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우먼 파워
[픽업 장소-알바니. 목적지-타카푸나. 픽업 시간-18:15. 여성 손님-4명]
민재가 시내 다운타운에서 알바니에 오는 손님을 내려놓았다. 손님이 내리자마자 동시에 민재 택시 모뎀에 예약 정보가 떴다.
민재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공원 옆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이 근처네. 이런 게 굿잡(good job)이지. 아직 20분 여유가 있는데. 어깨가 뻐근하니, 뭐 좀 먹고 쉬다 가자.”
트렁크를 열어 간식 통을 뒤졌다. 손에 딱 잡히는 게 진저 비어였다. 알코올 도수 없는 음료수치곤 피로 회복엔 안성맞춤이었다. 꿀꺽꿀꺽 마셨다.
“금요일 저녁이라 젊은이들이 꽤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네. 한바탕의 포효. 이런 것이 바로 젊음의 특권일 테니까.
이 진저 비어 한 병이면 오늘 저녁 바쁜 시간, 제대로 일할 수 있겠지. 역시 든든해서 좋아. 딱 고국의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난 듯 힘이 솟아.“
다 마신 진저비어 병을 바라보며 민재가 주변을 둘러봤다. 무성한 숲 자연 풍광이 저녁 햇살을 받아 편안해 보였다. 저녁이 기지개를 켰다.
“산자락 그늘 속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들이 평화롭게 보이는데. 아득히 먼 옛날, 굴뚝에서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고향마을이 떠오르고.”
민재가 픽업할 집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차량 두 대가 오더니만 같은 또래의 생기 넘치는 아가씨들이 내렸다. 모여서 함께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금요일 밤을 불태울 친구들이 모이자 서로들 껴안고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오늘은 주말, 금요일 저녁! 이제부터 신나게 함께 놀아 보는 거야.”
만나자마자 의기투합 한 기대가 얼굴에 가득 넘쳐나 보였다. 그들은 통상 평일엔 맡은바 저마다 일에 매진했다. 주말이 되면 화끈하게 풀어버렸다.
월요일에 다시 가뿐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그네들의 생활 문화가 건강해 보였다. 일할 때는 일속에 몰입하고, 놀 때는 재미에 푹 빠지는 거였다.
“좋은 저녁입니다. 아가씨들. 어서 타세요.”
“네. 기사 아저씨. 고마워요. 타카푸나 G.P.K 바 카페로 가 줘요.”
‘목적지가 타카푸나 G.P.K 라고?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카페 술집인데.’
택시 안인데도 생동감이 넘쳤다. 아가씨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뜨거웠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흥청대는 열정이 벌써 카페에 들어온 듯했다.
이런 아가씨들을 태우고 나면 택시도 흥겹게 저절로 굴러갔다. 말 못하는 차도 뭘 아는지 악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순풍에 돛단 듯이 움직였다.
아가씨들의 흥겨운 이야기 소리에 차 안이 들썩거렸다. 자연스레 속도를 더해 나아갔다. 택시가 하우라키 만에 떠가는 흰 요트처럼 미끄러졌다.
아가씨들이 창유리를 다 내려놓고 스쳐오는 바람을 맞았다. 어찌 그리도 신나게 떠드는지 그 기운에 차가 요동을 쳤다.
민재도 그 속에 어울려 운전을 즐겼다. 택시 운전 모드를 불타는 금요일로 전환했다.
고속도로, 모터 웨이를 빠져나와 타카푸나 쪽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마침, 청년들을 가득 태운 봉고 차량과 1, 2차선을 나란히 지나게 되었다.
운동선수 유니폼 차림의 청년들이 차창 밖으로 팔을 휘저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이쪽 택시에 탄 아가씨들에게 농(?)을 걸어왔다.
“헤이! 마이 프렌드. 뷰티풀 걸!”
‘누가 참새들 아니라고 했나?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칠 청년들이 아니지’
동네 바에서 럭비 한 게임 구경하고.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더 큰 생맥주 바 카페로 향하는 혈기왕성한 청년들. 거칠 게 없이 포효하는 젊음과 열정.
‘그래, 젊다는 것은 발산할 힘이지. 그 힘을 잘 쓰면 그 얼마나 좋은가.’
“오우! 마이 베이비!”
이쪽 아가씨들도 만만치 않았다. 받는 말에 던지는 말 펀치가 쿨했다. 서로 주고받는 공방전의 열기가 자못 흥미로웠다.
민재가 청년들이 탄 차 속도에 맞춰 운전했다. 택시 운전이 아니라 경주였다. 아가씨들과 민재는 한편이 되어 이겨야 하는 경기를 하고 있었다.
아가씨들 말이 청년들에게 잘 들리도록. 유리하게 말 펀치를 잘 퍼부을 수 있게. 청년들 봉고차보다 약간 앞서가며 택시 속도를 조절했다.
마치 팀 뉴질랜드 요트가 상대 팀 요트와 결전을 하는 요트 경기처럼. 재미를 붙여 가다 민재가 자신을 내려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럴 때 경찰이 보면 딱지 떼는 거 아냐? 택시 운전사가 이러면 안 되잖아’
그때였다. 청년들의 말 공격 수위가 좀 야하고 외설스러울 정도로 지나쳤다.
청년들이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고 세차게 흔들었다. 더 수위 높은 말과 제스처로 공격의 기세를 가할 때였다.
민재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똑 부러지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훅 날렸다.
“야! 너네 들. 어느 정신 병원에서 오는 애들이니?”
아주 승기를 판가름하는 결정타, 그야말로 KO 펀치였다. 아우성치는 청년들을 아예 도매금으로 환자 취급을 해버렸으니. 초토화한 펀치였다.
순간, 이쪽 택시와 저쪽 봉고차 할 것 없이 동시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
“호호호!”
승리를 굳힌 아가씨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민재 역시도 배를 움켜잡을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칫하면 잡은 핸들이 흔들릴 뻔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랄까. 주인 몰래 방앗간에서 모이 쪼아 먹으려다 덫에 치인 참새 꼴이 되어 버렸다. 청년들이 꼭 그랬다.
한동안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면서 봉고차 청년들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깨끗이 승복하는 청년들도 한 마디씩 던졌다. 여유 있어 보였다.
“졌다 졌어!”
“유아 마이 보스!”
“네 말이 맞다!”
말싸움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민재가 악셀 페달을 서서히 밟아 청년들 봉고차를 앞서갔다.
아가씨들이 청년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해 주었다. 짧은 순간, 참 즐거운 한판 시합이었다. 치기 어린 말싸움도 재치 있는 유모에 두 손 들었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때에 맞는 적절한 조크 한 마디, 긴장을 풀어주는 유머야 말로 한 여름 찜통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소낙비 같았다.
사람사는 일상의 활력소였다. 노골적인 반응보다 한 단계 점프하여 모두에게 웃음으로 답례하는 순발력 있는 재치야 말로 건강한 발산이었다. 신선했다.
기분 좋게 GPK 카페앞에 정차했다. 민재가 옆자리 아가씨에게 칭찬했다.
“아가씨의 그 멋진 조크, 너무 극적이었어요.”
“운전 속도까지 잘 조절 해 줘서 고마운 걸요.”
아가씨들이 민재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돈 많이 벌라며 팁까지 얹어 주었다.
이럴 땐 정말 택시 운전 할 맛이 났다.
“건전한 싸움, 유머 감각, 상식이 통하는 게임, 다시 평정을 되찾은 여유가 좋았어.
상대를 인정해주는 마음, 한 배를 탔을 때 동료의식, 상대를 배려하는 가슴, 뭐든 할 때는 확실하게 몰입하는 자세도 쿨했지.
놀고 쉴 때는 즐겁게 스트레스를 푸는 생활, 한바탕 비바람 친 후 곧바로 햇빛 나고 무지개 뜨는 뉴질랜드 풍토, 뉴질랜드 정서가 딱 배어있네.“
민재가 운전하면서도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뉴질랜드는 확실히 여성들의 기운이 곳곳에서 개성 있게 돋보이는 나라다.
타카푸나 GPK 카페 앞에 아가씨들을 내려놓고, 민재가 좀 쉬었다 가려고 스낵바 버거킹에 들렀다.
“어! 존! 이쪽으로 오셔. 나도 이제 막 쉬는 중이야.”
인도네시아 출신 이스마엘 이었다.
“오! 오랜만인데. 이스마엘!”
민재는 민스 파이와 요거트 한 병을 시켰다.
“이스마엘. 지난번 차 사고로 발 다친 것, 이제는 다 나았지?”
“응. 존 덕분에 회사에 내는 운영비(Levy)를 한 달 분 면제 받았어. 정말 고마웠어. 존이 새 보드 멤버로 들어가 아주 열심히 일 하던데.
신선해 보여. 한 가지 염려는 의장 다니엘의 사욕이야. 남은 임기 동안 사리사욕 채우려 할 텐데, 존이 옆에서 잘 막아내고 좋은 쪽으로 이끌어줘.
“이스마엘. 고마워. 다친데 나았다니 기쁘네. 이스마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덕분에 새 보드 멤버로 입성한 거지. 다니엘 의장 방어는 잘 할게.”
“이번 킨 모하니 장례식에 존이 앞장섰지. 일사분란하게 일 처리를 잘 했다고 동료 운전사들이 칭찬 많이 하더라고. 들으면서 내가 다 흐뭇하데.”
민재와 이스마엘이 저녁 요기를 하면서 서로를 칭찬했다. 별난 택시 손님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가다 아가씨의 KO펀치 이야기에 빵 터졌다.
이스마엘이 폭소를 터뜨리다 그만 입안에 음식이 튀어나올 뻔 했다.
“존. 내가 보기에도 뉴질랜드는 여성들이 대단해. 말도 잘하고 일도 똑 부러지게 하더라고. 여성 파워가 보통이 아니야. 원더우먼이 많은 편이지.”
“이스마엘. 내 말이. 뉴질랜드 전 지역에 쿨하고 똑똑한 여성이 널려있어.”
이스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뉴질랜드를 대표했던 제니 쉬플리 수상부터 헬렌 클라크 수상까지. 각계 각처의 여성파워들이 대단해. 그녀들 행동을 보면서 공감했지.
여성 파워 강국이라고. 고위직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도 원더우먼이 많아.“
이스마엘이 그런 식견을 가진 것에 민재가 놀랐다. 민재가 호감 있게 자기 이야기를 듣자, 이스마엘이 하던 말을 계속 신나게 이어갔다.
“견인차를 몰고 와 불법 주차한 차를 끌어가는 걸 봤어. 견인차 운전사가 반바지 차림의 여성 운전자던데. 손놀림이 민첩하더라고. 어디 그 뿐인가.
배달 Courier 차를 좁은 길가에 개구리 주차 해놓고 뛰는 여성도 봤어. 꽤나 무거운 짐을 배달하고 뛰어 나오는데 장애물 경기하는 육상선수 같더라고.“
민재가 이스마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난 경험을 늘어놓았다.
“이스마엘. 고속도로 변에서 딱지를 떼는 여자 경찰 봤어? 아주 당당한 모습이더라고. 육중한 중장비 트럭을 실은 길다란 트레일러를 세우더라고.
몸매도 다부진 여자 경찰이었어. 우락부락한 운전자한테 매섭게 교통 위반을 지적하는 거야. 트레일러 운전자가 꼼짝 못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라니까.“
이스마엘이 오늘 겪은 미담을 털어놓았다.
“짧은 거리인데 택시를 이용한 할머니를 만났어. 싫은 내색 안하고 무거운 짐 보따리를 할머니 사는 정부주택 문 앞까지 날라 주었어.
할머니가 1달러 동전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어. 순간 가슴이 뭉클하던데.”
이스마엘이 여러 이야기를 마치고 시계를 보면서 일어섰다.
“존. 나 먼저 갈 테니까. 남은 저녁 시간 안전운전하자고. 다음에 봐.”
“그래. 이스마엘도 돈 많이 벌고. 또 봐.”
민재가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으며 거울을 봤다. 택시 운전하며 대하는 훈훈한 일들이 민재 얼굴에 그대로 배어있었다. 예쁜 모자이크 그림 같았다.
생활 곳곳에 널려있는 여성 손길을 다시금 되새겨본 시간이었다. 그 나눔과 공감 속에 사람 사는 정이 피어올랐다. 건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지금여기.
‘오늘 불타는 금요일이 끝나면 내일은 주말, 등산가며 푹 쉴 시간인데. 다음 주말부터는 한국학교 봉사를 하기로 했으니.
내일 토요일엔 그동안 즐겨 찾던 힐러리 트레일, 베델스 비치에 트래킹을 다녀와야지.‘
민재도 자리를 일어서며 남은 몇 시간 일할 채비를 갖추었다. 저만치에서 젊은이들이 손 신호를 하며 택시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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