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5일 토요일. 이탈리아 오트란토에서, 뜬금없이 상대성 원리를 생각하고 있다. 수요일(22일) 여기 도착했으니까. 오늘이 4일째. 정확하다. 그런데 마치 오트란토에 온지 10일도 넘은 듯 한 느낌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날짜를 다시 헤어 본다. 날짜는 맞고 내 기억과 느낌은 오류다. 로빈슨크루소가 필사적으로 날짜를 표시하려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한 시간 한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는데, 일주일은 지나치게 느리다. 인간 설계의 불완전을 실감하게 만드는 나날이다. 시간과 질량의 블랙홀은 일상 사건마다 별도로 존재한다. 사건마다 시간의 척도가 달라진다. 즐거운 일은 빠르게 지나가고 힘든 시간은 한 없이 느리다.
오늘 오트란토는 날이 흐리고 바람이 강하다. 마리나스베바에서 일기예보를 확인한대로 토, 일요일은 풍랑이다. 만약 목요일(23일) 출항 했더라면, 크레타 앞바다에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을 거다. 판단이 맞았지만 마음이 무겁다. 이런 식이면 4달이 아니라 8달도 모자라겠네. 일단 오트란토에서 안전항해를 위해 배의 문제점을 수리 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고향이 그립다. 다른 배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AIS 시스템. 선배 선장님이 소개해 준 Vhf Standard Horizon GX 2400GPS. 을 구매하려 미국과 그리스 쪽을 알아봤지만 결론은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마련하는 게 답인 것 같다.
미국 시애틀에서 여동생이 사서 보내주면 세관 및 관세 운송료 등,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상황. 아니라면 도중에 대형 마리나에 정박 할 때 구매하면 되지만, 일단 그리스는 아닌 것 같다. 세금이 24%에 가격이 만만치 않다. 검색하다 보니 엇! 오트란토에서 1시간 20분 거리에 판매점이 있다. 일단 여기 마리나 마린샾에 가서 제품이 있는지, 빠르게 수급가능한지를 확인해야겠다.
아침부터 한국에 있는 분들께 레이마린 C80 Beep 음 기능에 대해 여쭈고 있는데 쉽지 않다. 매뉴얼을 봐도 따로 알람소리를 전체적으로 켜고 끄는 기능은 아직 못 찾았다. Display 설정에서 Beep On을 해도 안 되고, 공장 초기화를 해도 안 된다. 스피커 고장이 맞는가 보다. 그리스 레이마린 대리점이 있는 마리나는 하루 정박료가 10만 원 가량이다. C80수리 때문에 며칠만 있어도 정박료만 수십만 원이 깨진다. 구형 모델이므로 부품도 없겠지. 이걸 주문하고, 기다리고, 수리하고, 장난 아니게 터프한 상황이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니 레이마린 지점에 메일을 보내고 답변을 기다린다. 희망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가오는 법이다. 포기하면 아예 가능성이 사라진다. 살면서 배웠다.
오전 9시 되자마자 마린샾에 들렸다. GX 2400 AIS 무전기를 보여 주고 판매하느냐? 물어 보니 자신들이 취급하는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너희가 사서 내게 주면 안 되냐? 고 물으니 안 된다고 한다. 어쩌지? 그러자 점원이 나보고 직접 인터넷에서 사고 주소를 자신들의 마린샾으로 하라고 한다.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니 업무 날짜로 1~2정도라고 한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온다고 한다. 어차피 수요일 출항 예정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마린샾에서 인터넷 주문을 한다. 주문 화면을 봐도 이탈리아어라 하나도 모르는데 점원이 친절하게 옆에서 다 알려 준다. 주소는 직접 입력까지 해준다. 오케이 주문이 끝났다. Vhf Standard Horizon GX 2400GPS를 465.18유로(67만원)에 산다. 최선의 상황으로 마무리다. 그라치에! 너무 감사합니다. 이탈리아 인들의 친절은 진짜 감탄이다. 항해하면서 지나 온 곳들을 살면서 다시 올까 싶지만, 이래서야 원~ 반드시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뻔뻔하게 마린샾에서 인터넷까지 이용하려 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44M 짜리 파일 하나를 못 올린다. 조기 포기하고 온 가족이 빨래하러 코인 빨래방으로 간다. 타포린 백으로 3개. 접이용 수레가 가득이다. 코인 빨래방 중 제일 가까운 1Km 거리의 점포는 정오에 끝난다. 다음 가까운 곳은 배에서 1.8Km 걸어서 27분 거리다. 그러나 손수레에 짐을 싣고 유모차에 아기 태우고 아마 1시간은 족히 걸리겠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지 않은 항해가들이다. 거리를 걷다가 멈추어 서서 사진을 찍고 세월아 네월아다. 일부러 다른 길을 선택해 가다가, 아내가 가까운 곳에 공립 도서관을 발견했다. 창 너머로 보니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고 중학생 쯤 되는 여학생은 노트북으로 자료 검색중이다. 들어가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오전 9시~12시까지, 오후 15~18시까지다. 인터넷도 된단다. 오늘은 토요일인데도 시간표대로 운영한단다. 아주 친절한 관리인이 웃으며 안내해 준다. 이따 세탁을 마치고 오면서 들러보자. Wifi속도만 적당하면 이제 인터넷 되는 카페를 찾아, 커피 중독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빙고!
오트란토는 가는 곳 마다 유적이다. 성터가 여기저기 있다. 아마 이탈리아를 통해 대륙으로 들어가는 끝부분이라 그런 것 같다. 성곽은 멋지지만, 피비린내 진동하던 장소일거다. [1480년과 1481년 오스만 함대가 침공해서 스테파노 아그리코리 대주교는 대성당에서 살해되고, 스테파노 펜디네리 주교와 수비대의 지휘관 프란체스코 라르고 백작은 산 채로 쇠톱에 의해 절단되었다. - 구글검색] 고 하니, 끔찍하다. 인간과 짐승이 구분이 불확실하던 시대였나 보다. 그만하자.
언덕길을 올라 세탁소를 찾고 보니 어제 왔던 코나드(CONAD) 수퍼마켓 곁이다. 세탁소 곁에 수퍼마켓이 또 있다. 나는 세탁하고 아내는 아기를 데리고 수퍼마켓에 갔다. 맛난 빵들이 많다고 신나서 문자다. 피자도 산다고 한다. 뭔들? 우리는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고 따로 할 일도 없다. 맛난 이탈리아 빵과 피자를 즐기며 다음 항해를 준비하자. 바다에서는 꿈도 못 꿀 음식들이다. 고민은 잊고 먹자먹어. 세탁소 의자에 앉아 점심으로 마트에서 산 빵을 즐긴다.
세탁을 끝내고 3시에 맞춰 도서관에 가니 문이 닫혔다. 알고 보니 토요일 오 후엔 문을 닫고 월요일 오전 9시에 다시 연다. 아까 영어를 모르니 대략 막 오케이오케이 한 것. 예감이 딱 맞았네. 역시 이탈리아. 다음 주 월요일엔 와이파이 비밀번호라도 파악해 두어야겠다. 이탈리아에서 유튜브 같은 걸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올리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이제 인터넷 이야기도 그만하자. 나도 지친다.
바람이 강하니 마리나의 배들이 많이 흔들린다. 그래도 제네시스는 크기가 있어 별로 요동하지 않는다. 배에 도착하니 오후 4시. 한국은 이제 자정이다. 오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어 간다.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너머 블랙홀로, 오트란토 마리나의 하루 기억과 시간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