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8> 김방룡
“깨달음은 삼독심을 비워가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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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은 미얀마의 옛날 스님들이 깨달음과 수행문제를 토론하던 담마 야시카 사원의 모습. |
불교의 두 축은 깨달음과 자비이다. 깨달음이 수행의 목표라 한다면 자비는 깨달음의 내용을 구현하는 것이다. 깨달은 자는 온전히 자비를 실천하는 삶의 모습을 나툰다. 자비란 남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고 남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해주는 것을 뜻한다. 깨달은 자는 마치 자식을 위해 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희생한다는 마음을 전혀 내지 않는 어머니와도 같다.
깨달음이란 비유컨대 장님이 눈을 뜨는 격이다. 탐.진.치 삼독심에 가려 있던 중생이 번쩍 눈을 뜨고 참마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삼독심이 사라진 온전한 평화, 일체 만물에 대한 차별 없는 수용, 걸림이 없는 대자유, 일체중생을 향한 자비심이 이 참마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생겨나게 된다.
그러기에 깨달음에 대하여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는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한다. 또한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허덕이며 헤맨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를 받고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제 본성을 보면(見自本性) 번뇌 없는 지혜의 본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무엇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본래의 내 마음을 발견하고 그 참마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미 부처가 되어 있는 존재 즉 ‘본래성불’이라 하는 것이다.
보조 스님의 지적처럼 우리의 참마음은 ‘번뇌 없는 지혜의 본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삼독심에 쌓여 망상을 마음이라 믿고 또 그 망상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그러기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꿈을 깬 사람과 꿈을 깨지 못한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흡사 눈이 온전한 사람의 생활과 장님의 생활만큼 차이가 난다. 즉 마음이 들락날락하는 6개의 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이다. 참마음이 들락날락 하면 문제가 없지만, 망상을 가진 마음이 들락날락하면 시비분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참마음이 주인이 되어 육근 작용을 하는가, 망상이 주인이 되어 육근작용을 하는가’를 그 기준의 하나로 생각할 수는 있다. 또 ‘참마음이라면 앎이 없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옳고 그르다거나 미워하고 사랑하는 등의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므로 망심과 다르다. 그러므로 곧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고 밝아서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앎이 없이 아는 것을 참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의 세계를 연기로 표현했다. 이것과 저것이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참모습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것을 ‘연기=무아=공’이라 밝힌 것이 용수이다. 그리고 선(禪)에 와서는 ‘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마음의 문제로 표현하였다.
보조 스님은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것이 참마음의 구조라 밝혔다. 공적한 것은 참마음의 본체요, 영지한 것은 참마음의 작용이다. 이 본체와 작용은 항상 서로 즉(卽)해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의 일상적인 마음은 고요함을 체로 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작용으로 하고 있으니, 평상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과 수행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첫째, 깨달음은 완료형인가, 진행형인가?
‘깨닫고자 하는 마음’,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무엇을 얻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집착된 것을 놓고 망상을 비우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깨달음’을 대상화시키고, 깨달음은 위대한 고승(高僧)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수행자가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이들은 아주 엄청난 고행을 통하여 일순간 깨닫게 되면 모든 번뇌가 일시에 해소된다는 생각을 갖는다. 정말 깨달음은 일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완성되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계속 번뇌가 일어날 가능성은 있되 그것을 제어할 힘이 충분히 생긴 것일까.
수행 속에 존재…계정혜 삼학 꾸준히 닦아야
업장 녹이고 변화 이끌어 줘야 ‘최고의 수행법’
간화선을 정착시킨 대혜 종고 스님의 스승이 원오 극근 스님이다. 그는 무심(無心).무념(無念)의 본래면목을 철저히 증득해야만 진정한 깨달음이며, 이 무심.무념의 경지가 바로 견성성불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을 대요사인(大了事人) 즉 모든 일을 마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대도(大道)를 체득(體得)한 이는 무심을 철증(徹證)한지라, 비록 만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서 그 생각을 간여하겠는가. 다만 한가롭고도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니, 바보 같고 천치 같으나 일에 임하여서는 회오리바람이 돌고 번개가 치듯 하여, 기틀에 응당치 않음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 스님의 ‘대요사인’이란 표현은 자칫 깨달음이 완료형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비록 만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서 그 생각을 간여하겠는가. 다만 한가롭고도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니”라는 표현을 보듯이 항상 경계 속에 있으면서 공적하고 영지한 참마음의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대요사인’이 되는 것이지, ‘번뇌가 일어날 가능성조차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의 완료형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수행을 통하여 깨닫는 것인가, 깨달은 바탕 위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이미 중국 선종사에서 남종과 북종의 논쟁을 통하여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북종 신수의 입장은 수행을 통하여 깨닫는다는 입장이고, 남종 혜능의 입장은 깨달은 바탕 위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혜능은 구체적으로 ‘심지(心地)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심지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定)이며, 심지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慧)’라고 하여, 자성삼학(自性三學)의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필자 역시 ‘깨달은 바탕 위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혜능스님의 입장에 공감한다. 마음 공부의 시작은 ‘참마음’ ‘자성’ ‘본래면목’ 무어라 이름 하던 그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에게 맡겨야 한다. 그 무엇은 원래 그름이 없고, 원래 요란함이 없고, 원래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힘이 세져 항상 끊이지 않고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며, 그러기 때문에 닦을 것이 없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좋고 나쁜 수행법이 있는 것인가?
원칙적으로 수행법은 방편이다. 깨달은 자가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간화선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 주장과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수행 속에서 누구나 업(業)과 습(習)에 의하여 누적된 삼독심의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수련법과 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세울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하여 신(信).해(解).행(行).증(證)의 네 단계를 말한다. ‘신’이란 믿음을 말한다. ‘본래부처’라는 믿음과 기필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진정한 발심을 해야만 한다. ‘해’란 불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즉 참마음의 존재를 알고 느끼며, 그 작용과 속성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행’이란 참마음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도록 수행의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친 스승을 통하여 지도를 받고, 수시로 묻고 점검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증’이란 증득의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참마음이 항상 여일하게 작용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은 수행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자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늘 있어왔고 원래 우리의 주인공인 참마음을 회복하여, 항상 존재하게 하는 지속적인 수행과 인연 따라 나투는 동체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맑고 밝고 훈훈하고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 그 행위 속에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김방룡 / 보조사상연구원 기획실장
[출처 : 불교신문 2057호/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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