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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녀를 키우라(2191.2023.5.7 어린이주일)
요6:9-11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덧 5월을 맞이하였습니다.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고 한국감리교회는 5월의 첫째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를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 등 혈육이든 아니든,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는 어른, 아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돌본다, 보살핀다고 할 때, 이런 맥락,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준다는 것 이게 참 소중합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상주감리교회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성도여러분들과 어린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이는 싹과 같습니다. 싹이 좋와야 추수때에 좋은 결실이 있음과 같이 어린이 시절이 가장 귀중하며 일생을 판가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옛날 유대나라에서는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을 멸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과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경시하고 차별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어린이와 여인들과 종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사회를 얼마나 어린이들이 위험속에 살고 있는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툭하면 어린이가 납치 유괴되어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버려져서 거리의 부랑아가 되기도 하고, 고아원 같은 보호시설에 맏겨지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이 생활의 지장이 된다고 하여 자식을 살해하는 비정의 부모도 있고 또는 키우기가 힘들다고 하여 내다 버리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상주감리교회의 어린아이들의 앞날에 시온의 대로가 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므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1.오병이어를 드린 한 어린아이의 헌신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요6:9-10)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린 이 어린이는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고 그 예수님께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도시락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도시락 안에는 작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어린이의 헌신을 귀하게 받으셨고 결국 이 헌신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열두 광주리나 남기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열정입니다. 요6:5절‘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무리’ 속에 벳새다의 한 어린이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들은 순례자들입니다. 열두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들은 유월절 절기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소문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소문대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될 만한 인물인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막6:33절‘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 것을 보고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한 어린이는 오병이어 현장에 먼저 도착합니다. ‘큰 무리’의 열성은 대단했습니다. 이 열성파 속에 벳새다의 어린이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19:13절‘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아시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이 ‘큰 무리’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어린이들만 따로 모아 ‘교회학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보기에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일 뿐이었지만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서 그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가 온전한 찬미(마21:1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천국의 주인(마 19:14)이라고 했습니다. 마18:3절‘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런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순진함, 단순함, 겸손함, 잘 순종함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양육뿐 아니라 또한 나에게 이런 덕목이 쌓여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시대는 로마통치하에 은 삼십 냥으로 사람 목숨을 흥정하는 타락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는데’라는 말씀처럼 한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무엘 시대가 연상됩니다. 삼상3:1-3절‘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고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어둠의 시대 가운데 가슴이 뛰는 한 아이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가지고 예수님보다 먼저 벳새다에 도착했습니다. 한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바라보며 그 꿈을 현실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기적을 이루는 재료를 가진 한 아이입니다. 본문 9절‘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은 벳새다에 한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로 도시락입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안드레는 물로 포도주 만들었던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기진 무리들을 먹이시려면 무엇인가를 갖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떡과 물고기를 가져다드리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합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찾아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아이가 안드레에게 왔을 것입니다. 안드레가 무리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혹시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라고 소리를 지를 때 그 아이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들고 다가와 ‘여기 먹을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남자만 해도 오천명이 넘는 무리들 가운데 안드레가 그 아이를 찾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안드레가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음식은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보잘 것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음식이었지만 자기 음식을 내놓은 어린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을 받아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사실 주님에게는 보리떡이건 밀가루떡이건 다섯 개이건 그 이상이나 이하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적을 이루는 한 아이입니다. 본문 11절‘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어린아이의 한 끼니를 채울 수 있는 도시락입니다. 그 보리떡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큰 물고기가 아니라 작은 생선 두 마리입니다. 멸치 두 마리 정도로 참으로 미미한 것입니다. 한 아이가 자기의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정말로 작은 섬김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두 손으로 드리는 적은 정성입니다.
우리 주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는 작고 부족한 것입니다. 신7:7절‘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놀라운 것은 미미하고 ‘작은 것’이 주님의 손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큰 이적을 가져왔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부스러기가 열두 바구니를 채웠습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이 고백을 하는 것이 어떤 사람 경우 평생 걸립니다. 평생이 걸려도 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씨름은 결국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을 믿는다면서 ‘적어도 나는 오병이어가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오병이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이거라도 하나님께 헌신하여 드리면 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 합니다.
2.자녀를 잘 키우고자 하는 믿음의 부모가 필요합니다.(출2:1-10)
모든 부모들은 다 좋은 부모가 되고 쉽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잘 키우는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절로 훌륭한 자녀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훌륭한 자녀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습니다. 본문은 어려운 환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지도자가 된 모세를 그의 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좋은 믿음의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자녀를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좋은 믿음의 부모는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자녀의 가능성을 보는 사람입니다. 레위 족속에 속하는 한 남자가 같은 지파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서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6:18~20). 이 때 모세의 부모는 기쁨보다 고통이 더 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왕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을 위험하게 보고 산파들에게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책망했으나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인들은 강건하여 산파가 가기 전에 출산한다’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을 보호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더 잔인한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부모들에게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했습니다. 아이 부모도 산파들처럼 바로의 눈이나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자식을 석달동안 숨겨 키웁니다. 어떻게 그렇게 모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2절‘잘생긴 것을 보고’했습니다. ‘잘생긴 것을 보았다’는 의미는 외모를 말하기 보다는 아이를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아이임’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히11:23절‘부모가 믿음으로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행7:20절‘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그 아이를 하나님이 쓰실 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녀들의 가능성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아이인지는 생각지 못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를 평가하고 세상 적인 가치관으로 아이에게 강요하여 스트레스를 주고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보고 그 아이의 소질대로 이끌어주는 부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좋은 믿음의 부모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최선을 다한 후에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에 낙담하지 않고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가 커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아이를 담을 갈대 상자를 만들고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했습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았습니다. 아이의 누이에게 아이가 어찌 되는지 지켜보게 했습니다(15:20, 민 26:59).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아이를 지켜 주시고 길러주셨습니다. 아이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습니다. 마치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왔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공주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울었습니다. 공주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고 했습니다. 아이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준비한 후에 그 아이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공주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 아이를 양자로 삼게 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 되어 다시 생모에게 살아서 돌아오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선의 길로 아이를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말씀대로 키우려고 해도 한동안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낙담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우리 아이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녀를 맡기십시다.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강가에 아이를 내어 놓을 때는 그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으나 아이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들을 찾게 해주셨습니다. 아이는 바로에 의해 강에 버려졌으나 그의 딸 공주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딸은 아이의 누이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도록 ‘가라’ 했습니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바로의 딸은 아이의 어미에게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했습니다.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다가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물에서 건져 내었다고 그의 이름을 ‘모세’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칙령에서도 모세를 지켜주셨고, 공주에 의해 물에서 건져주셨고, 그의 아들이 되어 궁전에서 살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인 남자를 근절 시키려는 바로의 계획과 노력은 허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젖값을 받아가면서 그 아이를 맡아 자기 집에서 키울 수 있는 3여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젖을 물려가며 젖값을 받으면서 키운 사람은 아마 모세 엄마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40살이 되었을 때 공주의 아들임을 거부하고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히 11:24~26).
좋은 믿음의 부모는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더라도 ‘너는 특별한 아이다. 하나님의 걸작 품이다. 하나님이 너를 참으로 사랑하신다. 너는 하나님께 크게 쓰실 것이다’고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면 결국 귀한 자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자녀를 키운다는 말은 사랑과 믿음으로 키운다는 것입니다.그런 아이는 결국 믿음으로 서게 됩니다. 믿음의 자녀 뒤에는 믿음의 부모가 있습니다. 저절로 혼자 자란 아이는 없습니다. 부모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부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아이의 가능성을 보고, 최선을 다한 후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사랑과 믿음으로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웁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좋은 믿음의 부모가 되십시다.
3.가정의 꽃, 교회의 열매, 나라의 일꾼(막10:13-16)
어린이들을 환영하여야 합니다. 막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안수를 받게 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모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온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자의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아이들의 머리에 안수하여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중에서 ‘어린이를 용납하라’는 말씀에 깊이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용납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이들을 내게로 오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어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실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극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두팔을 벌리시고‘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 아이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환영을 하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역사를 이어나갈 주인공들입니다. 또 그들은 이 교회의 차세대를 이어나갈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어린 아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 전도야 말로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요나서 4:11절 말씀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니느웨성안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12만여명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요즘의 세상은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물질의 풍요로움과 문화수준의 향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안일과 향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 무엇에게도 억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 한명 전도하는 것 보다 아이들 한명 전도하기가 한결 쉽습니다. 아이들도 몇 년만 잘 키우면 큰일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무릎에 앉히시고 축복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예수님앞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구약의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로 데려 왔고 마리아도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8일만에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결례의 예식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벳도 어린 요한을 성전에 드렸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가 난지 40일이 되면 성전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손에 부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의탁된 어린 생명은 절대로 마귀가 넘보지 못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자녀들을 주안에서 교육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신6:4-9절‘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엡6:4절‘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자녀들을 항상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한나가 있는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에게 자녀를 주신다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눈물로 기도하게 되었고 그가 태에 났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이라 하였으니 그의 이름은‘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다 함이니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양육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일러준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눅1:27-28) 그 때에 수 많은 여인중에서 마리아가 선택이 되었고 그는 그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그 당시에는 처녀가 잉태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눅1:46-55절에는 마리아의 기도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신앙이 있었으면 잉태하고 나서 바로 이러한 기도를 드릴수 있을까? 부모가 먼저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기를 때에 그 자녀는 부모의 믿음을 본받고 성장하여 복음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로이스와 유니게와 같이 양육하여야 합니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이 너에게도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신앙은 자녀가 성장하여 세상을 살아나가는 때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의 자녀들은 기도의 자식들이므로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망해서도 안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목회 24년동안에 우리들의 자녀들이 한 사람도 탈선하거나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자녀들이 없기에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 중에 타락한 자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믿고 기도로 자녀들의 앞날을 위하여 더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믿음의 가정에 자녀들이 탈선하여 잘못되는 일을 왕왕 볼수 있는데 부모들은 신앙과 믿음으로 양육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집에서는 착한 것 같아도 밖에 나가서는 못된 짓 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간에도 여자 중학생이 마약을 하고 엄마가 신고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와 같이 양육하여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되는 아므람과 요게벳은 애굽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고 할 때에 목숨을 걸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3개월이 지난후에 두 사람은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나일강가에 두고 지켜 보았습니다. 마침 바로의 공주가 나왔다가 발견을 하고 극적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젖떼기까지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생활과 모범으로 양육시켜야 합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 부모의 역할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직접 보고 배우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들은 대개 아버지 같은 남자를 동경하게 되고 아들들은 어머니 같은 여자를 이상적인 여인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될 일들을 보여주고 해서는 안될 말을 하므로 자식들이 그만 부모에 대하여 존경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부모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어느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나니까 어린아이 하나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는 목사님에게 묻기를 ‘하나님은 누구와 같으신 분인가요’라고 묻자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너희 아빠와 같으신 분이시다’라고 하자 아이는 금새 실망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아이가 대답하기를우리 아빠는 술도 잘먹고 욕도 잘하고 때리기도 잘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때 목사님은 ‘그렇다면 너희 엄마와 같을 거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이는‘우리 엄마는 아빠보다 몇배나 더 나빠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는 이와 같은 부모는 없는지요. 자녀들에게 본이 못되고 실망을 주는 부모가 된다면 그 심판도 무거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기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본문 16절‘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축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며 기분좋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으시고 저들 머리위에 안수를 하시며 일일이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나의 자녀들을 비롯하여 이웃의 자녀들과 우리 교회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 축복을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그 축복이 그 아이에게 임하게 될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아서 하나님앞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들의 최대의 사명이요. 또한 축복의 길이라는 믿음으로 갖고 이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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