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저녁
요즘 깍두기 모서리가 삐뚤빼뚤하고
오이무침 두께가 들쑥날쑥 입니다.
어제는 양파를 썰다가 손을 베었는데
손끝이 아니라 가슴이 아렸답니다.
오늘 저녁에는 묵은 무를 썰다가
구멍이 숭숭한 내 몸을 보았습니다.
저녁 밥상에 국그릇을 올리는데
남편이 또 반찬 투정을 하더군요.
“바람 든 것들은 못써, 맛없으니 버려!”
화들짝 놀란 나는 국을 발등에 쏟았지요.
넘지 못할 곳을 넘어 다니다보니
손발이 이렇게 험해지나봅니다.
화장대 앞에서 연고를 바르다가 문득
집을 나갔던 엄마를 생각하였습니다.
도마소리가 유난히 엇박자 불협화음이었던
제 나이쯤이었을 때 엄마의 저녁을.
파혼
작년엔 홍매 아래서
붉은 얼굴이 다정했고요
올해는 청매가 환해
흰 이마가 아름다웠어요
봄바람에 매화 흩날리기 전
당신을 파혼시키러 가겠습니다
이런 일도 먼 후일엔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는
한 점 눈발이겠지요.
돼지
밥그릇에 평생 입을 처박고 사느라
죽는 날까지 땅만 보고 사는 짐승이 있다
살아서 고개를 쳐들어본 적이 없는 이 짐승은
손발이 묶여 넘어져 죽는 날에야 하늘을 처음 본다
목에 칼이 박혀 쿨럭쿨럭 피를 쏟아내면서도
저게 하늘이구나 하고 웃고 있는 짐승
평생 구수에 입을 처박고 산 자신이 우스워
목이 잘린 뒤에도 마냥 웃고만 있는 것이다
친구 사무소 개소식 날
고사상 위에 앉아있는 삶은 돼지머리에 절을 하고
돌아섰다가는 자꾸 되돌아보는
웃음부처
계간 『시와 세계』 2010년 가을호
지족해협에서 —유배일기 1
갯가 푸조나무 아래서 가을단풍을 등불 삼아
향교에서 빌려온 『주자어류』를 읽다가 내려놓고
통무를 넣고 끓인 물메기국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해안을 한참 걸어가 만난 곳이 지족해협이라던가
연을 날리는 아이들과
굴과 게와 조개와 멍게를 건지고
갈치와 전어와 쭈꾸미를 잡는 노인들을 만나
이곳 풍물을 묻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갈대를 엮어 올린 낮은 지붕에는
삶은 멸치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닮았더군요
아하, 이곳에서는 멸치를 미르치라 부른다는데
용을 미르라고 부르니 미르치는 용의 새끼가 아닐는지요
미르라고 부르는 은하수 또한
이곳 바다에서 올라간 멸치 떼가 아닐는지요
참나무 말뚝을 박은 죽방렴 아래에서는
남정네들이 흙탕물에 고인 멸치를 퍼 담고 있었습니다
흙탕물 바가지에 담긴 멸치들을 보면서
인간의 영욕이라는 것이 밀물 썰물과 다르지 않고
정쟁(政爭)에서 화를 당하는 것은 빠른 물살을 만나
죽방렴에 갇히는 재앙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삶기고 말라가는 지붕 위의 멸치와 다름이 없는 이 몸은
남해의 물을 다 기울여도 씻지 못할 누명이거늘*
오늘 밤, 밝은 스승과 어진 벗이 그리울 뿐입니다.
*『사씨남정기』구절에서 인용.
별 닦는 나무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삶이 지고 싶은 나를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완행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잃어버린 문장
푸장나무 향기가 풋풋한 마당
쑥대를 태우며
말대방석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별과 별을 이어가며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문장
어머니의 콧노래를 받아 적던 별의 문장
푸장나무도 없고 쑥대도 없어
밀대방석을 만들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 무릎마저 없어
하늘공책을 펼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문장
별과 별을 이어가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덕 그 문장이.
무량사 한 채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에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나무문살 꽃무늬단청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얼굴 반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중에서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수종사 풍경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콩새 부부가
산수유나무 가지에 양말을 벗고 앉아서
빨간 열매를 찢어먹고 있다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다닌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는 발 네 개가 꼭
붙잡을 때도 좋아 보이지만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하늘도 보기에 좋은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산수유나무 가지도
가는 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잠시 콩새 부부는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 흰눈이
가는 가지를 꼭 붙잡고 앉는다
콩새 부부를 기다리는 사이
산수유나무 열매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