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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5편 1-5절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4편의 경우 어리석은 자의 정체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시편 15편은 그런 자들과는 대조를 이루는 지혜로운 자, 즉 악인이 아니라 의인의 정체는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시편 14편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시편 14편을 인용하는 로마서를 보면 분명 모든 인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롬3:9-12 참조). 따라서 시편 14편 1절 이하 3절은 의인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악인이라는 차원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더불어 더 근원적으로는 모든 인류에 대한 성경의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 마음의 부패성은 그들의 행실로서 가증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있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과 대조되는 의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부르심, 의롭다 하심, 자녀로 삼으심, 거룩하게 하심 등과 같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로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불러내셨기 때문에 악인과는 다른 의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시편 15편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 악인이 아니라 의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할 때 이런 전제 아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불러내셨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 의인이라 칭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말하면서 2절 이하 5절을 보면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 등으로 말하고 있는데, 2절 이하의 말씀 때문에 마치 원인이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어리석은 자로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낸 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할 뿐이었습니다. 부패한 본성과 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가증한 악을 행하며 그것을 즐거워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당연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주의 성산에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과 같이 물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으로서 2절 이하의 내용을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가장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부르심, 의롭다 하심, 자녀 삼으심, 거룩하게 하심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되 특별계시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리셨으며, 심지어 그 알리신 바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분을 경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을 때 그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절 이하에서 정직하게 행하기 때문에, 공의 실천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주의 장막에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절 이하 5절은 1절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럼 오늘 본문 1절과 그 이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열매로 그들을 알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란 무엇인가가 핵심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분명 값없이 하신 역사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로를 철저히 거절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한 일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는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르신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목적지가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물론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할 때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공로란 하나도 없습니다. 자주 말씀드렸던 바울의 고백,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에 감사하여 더 많은 수고와 열심을 냈지만 그것 또한 은혜라고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고전10:15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느냐? 일단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들고자 하십니다.
부연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레위기 20장에서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레20:7-8 참조). 그렇게 이루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십니다. 때문에 거룩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님 홀로, 과정도 하나님 홀로, 끝도 하나님 홀로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도 우리가 교훈 받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에 있어서 나는 안 한다, 하나님이 한번 해 보려면 해 보라는 식으로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훈과 책망을 통하여 바른 방향으로, 의에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역시 그런 뜻에 부합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좀 어려울 수 있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표제에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어쩌면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선민으로 있던 백성들의 열매 없음에 대하여 탄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탄식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탄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도 다니며 주일 예배도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믿는 자답게 행동하느냐 했을 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경우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있더란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 이런 모습 속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정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공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는가?
때문에 시편 15편은 정직한 자, 공의를 실천하는 자 등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다운가를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다윗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자로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닌 자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유형교회 안에 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자도 있기 때문에, 비유로서 말하자면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기 때문에, 유기자와는 달리 택자의 열매는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자 하는 것이 본 시편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내용으로 설명하자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참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어떤 말까지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 분명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창15:6 참조) 그 믿음이 행함으로 참된 믿음인 것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그럼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살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어떤 열매를 기뻐하시는가? 우선 2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정직하게’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온전하게’, 혹은 ‘흠 없이’란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부터 막히게 됩니다. 정직하게, 다시 말해 온전하게, 흠 없이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라고 할 때 누가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2절 이하 5절은 조건이 아닙니다. 온전해야지만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란 무엇인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방향은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으로 하자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입니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다면 단지 외적인 살인, 외적인 간음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음으로 행하는 것까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은 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지 말라는 것만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고 할 때 하지 않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이웃을 상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안전을 도모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이웃의 생명과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육체적 불결에 대하여 금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향한 절제와 정숙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에(약2:10) 율법의 어느 하나라도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런 온전함을 이 땅에서 이루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편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여전히 부패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런 온전함을 이 땅에서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장막에 머물기 위해서는 온전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먼저 하나님 자신의 온전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온전하기 때문에 온전한 것 외에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우리의 아들됨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합니다. 그러니까 주의 장막에 머물기 위해서 온전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로서는 이 명령을 이루기가 불가능합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불완전한 자로 있지만 우리를 완전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내 의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이 내 거룩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인가 했을 때 정직하게 행하는 자, 다시 말해 온전하게 행하는 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런 명령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단지 열심을 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도 내야 합니다. 온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만을 가르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도 헛될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온전함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온전함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노력도 좋고 열심도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빠진 이상 노력도 열심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지만 노력도 헛되지 않고 열심도 헛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서 시작도 하나님 홀로, 과정도 하나님 홀로, 끝도 하나님 홀로의 역사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공로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의 공로가 된다는 것 안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인가?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기에 노력과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살피고서 온전하지 못한 것, 즉 점과 흠이 있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깨끗이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후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를 실천하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모든 것도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어느 누구도 공의를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택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고 그분이 이루신 모든 공로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 다시 2절을 보시면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정직(온전함) 다음에 나오는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선을 행하고 악을 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자의 요리문답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제5부 2문)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선이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악이기 때문에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 그리고 금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선을 행하고 악을 삼가다고 할 때 누구를 의식해야 하는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6:1)고 권면하기도 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거짓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요, 참된 것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진실을 말하되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이 말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귀신조차 믿고 떤다고 말합니다(약2:19). 그러나 그렇게 믿고 떠는 외적인 면과 그들의 내적인 면이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앙고백과 관련해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모릅니다. 목사 임직과 관련하여 합법적 맹세로서 몇 가지 선서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1) 본인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이것입니다. “2) 본인은,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 소요리 문답은 신구약 성경에 교훈한 교리들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3) 본인은,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합신 총회 헌법) 그러나 이런 합법적 맹세를 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 소요리 문답,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 예배모법에 있어 마음으로 따르느냐? 입으로 고백은 하지만 마음으로는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 임직에 있어서도 동일한 고백을 하지만 이런 교리의 내용이 그들의 정신으로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자가 아닙니다. 마음의 진실을 말하는 자, 단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되 그 마음에서부터 진실을 말하는 자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과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일치가 되는 자입니다.
2절 말씀이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내용을 말했다면, 3절에서는 금해야 할 내용을 열거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우선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로서 남의 허물을 들어 꾸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와 닿지 않는데, 개역한글 성경의 번역을 보면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소하다는 것은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치다는 의미인데, 허물하다는 의미 안에 이런 뜻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원문은 후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해야 할 내용으로서 가장 먼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 하면 혀로 참소하는 것, 혀로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 뒤에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중상모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요, 그것으로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입술의 열매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3장에 보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하기 때문입니다(2). 심지어 말을 제어하는 것은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3). 비유로 하자면 굉장히 큰 배의 방향을 작은 키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과 혀가 그렇다는 것입니다(4). 그런데 이 혀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본문에서처럼 남을 비방하는 데 사용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야고보서에 의하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말합니다(6). 혀는 불과 같아서 작은 말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온 몸을 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 몸을 태운다는 것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말 한 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언어폭력이라고 해서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말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혀로 참소한다는 것은 이런 언어폭력은 아닐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더욱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타락한 본성으로서의 혀는 참으로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야고보서는 증거 하고 있습니다(8).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가 했을 때 이런 이런 일을 금해야 한다고 하면서 첫 번째로 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만큼 혀가 큰 힘을 발휘하는 듯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열매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혀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9)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라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 성도에게는 마땅치 아니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10). 그러므로 남을 헐뜯는 것,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거짓으로 말하는 것, 이것은 결코 우리가 맺어서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 마음의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살폈지만, 다른 사람을 참소한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과는 전혀 반대편에 있는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말도 거짓이요 마음도 거짓입니다. 진실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열매는 참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 내용을 보시면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과 더불어 악한 행동까지 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에게 행하는 모든 악을 금하는 것인데, 혀로 참소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용 자체로서는 혀로 참소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혀로 참소하지 않는 것과 반복이 되기 때문에 달리 해석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 쪽에서 비방하는 말을 열심히 듣는 것, 충분한 이유 없이도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주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 결코 낯선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과 관련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거짓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기독교교리강론, 제 24장, 11문항).
따라서 전체적인 이해 속에서 보자면 혀로 참소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악행도 금하고 있으며, 혹 누군가 혀로 참소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거기에 적극 가담하는 것도 금하고 있는 것이 3절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열매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홉 번째 계명의 해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우리 이웃의 선한 명예를 깎아 내리지 말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의 명예를 증거 해주고 증대시켜 주는 것입니다(기독교교리강론, 제 24장, 2문항). 특별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명예를 깎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좀 더 올라가자면 여기 앉아 있는 자녀들뿐만 아니라 모든 분이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열매는 악행이 아니라 선행이어야 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의심 없이, 그리고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이든 해석하려고 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분명한 사유가 밝혀지기 전에는 근거 없이 의심해서도 안 되며, 되도록 선한 의도를 가지고서 들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사야 5장 20절에 보면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이 말씀과 맞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분명 할 수만 있다면 선한 의도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근거도 없는데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근거가 있어 악한 일, 선한 일이 밝혀졌는데도 그런 구분 없이 악인을 오히려 의인이라, 의인을 악인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고 할 때 우리는 악인의 악한 열매에 대하여 결코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망령된 자가 망령되게 행하는 모든 원리와 방식들을 멸시해야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에 원수가 행하는 망령된 행실까지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원리와 방식들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두려움은 경외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경함이, 사랑함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공경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열매로 가진다는 것이고, 여호와는 두려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진노하실만한 것은 열매로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원리와 같습니다(마6:19-20). 즉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는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망령된 자들의 원리는 한 마디로 재물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쪽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열매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바로 이런 원리 때문에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어야 합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같은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골2:5). 도리어 어떤 원리와 열매로서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2-15)
여러분, 망령된 자들은 언제나 땅의 것을 향하도록 합니다. 땅의 것을 향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런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에 소망해야 하고, 일시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4절 내용을 보시면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 이익 여부에 따라 서원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해를 볼지라도 약속한 것에 대하여 지키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자기 사랑이 강합니다. 자기 사랑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면 맹세할지라도 깨어버리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매는 이익 여부가 아니라 신실한 자가 되라는 데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물론 서원이라고 할 때 서원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입다의 서원과 같은 경우는 서원했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입다의 서원은 이미 서원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영광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1장 31절에 보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인신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적이 있는가? 물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명하신 바가 있긴 하지만 시험의 성격일 뿐 실제로 그렇게 받으시기 위해 명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입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입다의 경우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서원의 내용이 정당하다는 전제 아래에서입니다. 서원만이 아니라 모든 맹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그런 맹세가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라 해를 준다할지라도 손해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익 여부가 아니라 신실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성도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고리대금에 대하여 금하고 있으며, 고리대금만이 아니라 이자가 목적이 되어 돈을 꾸어주는 모든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핵심 가운데 한 가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된 자들을 돌아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은 이런 정신과 관계된 것입니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이자와 관련해 왜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5절부터 보시면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5:35-38)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으로 하자면 십계명의 서론,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었기 때문에 나머지 명령,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는가? 38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너희에게 거저 주는 자로 있기 때문에 너희도 이자가 아니라 거저 주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 곁에 있으면 너와 함께 생활하되 그에게서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는 것도 안 되며 이익을 위하여 양식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명기 23장 20절에서는 형제가 아닌 타국인에게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이자에 대하여 무조건 받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분명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어떤 경우라고 이웃 사랑의 정신이 파괴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익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아니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자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무죄한 자를 뇌물 때문에 해치겠습니까?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는 것은 철저히 뇌물이 목적이 되는 것이고, 뇌물이 목적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웃 사랑의 정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가 했을 때 2절 이하 5절은 주로 이웃 사랑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이웃 사랑입니다. 당연히 오늘 본문에서 이웃 사랑만 말한다고 해서 이웃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에 있어서도 외식적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당만 밟고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사1:12 참조).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한다고 하면서도 이웃 사랑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다윗 시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의 정신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웃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이 등한시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 사랑만 있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들은 모든 율법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치 율법의 성취가 우리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고, 성취하신 바를 우리에게 거저 주십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거저 주시는 바에 대하여 거저 주시는 바가 나타나고 있는가 자신을 살피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으로 하자면 가나안을 거주 주셨습니다. 가나안만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얻게 되는 모든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거주 주시는 것들입니다. 수고와 애씀이 있지만 그것까지 주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거저 받은 자로서 거저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 그런 정신입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전체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거저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라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 정직, 다시 말해 온전하라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공의를 실천하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마음에 진실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떤 성격인가? 혀로는 다른 사람을 참소하지 않아야 하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하고, 비방하지도 않아야 하며, 오히려 망령된 자들의 모든 원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 열매를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5절에서는 물질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과 골로새서 3장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재물을 위하여 사는 것,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재물도 땅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이 중심이 되어 살지 않습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는 자들이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요동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 성도가 요동하는가? 흔들리는 일이 있는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엣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그 열매에 있어 풍성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니 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마음이 그 사랑 가운데 머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주의 장막에 머무를만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다시금 살피셔야 합니다. 이런 열매가 없기 때문에 쫓겨난다가 아닙니다. 이런 열매가 없기 때문에 요동하는 겁니다. 흔들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흔들리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찾는 열매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다시금 주의 장막에 머무를만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고, 주의 은혜를 따라 그런 열매들을 맺기 소원하고, 또 그 열매를 찾고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