구나 싶었지라. 앉아서 예배당에선 기도 안 해요.
시장 좌판에서 일하는 게 기도고. 그물 던지는 거라 생각해요. 그날 먹을 건 다 벌게 해주더라구요. 그럼 된 게 아녜요.
남한테 불편 안 주고라. 기룡자동차 회장님처럼 줄 때는 확실히 주면서. 이제 살면서 가까운 곳 다니고 싶으면 이 차로도 다닐라만요.“
아침 마을 대담은 할머니의 진솔한 생활 체험을 듣는 시간으로 돼 버렸다. 방청객들의 반응도 진지했다. 살아있는 나눔과 봉사. 주도적인 삶의 주인공.
***
“윤재야. 어제 아침 마을 뒤편 보다가 많이 생각나더라. 빨간머리 앤 할머니. 멋지던데.
경우도 있으시고, 강단도 세고, 베드로 백오십삼 마리 물고기 믿음도 있고. 자기 여건에서 남에게 주눅 들지 않고 주도적으로 살아서 멋지던데.”
“말만 들어도 여장부, 삘간 머리 앤이 저절로 떠오르네. 그런 분이 부자지. 정말로.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춤을 보는 것 같아. 자유인말이야.”
“그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누구도 거리낄 게 없다. 나는 자유롭다. Freedom!”
둘이 공감하는 바가 척척 맞아 와인 맛이 더 달콤했다. 혜림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아침 마을 진행하는 분, 김연희 아나운서 있잖아. 참 편안하고 덕이 넘치더라. 그런 분 시어머니로 두면 좋겠더라. 며느리한테도 그렇게 하실 거잖아.”
“... .”
윤재가 말을 못 하고, 혜림이를 다시 보며 그저 빙그레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남은 진심으로 느껴져서 이야기한 건데.”
“시어머니는 그렇게 좋다고 쳐. 그럼 그분 아들은 어떡할 거고. 그 아들이라고 좋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아이참. 딱 보면 비디오지.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겠어? 아들도 엄마 따라 반듯하고 능력 있겠지. 몰라. 내 생각에는 딱 그랬어.”
“... .”
오늘은 진도가 많이도 나간 느낌이다. ‘김연희 아나운서가 바로 내 엄마야’ 라고 직접 말도 못 하겠고. 어떡하나. 저 서혜림. 정말 좋다는데. 울 엄마를.
엘레강스 경양식집의 시간도 발그레 물들어갔다. 첫 바깥 만남이 우아했나. 혜림이 얼굴에 일렁이는 소녀 모습. 천진무구했다. 이런 시간도 다 갖다니.
박동혁과 채영신이 오버랩됐다. 동혁이 한곡리로, 영신이 청석골로 농촌 계몽 운동을 간 옛날 상록수가 왜, 이 시간 뜬금없이 떠오르나. 정말 뭐야?
강윤재가 주도하고 서혜림이 협력하는 현대판 상록수라도 된다는 것인가. 회귀한 자동차 천재는. 윤재가 남은 와인을 마시며 생각이 날아다녔다. 순간.
“야, 윤재야. 사람 앞에 앉혀놓고 뭔 딴생각이야. 지금은 my time 이라고.”
윤재가 움찔했다. 잠깐 외출한 생각을 접고 혜림의 my time 안으로 들어왔다. 마법의 성, 매직을 어찌 알겠어? 당연히 매직에서 나오는 각성의 칼날도.
“어, 미안. 나 좀 봐라. 이런 시간 처음 이다 보니 마음이 좀 풀어졌네.”
앞에 앉아있는 혜림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을 벗어났다. 혜림의 잔이 빈 줄도 몰랐으니. 윤재가 남은 와인을 혜림의 빈 잔에 조심스레 따랐다.
“혜림아. 나 조금 전 상록수가 생각나더라. 심훈의.”
“박동혁과 채영신? 농촌 계몽운동. 학교 다닐 때 마음에 남았던 대목이 아련하네.”
“그걸 다 기억해? 그 대목이 뭔데?”
“응. 잘은 기억나진 않지만, 어렴풋이 이런 뉘앙스로 얘기한 것 같애. 동혁 씨! 인제는 외롭지 않아요. 바윗 덩어리 같은 당신이 있으니까요.
저 혼자 청석골 개척사업을 다지자면 삼 년은 걸릴텐데요. 앞길이 창창해요. 양식 떨어진 사람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만치 까마득해서요.
힘들 때, 송백처럼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틸래요라는 애향가 둘째 절을 목청껏 부르겠어요.“
“우~ 아! 짝짝짝! 서혜림 아니 채영신으로 기룡자동차에 회귀하셨네.”
“정말? 나, 이것 중학교 때 연극했거든. 내가 여주인공 채영신으로.”
“어쩐지. 범상치 않더라니. 거기에 그치지 말고 현대판 채영신으로 세상을 누벼봐. 나 강윤재가 너 서혜림 옆에서 수호천사로 적극 써포트 할 테니까.”
“그럼. 우리가 현대판 박동혁 채영신이네. 히히~”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 건배사는 상록수다. 짠!”
“상록수!” *
18화 끝(2,325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