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1530 ~ 1559년) 神道碑銘幷書 해설
[이 해설의 원문은 위에 소개한 『宗班行蹟』 (서울대규장각소장)이다.]
공의 휘는 초(岹)요, 자는 경앙(景仰)이라. 중종공희(中宗恭僖)대왕의 서자라. 어머니 안씨는 후궁 가운데서 가장 총애를 받아 품계(品階)가 숙용(淑容, 從三品)에 이르렀는데 가정 경인년(嘉靖庚寅, 明世宗9년, 1530년) 3월 초 5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이 태어난 지 9살에 덕흥군에 봉해졌고, 임인년(1542년, 13살)에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3남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정(鋥)이고, 다음은 인(鏻)이고, 다음은 금상(주석 1 참고)이신 전하이시다. 공은 을미년(1559년, 30살) 5월 초 9일에 병으로 졸하셨으니, 수(壽)가 겨우 서른이라. 이해 9월 17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술좌진향(戌坐辰向, 서서북좌, 동동남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이 단정하고 장중하면서 조용하고 화순하여 집안을 다스림에 삼가 조심하였고, 세 하들과 딸 하나를 의리로써 방정하게 가르치셨다. 정(鋥)은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고, 좌의정 홍섬(洪暹)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령(引齡) 향령(享齡) 석령(錫齡)이다. 다 어렸는데 홍씨가 일찍 몰하여 후취로 충의위 이의로(李義老)의 딸을 후취로 맞이했다. 인(鏻)은 숙부인 금원군(錦原君) 영(齡)의 후사(後嗣)가 되어 하릉군(河陵君)에 봉해졌고, 동지중추부사 신여종(申汝悰)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어려서 딸이 유사(儒士)인 안황(安滉)에게 시집을 갔다. 1남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응원(應元)이다.
(덕흥군의) 부인이 일찍이 과부가 되어 항상 따라 죽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근심으로 애태우더니 병이 되어 정묘년(1567년, 明宗22년, 宣祖즉위년) 5월 18일에 병이 지극해졌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애통하도다. 부인이 빈소에 계실 때에 명종께서 돌아가시고(明廟賓天), 금상께서 입궁하시어 대통을 이으셨으니 천도의 의복(倚伏, 禍福이 서로 인연이 되어 일어나고 엎드림)을 쉽게 헤아리지 못함이라. 영구(靈柩)를 이끌려고 할 때에 승지와 내시를 보내어 그 상(喪)을 호위하게 하고, 또 각 관아마다 한 사람씩 보내어 교외까지 전송하도록 했다. 길한 날을 점쳐 이 해 8월 초 9일에 덕흥군의 묘역(兆次, 조차 :주석 2 참고)에 합장(祔窆, 부폄)하는데, 같은 선영(先塋)내에 묘실을 다르게(同塋異室) 하도록 했다.
장례는 왕비 부모의 예(例)로써 하였고, 상의 기일 끝날 즈음에 관아에 명하여 본가(本第)에 나아가 집안에 사당(家廟)을 세우도록 하였다. 경오년(1570년) 봄에 대신들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기를, 송나라 영종이 濮王(주석 3 참고)을 추존한 고사에 의거,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주석 4 참고)으로 하고, 부인은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칭하고, 나라에 제고(祭告)가 있을 때에는 황백부모(皇伯父母)라 칭하도록 하고, 관원을 보내 사당에 고하고, 또 대군의 예로써 하도록 하였으며, 품계는 봉사자(奉祀子)의 작위를 종1품으로 하고, 토전과 종을 하사하여 제사를 넉넉히 갖추도록 하였다. 상을 다 마치고, 하원이 섬(暹)에게 신도비(神道碑)에 새길 내용을 구하면서 말하기를, “아니하면 후세에 알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새겨 가로대,
“아버님이시여! 우리 정릉(靖陵, 中宗의 陵號)께서 저 덕있는 가문에 장가를 들었으니, 덕있는 가문이란 무엇인고? 이러한 석대하고 아름다운 이를 낳으심이라. 두 아름다운 이가 짝을 지음에 하늘이 나이를 주지 않으시더니, 화(禍)가 복(福)으로 기울어졌는가? 용이 연못에서 뜀에 대저(代邸 : 주석 6 참고)에서 대통의 복을 맞이하여 받들어 오르니 위호가 높아짐에 달리 견줄 일컬음이 없구나. 갈대 벌판(蘆原)의 맑은 기운이 모이는 바이고, 산이 에워싸고 물이 보호함이 마치 집에 봉분이 있는 것 같도다.
만력(萬曆, 明 神宗때의 연호) 원년 계유(癸酉, 1573년) 8월 *일에 세우다.
좌의정 홍 섬 찬하다.
[아래의 덕흥대원군의 신도비문은 실제 비석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워 인터넷 남양주사료관 http://www.nyj.go.kr/doc의 자료에 근거하여 올린 원문이다. 앞부분을 제외하고 『宗班行蹟』에 실린 내용과 같기에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 토를 달아 붙였다. 참고로 비문을 찬한 洪暹(홍섬)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인 鋥(정) 곧 河原君의 장인이다. 하원군의 묘는 덕흥대원군의 아래에 자리하고 그 아래 서남편으로 신도비가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어두운 눈이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많은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TV에서 많은 다큐를 보지만 이렇게 속시원한 공부는 처음입니다. 우리의 선조를 알지 못하면서 나를 아는 것이 쉬울리 없고, 나를 알지 못하는데 어떤 공부와 일이든지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몰라 깜깜했던 세계로 한 발 디딘 기분입니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